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가장 중요한 일이 잘 끝났다. 기념하기 위해 오디오 장비를 업그레이드 하기로 했다. 오디오 장비는 고가지만 차는 안 살 거니까 괜찮다고 합리화한다. 통과의례와 같은 큰 일을 마무리하면 오디오 장비를 바꾸는 것은 우리 가족의 작은 전통이 될 것이다.
오디오를 새로 들이면 소리가 어떨지 기대하며 여러 장르의 음악을 틀어본다. 클래식을 그렇게 오랜만에 들었다. 챗지피티의 도움으로 예전에 듣던 곡들을 하나씩 더듬거리며 찾아낸 것치고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오히려 그래서 더 좋았을 수도 있고. 최근 몇 년동안 가사 있는 음악을 오래 듣기 힘들어서 재즈만 들었는데 이제는 클래식도 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어떤, 클래식>은 더 좋은 거 없나하고 온라인 서점에서 뒤적거리다 찾았다. 교차검증을 위해 그믐에 검색해보니 한 차례 모임이 열렸고 오간 대화들이 즐거워 보였기 때문에 부담없이 선택했다.
클래식 음악을 알기 위해 읽었는데 결과적으로 작가가 궁금해지는 책이었다. 그리고 그게 나쁘지 않았다. 작가의 말에서부터 작가의 음악에 대한 진정성 있는 애정이 묻어난다. 연주자, 작곡가, 곡들에 대한 이야기가 흡인력있지만 특히 좋았던 것은 작가의 일화들이다. 다른 애호의 대상과 비교해 음악은 특히 그 사람의 삶과 결부돼서 함께 기억되는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베토벤 소나타와 샤콘느를 여러 번 들었고 지금도 듣고 있다. 나도 큰 일 뒤에 오디오를 교체한, 조금 들떠있고 방향성 없는 이 시기를 지금 듣는 음악들과 함께 기억할 것이다.
뱀발) 예술의 전당 이야기와 비슷한 경험을 나도 했다. 근데 내 경우는 영화라서 좀 더 속이 좁은 버전이다. 반성과 깨달음으로 나아간 마음 넓은 작가와는 달리, 나는 앞으로 영화는 혼자 보기로 했다.
일꾼들은 집 사기 어려운 세상, 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집값이 치솟고 있다. 내년 2월 지금 사는 곳의 계약이 끝나 이사를 해야 하는 나는 뉴스를 볼 때마다 불안에 휩싸인다. 결국은 아예 부동산 관련 뉴스를 외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번엔 무사히 이사할 수 있을까?
지방 출신에게 이사는 귀찮고 궁색한 일이다. 2005년 대학 입학할 때 서울로 올라온 후, 지금 살고 있는 성북구 투룸에 오기까지 이사를 열 네 번 했다. 뭐가 뭔지도 몰랐던 학교 기숙사, 기숙사 룸메이트와 함께 구했던 낡은 투룸, 누우면 발이 닿는 원룸, 한 달만에 끝난 친척 집에 얹혀 살기, 급하게 구해 비가 새던 옥탑방, 반찬이 늘 똑같았던 하숙집…. 아, 디에디트처럼 힙하고 세련된 매체에서 이렇게 구질구질한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았는데.
그래서 이 책이 놀라웠다. 사실 저자의 서울살이 자체는 열 네 번의 이사 못지않게 귀찮고 궁색하다. 살(buy) 집이 아니라 살(live) 집을 마련하는 과정이 원래 그렇다. 내가 가진 돈을 헤아려보고, 몇 개의 조건을 포기하고, 다시 헤아려보고, 읍소를 해보지만 여의치 않아 몇 개의 조건을 또 포기하고. 심지어 저자는 혼자가 아니라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기에 더 많은 것을 헤아리고 포기해야 했다. 그럼에도 이 책의 문장들은 구질구질하지 않았다. 매물을 둘러보고 하나하나 따져보는 대목은 실용적이고, 집주인과 매매가격을 협상하는 대목은 긴장감 넘치고, 어렵게 얻은 나만의 방에서 여자친구와 밥을 해먹는 대목은 달달하다. 꾸준히 다양한 매체에서 글을 써온 경험이 빛을 발한 것이리라. 그리고 외부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중심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저자의 태도 또한 좋은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됐을 것이다.
물론 책이 아무리 좋아도 내 고민을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나 역시 저자처럼 휘둘리지 않고 차분히 새 집을 구해야 할 텐데. 내가 자기 중심을 유지할 수 있도록, 부동산 시장이 하루속히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기를 바라는 수밖에.
첫 타자로 책을 신청하고선 바빠서 막상 북클럽에서서는 뒷쳐져 버렸던 <자유> 🥲
한주씩 밀리긴 했어도 완독도 했고
뜻깊은 책이어서 늦었지만 서평을 끄적였습니다.
https://m.blog.naver.com/cheongmyeong_hada/223662806334
서평 목차
> 어린아이의 시점에서
> 온 세상이 뒤바뀌다
> 자유, 자유, 자유🗽
자전적 경험을 녹여낸 이야기로
소설처럼 읽을 수 있는 책이고
나름 2부로 넘어가며 반전도 있었던,
<자유>라는 이름이 너무 무겁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게 다룬 책이었습니다 ;)
버지니아 울프 때문에 '서신'이란 단어에 갑자기 꽂혀서 읽었는데...읽고 나니 무슨 옛날 드라마 주인공마냥 내 마음 나도 잘 모르겠다. 읽은 것을 후회하는가? 대문호의 글을 읽고 해설도 봤으니 남는 것이 있을텐데...
단편이나 좀 봤지 장편 작품도 손대보지 않은 내가 고골에 대해서 뭘 말할 수 있겠냐만, 외투가 날렸던 공포의 강펀치를 생각하면 이 사람은 과연 어떤 편지를 썼을까 기대감이 클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책 펴자마자 옮긴이 머릿말에서 이게 순전한 편지가 아니라 독자 계도가 목적이며 당시에 엄청난 혹평을 받았다라고 나오니 갑자기 불안감이 밀려온다. 그리고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소련 이전 러시아 문학에 종교성이 있는 건 당연하다고 해도, 중세 시대 글인가 싶을 정도의 종교 타령에 어안이 벙벙. 힘든 일을 많이 겪고 죽을 뻔한 경험도 한 작가의 인생을 고려해야하는 부분들이 있다만, 인프라 따위도 필요없고 법도 필요없고 신앙만 독실하면 교회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거라는 생각은 너무 멀리 간 것 아닌가...시기상 어쩔 수 없다고는 해도 읽으면서 어안이 벙벙해지는 레벨의 국뽕도 그렇다만(같은 우크라이나 출신 셰브첸코랑 입장차 너무 대조되어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다) 농부에게 읽고 쓰기 가르치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성서를 읽으려 하는 게 아니라면 다른 책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서는 안 된다고 열변을 토하는 부분에서는 정말 쇼크 받았다. 그리고 푸쉬킨을 너무너무 사랑했다는 건 알겠다만, 책 전반부 "푸쉬킨 = 황제 사랑 나라 사랑" 평론은 대체...이해가 왜곡된 독후감을 공개하는 건 피해야할 일이라는 게 이런 것인가...(잠시 나의 부족한 글은 블로그에 써도 되는가 생각했는데, 추측 조회수 0~2 정도의 글에는 무의미한 고민이다...)
뒷부분 러시아 시 평론은 고평가받는 의미있는 글이라고 해설도 있고, 일단 이 사람들 작품에 뭔가 엄청난 것이 담겨있을 듯한 열정적 평가라 찾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드니 남는 건 분명히 있긴 하다. 그리고 뭐가 어떻게 변해서 마지막 글의 방향이 이렇게 되었는가 궁금해서라도 죽은 혼을 꼭 봐야겠다 마음 먹는다. 하지만, 그냥 읽는 게 좀 좋은 사람에게 상당량의 착잡함을 안겨주는 글들이었고, 별로 두껍지 않아 망정이지 두꺼운 책이었다면 읽다가 복통 왔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완벽한 이도 없고 나의 평가가 뭐 그리 중하겠냐마는...가을날 어울리지도 않는 고뇌를 안겨준 책이었다...
한때 소셜미디어 계정 프로필에 ‘맥주, 자전거, 아이러니를 좋아한다’고 적었더랬다. 맥주는 맛있고 시원해서, 자전거는 타면 즐거워서 좋아한다. 아이러니는 왜 좋아하느냐. 다른 방식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삶과 세계에 대한 어떤 진실을 아이러니가 알려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거기에 끌린다.
세상은 복잡하다. 삶도 복잡하다. 그 복잡함은 한 사람의 이해를 훌쩍 뛰어넘는다. 인간은 논리를 세우고 모델을 만들지만 결국 인생도 세상도 우리의 공들인 전략을 비웃고 간절한 기대를 배신한다. 성실한 자를 처벌하고, 노력하지 않은 사람에게 보상을 주고, 그래서 만사 포기하려는 순간 갑자기 선물을 안기기도 한다.
현대문학에서 나온 『기 드 모파상』에는 모파상이 길지 않은 작품 활동 기간에 쏟아내다시피 써낸 단편소설 300여 편 중 63편이 실려 있다. 대부분은 현대 기준으로는 단편이라기보다는 엽편 쪽에 가깝다. 808쪽짜리 책에 63편이니까 편당 평균 길이는 12쪽 남짓이다. 책 자체는 두껍지만 콩트집 읽듯 무겁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전쟁의 참혹함을 말하는 작품에서부터 괴기소설로 분류해야 할 단편까지 주제와 소재는 실로 다양한데, 그중에서도 나는 결말이 아이러니한 글들에 특히 매료됐다. 모파상은 아이러니의 대가다. 대단히 효율적으로 아이러니의 앞부분을 쌓아올리고 정확한 호흡으로 주인공과 독자를 낭패감에 빠뜨린다. 그 낭패감은 세상 돌아가는 이치라 믿었던 생각이 틀려서일 수도 있고, 성실하고 선량하다고 믿어온 특정 인물이 실망스럽게 행동해서일 수도 있다.
기대와 실체의 괴리 앞에서 신념이나 태도를 바꾸는 사람들을 저자는 비웃는 걸까. 모파상은 인간혐오자일까? 「목걸이」 같은 단편을 여러 번 읽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작가가 그런 속물성에서 벗어나기 힘든 우리네 삶에 덤덤히 연민을 보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자연주의 작가로 불린 그는 그저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썼을 뿐일지도 모르겠다. 독서모임 멤버들과 함께 읽고 따뜻한 책이냐, 차가운 책이냐를 한참 이야기했다. 토론은 즐거웠고 좀처럼 결론은 나지 않았다.
동성애가 가혹하게 배척되는 시대에 두 젊은 여인이 갑작스럽게 사랑에 빠진다. 성애 묘사가 무척 관능적이면서도 아름답다. 그런 그들을 둘러싸고 범죄가 벌어지는데, 이들은 경찰의 도움을 요청할 수는 없는 처지다. 일은 점점 꼬이고, 이 연인들은 범죄의 진상을 놓고 서로를 불신하게 된다…….
세라 워터스의 대표작 『핑거스미스』(열린책들)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고, 오늘 소개하려는 『게스트』(자음과모음)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두 책 모두 한국 번역본 기준으로 700쪽이 넘어가는 두툼한 분량이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게 되며, 여성과 성소수자가 받는 차별을 말하고, 배경이 되는 사회 풍경 묘사가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두 작품 사이에 차이점도 있다. 『게스트』는 『핑거스미스』처럼 현란하게 플롯을 꼬아놓지는 않았고, 이야기의 호흡도 느리다. 『핑거스미스』처럼 반전이 촘촘히 들어 있는 화끈한 서스펜스를 기대하고 집어 들었다간 실망할 수도 있다. 범죄가 발생하는 것도 이야기가 한참 진행되고 나서다. 『게스트』는 추리물이라기보다는 흡인력 있는 드라마이며, 인물들의 고통에 보다 집중한다.
이 소설의 연인들은 『핑거스미스』의 주인공들과 달리 강단이 있지도 않고, 야무지지도 않다. 행동도 부족하다. 대신 그만큼 그들을 둘러싼 상황이 더 절망적으로 다가온다. 『게스트』의 연인들은 『핑거스미스』의 주인공들보다 더 좌절하고 더 두려워한다. 거기에 공감하고 몰입하는 데 독자의 성적 지향은 아무 상관이 없다. 그들의 죄와 그에 합당한 벌에 대한 고민은 끝내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핑거스미스』처럼 휘몰아치는 이야기가 아니어서 문장들에 더 여유가 있었던 걸까, 보다 현대에 가까운 시대가 배경이어서일까. 1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 사회를 살아가는 갑남을녀들의 좌절과 공허함도 잘 전달된다. 많은 이들이 가족을 잃었고, 전쟁터에서 돌아온 군인들은 일자리가 없어 울분에 차 있다. 경제난 속에 희망은 보이지 않고, 특히 여성은 독립하기 어렵다. 책장을 덮을 때에는 주인공 연인들뿐 아니라 살아남은 모든 등장인물들을 응원하고 싶어진다.
<삶의 대립쌍이 죽음이고, 죽음 곁에 있는 삶이란 사랑의 상실을 피할 수 없는 숙명으로 짐 지는 일이며, 상처는 죽음을 동반하는 '되태어나기'를 강요하기에 가장 두려운 적이자 장애물이지만 동시에 그러한 '되삶'의 가치란 인간을 '인간'으로 살게 하는 힘이라는 사실을 심원하고 도저한 정신의 층위에서 성찰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책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우울한 모습입니다.
우울함을 너머 빛이 있는 세상에 거부반응을 일으킵니다.
6편의 단편을 모두 읽고 저에게 각인된 주인공의 한결같은 점입니다.
해설을 보는 순간, 그들의 인생이 왜 그렇게 어두울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소중한 이들을 잃고, 그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기어이 살아가야 하는, 몸부림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소설을 읽었습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이니 작품성은 제가 따져볼 개제가 되지도 않지요.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하면서 문장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소설이라고 하면 가볍게 머리를 식힐 정도에, 익숙했던 제게 작가에 대한 존경심을 유발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이제 책 한권을 읽었을 뿐인데...
또 다른 작품들은 제 마음에 어떤 파장을 일으킬까요.
공부도 잘 하고 유머 감각도 있는, 장난꾸러기 눈을 가진 언니가 나랑 상의도 없이 덜컥 프랑스 수녀원에 몸을 던졌다. 그냥 공부를 좀 잘하는 정도가 아니라 싱크홀 '무간'이 시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는 웜홀임을 증명한 세계적 석학인 언니가. 부모도 친척도 없어 세상에 단 둘 뿐인 나를 두고서는!
단편 '대화'는 그런 언니를 향한 일종의 복수심을 가진 동생의 시선으로 흐른다. 무간 프로젝트를 이어받은 동생 '효미'는 예수가 신의 아들이 아니라는 증거를 찾아와 언니의 믿음을 무너트리고 싶다. 언니의 믿음을 무너트려 나의 언니를 되찾고 싶다. 신의 아들이라니, 그런 걸 정말 믿을 셈인가?
자매의 (*일방적인) 갈등은 종교인과 비종교인 사이 수세기 간 진행 된 논쟁으로 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사랑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무간을 뛰어넘어 만난 예수는 효미에게 이렇게 되묻는다. 언니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물은 적은 있나? 지금 당신의 태도는 언니가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할 수 없다는 것 아닌가?
무간 너머의 예수의 말이 맞다. 효미의 언니는 스스로 그 삶을 선택하고 행복을 느낀다. 하지만 예수의 말은 효미의 언니가 안전한 선택지를 골랐기에 '참'이 될 수 있다. 언니가 만약 스스로의 선택으로 사이비 종교에 들어갔다면? 광신도가 되어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이 백악관을 정복하고 모든 밀을 파스타로 바꿀 것이라고 외치고 다닌다면? 그 과정에서 행복을 느낀다면 어떡해야할까?
세상이 안전하지 않아서 진리의 힘이 무뎌지고 있는 것 같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던 날, 마치 내 가족의 일인냥 들뜨는 나를 보게 되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인터넷 서점을 열고 '한강' 이름을 검색하고 내가 아는 작품들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읽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적어도 노벨문학상을 받은 우리나라 최초의 작가 작품은 소장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책 주문은 서둘러 했는데, 책이 오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다들 비슷한 생각을 했을테고 많은 사람들이 책을 찾고 있을테니 출판사, 인쇄소, 서점 등 관계자들은 얼마나 정신이 없었을까? 더구나 예상치 않고 다른 작가들과 계약을 맺었을테니 더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그렇게 기다리는 도중, 사랑하는 '책 먹는 사라'님이 훅~ 던지셨다.
"우리 한강 작가 작품 읽기 할까요?"
바로 받았다.
"네. 해요. 우리 해요."
한창 워크숍이 진행되는데, 죄송하게도 마음이 또 들뜨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강 작가의 작품을 제대로 읽어보기 시작했다.
솔직히 소설책을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처음 읽는 소설은 아니나 주로 자기계발서나 에세이는 읽어도 소설은 깊이 빠져들지 못하는 편이었다. 아마도 현실이 아닌 허구라는 나만의 '선입견'을 갖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한강 작가의 작품은 이해하기 어렵고 어둡다는 생각때문에 진입 장벽이 높았다. 역시 경험이 많은 사라님이 초창기의 작품부터 접근해보자고 했다. 그래서 선택된 작품 "여수의 사랑"
"여수의 사랑"은 한강 작가의 소설집이다.
내가 가진 책으로는 여섯 개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었다.
'여수의 사랑', '어둠의 사육제', '야간열차', '질주', '진달래 능선', '붉은 닻'
각 작품들은 가족의 죽음이나 사고, 질병을 목도한 인물들이 겪는 외로움, 고단함, 죽음에 대한 고뇌 등의 모습이 펼쳐진다.
...... 세상에 있는 모든 물은 바다로 흘러가고,
그 바다는 여수 앞바다하고 섞여 있어요.
<여수의 사랑> 중에서
...... 바로 거기가 내 고향이었던 거예요.
그때까지 나한테는 모든 곳이 낯선 곳이었는데,
그 순간 갑자기 가깝고 먼 모든 산과 바다가
내 고향하고 살을 맞대고 있는거예요.
<여수의 사랑> 중에서
태어난 곳조차 정확히 모르는 자흔, 삶이 너무 외롭고 고단하여 고향을 찾으면 무언가 안정을 찾을 것 같은 자흔의 귀소 본능이 아닐까
어디로 가든, 난 그곳으로 가는거예요.
한강 작가의 작품에는 '밤', '어둠'이 배경인 경우가 많다. <어둠의 사육제> 역시 밤이 배경이고 암울함이 그대로 드러난다. 작가의 묘사로 주인공의 고통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하다.
6개의 작품 중 나를 가장 사로 잡은 인물은 <질주>에서의 인규와 진규의 어머니
동네 아이들에게 얻어 맞아 죽었다는 진규. 그 보상금만 챙긴 인규의 의붓아버지. 인규는 자신만이 동생을 잃은 아픔을 갖고 있다 생각했다. 하지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자식을 잃은 부모'일 것이다.
내 경험 탓인지, 박완서 작가가 25살의 아들을 잃고 고통속에서 쓴 <한 말씀만 하소서> 탓인지 인규 어머니의 절규가 뇌리에 박혔다.
다시 너를 낳고 싶다 진규야!
다시 너를 낳고 싶구나, 돌아오겠느냐?
나에게 돌아오겠느냐?
<질주> 중에서
한강 작가의 표현력, 어휘력에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대충 뉘앙스만 아는 단어들도 있었다.
- 박명: 해가 뜨기 전이나 해가 진 후, 얼마동안 주위가 희미하게 밝은 상태
이 박명이란 단어는 한강 작가의 작품에서 자주 표현되는 단어임을 알게 되었다.
- 사위다: 불이 사그라들어 꺼지거나 삭다. 재가 되다.
<여수의 사랑>은 한강 작가가 25세때 쓴 초창기 작품이라고 한다. 20대의 필력이라는 사실에 입을 다물수 없을 정도로 놀랍다. 배경이나 감각에 대한 묘사나 너무나 섬세한 감정 표현을 보면서 '미쳤다'는 말이 나온다.
다들 한강 작가의 작품은 어둡다. 비극이다. 잔인하다고 한다. 왜 작가는 이렇게 어둡고 음침한 글을 썼을까 내내 생각하게 된다. 너무나 이기적인 요즘의 세태, 타인의 고통을 표현하면서 끝내 절망을 극복하고자 하는 작가의 소망을 얘기하고 싶은게 아닐까?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후 많은 독자들의 격려 중 '앞으로 10년만 글을 써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 작가는 10년이면 3편 정도는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답을 했다. 그녀의 머리 속에는 어떤 생각들이 들어 있는지, 앞으로 나올 작품의 배경은 어떤 것일지도 사뭇 궁금해진다.
한강 작가가 노벨상을 받음으로써 드디어 노벨문학상을 원어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헤르만 헤세나 다른 노벨상 수상 작가들의 번역된 책을 읽으며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끙끙대던 일이 한강 작가의 글로 보상을 받는 느낌이다.
한강 작가와 같은 한국인이어서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