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구와 굴종은 쌍둥이 같았다. 무언가를 원한다는 것은 실망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혼자서는 떠올리지도 못했을 생각들을 해왔고, 같은 고민을 해왔다는걸 알게 되면 안도감과 실망감이 함께 든다.
너무 많은 것을 원한다는 것과 지나치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동시에 느끼면서도 그 간극이 어디에서 오는지, 왜 원한다는 것이 낙담과 자책으로 이어질 때가 많은지, 왜 항상 욕구에 대한 정당성을 찾는지, 어쩌다 원하는 것 자체를 주저하는 지경에 이르렀는지 같은 기본적인 것들을 스스로에게 질문해 본적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냉장고에 있는 케잌의 존재를 백이십프로 의식하면서 밤새 냉장고로 향하는 발걸음을 참아내느라, 내일 아침이 밝아오면 입에 들어올 케잌 맛을 상상하느라 다른건 집중 할 수 없는 밤. 책상에 놓여있는 과자봉지를 노려보며 지나가는 순간들, 지겹고 지난하고 청승맞고 끔찍한 시간들.
<욕구들>읽는 동안은 잠시나마 삶에 대한 주도권이라는 돛대를 손에 쥘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덮고 나면 그 잠잠한 바다의 아래에 도사리고 있는 태풍의 실체에 대해 바닥까지 알게 된 거 같아 더 두려워진다. 냅이 던진 질문의 화살의 촉은 내게 겨누어졌고, 아직 그 어느 것도 피하지도, 나를 통과시키게 두지도 못했다.
*인권연대 숨 소식지 2024년 8월호 <현경이랑 세상 읽기> 꼭지 게재 글입니다.
제목: 이제 알게 되었으니 / 글쓴이: 박현경(화가, 교사)
2024년 6월 21일 금요일
떨리고 긴장되고 두려운 아침이다. 하지만 나 자신을 믿고 가자. 하느님을 믿고 가자. 언제는 안 떨리고 안 긴장되고 안 두려웠나. 그런데 그렇게 걸어온 발자국 나중에 돌아보면 다 결국은 괜찮지 않았나. 하느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2024년 6월 23일 일요일
어제 병원에서 진료를 받으며 펑펑 울고, 오후에는 그림 그리면서 펑펑 울었다. 울면서도 계속 그렸다.
2024년 6월 26일 수요일
어제 정책협의회를 마치고 든 솔직한 생각은 다 그만두고 싶다는 거였다. 나는 이런 일에 맞는 인간이 못 되는데 어쩌다 이런 일을 하고 있는가.
내 자신이 이 교육 시스템에도 전교조 투쟁에도 맞지 않는 인간이란 생각이 든다.
2024년 6월 28일 금요일
결국 아무도 내 편을 들어 주지 않을 것 같다. 결국 나만 비난받을 것이란 걸 잘 알고 있다.
2024년 7월 1일 월요일
푹 자며 주말을 보내는 동안, 출근해 하나씩 차근차근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거 같다는 마음이 생겼다.
2024년 7월 11일 목요일
죽을 것 같았던, 그리고 죽고 싶었던 나날을 지나 이제 겨우 정신을 차린 요즘.
내 자신이 왜 그리도 힘들고 아팠는지 확실히는 알지 못한다. 다만 짐작하기로는, 전교조 지회장으로서 모든 일을 너무 잘하려 했고, 혼자서 다 해내려 했고,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능력을 평가받는 기분이 들었고, (사실 아무도 내가 잘하나 못하나 평가하는 사람은 없었는데 내가 내 스스로를 평가하며 괴롭혔던 것 같다.) 그런 스트레스가 우울과 불안을 단단히 도지게 하지 않았나 생각할 따름이다.
4월 말부터 힘겹고 소진된 느낌이 점점 심해지더니 5월 중순부터 7월 초까지는 우울과 불안이 극에 달했다. 특히 6월 25일 정책협의회가 끝난 뒤에는 교육지원청 측에 대한 분노와 무력감으로 울화병까지 더해졌다. 아무도 내 편을 들어 주지 않을 거고 나 혼자 비난을 감당해야 할 거라고 일기에 쓴 6월 28일 금요일에는, 다시는 학교에 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책상을 정리한 뒤 조퇴했다. 머릿속엔 다 망친 거 같다, 더는 도저히 못하겠다는 부정적인 생각이 휘몰아쳤고, 걷는 것도 말하는 것도 힘들 정도로 몸이 아팠다.
그런 상태로 울면서 병원 진료를 받았고,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주말 동안 약을 챙겨 먹으며 푹 잤다. 그렇게 쉬는 2박 3일 동안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폭풍우가 가라앉고 맑고 파란 하늘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머릿속에 휘몰아치던 극도로 부정적인 생각들이 잠잠해지면서 차차 맑고 침착한 기분이 들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차분함이었다. 차분해진 상태에서 생각해 보니 지금 상황이 그다지 망한 상황도 아니었고 교육지원청에 대한 대응 등도 월요일부터 하나씩 해결해 나가면 될 일이었다. 여린 새싹 같은 자신감이 느껴졌고, 심지어는 가느다란 의욕마저 샘솟았다.
그렇게 해서 7월 1일 월요일의 일기가 가능했던 것이다. ‘푹 자며 주말을 보내는 동안, 출근해 하나씩 차근차근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거 같다는 마음이 생겼다.’ 이 한 문장에는 죽을 것만 같다가, 아니 죽고 싶다가 가까스로 살아난 역사가 담겨 있다. 이 값진 경험을 나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자신감도 의욕도 삶에 대한 사랑도 회복한 건강한 상태. 그러나 자만하지 않을 것이다. 도움을 청할 것이다. 나 자신을 돌볼 것이다. 전부 잘하려는 생각, 혼자서 다 해내려는 생각, 스스로를 평가하는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이다. 내 자신이 얼마나 약한지, 또한 얼마나 강한지 이제 알게 되었으니.
그림_박현경, 천사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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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라지면 암흑이 찾아온다"
지난 8월 16일, 살롱드북에서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을 파헤치는 뜨거운 완독파티가 열렸습니다! 청춘의 고뇌와 열정을 담은 작품들을 함께 읽으며, 작가들의 삶과 문학 세계를 깊이 있게 탐구하는 시간이었죠. (라고 쓰고 맥주 파티라고 읽겠습니다.^^)
특히, 다자이 오사무에 대한 솔직하고 유쾌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각자가 파악한 그의 작품 속에 숨겨진 의미를 이야기했고, 때로는 그의 비극적인 삶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내기도 하며, 때로는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쏟아내기도 했습니다. 마치 다자이 오사무가 우리 곁에 있는 듯, 그의 작품을 두고 열띤 토론을 벌이며 문학적 감수성을 한껏 끌어올렸습니다. (실제로 다자이 오사무가 우리 옆에 있었다면 조금 상처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때에는 순수 독자들만 모인 독서모임이 좋네요.^^)
물론, 책 이야기만 하진 않았어요. 개인적으로 최근 독서모임장이 되어 고민을 하고 계신 분을 위해 많은 이들이 직접 북클럽을 운영하며 느낀 노하우와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서로 공유하며, 더욱 활기찬 북클럽을 만들기 위한 다양한 아이디어를 쏟아냈습니다. (독서모임에서 짝을 찾으신 분도 있었어요.)
마치 오랜 친구들과 함께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는 듯,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서로의 생각을 나누었어요.
무더운 여름날, 청춘의 열기와 문학의 향기가 가득했던 살롱드북 완독파티! 다음에는 비욘드비어북클럽에서 다시 또 어떤 작가와 어떤 작품으로 다시 만날지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함께 해 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제행무상 불방일정진.’ 부처의 마지막 말이다. ‘모든 것은 덧없다. 그러니 쉼 없이 정진하라.’ 언뜻 모순처럼 보이는 말이지만 가만히 곱씹어보면 그 뜻이 점점 와닿는다. 예측할 수 없는 사건•사고가 삶에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치는 시대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루하루 의미와 재미를 가진 몇 가지 행위를 지속하는 일이 아닐까.
마지막 장면이 계속 떠오른다. 순간은 덧없고 그렇기에 아름답다. 그래서 기쁘고 그래서 슬프다.
원작이 재밌으니 드라마도 재밌었구나 싶다. 드라마에 비하면 담백하지만 드라마도 각색이 잘된 것 같음. 불편한 부분이 아예 없던 건 아니지만 충분히 재밌었다.
영화계 출신 소설가들이 많아졌다.
장편소설 『고래』를 쓴 천명관 작가, 『아몬드』를 쓴 손원평 작가, 『불편한 편의점』을 쓴 김호연 작가, 『급류』를 쓴 정대건 작가, 『미러볼 아래서』를 쓴 강진아 작가 등 당장 떠오르는 이름만 헤아려 봐도 손가락이 모자란다.
서사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영상이 눈앞에 바로 떠오른다는 점에서 영화계 출신 소설가들이 쓴 작품을 좋아한다.
이 앤솔로지는 참여 작가 모두가 영화감독 출신이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영화감독 출신 작가의 작품만을 모은 앤솔로지는 아마도 이 책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정은경 감독이 쓴 「두근두근 꾸륵꾸륵」은 90년대를 배경으로 10대 고등학생 소녀 탁구 선수들을 등장인물로로 내세워 그 시절 사랑의 복잡미묘한 감정을 섬세하게 다룬다. 88올림픽, 드라마 「질투」, 가수 강수지, 탁구선수 현정화 등 그 시절의 아이콘을 매개로 제대로 추억 여행을 했다. '급똥'이 꽤 중요한 소재인데 전혀 더럽지 않다. 몹시 귀엽다.
이동은 감독이 쓴 「여름을 찾아서」는 가상현실 체험이라는 소재를 통해 주인공의 불완전한 기억을 복원하고 상처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그린 SF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21세기 소년」 후반부에 등장하는 가상현실 체험을 연상케 하는 연출이었는데, 그보다 훨씬 아름답고 애절한 묘사가 돋보였다.
오세연 감독이 쓴 「매실과 짝피구」는 첫사랑의 열병을 앓는 10대의 마음을 간지럽게 표현한 로맨스다. 주인공의 일기장을 몰래 엿보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구성, 체육 선생님과 짝꿍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주인공의 심리를 따라가다 보면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영화감독들이 쓴 소설인 만큼 작품 하나하나의 질감이 기존 앤솔로지와 꽤 다르다.
마치 하이틴 로맨스 영화 세 편을 옴니버스로 감상한 기분이 들었다(영상화를 염두에 두고 소설을 썼음이 확실하다).
시원한 색감의 표지만큼 상큼하고 동시에 애틋하다.
기분 좋게 책을 덮었다.
간질간질한 기분을 오랜만에 느껴봤다.
춤에는 젬병이다.
내 기억 속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췄던 춤은 대학교 신입생 시절에 뭣도 모르고 운동권 선배들 손에 이끌려 꽃다지의 노래 '바위처럼'에 맞춰 따라 했던 율동이다.
율동을 따라 할 때 무척 부끄러웠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에 오락실에서 DDR이나 펌프가 대단한 인기를 끌었는데, 쳐다보지도 않았음은 물론이다.
최근에 '스우파'가 화제를 모았을 때도 별 감흥이 없었다.
그래도 궁금하긴 했다.
도대체 무슨 매력 때문에 춤에 열광하는 사람이 많은지 말이다.
이 앤솔로지는 춤 좀 춰봤다는 작가 다섯 명이 쓴 단편소설을 모았다.
다섯 단편 모두 현재의 고민과 결핍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춤을 내세운다는 점은 같지만, 저마다 다른 배경을 가진 작가들이 쓴 작품인 만큼 이야기가 다채롭다.
피아노 연주자를 꿈꾸다가 기연을 만나 댄서를 꿈꾸며 행복을 찾기도 하고(춤추는 동전), 쌍둥이 동생 대신 꿈꾸던 무대에 올라 아슬아슬한 상황을 겪기도 한다(꿈을 꾸며).
발레리나로서 가지지 못한 장점에 좌절하는 대신 자신만의 장점을 살려 한 발 나아가기도 하고(비 플러스), 누군가에겐 평범함에서 벗어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걸 파이터).
그중에서도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어린 시절과 딸이 탭 댄스를 매개로 조우하는 「유성우가 내리는 날」이 인상적이었다. 유성우라는 배경 아래에서 과거와 현재를 교차시키는 연출이 환상적이었다.
읽는 내내 풋풋한 성장 드라마를 보는 기분이 들어서 상큼했다.
작가들이 왜 춤을 추고 왜 소설을 썼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