안녕하세요. 그림그리는 돌고래님.
돌고래 그림을 그리는 분은 어떤 분이실까?
바다를 배경으로 할까? 하늘이나 그외를 배경으로 그리실까 문득 궁금했답니다.
돌고래는 아니지만, 향유고래잡이 이야기를 다룬 허먼 멜빌의 <모비딕>을 좋아해서 '고래'라는 단어만 봐도 가슴이 설렌답니다. 돌고래님의 '용서'에 관한 편지를 받고, 저라는 사람에 대해 한참 들여다보았습니다.
'나는 나를 잘 용서하는가?'
저는'why'를 많이 붙이는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이더군요. 자책의 시간을 거쳐야 허용의 단계로 넘어가는 사람요. 30대엔 그런 내 모습이 싫었어요. 솔직히, 마음에 드는 구석보다 안드는 점 투성이였죠. 주위 사람들을 보기 바빴어요. 그걸 감추기위해 겉으론 더 강하게 보이려 애썼고요.
40대에 들어서야 내려놓을 건 놓아지고, 소중한건 붙잡게 되고, 나라는 사람도 들여다보게 되더군요. 인생 경험과 나이, 문학과 예술, 관계 등 여러가지들로부터 크고 작은 영향을 받은 결과고요.
그림 그리는 돌고래님의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시면 어떨까 싶어요.
'나는 나를 얼만큼 사랑하는가?'
남들이 말하는 기준이 아닌, 오롯이 자신에 대한 사랑의 깊이를 들여다보시길 바라요. 용서,자책,허용,존재.. 모든 것의 시작은 사랑이 아닐까싶어요.
덕분에 처음 펜팔을 경험해봅니다. 고개를 드니 파란하늘이 보이네요. 편한 미소지으며 캔버스에 돌고래를 그리며 계실 님을 상상해봅니다. 저의 글이 고민에 작은 보탬이라도 되었길요.
2024년 6월 2일
바닷다에서 보내는 편지
여러분께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문장을 하나 올려봅니다.
전설이나 괴담을 이야기하고 거기에 얽힌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건 흔한 패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더 찾아보게 되는 매력이 저자에게 있다. 모토로이 시리즈는 당시의 풍경이나 사람들의 고달픔이 더 녹아있기 때문일까 개인적으로 다른 시리즈보다 더 재미있게 보고 있기도 하고. 단지, 후반 '팍'이 아니라 '스르르륵...'하고 김빠지는 것이 정해져있으니 그냥 그 흐름을 따라갈 뿐이다.
예전에 거미의 땅이란 다큐멘터리를 봤었는데(얼마나 힘든 내용인지, 중간에 상영관을 나가는 관객한테 할 말이 없었다...) 읽다보니 간만에 생각나기도 하고...내가 민감해서 그런가 결말에 유달리 씁쓸함도 느낀다. 갑자기 등장하는 캐릭터는 너무 '저는 다음 권에도 등장 예정입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순간 이마도 한 번 쓸었고. 소설 전개도 그렇지만 관련 사실들만 찾고 토론해도 오래 곰씹게 되겠다만, 정신없이 주인공과 미로를 돌다보니 피로하다. 그 와중에 옮긴이의 말 보고 다음 권 벌써 기다리는 나는 아마 세간에서 좋게 보는 독서인의 카테고리에는 못 들어가겠지;
2024 성북구 비문학 한 책 최종 후보 도서를 함께 읽습니다!
첫 번째 함께 읽기, 『당신의 작업복 이야기』 (경향신문 작업복 기획팀 | 오월의봄 | 2024)
■ 『당신의 작업복 이야기』 추천글
“경향신문의 기획 시리즈 〈당신은 무슨 옷을 입고 일하시나요〉를 흥미롭게 읽었는데 책으로 나온다니 함께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20대때 직장에서 유니폼을 입었어요. 남자 직원들은 입지 않는데 왜 여자만 입어야 하는지 궁금했습니다. 아니, 궁금하다기보다 묘하게 기분이 나빴죠. 유니폼으로 직장 내에서의 위치가 모두 설명되는 듯 했거든요. 작업복을 통해 바라보는 일하는 사람들의 세계, 왜 어떤 노동은 그토록 폄하되어야 하는지 섬세하게 들여다보며 조금 더 멀리 나아가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
- 그믐 책추천 모임에서 ‘밤엔더용감하지 ‘님의 추천사 중
■ 『당신의 작업복 이야기』 출판사 책 소개
2023년 각종 보도상을 휩쓴 화제의 기획 시리즈 〈당신은 무슨 옷을 입고 일하시나요〉가 책 《당신의 작업복 이야기》로 출간되었습니다. 일할 때 입는 작업복을 화두 삼아 노동 환경과 안전, 차별 등의 문제를 밀도 높게 풀어냈어요.
흔히 ‘작업복’이라고 하면, 각종 사고와 위험으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해주거나 일이 수월히 진행되도록 편의를 더해주는 복장이 떠오르기 마련인데요. 그러나 그런 작업복이 오히려 일하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고, 위험에 빠뜨리며, 심지어 차별과 배제를 겪게 한다면 어떨까요?
경향신문 작업복 기획팀은 하수처리장, 쓰레기 소각장, 자원순환시설, 환경미화, 건설 현장, 은행, 호텔, 패스트푸드점, 여객기, 열차, 산불 현장, 급식 조리실 등 10여 곳의 일터를 찾아 각기 다른 노동자들의 작업복 이야기를 듣고 기록했어요. 글은 물론 사진, 영상과 같은 시각적 콘텐츠로도 제시되는 다양한 작업복은 ‘안전한 옷’이 아닌 ‘차별과 위험’을 입고 고군분투하는 이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해줍니다.
책을 증정 받아 같이 읽고 우리 공동체에 광장을 만드는 법을 함께 고민하실 독자 10분을 초대합니다.
✨모임 기간: 6월 5일(수) ~ 7월 3일(수) 29일간
*[2024성북구 비문학 한 책] 프로젝트는 성북구립도서관과 그믐이 함께합니다.
제주 삼양해수욕장입니다
‘알래스카의 아이히만’을 읽고 떠오른 수만 가지 생각 중 하나
나는 벤야민 씨가 궁금하다. 그는 왜 체험 기계의 경험자를 자처했을까? 그가 체험 기계 가동 후 아이히만에게 보인 태도는 거짓일까 진실일까? 체험 기계 이후 벤야민 씨의 모습을 다시 읽어보았다.
그는 마치 다섯 시간여에 걸쳐 영혼의 일부를 잃어버린 사람 같았다. 눈에는 경악의 빛이 담겨 있었고 입은 벌린 상태였으며 팔다리에는 힘이 없었다. 천천히 참관인석을 둘러보는 그의 모습에는 어딘지 오싹한 데가 있었다. 그는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 같았다.(155쪽)
벤야민 씨는 느릿느릿 몸을 숙이더니 자신도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아이히만의 어깨를 잡았다가 손을 아래로 내려 상대의 팔꿈치를, 그리고 마침내 그 인간 백정의 두 손을 감싸쥐었다. 그리고 천천히 일어서며 나치 전범의 몸도 일으켜세웠다.(156쪽)
벤야민 씨는 떨리는 팔로 이이히만을 끌어안았다. 아이히만도 서서히 팔을 들어올려 벤야민 씨의 몸을 안았다. 아이히만은 꺽꺽 소리를 내며 울고 있었다. 벤야민 씨의 눈에서도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157쪽)
아이히만의 ‘주관적인 기억’을 이식받은 벤야민 씨는 ‘영혼을 잃어버린’ 듯한 모습이다. 자신의 발치에 무릎 꿇은 아이히만을 일으켜세우는 벤야민 씨의 팔이 떨린 것은, 그를 끌어안은 것은, 눈물이 흘러내린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후 벤야민 씨가 보인 행동을 생각하면 결코 용서는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는 아이히만의 파렴치한 기억에 영혼 깊이 상처를 받은 것일까? 그는 아이히만을 용서하거나 혹은 그가 가련해서 끌어안은 것이 아니라 어찌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일까? 혹은 반대로 그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른 아이히만을, 그의 주관적 기억을 이식받음으로써 이해하게 된 것일까?
그가 남긴 ‘타인은 타인인 채로 남아 있는 게 좋다.’(162쪽)는 메모의 의미는 무엇일까?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아이히만의 기억을 이식받음으로써 그를 이해하게 된 것이 괴롭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유대인 학살을 저지르고도 일말의 죄책감도 없는 아이히만의 기억을 통해 아이히만에 대한 증오가 감당할 수 없는 정도로 커졌다는 것일까?
“체험 기계는 한 사람의 주관적인 기억을 다른 사람에게도 주관적인 기억이 되도록 만들어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주관적인 기억을 대하는 태도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 않나요? 극단적으로는, 그런 기억을 이식받아도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할 수 있잖아요?”(123쪽)
벤야민과 아이히만이 서로의 기억을 주고받았지만 결국 그 기억을 받아들이는 것은 당사자의 몫이라면, 아이히만은 벤야민이 경험한 처절한 수용소의 기억 앞에서도 죄책감을 전혀 받지 않았을 수 있다. 역으로 벤야민은 아이히만이 저지른 학살의 기억 앞에서 더욱 괴로워졌을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소설 속 상담 칼럼니스트가 했다는 말을 연결 지을 수 있겠다.
“상대의 처지를 이해한다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지는 않는답니다. 거기서부터 새로운 문제가 시작되기도 하지요. 상대의 처지를 이해하는 사람이 자신이 그렇게 이해받지 못하는 데 대해 더 절망할 수도 있고, 반대로 상대의 세계를 이해하기에 그에게 더 잔인한 일을 저지를 수도 있어요.” (160쪽)
결국 벤야민과 아이히만은 서로의 기억을 주고받았지만 상대를 이해하지는 못한 것이 아닐까. 혹은 이해했기에 ‘더 잔인한 일’을 저질렀거나.
소설 말미에 하버드대 철학과 폴 레비나스 교수의 주장이 인용된다.
“종종 타인은 지옥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지옥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곳에 있음을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레비나스가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어서 검색해 보니 하버드대의 폴 레비나스는 아니지만, 소르본대의 에마뉘엘 레비나스라는 철학자가 ‘타자론’을 주창했다고 한다. 인터넷에서 약간의 검색을 통해 얻은 마구잡이 지식으로 보건대 레비나스는 자아를 중심에 두는 서구 철학의 전통에 반기를 들고 타자를 윤리의 출발점으로 삼았으며 타자는 어떤 경우에도 나에게로 통합시킬 수 없는 절대적 타자성을 지니기에 타자를 자아에 환원시키고자 하는 것은 폭력이라고 본다.(정확성 없음, 오류 가능성 높음)
이 부분에서 체험 기계가 저절로 생각났다. 타자를 이해하려는 것, 타자를(또는 그 기억을) 나에게로 통합시키려 하는 것 자체가 폭력이자 오류가 아니었을까?
이외에도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우리는 타인과 얼굴을 통해 만나고, 타인의 얼굴은 우리에게 명령하고 있고, 타인과 나는 비대칭성 상호주관성을 지니고, 타인과 나는 절대적 타자성으로 인해 관계성 없는 관계(혹은 모리스 블랑쇼의 공동성 없는 공동체)이고, 절대적 타자성은 죽음이고,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통해 나타나는 타자성이 타인의 얼굴로 전화되어 나타나는 것을 적극적으로 인수할 때 성립된다 즉 내가 타인을 적극적으로 환대하는 주체로서 거듭날 때 죽음을 극복한다고 보았으며, 타자성과의 만남이 곧 사랑이다 등등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많이 했던데 원전도 아니고 인터넷 글만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으므로 대충 줄인다.(그리고 물론 레비나스 원전을 읽으면 더욱 이해못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웹툰 제목으로도 유명한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문장은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의 희곡 ‘닫힌 방’에 처음 등장했다고 한다. 「닫힌 방」은 지옥에 온 세 인물이 한 방에 갇혀 벌어지는 일에 대한 내용이다. 「닫힌 방」의 구절은 정확히 이렇다. “그러니까 이런 게 지옥인 거군. (중략) 지옥은 바로 타인들이야.” 이 문장은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을 핵심을 담고 있다고 하며, 사르트르는 “타인은 우리에게 지옥이지만,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데 분명한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는데 여기까지 가면 너무 어려우니까 그만 멈춰야겠다.
*레비나스 철학에 대한 것은 아래 두 게시글을 참고했다.
1) 타자의 얼굴과 윤리적 주체성, 오희천, 성결신학연구소
http://sgti.kr/data/person/oh/column/4.htm
2) 현대철학입문 11강 레비나스, 철학아카데미 조광제 교수 강의 요약 (출처: 김인곤 블로그)
https://blog.naver.com/builder10/220883038745
** 사르트르와 이 문장에 대한 부분은 서강학보(서강대학교 신문) ‘타인은 지옥이다’ 사르트르의 인간 실존, 서지원 기자, 2022. 3. 27. 기사를 참고했다.
https://sgunews.sogang.ac.kr/front/cmsboardview.do?siteId=sgunews&bbsConfigFK=3630&pkid=878979
[월간 십육일 – 은유] 사랑이 안전한 세상을 위해 - 재단법인 4·16재단 (416foundation.org)
내 머릿속 세월호 아이들의 존재에 비로소 생기가 돌았다. 누군가의 자식이고 자매나 형제, 친구, 단원고 학생, 희생자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그들은 사랑에 애태우고 눈물짓고 노래하고 포옹하는 열일곱 살 사랑의 주체이기도 했던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희생자’는 단지 희생자가 아니라 사람이거늘. 여지껏 생각해 보지 못한 관점이다. 304명의 죽음은 304가지 사랑의 소멸이라는 것. 304개의 전구가 꺼진 만큼 세상은 어두워졌겠고 304개의 사랑 이야기가 중단된 만큼 인간 정신은 쪼그라들었다. 이게 얼마나 큰 손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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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과 죽음의 공통점일 것이다. 일상 어디에나 있고 어떤 방식으로도 존재하는 것. 어디에나 있기 때문에 보려고 하지 않으면 안 보인다는 사실까지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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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나는 망설이는 친구에게 간절함 한 스푼 얹어 말하고 있었다. “다음에 가면 좋겠지만 우리가 나중에 아플 수도 있고 또 싸울 수도 있어. 다 변하더라. 영원할 것 같은 관계도 틀어지고 가까웠던 친구랑도 멀어지고, 멀쩡했던 사람도 병에 걸리고. 같이 여행을 가도 좋을 우정, 건강, 시간, 마음, 여윳돈… 이런 조건이 너와 나 동시에 맞아떨어지는 게 언제나 가능한 건 아니지 않을까. 거기다가 가성비까지 완벽한 여행의 기회는 영영 없을지도 몰라. 완벽한 삶이 없듯이.”
친구는 설득됐다며 팔랑귀라서 미안하다고 말하곤 웃었다. 나는 나의 진심을 받아준 친구가 고마웠다. 돌이켜보면 시대의 아픔은 한 세대를 성장시킨다. 고통이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로 만들어주는 이치일 거다. 군부독재를 거치며 민주주의를 배우고 아우슈비츠를 통해 인간의 이성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세월호 참사도 내게 커다란 배움과 각성을 안겨주었다. 사회에 큰 구멍을 만든 기성세대로서의 면목 없음, 안전하지 못한 사회에서 들리는 비명을 수신하는 일의 중요함, 유가족의 말씀대로 내 자식만 위해서는 내 자식을 위할 수 없다는 깨달음 같은 것들. 남이 불행한데 내가 행복할 수 없다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자의식에 눈뜬 것도 세월호 덕분이다.
그래서 관용구처럼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런데 무엇을 잊지 않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모호했던 것 같다. 세월호 참사 10주기가 되어가는 동안 나는 죽음과 더 가까운 나이에 이르렀고 그러면서 조금씩 선명해짐을 느낀다. 무엇을 잊지 않고자 노력해야 하는지. 그건 아이들의 죽음이 아니라 아이들의 사랑이다. 살고자 했던 삶이다. 세미와 하은이 했고, 하고자 했던 사랑을 잊지 않고 싶다. ‘사랑이 안전한 세상’을 만들어야겠구나 다짐한다.
영화에서 세미는 주어진 마지막 하루를 뜻깊게 보낸다. “오늘은 너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라며 다가가고 고백하는 일로 하루를 온전히 다 쓴다. 이 설정은 무척 아프지만 다행이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닮고 싶은 삶이다. 그래서 세미가 앵무새에게 “사랑해”라는 말을 연습시키듯이 나도 나를 길들이고 있다.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삶의 유한성을 우선 고려하기. 이것이 생의 마지막 일이 되어도 좋은가. 그럴 만하다면 실체도 없는 다음으로 미루지 말기. 세상이 주입하는 효율과 계산의 잣대에 휘둘리지 않기. 먼저 손 내밀기. 진심을 전달하기 위해 한 번 더 시도하기. 사랑이 안전한 세상을 위해 같이 싸울 친구를 곁에 두기. 침투하고 침투되기를 두려워하지 않기. 그리하여 내 삶의 최후가 사랑의 일이면 좋겠다. 세월호 아이들의 사랑의 역사를 이어 쓸 수 있도록.
5월달에 짬이 좀 나서 넷플릭스를 구독하고 뒤늦게 삼체를 봤다. SF광으로서, 삼체의 세계관과 드라마가 던지는 화두가 흥미로웠다. 과학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사회, 메시아처럼 외계인을 기다리는 사람들, 비밀이 없는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삼체인, 문화대혁명, 삼체이론까지... 이 모든 개념을 엮어 탄생한 이야기가 충격적이지 않은게 이상했다. 드라마를 본 뒤로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야기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비밀을 만들지 않는 전체주의적인 삼체인들이 문화대혁명 시기 중국과 연결됐다. 고도로 발전한 전체주의가 주는 무서움이 느껴졌달까.
드라마 곳곳에 나오는 배우들이 '왕좌의 게임'에서 봤던 얼굴이라 익숙하고 반가웠다ㅎㅎ 그리고 시즌2가 언제 나올지 알 수 없는데 이야기의 끝을 봐야겠다 싶어 책을 사버렸다...
손편지라는 게 사실상 사라져가는 시대에, 옛날 엽서를 보면 그것만으로도 신기하게 느껴진다. 지역이 인천에 국한된 것이 살짝 아쉽지만, 찍힌 지역을 일일히 찾고 변화하는 모습까지 설명하려면 전국을 망라하는 건 어려웠겠다 싶고...
엽서 트리비아로 시작한 뒤 등장하는 인천의 풍경이 정말 충격적이다. 자극적인 내용이어서가 아니고, 얼마 없는 향교나 한복입은 이들의 모습을 빼면 시가지는 인천이라는 설명이 없으면 일본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외국인 조계지들이 들어오며 개발이 되고 식민지 시대가 된 후는 매립지까지 만들어 일본인들이 거주했으니 따져보면 놀랄 일이 아닌데도, 이 모습은 예상을 좀 많이 넘어간다.
엽서에 나온 장소를 지금의 지도와도 비교하며 볼 수 있고, 학교와 쓰레기 소각장, 항구를 끼고 벌어지던 각종 상업의 흥망 등 재미있거나 씁쓸한 이야기들이 있다. 전혀 몰랐는데 2020년에 우크라이나 건축가 사비틴을 러시아 청년이라고 소개했다는 이야기도 뒷맛이 쓰다. 백여 년 전의 마스크 이야기, 대불호텔, 외국인 저택과 공화춘...건물은 사라졌어도, 사람이 사는 곳은 이렇게 무궁무진하게 이야기를 남기는가 싶다. 나중에 인천 마실을 갈 때, 다시 곰씹어보고 싶은 이야기들이다.
4월 19일, 사람 너덧이 한사람을 둘러싸고 무릎을 꿇는다. 뭔가를 애원하느라 흙바닥에 무릎을 끌며 기다시피 하는 사람은 전부 팔다리가 가느다란 여자, 꼿꼿이 서서 그들을 내려다보는 사람은 두툼한 몸을 가진 남자다. 여자들은 남자를 향해 계속 말을 건다. 그러나 남자는 여자들이 뭐라고 말하든 무응답으로 일관한다. 그는 입술을 꽉 다문 채 핸드폰을 들어 자기 아래에 있는 여자들의 얼굴을 촬영해 간다. 다급한 마음에 남자의 바짓자락을 잠시 붙잡은 한 여자는 여자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걸어가는 다리에 맥없이 질질 끌려가다 무릎에서 피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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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시는 2023년 초부터 1년 안에 용주골 성매매 집결지를 강제 폐쇄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용주골 여종사자들을 폭력과 착취에 시달리는 ‘성매매 피해자’로 규정한 파주시는 피해자의 인권 회복을 위해 성매매 집결지가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작 성매매 피해자로 규정된 바로 그 여성들이 용주골 여종사자 모임 자작나무회를 조직하며 강제 폐쇄에 저항하자 파주시는 그들을 업주에게 조종당한 여성들, 혹은 말할 권리가 없는 범죄자들로 치부하고는 “불법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성매매집결지폐쇄 TF 팀장 앞에 무릎 꿇었던 날에도 자작나무회 대표는 그저 말하고 있었다. 집결지에 사는 여자들에게도 사정이 있다고, 여기 있는 여자 중에 누구는 아픈 가족을 부양하고, 누구는 장애가 있는 아이를 키우고, 누구는 아파서 다른 일을 못 한다고, 다 성매매 집결지에서 일하게 된 사정이 있는데 이렇게 하루아침에 내쫓으려고 하면 어떡하냐고, 면담 날짜를 잡아서 우리 이야기를 좀 들어 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차차 활동가 '여름'은 당시 상황이 어땠는지 묻는 동료에게 “처음엔 우리가 안 보이는 척하는 모습이 너무 충격적이라서 멋진 말이 하나도 안 나왔다”고 전했다. “왜 피해자 말을 안 들어주고 도망가세요? 어디 가세요? 성매매 피해자라고 했잖아요. 피해자를 위한다면서요. 근데 왜 피해자가 무릎 꿇고 면담 날짜 잡아 달라고 하는데 그냥 가세요?” 대답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거의 독백이나 다름없게 된 이 질문들을, 그는 무릎을 털고 일어나게 될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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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그의 몸을 통해 현현한 파주시가 성매매 여성을 대하는 태도에 관해서는 어떻게든 증언해야겠다고 느낀다. 개인의 몸과 성별에서 비롯되는 인상을 떼어 놓고 4월 19일을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 유감이지만, 그렇지만 그건 정말 그린 듯한 남자의 모습, 권력의 모습, 곧 국가의 모습이었다. 사회변혁을 꿈꾸는 자들이 일평생 전력을 다해 거부하는, 그러나 거부하기 어려운 역사로 반복되는 모습 말이다. 슬픈 여자, 화난 남자. 빼앗기는 여자, 파괴하는 남자. 말하는 여자,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남자. 포기하지 못하는 여자, 촬영하는 남자. 그리고 끝까지 대드는 여자를 처벌하기로 결정하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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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2024년 5월, 공무집행방해죄로 고소당한 사실을 알게 된 A씨는 이렇게 말했다.
“아팠습니다. 무릎이 아니라 마음이. 자기들이 피해자라 정해 놓은 나를 이렇게까지 무시할 수 있는지. 상처받았습니다. 어떻게 얘기를 들어달라 무릎을 꿇고 사정한 것이 공무집행방해죄가 되는지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왜 저희의 이런 상황들이 알려지지 않고 매번 묻히는지, 우리는 목소리도 내면 안 되는 사람들인지 억울하고 힘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