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 년도 더 전에, 딱히 관광 명소도 아니었던 북쪽으로 아이까지 데리고 여행을 간다는 것 자체가 놀랄 노자지만, 그런 요소를 빼도 당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게 납득이 가는 책이다. 시작부터 소견이나 감상을 구속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만큼 호기심과 까칠함, 때로는 밀물처럼 밀려오는 감성이 낯선 나라의 현 상황과 믹스되니 인터넷도 없는 시대에 얼마나 흥미로웠을까.
본문 중 메리는 그닥 좋지 않은 의미로 여자논객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자신이 사는 시대에서 얻을 수 있는 지식들을 충분히 공부하고, 믿는 것을 말하고 자신의 의견을 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에는 성별도 호칭도 관계없지. 그냥 싫어서 까는 거 아닌가(...) 느껴지는 부분도 있긴 하다만, 불합리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주저없이 말하는 깡을 보면 역시 아무나 프랑스 혁명을 현지에서 버티는 것이 아니다. 아주 다방면을 두루 까는 한편 사이사이에 북유럽의 자연 경관을 어찌나 감성적으로 묘사하는지 부족한 상상력의 사람도 홀딱 넘어가기 좋다. 나도 가서 보고 싶다! (홈쇼핑 여행채널에서 북유럽 패키지 팔 때 이 책을 읽어줘야 되는 거 아닌가?) 영화로도 나왔던 마틸다 왕비 스캔들이 실시간 이슈로 다뤄지는 것도 신기하고, 코펜하겐 대화재는 아예 몰랐는데 인터넷서 찾으니 엄청난 규모여서 이백 년 늦게 놀람; 그리고 분량은 적다만, 여행 중에 보기만 해도 마음이 벅차서 눈물이 흐를 정도로 사랑하는, 산딸기를 좋아하는 패니가 나오면 씁쓸하다. 아기 패니와 메리가 어떻게 되는지 모두가 다 아니까...한 번은 노르딕 느와르 중 한 권을 끼고 북유럽에 가고 싶었는데, 그 날이 오면 가방에 넣을 책이 이렇게 한 권 추가되었다.
작가가 사랑하는 여러 국내외 여러 작가와 작품에 관해 쓴 독서 산문집이다.
제목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지었다.
다소 길지만 장바구니에 집어넣도록 강력하게 유혹하는 제목이다.
어떤 책이든 그렇지 않겠느냐마는, 산문 집의 주제는 작가가 정말 좋아하는 주제여야 한다.
다른 책은 몰라도 산문집은 그런 주제가 아니면 절대 편안하고 좋은 글이 나오지 않는다.
작가는 로베르토 볼라뇨의 『전화』를 시작으로 다카하시 겐이치로, 하라료 등 본인에게 많은 영향을 준 다양한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즐겁게 풀어놓는다.
여기서 방점은 '즐겁게'에 찍혀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작가가 이 산문집에 인용한 작품을 얼마나 즐겁게 읽었는지 느껴진다.
그래서 이 산문집은 단순한 감상을 넘어 어떤 책은 어떻게 읽는 게 좋은지 알려주는 독서 가이드북이기도 하다.
어떤 소설을 읽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면 참고할 부분이 많은 산문집이다.
이 산문집이 내가 지금까지 읽은 작가의 소설보다 훨씬 잘 읽히고 만족스러웠다.
소설을 읽는다기보다는 무대에서 펼쳐지는 실험적인 퍼포먼스를 감상하는 기분이 들었다.
형식만 보면 최근에 읽은 모든 작품 중에서 가장 독특하고 파격적이었다.
소설과 미술의 경계뿐만 아니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경계도 없다.
이 책에 실린 단편소설 세 편은 분명히 허구이지만 마냥 허구라고 볼 수가 없다.
십수 년 뒤에 이 땅에서 벌어지는 원전 사고, 사고 이후 고립된 도시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건들, 여기에 절묘하게 엮이는 예술 작품과 작가의 삶.
익숙한 서사 구조를 기대하고 읽으면 당황스러울지도 모르겠다.
현장 기록(물론 허구다)을 나열하는 형태로 전개되다가, 인터뷰(역시 허구다)가 튀어나오는데, 소설보다는 르포를 읽는 듯한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과거와 현재의 역사과 실존하는 예술 작품을 바탕으로 소설에서 펼쳐지는 근미래가 낯설지 않다.
이야기를 읽는 즐거움보다는 특유의 분위기가 작품 전체를 휘감아 돌고 있다.
무엇을 읽었는지 선명하게 기억에 남진 않는데, 그 특유의 분위기가 압도한다.
현대음악 같은 전위예술을 소설로 경험했다.
호불호가 대단히 갈릴 작품이다.
솔직히 내 입장은 불호에 가깝다.
나는 서사가 소설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독자니까.
하지만 최근에 읽은 모든 한국 소설 중에서 이보다 확실하게 개성이 느껴지는 소설은 없었다.
주목해야 할 신인이 나왔다.
그래. 이런 소설도 있어야지.
스토리 설계자 - 리사 크론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우리는 글을 쓸 때, 그동안 교육받은 작문의 원리에 치중하느라 이런 스토리의 힘을 보지 못한다. 아름다운 글의 힘으로 독자를 매혹할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는다. 포장지를 선물로 착각하는 셈이다. (p. 42)
어떤 작가들은 데뷔작이 큰 성공을 거두지만 독자들이 정확히 무엇에 매료되었는지 몰라서 차기작, 차차기작은 줄줄이 실패하고 만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무턱대고 써 나가기만 하면 스토리가 만들어진다는 발상의 폐해는 무척 크다. 거기에서 나온 개념이 바로 '무작정 쓰기' 기법이다. 이 기법은 작가들을 무척 유혹하면서 널리 퍼져 있지만 큰 해를 끼치고 있다. (p. 47)
'자리에 앉아 모조리 쏟아 내는' 방식에 우리는 왜 그리도 큰 유혹을 느낄까? 그 답은 간단하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쉬운 일을 택하게 되어 있다. (p. 49)
글의 순서만 이리저리 바꿔 보면서 적당히 만져 주면 어떻게 해결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안 된다. 글의 순서를 이리저리 바꿀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소설에 내적 논리가 없다는 증거다. (p. 52)
모든 주인공은 소설 속으로 내던져지기 직전에 두 가지 불씨를 품고 있다.
1 뿌리 깊은 욕구. 아주 오랫동안 품어 온 어떤 소망.
2 그 욕구의 충족을 가로막는 본인만이 잘못된 믿음. 자신의 발목을 잡는 두려움의 근원.
이 두 갈등 세력이 합쳐져 소설의 전깃줄을 이룬다. 소설 속 모든 사건은 그 전깃줄에 닿아 있어야 한다. 그래야 주인공의 감정을 흔들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게 만들 수 있고, 독자는 주인공에게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알 수 있다. (p. 128-129)
주인공은 잘못된 믿음을 진심으로 옳다고 믿고 있다. 주인공이 그 잘못된 믿음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이 바로 당신이 써 나갈 스토리의 본질이다. (p. 137)
잘못된 믿음이란 정확히 무엇일까? 여타 믿음과 같지만, 잘못된 것이다. 당연한 말을 해서 미안한데, 잘못된 믿음도 믿음이다. 다시 말해 본인에게는 옳은 믿음과 구별이 안 된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다. 잘못된 믿음이 옳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주인공이 멍청해서도, 사리 분별을 못 할 만큼 큰 결함이 있어서도 아니다. 주인공의 지난 삶 속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실제로 옳았기’ 때문이다. 물론 ‘일반적으로 옳은 것’과는 거리가 있다. (p. 138)
잊지 말자. 주인공이 세상을 보는 렌즈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그 렌즈는 항상 ‘믿음’이라는 내밀한 정보에 비추어 눈앞의 모든 것과 그에 따른 자신의 행동을 해석한다. (p. 150)
모든 인물은 자신만의 내적 논리라는 필터를 통해 세상을 걸러서 본다. 그리고 그 필터를 만든 것은 과거에 어떤 일을 겪으면서 맞닥뜨려야 했던 상황이다. 주인공의 과거 속 결정적 순간을 찾아내자. (p. 161)
[출처] 스토리 설계자 - 리사 크론|작성자 임현
읽는 내내 제주4.3이 겹쳐졌다. 작가 김숨이 선택했듯이 등장인물의 이름을 불특정의 동물이름으로 전부 했다면(물론 그럴수는 없겠지만) 오키나와의 외딴 섬에서 일어난 일인지, 제주 4.3을 소재로 쓴 픽션인지 구분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 모든 학살은 서로 닮았다.
스테디오는 독자만을 위한 공간은 아니었지만 독서 모임도 열 수 있는, 준(準) 독서모임 플랫폼이었다.
나도 3월 <K-북 트렌즈> 에 기고한 글에서 그믐, 독파, 플라이북 등 온라인 독서 모임 플랫폼을 설명하면서 스테디오도 함께 소개한 바 있다.
‘발행인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읽기 모임’ ‘미라클 모닝 독서 100일 챌린지’ 등 눈여겨 본 모임도 있었는데……. 아쉽다. 커뮤니티 빌딩은 정말 어렵다.
나이 들어도 설화집은 가끔 손이 간다. 큰 감동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시대의 슬픔이나 한계가 느껴져서 속터질 때도 있다만, 어릴 적 생각도 나고 지명을 보면서 아, 이런 전설이 그 곳에...하면서 괜히 감탄도 하고. 어떻게 읽어야한다는 마음의 부담이 없어서 손이 가는지도 모르겠다.
영화 소재 같은 퇴마 이야기도 있다만, 임신 목적의 강간이라던가 남의 걸 뺏고도 딱히 벌받지도 않는, 시대의 한계가 뻘건 줄로 그어진 듯한 이야기가 종종 두통을 부른다. 복성군이나 남이장군은 사실 일반 백성들과 거리가 있는 이들인데도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설화를 남겼구나 생각하면 약간 찡하다. 내 밥줄이랑 전혀 관계 없는 높은 사람들에게도 측은함을 가지고 대하는 마음을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구나. 아니면 지금도 다들 그리 사는데 내 속이 좁은 건지도 모르지.
숭유억불 아래서도 참 많기도 한 도승이랑 보살 얘기, 처음 듣지만 뭔가 영화같은 사곡리 말세우물 이야기...이야기들도 신기하지만, 넓지도 않은 나라인데 아직까지는 손대는 책들마다 겹치는 이야기 비율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점에도 놀랄 따름이다. 조상님들은 상상력이 무궁무진하셨구나.
같은 땅에 살아도 수백 년 차이면 가치관이나 생활상이 거의 다른 행성에 사는 수준으로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래도 설화들을 읽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면, 이야기를 만들고 전한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다. 내친 김에 전설의 고향이나 좀 보고 자야지...
주제별로 전 세계 신화들에 관한 내용들이 두루 발췌되어 수록되어 있다. 게임과 영화 등에서 접점이 되는 주제와 신화를 연결시키려는 저자의 노력이 느껴지지만 그다지 효과는 발휘하지 못 한다. 일본과 한국의 신화, 전설의 교집합은 흥미로운 부분.
우주의 순환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있다. 모든 삶과 죽음이 순환이라면, 우주는 왜 소멸해야 하는지. 언젠가 거대한 블록홀이 온 우주를 집어삼켜 모두가 소멸하는 시점은 우주가 시작했던 빅뱅처럼 모두 신의 장난같던 우연일뿐인지.
과거로 소멸하는 블랙홀과 미래로 수렴하는 화이트홀의 개념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암흑물질로 존재하는 수많은 작고 섬세한 화이트홀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많은 가능성의 확률이라고 오해하고 싶을 만치, 근사하게 와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