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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순수 (조너선 프랜즌)

자기 이름을 ‘핍’이라 소개하는 우리 주인공의 본명은 ‘퓨리티(순수)’. 씩씩하고 똑똑한 젊은 여성이지만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 텔레마케팅 회사는 도무지 못 다니겠고, 유부남을 짝사랑하고 있고, 제대로 된 집도 없고, 떨어져 사는 어머니는 좋게 표현해서 괴짜인데 핍의 친아버지가 누구인지 절대로 말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핍은 위키리크스와 비슷한 무정부주의 해킹집단을 이끄는, 줄리언 어산지와 비슷한 사내로부터 기묘한 초대장을 받는다. 인턴 자리를 제안하고 싶다고? ‘젊은 여자들 불러서 재미 보려는 속셈인 거 아니까 썩 꺼져’ 하고 답장을 보냈는데 그런 거 아니란다. 태도도 정중하다. 아버지를 찾는 일을 도와달라는 조건으로 핍이 제안을 받아들일 즈음 독자들도 눈치 챘을 터인데, 그렇다. 핍에게는 어마어마한 출생의 비밀이 있다.

그리고 핍이라는 주인공 이름을 들었을 때 고전문학에 조예가 있는 독자들은 이미 알아차렸을 터인데, 그렇다. 조너선 프랜즌의 소설 『순수』(은행나무)는 찰스 디킨즈의 『위대한 유산』을 곳곳에서 노골적으로 인용한다. 디킨즈의 소설을 21세기에 조금 차갑게 다시 쓰면 이렇게 될까? 선량한 주인공의 수난과 성장, 뒤틀렸지만 아주 매력적인 조연 캐릭터들, 뜻밖의 전개와 흡인력.

“나는 평생 문학을 연구해온 사람이라 인간 심리에 대해 조금은 안다고 자부해. 내가 보기에 ○○○은 너에게 맞지 않는 여자고 걔도 그걸 알아.”

전체 828쪽인 이 소설이 80퍼센트가 넘어갔을 때 나오는 대사다. 『순수』가 프랜즌의 대표작으로 남을 것 같지는 않고, 그가 심오한 메시지를 고민하면서 이 작품을 쓴 것 같지도 않다. 인터넷과 정보 공개에 대한 고찰이 간혹 나오기는 하지만 내게는 저 위의 대사가 이 소설의 핵심으로 다가왔다. 저자의 의도였건 아니건 간에.

맞지 않는 사람과 사랑에 빠지거나 가족이 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뒤틀린 인물의 내면에 대한 깊이 있는 묘사를 문학을 통해 접하게 되면 정말 인간에 대한 이해도 깊어질까? 책 뒤표지에 나온 묵직한 해외 서평들에 주눅 들지 마시기를.

 


순수
순수
66. 한낮의 우울 (앤드루 솔로몬)

우울증은 흔하지만 이해하기 힘든 질병이다. 흔하다는 이야기부터 하면 3년 전 우울증 에피소드를 어느 산문에서 고백하고는 지인들로부터 “나도 약 먹고 있어, 힘내” 하는 연락을 많이 받았다. ‘아니, 이 사람도?’ 하고 놀라기도 여러 번. 얼마 뒤 한국인의 우울증 유병률이 36.8퍼센트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라는 기사를 접했다.

이해하기 힘들다는 부분에 대해 말하자면 내가 이 병에 왜 걸렸는지, 어떻게 나았는지 나도 모르고 의사도 모른다. ‘그게 어떤 느낌이야? 오랫동안 낙담해 있는 것과 우울 장애는 뭐가 달라?’라는 질문에 정확히 답하는 것조차 어렵다. 속은 지옥인데 밖으로는 멀쩡해 뵈는 상황이 당사자에게도 난데없다.

1,028쪽에 이르는 분량에 우울증의 역사, 의학적 분석, 정치사회경제학적 접근, 과거와 현재의 치료법, 환자들의 투병기, 글쓴이의 경험을 담아내 이 분야의 고전이 된 책, 『한낮의 우울』(민음사)을 읽으면 우울증을 이해하게 되느냐. 저자 앤드루 솔로몬조차 아니라고 한다. ‘암흑의 핵심’은 여전히 깜깜하다.

그러나 암흑 주변부에도 의미 있고 유용한 사실들이 많다. 예를 들어 우울증이 결코 현대 선진국 중산층의 질병이 아니라는 것. 우울증은 오래 전부터 다양한 문화권에서 나타났고, 그만큼 다양하게 편견 어린 시선을 받았다. 우울증과 맞서는 데에 자존심이나 허영심이 때로 사랑보다 더 도움이 된다는 지적 역시 의미 있고 유용하다.

그럼에도 이 책은 ‘암흑의 핵심’에 있는 것을 언어로 최대한 붙잡고자 할 때 가장 빛을 발하는 것 같다. 목적의식이 없는 상태, 관점 자체가 없어지는 기분, 부식되어 가는 자신에 대한 증오와 환멸, 그 상황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절망감.

그리고 놀랍게도 암흑을 파헤치는 작업을 따라가다 보면 반대편에 무엇이 있는지를 점점 더 깨닫게 된다. 그것은 고통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우리는 ‘서툴지만 열정적인 저글링 곡예사’(734쪽)가 되어 ‘스트레스가 많고 매혹적인 삶’(〃)을 쫓아야 한다. 우울증에 관심이 없는 분께도 그런 이유로 이 책을 추천한다.


한낮의 우울 - 내면의 어두운 그림자, 우울의 모든 것
한낮의 우울 - 내면의 어두운 그림자, 우울의 모든 것
이웃집현대사

한국 현대사를 배경으로 서로 다른 세대가 지닌 다양한 가치관을 이웃들의 이야기로 섬세하게 엮어 낸 소설. 196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세대 간의 간극을 뛰어넘어 공통된 정서를 공유하게 만드는 감동적인 작품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3대를 아우르며 시대의 풍파 속에서 좌절하고 다시 일어서며 성장한다. 물질만능주의의 상징인 갑식, X세대의 상징인 가희와 나희 자매, 물질보다 정신적 가치를 더 소중히 여긴 지숙 등 다양한 등장인물의 이야기들을 마치 드라마 보듯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다. 이 시기를 살아온 이들에게는 잊힌 기억을 되살리는 동시에, 그 시대를 경험하지 못한 독자에게는 이해와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웃집 현대사 - 드라마처럼 읽는 이웃들의 이�야기
이웃집 현대사 - 드라마처럼 읽는 이웃들의 이야기
<좋은 불평등>, 진보진영의 과제에 대한 출발점을 제시하는 책

좋은 불평등이라는 제목은 우선 그 역설적인 표현으로 눈길을 끈다. 우리는 보통 불평등이란 것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좋은 불평등이라고 하는 것이 가능한가? 오랜 동안 진보진영에서 활동한 정치인이자 민주당 소속의 정책전문가인 저자는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까?

이런 궁금증이 강하게 일어난다면, 이 독후감을 읽기 전에 책을 먼저 직접 읽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소설책을 읽듯, 저자가 제시하는 질문들을 마음에 품고 데이터와 논리로 저자가 이야기하는 답변을 찾아가는 즐거움이 있을 것이다. 이 독후감은 일종의 스포일러이다.

요약하자면, 저자가 이야기하는 좋은 불평등은 상위계층의 소득이 늘어남으로서 소득 격차가 확대되는 불평등이다. 저자는 좋은 불평등과 나쁜 불평등, 좋은 평등과 나쁜 평등의 네 가지 차원을 구분하는데, 나쁜 불평등은 저소득계층의 상황이 더 나빠지면서 불평등이 확대되는 경우, 좋은 평등은 그 반대의 경우, 나쁜 평등은 상위계층의 소득이 줄어들면서 불평등이 완화되는 경우를 각각 가리킨다.

저자는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역사를 주요한 변곡점으로 경계가 지어지는 몇 가지 단계로 구분하는데, 1995년부터 2007년까지 이어지는 불평등의 지속적 심화는 중국 경제의 발전으로 대표되는 글로벌 경제 환경의 변화 속에서 수출 중심의 대기업들이 급성장한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즉, 1992년의 한중수교와 2001년 중국의 WTO 가입을 주요 이벤트로 삼는 중국 경제와 무역의 급격한 성장 속에서 우리나라의 대중국수출 역시 급증하면서 임금 인상과 성과급을 통해 대기업 임직원들의 보수가 크게 늘어난 것이 불평등 확대의 주 요인이라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부산의 신발산업과 대구의 섬유산업으로 대표되는 저기술 산업은 중국과의 경쟁으로 인해 사양화되고 관련 종사자들의 고용과 임금이 줄어들면서 불평등 확대의 원인이 되었다. 반면 2007년의 글로벌 경제 위기는 대기업의 성과를 줄이면서 불평등 감소를 가져왔다. 그리고 2020년 이후 코로나 사태와 미중 갈등도 비슷한 방식으로 불평등의 확대를 억제하는 효과를 낳고 있다. 전자가 좋은 불평등의 사례라면 후자는 나쁜 평등의 사례일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저자는 여러 가지 데이터로 뒷받침하는데, 나한테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1988년에서 2008년 기간 동안 글로벌 소득 분위별 실질소득 상승률을 표현한 그래프였다. 오른쪽 방향으로 서 있는 코끼리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코끼리 곡선이라고 불리기도 한다는데, 전세계적으로 코끼리 등에 해당하는 하위 10~60% 계층은 소득상승 비율이 높은 반면, 코끼리의 굽어진 코 아랫면이라고 할 수 있는 상위 20% 부근 계층은 실질소득이 거의 오르지 않았다. 전자는 주로 중국으로 대표되는 상대적으로 빈곤한 국가의 국민들이고, 후자는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의 중하위층이라고 할 수 있다. 그와 같은 해석은 미국과 유럽의 유권자들이 이민을 거부하고 자국의 기존 엘리트계층을 불신하면서 이에 편승하는 극우 정파를 지지하는 현상을 일부 설명해 주는 것처럼 보인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불평등 문제에 대한 진보 진영의 해법이 잘못된 진단과 협소한 관점에 제약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진보 진영이 진단하는 불평등 문제의 원인은 재벌, 신자유주의, 비정규직의 3대 적폐이며, 그러한 진단에 따라 이 적폐들을 해결하는 것이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진단과 해법이 부족하거나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대표적으로 문재인 정부 때 추진된 최저임금인상의 효과를 자세히 분석하는데, 저자에 따르면 최저임금의 급격한 상승은 저임금노동자에 대한 고용을 감소시키면서 불평등을 악화시켰다. 불평등을 개선하려는 선의의 정책으로 인해 나쁜 불평등이 초래된 셈이다.

저자는 더 넓은 맥락에서 소상공인과 중소기업을 지나치게 보호하려는 정책은 규모의 경제 효과를 저해하고 경제 전반의 저부가가치화를 촉진하는 효과를 가져온다고 주장한다. 고부가가치 영역을 제한하고 저부가가치 영역을 지원하는 정책은 경제 전체의 부가가치를 낮춘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정의당이 주장했던 대기업 임원들의 최고임금제한 정책 같은 시도는 국내 인재의 해외 유출을 가져와 중국의 기업들을 유리하게 하고 반도체 산업과 같은 고부가가치 산업을 망치게 될 것이라고 비판한다.

저자가 불평등에 문제의식을 갖는 진보진영 인사로서 제안하는 해법의 방향은 경제 성장을 촉진하기 위한 정책과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한 정책을 병행하는 것이며, 평등을 지향하되 경쟁력을 해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반값등록금 정책으로 고등교육의 질을 해치는 것보다는 기업이 원하는 인재를 키워낼 수 있는 교육이 되도록 하면서 교육 기회의 불평등 문제는 저소득층에 대한 장학금 지원으로 해결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복지 측면에서 저자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열악한 처지의 계층이 노인빈곤층임을 강조하면서 기초연금 상향, 노인일자리 확대, 노후 돌봄 서비스 강화 등 사회의 약자를 돕는 정책에 집중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나로선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먼저 진보 진영이 불평등 문제 해결을 위한 충분한 이론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문제의식에 공감이 된다.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의 노동 탄압이 오히려 대기업 노동자들의 임금 상승을 억누르면서 불평등 감소 요인이 되었고, 87년 민주화 운동 이후 노조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임금 격차가 확대되고 불평등 지수가 악화되었다는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진보 진영의 일반적 인식에 도전하는 부분들이 상당히 많은 것 같은데, 특히 불평등 문제를 가진 자들의 탐욕이나 불공정한 권력 배분에 의한 것으로 보기보다 글로벌 경제 환경 변화 같은 구조적이고 거시적 요인에 비롯된 것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관점에 공감이 간다.

다만, 해법은 지나치게 원론에 머무르고 있고 대안의 범위도 너무 좁다는 느낌이다. 불평등 문제 뿐 아니라 성장과 경쟁력 확보도 중요하다는 것에는 공감하나, 불평등과 성장을 함께 이룰 수 있는 방안이나 상충되는 측면을 조화시킬 수 있는 방안에 대한 구체적인 제안은 부족했다고 본다. 물론, 책 한 권에서 연구자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제안에는 한계가 있으니, 진보 진영에 화두를 던지는 역할 이상의 기준으로 비판을 하는 것이 지나친 일이긴 할 것이다.

저자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가난한 계층이 노인빈곤층이기 때문에 노인빈곤문제 해결이 불평등 완화를 위한 핵심적인 정책 과제이어야 함을 이야기한다. 여기에는 동의하지만, 노인이 아닌 사람들을 포함한 불평등 문제 전체를 포괄하지는 못한 것 같다.

불평등 해소에는 결국 예산이 필요하다. 그런데 예산 확보를 위해서는 증세가 필요하고, 증세에는 국민 저항과 더불어 증세가 경제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반대 주장들이 따른다. 그렇다면, 증세와 재정 규모의 확대에 대한 더 구체적이고 명확한 입장을 갖는 것이 진보 진영의 정책 체계의 기반을 이루는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저자가 경쟁력 강화와 계층 간 사다리 구축을 위해 제시하는 방안은 교육 개혁에 많은 비중이 있다. 교육 개혁은 보수나 진보 이념에 관계 없이 폭넓은 동의를 받을 만한 과제이다. 그렇지만, 교육개혁의 조금 더 구체적이고 포괄적인 방안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와 더불어 교육정책 만으로 성장과 불평등 문제가 충분히 해결될 것이냐 하는 의문이 뒤따른다. 기술 발전에 따른 일자리 감소나 임금 양극화 현상이 교육 개혁만으로 해소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이코노미스트>의 수석편집자였던 라이언 아벤트는 <노동의 미래>에서 교육의 향상이 첨단기술 분야의 병목을 해결하는 데 도움은 될 것이나 노동자 간의 경쟁을 높여 불평등 해소에 근본적인 대안은 될 수 없음을 지적한다.

또한, 진보 진영이 불평등 심화 원인의 핵심으로 짚어 왔다고 하는 재벌, 신자유주의,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서도 입장이 정리될 필요는 있어 보인다.

재벌 문제와 관련한 저자의 입장은 어느 정도 명확해 보이는데, 재벌은 개혁의 대상이지만 대기업은 경쟁력을 강화하도록 국가가 지원할 대상이고, 중소기업이나 소상공인 등 저부가가치 영역에 대해서도 지나친 보호적 시각에만 머무르지 않고 고부가가치 영역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입장으로 이해가 된다. 원론적으로 공감이 가는 부분은 있으나, 고부가가치에 대한 지원과 저부가가치 영역에 대한 보호 축소의 직접적인 효과는 불평등 심화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나쁜 평등보다는 좋은 불평등이 낫다는 원론적 입장에 동의를 한다고 하더라도, 성장과 불평등 간의 상충되는 가치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한 기준들이 현실의 정책들을 다루는 데 적용될 수 있을 만큼 구체화되어야 할 것이다.

비정규직 문제 역시 보수 진영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노동유연성 강화와 맞서는 진보 진영의 입장이 무엇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성장을 위해 노동유연성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과 고용에서 밀려나는 이들을 위한 사회안전망 정책을 병행한다거나, 기업의 부작용이 심한 규제를 풀어주는 것과 반대급부로 노동조건을 향상시키기 위한 긍정적인 규제 정책을 강화하는 것과 같은 입장들이 가능할 것이다. 다만, 이런 주장들은 보수측 입장과 별다른 차이점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 장점이자 단점이다. 보수 진영과 공통적인 기반을 넓혀 나가면서 합리적인 대안을 모색해 나갈 수 있다면 이상적이겠으나, 노동조합 등 진보진영 지지층의 동력을 모아 정치적 힘을 갖추기 위해서는 보수 진영과 차별화된 정체성을 보여 주는 이념적 전제들 역시 필요할 것이다. 신자유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그 논리를 그대로 수긍하고 따라갈 것이 아니라면, 대항할 수 있는 논리들이 더 탄탄하게 자리를 잡을 필요가 있다.

성장과 평등에 함께 도움이 되거나, 적어도 한쪽이 다른 쪽에 방해가 되지 않는 정책들이 가장 높은 우선순위를 받을 만하다. 하지만, 두 가치는 서로 상충되는 측면 역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글로벌 경제 환경에서 국가 경쟁력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성장우선주의에 저항하는 평등 지향 정책을 펴는 데 많은 제약이 따른다. 이런 맥락에서 진보 진영은 성장에 큰 방해가 되지 않는 정책들을 소극적으로 추진하는 데에 머물러야 할까? 또는 보수 진영에서 평등 지향 정책들이 성장에 방해가 된다고 주장하는 논리에 적극적으로 맞서면서 평등 지향 정책의 범위를 넓히고 제약들을 넘어서야 할까? 후자를 위해서는 성장에 방해가 된다고 지탄받는 정책들이 그렇지 않음을 보이거나, 오히려 성장에도 도움이 되거나 필수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보이거나, 아니면 비록 성장을 방해하는 측면이 있더라도 그 정도의 손실은 더 큰 사회적 가치의 측면에서 감수해야 함을 주장해야 할 것이다.

이런 노력들이 모두 진보 진영에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한다. 즉, 진보 진영은 성장과 국가 경쟁력, 불평등 완화의 가치에 함께 책임지는 자세를 가져야 하고, 가치들 간의 상충 관계를 최소화하는 정책들을 지향하거나, 상충 관계를 갖는 가치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균형을 잡을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입장에 근거한 정책들을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이 정책들은 사회의 관심이 집중되는 지엽적인 이슈들에 분산되지 않고 완벽하진 않더라도 충분히 포괄적인 체계에 기반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노력들은 객관적인 사실과 설득력 있는 이론에 토대를 두어야 할 것이다. ‘좋은 불평등’은 풍부한 데이터와 간명한 논리들로 하나의 본보기를 보이고 있다. 정치에서 정권을 차지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겠지만, 불평등 문제에 대한 진단과 해법을 제대로 만들어내는 역량이 없다면 정권을 차지하는 일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좋은 불평등 - 글로벌 자본주의 변동으로 보는 한국 불평등 30년
좋은 불평등 - 글로벌 자본주의 변동으로 보는 한국 불평등 30년
괜히 울고 싶어지는 버지니아의 마지막 작품

난해하기도 하다만, '비타와 버지니아'에서 이 책이 일종의 유서라고 했다는 당시의 한 비평을 봐서 그런지 꽤나 우울한 독서 타임이었다. 그렇다고 읽은 걸 후회하는 것은 아니고...

형이상학적 부분에 대해서는 해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만, 각 독자들이 나름의 형태로 그걸 이해할 때까지 생각하는 것이 버지니아가 원하던 사유하는 독서의 형태일테니 정답을 작성할 필요는 없겠지. 다만 사람들의 관계, 극중 극 대사들에서 피로와 우울을 느끼는 건 그냥 내 기분 탓일까...서로 깊은 애정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상대방이 보는 것을 보지 못한다는 좀 아픈 말. 플롯 따위는 무의미하다는, 무대를 이끄는 당사자의 독백. 구역질나는 식사에도 맛있다고 탄성을 질러야하는 사회적 의무, '다시 만날 일이 절대 없는 상대이기 때문에' 잠시나마 솔직해질 수 있는 순간, 크게 생각하지 않고 보다가 본편보다 훨씬 우울해지는 극중극...연극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사람들의 수다는, 버지니아가 들었기 때문에 이 작품으로 대답하고 싶었던 말들일까? 그나마 마지막에, 이자와 자일즈의 싸움에서 포옹과 생명이 태어날 가능성도 있으리라 말하지 않았다면 우울할 때 접근 금지 책 리스트에 넣을 뻔...하아.

이 책의 완성이, 마지막 길 떠나기 전 작가의 마음 속 무거움을 약간이나마 덜어주었을까. 괜히 혼자 꿉꿉해진 기분으로 답이 없는 상상만 해본다... 

막간 - 기획 29주년 기념 특별 한정판
막간 - 기획 29주년 기념 특별 한정판
저런,

시는 어떤 장르인가, 어떤 형체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군집단(?) 같은건가. 시는 한 번도 쓴 적이 없는데도 시에 대한 고민을 그보단 많이 해봤다. 왠지 모르겠는데 시 안 쓰는 사람들이 유난히 시에 대한 의견이 많은 것 같다. 이건 너무 유치하고 저것은 나무를 낭비한 것이고 나무야 미안해. 잘 쓴 시에 대한 정의를 다루지 않고 못 쓴 시를 까내리는 의견을 너무 많이 봤다.


김은지 시인의 이 시집이 그 줏대 없이 정답을 찾으려 애쓰는 사람들을 향한 다정한 교정 같다. 문장의 형태나 길이, 소재가 중요할 수 있지만 정말 중요한 건 사람들이 읽고나서 무언가 느꼈는가. 남에게 꺼내보이기 부끄러워 아래로 아래로 눌러두었던 감정이나 다들 평범하다고하는데 정작 나는 잘 느껴본 적 없는 그 특수한 일상적 감흥이라던가. 뭐라도 느꼈으면 되는거 아닌가.


‘늘픔‘이라는 시는 이렇게 끝난다.


내가 다가가는 어떤 세계에선

모두가 시를 좋아해

간호사
간호사
오늘의 문장 - 2024년 11월 10일

문명은 사람들을 끌어모은다.

유사한 언어, 유사한 의복, 유사한 건축, 유사한 생활로

상호간에 결속을, 소속감을 제공함으로써 안정감을 준다.


하지만 동시에 그 결속에 속하지 못하는

남들을 구분하게 된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이 바깥 세상과는 다른

문명인임을 증명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사람으로 볼 필요가 없는,

다른 대륙에서 끌고 온 노예가 필요했다.


설령 그들이 통행증을 가진 자유 흑인이 될지라도

그들은 결코 '진짜 백인'이 될 수 없었다.

그는
그는
65. 굶주린 길 (벤 오크리)

산 것과 죽은 것들 사이에 혼령의 세계가 있다. 태어나고 싶어 하는 혼령은 없다. 삶의 세계에서는 존재의 협소함과 무지, 채워지지 않는 욕망, 끝없는 부당함, 어지러운 사랑, 죽음을 겪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혼령 아이들은 만약 태어나게 되더라도 될 수 있는 한 빨리 혼령의 세계로 돌아오겠다고 약속한다.

나이지리아 소설가 벤 오크리의 장편소설 『굶주린 길』(문학과지성사)은 이러한 세계관을 소개하며 시작한다. 주인공 아자로도 태어나기를 원치 않았던 혼령 아이다. 하지만 자기 어머니가 된 여인을 위해 계속 살아가기로 한다. 맹세를 어긴 소년에게 혼령 친구들이 찾아오고, 아자로는 기이한 일들을 겪는다.

‘신비한 능력을 지닌 소년이 두 세계에 걸쳐 살면서,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초자연적인 위기 상황들을 이겨 낸다’고 적으면 어떤 분들은 해리 포터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굶주린 길』은 그렇게 단정하지도, 밝지도 않다. 주인공뿐 아니라 작품 전체가 현실과 환상 사이에 놓여 있다. 현실과 환상 양쪽 모두 한편으로 달뜨고, 또 한편으로 구슬프다.

한국 독자에게 아프리카 민담의 정서는 익숙하고도 낯설다. 동아시아에서도 밤은 강력하지만, 낮 아래 있다. 귀신은 생전의 한에 연연하며, 도술을 부리는 동물들이 인간의 삶을 동경한다. 『굶주린 길』의 밤은 낮 아래 있지 않다. 이곳에서 밤과 낮은, 서로 대화하며 하나의 거대한 꿈이 된다.

번역본으로 751쪽에 이르는 이야기는 뒤로 가면서 권투선수이자 정치인이 되는 아자로 아버지의 비중이 커진다. 부패하고 혼란스러운 아프리카의 정치 현실을 비판하는 듯싶지만 그 또한 환상이 섞여 있다. 아자로 아버지의 투쟁과 이상주의도 너무 괴상해서 아자로와 읽는 이를 두렵게 한다.

오크리는 30대 초반에 발표한 이 소설이 부커상을 받으면서 세계적인 작가로 떠올랐다. 어린 시절 참혹한 나이지리아 내전과 정치적 혼란을 겪은 그는 현실과 환상이 섞인 이 작품에 대해 “내가 본 현실을 전통적 문학 기법으로 묘사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설명했다. 쉽지 않지만 매혹적인 작품이다.

 


굶주린 길
굶주린 길
64. 찰스 다윈의 비글호 항해기 (찰스 다윈)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읽지 못했는데, 솔직히 엄두가 안 난다. 책장이 쉽게 넘어가지 않는 책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정모 국립과천과학관장은 한 칼럼에서 애정 어린 어투로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과학책”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관장은 『종의 기원』 대신 『찰스 다윈의 비글호 항해기』(리잼)를 권하는데, 후자라면 나도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다. 180여 년 전에 출간된, 번역본 기준으로 900쪽이 넘어가는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술술 읽힌다. 과학 고전임을 의식하지 않고, 여행 에세이라고 여기고 펼쳐도 좋을 정도다.

사실 호기심 많고 지적인 20대 청년이 5년 동안 배를 타고 세계여행을 하며 쓴 일기가 재미가 없으면 이상하다. 지진과 쓰나미, 식인 풍습을 설명하는 원주민과의 대화, 구리광산 광부들의 극도로 위험한 삶, 조난당한 선원, 인광(燐光)으로 빛나는 밤바다, 뒷다리를 쳐든 채 꽁꽁 얼어 죽은 말 등등 신기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게다가 다윈은 글을 무척 잘 썼다. 읽다 보면 저자의 초상이 점점 뚜렷해지고, 거기에 깊은 호감이 생긴다. 그는 감탄을 구체적으로 잘 한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기쁘고 감사하게 받아들인다. 유머 감각도 있다. 젠 체 하지 않고, 주눅 들지도 않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잘 어울린다. 노예제에 거듭 분노하고, 처음 보는 동식물을 연구한다.

그리고 물론, 진화론이라는 위대한 아이디어의 싹이 트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갈라파고스 제도에 가기 전에 이미 다윈은 소의 한 품종이 가뭄에 매우 불리해지는 현상을 상세히 기록했다. 다른 소들은 나뭇가지를 뜯어먹고 연명할 수 있지만 문제의 품종은 입술 구조가 긴 풀을 먹는 데에만 적합했던 것. 옆에서 ‘적자생존’이라고 속삭여주고 싶은 기분이 든다.

『찰스 다윈의 비글호 항해기』는 나한테는 여행 충동을 가장 불러일으킨 책이기도 하다. 다윈은 외딴 곳에서 대자연을 보며 얻는 장엄한 감동에 대해 썼다. 파타고니아 평원, 바다로 흘러내리는 빙하, 남반구의 별밤. 내가, 어쩌면 현대인 모두가, 놓치고 사는 게 많다는 생각을 한다.

 


찰스 다윈의 비글호 항해기
찰스 다윈의 비글호 항해기
[그믐북클럽Xsam] 24. <작가란 무엇인가> 읽고 답해요

그믐북클럽에서는 그믐이 엄선한 좋은 책을 끝까지 읽고 질문에 대답하며 사유하는 힘을 기르실 수 있습니다. 그믐에서 추천하는 책을 함께 읽으며, 깊이 있고 의미 있는 시간을 나누기 원하시는 독자 25명을 초대합니다.


*그믐북클럽은 15기부터 교보문고 구독서비스 sam 의 후원을 받아 운영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으로 우리는 엄청난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이처럼 문학에 대한 관심, 작가에 대한 관심이 높은 시절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 기세를 몰아! 그믐북클럽 24기에서는 우리가 사랑하고 흠모하는 작가들에 대해 더욱 깊이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작가란 무엇인가』는 미국의 저명한 문학잡지 『파리 리뷰』가 세계적인 작가들과 가진 인터뷰를 모아놓은 책입니다. 우리가 즐겨 읽고 익히 들어본 20, 21세기 대표 소설가들인 에코, 파묵, 하루키, 오스터, 매큐언, 로스, 쿤데라, 카버, 마르케스, 헤밍웨이, 포크너, 포스터. 대가의 반열에 오른 이들은 언제 어떻게 글을 쓰고 자신의 열정을 이어가는지. 또 어떤 이유로 작품에 성공하고 실패하는지. 문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둔 이들이라면 모두가 궁금해하지만 좀처럼 답을 듣기 어려운 이 질문들에 작가들이 한 인간이자 작가로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습니다.


‘작지만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문학잡지’(타임)라는 격찬을 받은 『파리 리뷰』는 뉴욕에서 출판되는 문학잡지로, 1953년 창간된 이후 69년간 노벨 문학상, 퓰리처상, 부커상을 수상하고 이미 더는 유명해질 수 없을 만큼 명성을 얻은 세계적 작가들과 인터뷰해왔습니다. 이 인터뷰는 신간이나 작가 홍보를 넘어선 소설 기법과 글쓰기 방식, 삶에 관한 진솔한 내용을 다루어 작가 인터뷰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인터뷰를 하나의 문학 장르로 격상시켰다는 평을 듣기도 했어요.


다른 출판사는 『파리 리뷰』에서 인터뷰한 250여 명의 소설가들 중 ‘가장 인터뷰하고 싶은 작가 36인’을 선정해 『작가란 무엇인가』 총 3권에 담아냈습니다. 그믐북클럽 24기에서는 이 3권을 모두 읽습니다. 여유있게 읽으실 수 있도록 이번에는 모임기간도 평상시의 29일이 아니라 55일로 넉넉하게 잡았습니다. 첫 번째 모임에서 18 명을 만난 뒤 이어지는 두 번째 모임에서 18 명을 만납니다.


우리를 울고 웃게 만드는 작가! 당신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자, 이제 36명의 작가를 만나러 갈 시간입니다.


● 신청 안내 ●


- 모집 기간: 10월 28일(월) ~ 11월 19일(화) 오후 2시까지 (sam이용권을 받으시려면 오후 2시까지 추가 정보를 입력하고 참여 신청 버튼을 누르셔야 합니다.)

- 모집 인원 : 25명 + a (교보문고 구독서비스 sam 프리미엄 이용권을 25분에게 증정합니다. 책을 따로 도서관에서 대여하시거나 별도 구매, 또는 이미 가지고 계신 분들은 ‘참여 신청’만 누르시면 됩니다.)


그믐북클럽 24기 참여하기



작가란 무엇인가 1 (헤밍웨이 탄생 123주년 기념 리커버) - 소설가들의 소설가를 인터뷰하다
작가란 무엇인가 1 (헤밍웨이 탄생 123주년 기념 리커버) - 소설가들의 소설가를 인터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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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나눔 이벤트] 지금 모집중!
[책나눔][박소해의 장르살롱] 20. <고딕X호러X제주>로 혼저 옵서예[버터북스/책증정] <오늘의 역사 역사의 오늘> 담당 편집자와 읽으며 2025년을 맞아요[책증정] 연소민 장편소설 <고양이를 산책시키던 날> 함께 읽기[📕수북탐독] 7. 이 별이 마음에 들⭐수림문학상 수상작 함께 읽어요[도서 증정] 저자이자 도슨트인 유승연과 함께 읽는 <내셔널 갤러리에서 보낸 50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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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9일(금) 이번 그믐밤엔 소리산책 떠나요~
[그믐밤] 29. 소리 산책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
이번에는 극단 피악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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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을 읽습니다 🐋🐕🦍
[현암사/책증정] <코끼리는 암에 걸리지 않는다>를 편집자, 마케터와 함께 읽어요![그믐북클럽] 14. <해파리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읽고 실천해요[진공상태] 반려동물과 함께하는 이들 모여주세요![성북구 한 책 플랜 비-문학] ③ 『동물권력』 함께 읽기 [그믐북클럽Xsam]19. <아마존 분홍돌고래를 만나다> 읽고 답해요 [그믐북클럽] 4. <유인원과의 산책> 읽고 생각해요
🏆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을 축하하며 작품 함께 읽어요.
[라비북클럽](한강작가 노벨문학상 수상기념 1탄) 작별하지 않는다 같이 읽어요노벨문학상 수상 한강 작가 작품 읽기 [Re:Fresh] 3. 『채식주의자』 다시 읽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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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의 세 가지 빛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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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의 활발한 독서 생활을 응원하며 그믐이 선물을 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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