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가게 글월』 속 '그림 그리는 돌고래'님께,
안녕하세요, 돌고래님.
돌고래님의 고민을 읽고 나서 저도 분명 그런 시기가 있었고,
때때로 지금도 그러고 있지 싶어 많이 공감되었어요.
부정적(?)인 이야기와 긍정적인 이야기를 함께 드리자면,
자기 자신을 잘 용서하지 못 하는 사람은 계속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렇게 계속 살아야 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방법을 잘 아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자신을 책망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자신을 용서할 수 있겠어요.
자신을 책망하면서도 자기 비하로 빠지지 않고 스스로 구원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타인의 잘못보다는 자신의 부족한 점을 먼저 살피고,
그로 인한 성찰로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을 포용할 줄 아니 나 혼자만 좋은 사람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도 좋은 사람이 될 확률이 높고요.
자기 자신을 잘 용서할 줄 모른다는 건,
그만큼 성장의 여지가 많고, 좋은 사람이 될 확률이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오늘의 내 잘못에 대해서 만큼은,
'나도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어. 난 언제든 나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 오늘은 좀 넘어가도 돼.'
하고 자신감을 가져도 될 것 같아요.
저는 이렇게 제 자신을 용서해줘요. 많이 힘들다 싶을 때 마다요.
어차피 나는 자신을 용서 못 하는 나로 돌아올 회복탄력성을 가진 존재이니,
나는 사실 참 괜찮은 사람이니까
오늘만큼은 좀 느슨하거나, 이기적이어도 돼. 하고요.
그림 그리는 돌고래님은 참 괜찮은 사람일 거예요.
나 자신을 쉽게 용서하지 못 할 정도로요.
그러니까 가끔은 에라 모르겠다 하고 그냥 용서해버리세요 :)
훌훌 털고 그냥 잠을 자버리세요.
시간이 지나면 어차피 자신으로 돌아올테니까요.
만약 그게 아니라 어느 순간 자신에게 너무나 관대한 나로 변해버린다면,
우리 같은 사람들은 절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거예요 :)
그러니 지금, 나 자신을 잘 용서하지 못 하는 나를 마구 긍정해주자고요 :)
그림 그리는 돌고래님
안녕하세요^^
편지 잘 받았습니다~
펜팔은 고등학교 이후로 처음 써보네요
덕분에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돌고래님 편지를 읽으면서 저의 성향과 매우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나를 용서한다는 표현은 그만큼 나를 많이 미워해야 나올 수 있는 말일 텐데.. 펜팔 친구로서 가장 먼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우선 스스로를 아낄 줄 아는 마음 키우는 것부터 시작해 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완벽하려는 욕심이 과해지다 보면 조금의 실수도 용납하기 어렵게 되더라고요. 저는 이제껏 늘 과거를 곱씹으며 후회하고 자책하고를 반복하는 삶을 살아왔어요. 우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게 먼저일 것 같아요.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마음가짐 그런 용기가 필요할 것 같아요.
잘하지도 못하면서 괜한 욕심을 내니까 스스로를 달달 볶기 바밨던거죠. 그러다 잘 안되면 모두 남 탓! 이런 악순환에 빠져서 오랫동안 힘든 시간을 보내며 살아왔어요.
요즘 많이 깨닫고 있는데 왜 그런 잣대로 나를 채근하면서 힘들게 살아야 했을까. 나는 나대로 참 괜찮은 사람일 텐데. 내가 나를 인정해 주지 않으니 늘 남의 눈치부터 살피며 힘들게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라도 스스로를 존중하며 잘 돌봐야겠다는 생각에 내린 결론이 있어요. 더 이상 이렇게 나를 방치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한번 같이 해보실래요?
나 스스로를 아끼고 칭찬하기 프로젝트 중 하나에요!!
그 중 한가지 먼저 말씀드릴게요. 매일 밤 자기 전에 하루를 회고하면서 나의 하루를 꼭 칭찬해 주세요. 잘잘못을 따지지 말고 나는 어떤 하루를 보내고 있는지 찬찬히 들여다보세요. 그리고 스스로를 꼭 칭찬하고 세상에 감사한 일을 매일 기록해 보세요.
물론 처음엔 칭찬할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될 수 있어요. 그럴 땐 아주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 보세요. 예를 들면 아침에 일어나서 이불 정리하는 내 모습이 사랑스럽다. 아침에 세수하는 내 모습이 참 예쁘다. 나를 위해 하루를 회고하는 시간을 갖는 나를 칭찬한다. 기록하는 내가 정말 기특하다 등등..
이렇게 매일이 쌓이면 칭찬의 개수가 누적되어 스스로가 정말 대견하다는 생각까지 들게 될 거예요.
처음엔 어색해서 잘 안되겠지만 이렇게 매일 나를 위한 시간으로 채우다 보면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점점 커질 거예요. 나 스스로를 아끼는 마음이 커지다 보면 나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지게 되죠. 나를 너그럽게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이 커진다면 성공이에요.
어때요? 그림 그리는 돌고래님도 한번 시작해 보실래요?
그림 그리는 돌고래님께
굿모닝~~❤
혹시 어젯밤도 불면증 때문에 힘드셨던 건 아니죠?ㅜㅜ
자기를 용서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지 물으셨죠?
이 질문을 받고 한참 동안 생각했어요.
나는 나를 얼마나 용서하고 있는지, 어떻게 나를 용서했는지...
그동안의 나를 돌아보건대 다행히 나는 나에 대한 잣대가 엄격하지 않아서 크게 용서하고 용서하지 말고의 개념이 없이 살았던 것 같아요~~😊
못하면 못한 대로,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두는 거죠.
물론 어떤 일이 뜻대로 안 풀렸거나 일을 그르쳤을 때 후회나 자책을 할 때도 있지만 그때마다 '괜찮아' '다음에 또 잘하면 되지' 이런 마음으로 나를 다독거리면 나를 채찍질했던 마음도 스르르 사라지더라고요.
잘하려는 욕심은 누구나 있을 거예요.
어떤 일을 완벽하게 하고 싶고, 잘해내고 싶고,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고...
<빠르게 실패하기>라는 책에서 '모든 일은 계획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만약에 실패하더라도 더 빨리 다른 기회를 만들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으니 괴로워하지 말라' 라는 말이 나와요.
최선을 다하되 결과에 그렇게 연연해 하지 않았으면 해요.
'이만하면 잘했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해냈잖아' 말하며 자신을 칭찬해주세요. '이번에 배웠으니까 다음에 더 잘하면 되지' 이런 마음을 가져보세요.
이렇게 자신을 토닥이고 칭찬해주면 자연스럽게 용서가 되지 않을까요?
저의 긍정 에너지를 돌고래님께 나눠주고 싶네요^^
오늘 밤은 부디 편안한 마음으로 숙면을 취하시길 멀리서 응원합니다.
2024년 6월 5일 날 좋은 날
FROM. 그림 그리는 돌고래님께 긍정 에너지를 마구마구 전해주고 싶은 익명
<지하로부터의 수기> 네 번째 읽기를 마쳤다. 세상은 지하인에게 지상의 살아 있는 삶이 두려워 지하로 숨었다고 손가락질 한다. 지하인이 직접 답한다.
"내가 왜 이런 행동을 했느냐 하면, 여러분이 감히 천착해볼 엄두도 못 냈던 것을, 또는 반쯤 천착해보았던 것을, 그리고 비겁함을 분별력이라 하며 여러분이 자신을 기만하면서 자위해왔던 것을, 끝까지 파헤쳐서 그 속을 뒤집어보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그러니까 나는 여러분보다 훨씬 더 '생생하게' 살아 바깥으로 나온 셈이다."
지하인에게 인류의 반은 죽은 혼, 나머지 반은 산송장이다. 그들이 지하로 들어간 건 죽은 혼과 산송장들의 삶에서 질식할 것 같은 죽음, 환멸, 무의미를 보았기 때문이다.
수기 이후로 이어지는 도스토옙스키 5대 장편은 하나의 주제로 요약된다. 지하인에게도 구원은 가능한가.
단테는 천국에 올라가기 위해 먼저 지옥으로 내려갔다. 우리도 지상으로 올라가기 위해 먼저, 지하로 내려가야 한다. 그리고 거기서 보아야 한다.
'무언가 추악한 것을'
Up is down, down is up.
아멘이다.
그림 그리는 돌고래님께
짧은 편지를 드려요.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있내고 물으셨죠?
글쎄, 전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요.
대부분의 답이 그렇듯 딱 떨어지긴 어려워요.
다만 예전에 제 잣대가 딱딱한 나무기둥 같았다면
지금은 좀 물러지고 있어요. 노력합니다. 타일러요.
때론 제 성급한 판단이나 과오에 용서를 하지 못하기도 해요. 때로는 예전보다 나를 더 안아줍니다.
용서는 저에게도 숙제예요.
그리고 오로지 날 위해서 용서하고 싶은 그 사람을 용서하는 것도 저의 숙제랍니다. 용서할 이를 용서하지 못하는 날 용서하고 싶어지네요…
돌고래님도 자신을 용서하는 방법을 찾고 계시니 전 오히려 위로를 받았어요. 절 보고 작은 위로가 되시길.
To. 그림 그리는 돌고래 님
안녕하세요, 돌고래님.( 그림 그리는, 이란 앞의 수식어를 빼고 이렇게 부르니 왠지 친한 사이끼리 성을 빼고 부르는 그런 친숙한 느낌입니다)
정말 얼마만에 ‘To'라는 단어를 쓰는지 모르겠어요.
빈 여백에 ’T' 를 쓰는 순간 마음이 일렁거렸어요. 설레임이 밀려오더군요.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일은 마음의 한 부분을 살포시 떠서 보내는 일이쟎아요.
그런 낭만을 다시 느낄 수 있어 너무 설레입니다.
그런데 그런 설레임은 잠시 넣어둬야 할 것 같아요.
돌고래님이 하신 질문에 이제 답을 해야 하니까요.
“자기 자신을 잘 용서하는 편인가요?”
사실 편지의 이 부분을 읽었을 때, 숨기려 애쓰던 마음을 확 들킨 기분이 들었어요.
저는 과거의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해요.
저의 유년기와 이십대는 밝지 않은 감정들의 덩어리로 기억에 남아있어요.
그 속에는 우선 타인으로 인한 상처가 있어요. 아프고 슬프고 외로운 기억들입니다.
하지만 그런 기억보다 저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학대하고 방치했던 긴 시간들에 대한 죄책감입니다.
그리고 저를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준 상처를 너무 뒤늦게 깨달은 것에 대한 미안함입니다.
아주 오랜 시간 저는 제가 받은 상처에만 너무 집중하고 빠져있던 탓에 그 속의 제 자신과 주위 사람들을 보지 못했어요.
저를 아프게 했던 사람들에 대한 상처는 희미해져 가는데 어째서 죄책감과 미안함은 시간이 갈수록 짙어지는 걸까요?
돌고래님.
그래도 저는 살아가고 있어요.
하루 중 어떤 한 시간 속에서 매일 저는 그 감정들과 뒤엉킨 기억들을 마주합니다. 어떤 날은 제법 긴 시간동안, 또 어떤 날은 그저 스쳐지나는 시간동안 말이죠. 그 기억들은 현재의 힘든일들과 맞물리면 시간을 멈춰서 그 시간에 저를 가둬버리기도 해요.
그러면 저는 이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합니다.
너는 이제 그때의 네가 아니야. 너는 지금의 너야.
그리고 그때, 나를 아끼지 않고 학대하고 방치했던 나에게, 그리고 나를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는 방식을 배우지 못했던 나에게 애틋함과 연민을 보내려 노력합니다.
한때 자주 했던 괜찮아, 괜찮아 라는 말은 저는 이제 잘 하지 않아요. 대신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줍니다.
용서는 쉽게 되지 않지만, 용서의 색은 느리지만 서서히 진해지고 있다고 믿거든요.
그래서 제 자신이 쉽게 용서는 지금 안되지만 그래도 괜찮아. 노력하고 있으니까.
라고 말해줍니다.
돌고래님에게 이 방법이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도움이 되었음 좋겠네요.
답장을 받길 기대합니다. (책의 뒷 부분에서 받을 수 있기를...)
6월 초입니다. 23도 안팎의 날씨가 소중한 계절입니다. 돌고래님도 소중한 시간을 더 많이 보내시길...
ps. 사실, 위에 언급한 저의 방법 중 절반은 이 편지를 쓰며 발견한 방법입니다. 어쩌면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마음을 알게 해주는 것이 편지의 힘인가 봅니다.
안녕하세요! 익명님!
사과는 안하셔도 됩니다.
덕분에 '나는 어떻게 나를 용서하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거든요
예전 kbs'황금빛 내인생' 이라는 드라마의
신혜선이 생각이 나네요. 부잣집으로가고싶어 가족들에게 거짓말 했던...들통이 나면서
'난 나를 용서할수가 없어' 하면서 자살시도를 합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해봅니다.
갑자기 웬 드라마? 생각하셨죠?
한참전 드라마인데 제가 이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걸 보면, 저 또한 저를 용서하는 타입은 아닌것 같아서에요.
타인에겐 관대하면서 유독 본인에겐 용납이안되더라구요. 다른 사람들의 충고가 잘되라고 하는 말 일텐데 나에겐 질타로 생각되고.
내가 이렇게 한심한 사람이었나 자책까지하게 됩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
집중이 잘되는 취미가 있나요? 독서, 그림그리기, 글쓰기, 운동 등.. 집중할 수 있는 뭔가가 있으면 좋아요.
다른곳에 집중하다보면, 용서라는 생각은 멀리멀리 사라지더라구요.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다행이어요.^^
조금이나마 도움 되셨길 간절히 바래봅니다.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익명씨 :D
이슬아 작가의 책을 처음 읽었다. 그렇게 유명한데 이제야 읽다니... 라고 쓰고 보니 아니군, 인터뷰집 '깨끗한 존경'을 읽은 적이 있군. 인터뷰집이다 보니 의식을 못했네.
'가녀장의 시대'는 장편소설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왠지 읽는 내내 이걸 장편소설이라고 할 수 있나? 하는 의아함이 생겼다. 굳이 분류하자면 옴니버스 소설이랄까? 긴 호흡을 갖고 좇아가는 중심 서사는 없는 소설이다.
그러나 그런 분류가 중요하지는 않다고 치고, 소설은 여러모로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어서, 그리고 아주 유머러스해서 만족스러웠다. 가녀장이라는 개념도 새롭고, 게다가 그게 이슬아 작가의 실제 삶이다보니 더욱 놀랍고. 슬아, 복희, 웅이, 철이, 미란 등 등장하는 인물들이 다 사랑스럽다. 아마도 대체로 이슬아 작가의 주변인물들을 각색하여 만든 인물들일텐데 주변인들을 애정의 눈으로 보지 않는다면 만들 수 없는 인물들이다.
청소도구를 문신으로 새기는 웅이가 동창회에서 세간의 시선에 저도 모르게 위축되고 동조하지만 결국 자기 마음을 제대로 읽어내는 에피소드도 좋았고, 시댁살이 10년을 용감하게 접고 나와 자신에 대해 알아가며 잘 살아가는 복희가 살림노동의 무상함에 대해 위스키 탄 믹스커피를 마시며 생각하는 에피소드도 너무 좋았다. 무임금으로 복희를 부려먹던 가부장에 비해 임금을 지불하는 가녀장은 분명 진일보했지만 복희는 자신의 노동이 제대로 가치를 대접받지 못하는 기분에 쓸쓸함을 느낀다. 돈을 지불한다고 해서 정당하게 대접한 것은 아니다. 이 부분은 최근 내가 매식을 할 때 했던 생각을 떠올리게 해주었다. 내가 돈을 냈으니까 저 사람은 나에게 음식을 주는 게 당연하고, 그 음식이나 서비스가 기대에 못 미치면 따질 권리가 있다고 우리는 흔히 생각하지만, 노동을 돈만으로 살 수는 없다. 그가 노동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으면 내가 아무리 돈을 지불해도 나는 그가 노동한 대가를 받아먹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얄궂은 돈에 기꺼이 나에게 노동을 베풀어주는 손에 나는 매번 감사해야 옳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대접받은 것이므로.
아직 본 적 없는 모양의 가족드라마, 이런 이야기를 TV에서 보고 싶다고 생각하며 썼다는 작가의 말이 이 이야기의 가치를 잘 드러낸다. 우리는 항상 더 새롭고 더 낯선 것을 떠올리고 말해야 한다. 멈춰 있는 가치들을 발굴해내기 위해.
살림하는 사람들의 정당 [전범선의 풀무질] (hani.co.kr)
인간의 이념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가치는 생명이다. 삶과 죽음 앞에 다른 가치는 부차적이다. 자유, 평등, 정의, 민주, 해방, 그 무엇이든 생명보다 우선시되는 순간 도그마가 된다. 생명의 논리는 이분법적이지 않다. 삶과 죽음은 하나다. 옳고 그름으로 나눠지지 않는다. 삶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 때문에 삶이 있다. 빛과 그림자, 밝음과 어둠이 하나인 것처럼 삶과 죽음은 하나다. 그것이 역설적이며 통합적인 생명의 논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