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가 되는 두 가지 길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다른 모든 것은 작파하고 심지어는 속세를 떠나 살과 뼈는 물론이고 영혼까지 갈아 대가가 되는 것. 또 하나는 세상 속에서 즐길 거 다 즐기고 볼 꼴 안 볼 꼴 다 봐 가면서 최고가 되는 것. 이 책은 전자는 아닌 후자에 속하는 이야기는 아닐까 한다.
또 그럴 경우 전자보단 후자가 더 흥미롭지 않나 생각해 본다. 전자의 이야기로 한석봉과 그의 어머니나 율곡과 신사임당 같은 이야기도 좋겠지만 위인 전기를 보는 것 같을 수도 있다. 그런데 비해 후자는 여러 많은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여 주면서 인간 내면을 여지없이 보여줘 이야기가 더 풍성할 수 있다.
이왕 당구 이야기가 나왔으니 전자의 이야기가 되려면 정정당당한 스포츠 대결로 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하지만 후자로 풀려면 도박 이야기로 풀어야 할 것이다. 이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영화 <신의 한 수>가 생각이 난다. 난 바둑이 도박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그 영화에서 처음 알았다. 그전까지 바둑은 앉아서 하는 건전한 스포츠인 줄 알았는데 말이다. 하긴 스포츠와 도박의 경계를 넘나드는 종목이 있긴 하다. 이를테면 경마가 그렇다. 화투는 그렇지 못함에도 농담 삼아 스포츠라고 말하기도 한다.
당구가 언제부터 정식 스포츠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물론 주인공 에디가 살았던 1960년대도 당구가 항상 도박이었던 것은 아니었나 보다. 얼마든지 건전 스포츠로 즐길 수도 있는데 도박의 경지에서만 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에디도 그중 한 사람이다. 이렇다 할 꿈이나 비전 없이 자란 에디는 당구에 소질 있다. 이런 걸 두고 우리 옛 어르신들은 사람은 자기 먹을 밥통은 가지고 태어난다고 하셨나 보다. 자기가 잘하는 것 가지고 빌어먹고 살겠다는데 누가 말리겠는가.
더구나 에디가 사는 곳은 자유가 자유스럽게 보장되는 미쿡이다. 자나 깨나 배곯을까 걱정해야 하는 우리나라완 다르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유교적 사고방식이 있어 노름으로 밥 빌어먹고 산다면 혀를 끌끌 차던가, 호적을 파던가, 접시 물에 코 박고 죽던가 해야 한다. 설사 접시 물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다고 해도 그 바닥의 룰과 살벌한 약육강식에서 살아남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솔직히 말을 하자면 이 소설은 그런 치열함 같은 건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냥 좀 아기자기하면서 재즈스럽다고나 할까. 얼핏 들으니 이 책이 처음으로 쓰인 당구 소설이라고 했던 것 같다. 그런 만큼 하나의 전범으로 손색은 없어 보인다.
읽다 보니 주인공 에디가 누구를 만나게 되는가가 눈에 들어왔다. 에디는 제일 먼저 찰리와 함께 미네소타 뚱보를 만난다. 찰리는 이를테면 에디의 매니저 같은 역할을 잠시 한다. 그래서 당구계의 전하 무적(?) 미네소타 뚱보와의 만남을 주선한다. 그런데 이때만 해도 에디는 좀 순진한 데가 있었다. 도박이건 게임이건 치고 빠져야 한다. 즉 누가 빨리 승점을 획득하느냐인데 뚱보가 끝이라고 해야 끝나는 거란다. 끝나야 끝난다란 말을 이런 식으로 적용하다니. 미친 거 아닌가?
결국 우리의 에디는 졸음과 피곤을 꾸역꾸역 참으며 게임을 계속한다. 머리만 잘 쓰면 이길 수도 있었는데 역시 게임은 기술만 좋다고 이기는 건 아니라는 걸 에디도 그쯤에 어렴풋이 깨달았을 것이다. 그래서 판세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말이 아니다. 또 그런 만큼 미네소타 뚱보는 뚱뚱할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해야 상대를 넘어뜨릴 수 있는지를 아는 사람이다.
찰리와 헤어진 후 버스 터미널 카페에서 새라를 만나다.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 결국 가까워지고 그녀의 집에서 동거를 시작한다. 이런 이야기에 연애가 빠지면 배신이다. (이건 이야기의 공식이다.) 하지만 그들은 동거만 할 뿐 결혼을 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서로의 삶은 노터치다. 그냥 섹스 파트너 겸 동거인으로서 간섭하지 않는 삶을 살 뿐이다. 나는 이런 유형의 동거를 꽤 오래전 영화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를 봤을 때 보고 좀 놀란 적이 있었다. 난 그때 동거는 결혼식만 안 올렸다 뿐 사는 건 똑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살을 부대끼고 사는데 어떻게 서로의 삶을 터치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의아했다. 그런데 이게 오래전부터 가능했었나 보다. 역시 미국은 끕이 다르구나 했다.
하지만 에디는 언제까지나 새라하고 세세세하며 살 수만은 없다. 오는 사람 안 말려 같이 살았으니 가는 사람 붙잡지 않는다를 실천할 때가 돌아왔다. 사실 난 이 책을 읽는 중에 영화도 찾아봤는데 이 부분이 원작과 영화가 달랐다. 영화는 새라가 에디를 붙잡는 바람에 결국 동행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제 와 이런 말 한다고 달라질 건 없겠지만 그 설정은 뭔가 난센스란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새라는 나중에 극단적인 선택까지 한다. 이것은 미국의 자유분방한 정신과 별로 맞지 않아 보였다. (여기선 지면상 영화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겠다.) 그래도 나는 나중에 에디가 새라를 너무 나 몰라라 하지 않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에디가 양쪽 엄지손가락을 다쳤을 때 새라가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다. 사람이 은혜를 모르면 짐승만도 못한 존재가 되어버리기도 하는데 그 정도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이 이야기의 하이라이트는 에디가 버트를 만난 거 아닐까. 에디가 버트를 만나고서야 비로소 진정한 허슬러의 면모를 갖추게 되니 말이다. 버트는 에디에게 네가 왜 미네소타 뚱보를 만나지는 게임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지적해 주기도 한다. 또한 버트는 에디가 진정한 허슬러라는 걸 알아본다. 그리고 도사 같은 말도 한다. 이를테면,
게임에서 승리하는 사람은 큰돈을 기다리면서 직감적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다섯 명의 상대 선수들을 지그시 내려다보며 내기를 할 수 있는 자기만의 개성을 자신에게 부여하는 사람이야. 그 누구도 실행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내기를 대비하지. 그건 운이 아니네. 나는 운 같은 건 없을 거라고 보네. 만에 하나 있다고 하더라도 운에 의존해서는 안 되지. 자네가 할 수 있는 건 확률에 따라 경기하고, 최선을 다해 게임에 임하는 거야. 중요한 내기 게임 앞에선,-돈이 걸린 모든 게임은 언제나 중요하지만- 배를 팽팽하게 조이고 세게 밀어붙여야 하네. 그게 바로 클러치야. 그때 타고난 루저는 죽고 자네는 다시 태어나는 거지." 212p
이런 사람 꼭 있다. 모든 것을 초월한 듯도 하고 동시에 사람을 알아볼 줄 아는 사람 말이다. 그래서 사람은 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래도 에디는 꼴에 처음에 버트를 거절했다. 게임에서 이기면 75를 자기가 갖고 25를 버트가 갖는 줄 알았더니 그 반대란다.
버트 같은 사람은 오히려 돈 싸 들고 나 좀 키워 달라고 부탁해야 할 사람인데 에디가 아직 철이 덜 들었다. 에디에 대해 별로 아쉬울 것이 없는 버트는 에디와 안녕을 고하고 자기 갈 길을 간다. 하지만 역시 만날 이유가 있는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되어 있다. 에디는 우여곡절 끝에 수락을 하는데 나중에 버트에게서 75를 자기가 갖는 것 못지않은 축복을 누린다. 한마디로 버트는 에디에겐 은인이다. 어디 나도 버트 같은 사람 좀 안 만날까? 이게 또 인생의 최대 과제 아닌가. 재주가 있다고, 테크닉이 뛰어나다고, 판세를 읽을 줄 안다고 최고의 허슬러가 되는 건 아니다. 사람은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그 운명이 달라질 수도 있다.
오래전 고 이이령 교수가 이런 말을 했다. 미국과 우리나라의 문학을 비교하면서, 미국은 거리의 문학이고 우리나라는 집의 문학이라고. 그 말을 들었을 때 굉장한 통찰이라고 생각했다. 이 작품에 나오는 사람들 하나같이 집에 대한 그리움이나 가족 걱정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의 모든 만남은 집이 아닌 거리(!)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헤어지는 것에 그다지 미련이 없다.
이 책을 통해 미국이란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칙릿'이란 ‘젊은 여성’을 의미하는 영어 속어 ‘chick’과 문학을 의미하는 영어 ‘literature’의 줄임말인 ‘lit’을 합쳐 만든 신조어로, 젊은 여성들의 문학이라 할 수 있다고 한다. 『개를 다니고 다니는 남자』는 북다의 로맨스 시리즈 달달북다, 그 중에서도 로맨스X칙릿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이다. 백과사전마냥 칙릿의 정의를 짚고 가는 까닭은, 나도 칙릿이 뭔지 몰라 찾아봤기 때문이다.
책 속 이야기에서 모림은 쳇바퀴 굴러가듯 평범하고 반복적인 일상을 살아간다.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했겠지만, ‘재미가 없는 인생’ 을 살고 있다. 의욕도, 책임감도 없던 모림이었다. 그런 모림에게 개 약밥이와, 개를 데리고 다니는 남자 티튀루스가 나타난다. 티튀루스는 당연히 진짜 이름이 아니고, 모림이 읽은 책 『팔뤼드』의 주인공이다. 어느 날 공원에서 만난 둘은, 회사원 1과 떡집 가게 아들이던 이들은, 각각 모림과 찬영이 된다.
이 이야기는 일상적이고 지루하게 살고 있던 두 사람이(티튀루스의 경우에는 귀여운 개 약밥이 덕분에 인생이 좀 덜 지루했을 수도 있겠다.) 일상에서의 설레임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짧고 담담한 문체로, 약간의 설레임을 담아서. 어느 날 아침 충동적으로 떡집에 들러 인절미를 샀던 것처럼, 우리가 지하철 역의 델리만쥬 냄새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처럼, 앞으로 펼쳐질 모림의 비일상과 일탈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책을 덮었다.
저는 제 인생이……. 좀 재밌었으면 좋겠어요. 다 제치고, 냅다 그런 말을 해버렸다. 그 순간 나는 나의 욕망을 깨달은 것도 같았는데, 머릿속을 스치듯 지나간 문장은 이런 것이었다. 한참 늦더라도 내 마음대로 걸음대로 이 시대를 가로지를 것. 그것이 나의 목표다. - p.60
* 해당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 받아 쓰였음을 알려드립니다.
작가의 ‘데커’ 시리즈를 재밌게 읽은 기억이 나서 기대하고 읽었는데 생각보다는 평범하게 재밌는 정도로 읽었다. 일단 범인과 범행 동기가 엥...? 😕하게 만들어서 그 동안 재밌게 읽었던 기분도 다 빠져나간 것 같다. 그래도 트래비스 디바인이 나오는 다음 소설이 있다면 또 읽긴 할 듯.
예금, 주식, 채권, 부동산, 세금, 연금에 관한 상식적인 수준의 정보를 패키징했다. 사실상 '내용 없음'에 가까운 책이라 두께에도 불구하고 한 시간이면 완독. 출간 굿즈를 책으로 형상화했고 덕분에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
청계산이라는 동네가 익숙해서 호기심에 오디오북으로 들었다. 부산국제영화제 스토리투필름 선정작이라는데 시나리오 포맷으로 변환하기에 용이한 구성으로 기술되었다. 미국에서 판권이 팔려서 드라마 제작 예정이라는데 아무리봐도 드라마 제작까지 가기엔 밀도가 낮은 내러티브.
정신과 의사의 임사 체험자 사례집. 작가는 150여 건의 임사 체험 사례를 조사했고 15종의 공통 패턴을 확인한다. 15종의 패턴 가운데 죽음의 순간에 그 모멘트가 너무 만족스러워서 이승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는 증언이 인상적. 죽기 전에 한번쯤 읽어보면 죽을 때 덜 당황스러울 거 같다.
이토 준지의 자서전과 창작론, 작품 셀프 해설을 한권에 묶었다. "스토리는 테마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괴이 현상이 집 안에서 일어나면 호러, 집 밖에서 일어나면 SF가 된다."등의 코멘트도 좋았고 책장에 그려놓은 플립 만화도 이토 준지 다웠다.
치과 기공사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은 이토 준지는 연일 계속되는 과로에 이렇게 살다가는 40살에 죽을 거 같다는 예감을 느끼고 어차피 죽을 거라면 하고 싶은 일(만화)을 하다 죽겠다는 결심을 한다.
미국에서 업계 경력을 쌓은 디자이너의 평범한 에세이인데 타이틀에 뜬금없이 AI가 삽입되었다. AI 관련한 이야기가 전혀 없는 건 아닌데 분량도 매우 적고 깊이나 인사이트도 없다. 그냥 요즘 출판계의 트렌드인 듯.
관 시리즈를 순서대로 본 게 아니라 3권을 이제야 보았다. 배경도 출간도 디지털 시대 이전이고, 기상천외한 트릭도 좋아하지만...마지막에 혈흔 반전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흥이 한방에 날아간다. 기괴한 저택이나 트릭 설정은 호불호 문제지만, 인체에 일어나는 일은 그 시절이라도 자문 구하는 게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닐텐데 뭐 이런...관 시리즈 영상화도 코앞인데, 설마 이 결말을 2024년에 그대로 쓸까?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