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이름을 ‘핍’이라 소개하는 우리 주인공의 본명은 ‘퓨리티(순수)’. 씩씩하고 똑똑한 젊은 여성이지만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 텔레마케팅 회사는 도무지 못 다니겠고, 유부남을 짝사랑하고 있고, 제대로 된 집도 없고, 떨어져 사는 어머니는 좋게 표현해서 괴짜인데 핍의 친아버지가 누구인지 절대로 말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핍은 위키리크스와 비슷한 무정부주의 해킹집단을 이끄는, 줄리언 어산지와 비슷한 사내로부터 기묘한 초대장을 받는다. 인턴 자리를 제안하고 싶다고? ‘젊은 여자들 불러서 재미 보려는 속셈인 거 아니까 썩 꺼져’ 하고 답장을 보냈는데 그런 거 아니란다. 태도도 정중하다. 아버지를 찾는 일을 도와달라는 조건으로 핍이 제안을 받아들일 즈음 독자들도 눈치 챘을 터인데, 그렇다. 핍에게는 어마어마한 출생의 비밀이 있다.
그리고 핍이라는 주인공 이름을 들었을 때 고전문학에 조예가 있는 독자들은 이미 알아차렸을 터인데, 그렇다. 조너선 프랜즌의 소설 『순수』(은행나무)는 찰스 디킨즈의 『위대한 유산』을 곳곳에서 노골적으로 인용한다. 디킨즈의 소설을 21세기에 조금 차갑게 다시 쓰면 이렇게 될까? 선량한 주인공의 수난과 성장, 뒤틀렸지만 아주 매력적인 조연 캐릭터들, 뜻밖의 전개와 흡인력.
“나는 평생 문학을 연구해온 사람이라 인간 심리에 대해 조금은 안다고 자부해. 내가 보기에 ○○○은 너에게 맞지 않는 여자고 걔도 그걸 알아.”
전체 828쪽인 이 소설이 80퍼센트가 넘어갔을 때 나오는 대사다. 『순수』가 프랜즌의 대표작으로 남을 것 같지는 않고, 그가 심오한 메시지를 고민하면서 이 작품을 쓴 것 같지도 않다. 인터넷과 정보 공개에 대한 고찰이 간혹 나오기는 하지만 내게는 저 위의 대사가 이 소설의 핵심으로 다가왔다. 저자의 의도였건 아니건 간에.
맞지 않는 사람과 사랑에 빠지거나 가족이 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뒤틀린 인물의 내면에 대한 깊이 있는 묘사를 문학을 통해 접하게 되면 정말 인간에 대한 이해도 깊어질까? 책 뒤표지에 나온 묵직한 해외 서평들에 주눅 들지 마시기를.
우울증은 흔하지만 이해하기 힘든 질병이다. 흔하다는 이야기부터 하면 3년 전 우울증 에피소드를 어느 산문에서 고백하고는 지인들로부터 “나도 약 먹고 있어, 힘내” 하는 연락을 많이 받았다. ‘아니, 이 사람도?’ 하고 놀라기도 여러 번. 얼마 뒤 한국인의 우울증 유병률이 36.8퍼센트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라는 기사를 접했다.
이해하기 힘들다는 부분에 대해 말하자면 내가 이 병에 왜 걸렸는지, 어떻게 나았는지 나도 모르고 의사도 모른다. ‘그게 어떤 느낌이야? 오랫동안 낙담해 있는 것과 우울 장애는 뭐가 달라?’라는 질문에 정확히 답하는 것조차 어렵다. 속은 지옥인데 밖으로는 멀쩡해 뵈는 상황이 당사자에게도 난데없다.
1,028쪽에 이르는 분량에 우울증의 역사, 의학적 분석, 정치사회경제학적 접근, 과거와 현재의 치료법, 환자들의 투병기, 글쓴이의 경험을 담아내 이 분야의 고전이 된 책, 『한낮의 우울』(민음사)을 읽으면 우울증을 이해하게 되느냐. 저자 앤드루 솔로몬조차 아니라고 한다. ‘암흑의 핵심’은 여전히 깜깜하다.
그러나 암흑 주변부에도 의미 있고 유용한 사실들이 많다. 예를 들어 우울증이 결코 현대 선진국 중산층의 질병이 아니라는 것. 우울증은 오래 전부터 다양한 문화권에서 나타났고, 그만큼 다양하게 편견 어린 시선을 받았다. 우울증과 맞서는 데에 자존심이나 허영심이 때로 사랑보다 더 도움이 된다는 지적 역시 의미 있고 유용하다.
그럼에도 이 책은 ‘암흑의 핵심’에 있는 것을 언어로 최대한 붙잡고자 할 때 가장 빛을 발하는 것 같다. 목적의식이 없는 상태, 관점 자체가 없어지는 기분, 부식되어 가는 자신에 대한 증오와 환멸, 그 상황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절망감.
그리고 놀랍게도 암흑을 파헤치는 작업을 따라가다 보면 반대편에 무엇이 있는지를 점점 더 깨닫게 된다. 그것은 고통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우리는 ‘서툴지만 열정적인 저글링 곡예사’(734쪽)가 되어 ‘스트레스가 많고 매혹적인 삶’(〃)을 쫓아야 한다. 우울증에 관심이 없는 분께도 그런 이유로 이 책을 추천한다.
한국 현대사를 배경으로 서로 다른 세대가 지닌 다양한 가치관을 이웃들의 이야기로 섬세하게 엮어 낸 소설. 196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세대 간의 간극을 뛰어넘어 공통된 정서를 공유하게 만드는 감동적인 작품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3대를 아우르며 시대의 풍파 속에서 좌절하고 다시 일어서며 성장한다. 물질만능주의의 상징인 갑식, X세대의 상징인 가희와 나희 자매, 물질보다 정신적 가치를 더 소중히 여긴 지숙 등 다양한 등장인물의 이야기들을 마치 드라마 보듯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다. 이 시기를 살아온 이들에게는 잊힌 기억을 되살리는 동시에, 그 시대를 경험하지 못한 독자에게는 이해와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