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이 책을 여러 곳에서 이야기하고 다닌다. 하이트의 주장이 과격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주어진 여건을 생각하면 ‘과연 이게 될까?’ 싶은 의문이 생기지만,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야 할 사회를 생각하면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마음. 자기 제안들 중 분명히 틀린 것도 있으리라고 인정하는 자세와 관계자들의 어려움을 언급해주는 사려 깊은 태도도 배우고 싶었다.
로메리고 주식회사가 하는 일이 손해사정으로, 한 인간의 고통을 수치화하는 업무다.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천박하며 대화를 하기는 하지만 깊이 있는 소통을 하지는 않으며, 때로는 독자가 화자에게 이입하는 것도 쉽지 않다. 이것이 그들의 업무 성격과 분리되지 않는 필연적인 결론임을 저자는 암시한다. 남성 등장인물들이 성추행을 당하는 장면은 굉장히 인상적.
책 등만 보고 뽑는 찰나의 순간, 루 리드가 병나발을 불면서 크흐 사랑했다...이러면서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랑 러브 스토리가 믹스가 되다(그런 내용이면 커버가 날주황색일리가...) 뽑고 나니 뒷표지가 침넘어가는 단어들로 꽉 차 있다. 1830년 웨스트포인트(맙소사 잭 리처의 주먹을 가진 뒤팽 나오나요), 은퇴 경찰, 애드거 앨런 포, 에드거상 대거상 노미네이트...상상과 달라도 잘 뽑았으니 로또 맞은 기분으로 읽었다.
시작이 포의 시 레노어라 시 모르는 독자도 제목이 어디서 나온 건지 알게 된다. 마지막까지 다 읽고 다시 시를 보면 기분이 꽤 묘해지는데 일단 넘어가고...포가 명탐정 앨런을 찍는가 싶어서 두근두근 기다렸는데 덕력도 자아도취도 어마어마한 인물로 나와서 참...(중간중간 오글거린다) 성격이 성격이다보니 안 좋은 꼴을 중간에 당해도 별로 안타깝지 않았으나, 클라이막스에서 디스 아닌 디스(...한 번도 아니고 그 다음 챕터 머리부분까지 확인 사살을...)를 당할 때는 안타까움과 헛웃음이 갑자기 올라와서 개인적으론 순간 긴장도가 쫙 내려감. 결말도 우와 반전! 이런 느낌이 아니라, 분명히 반전인데 이상하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날 풀리면서 흙이랑 같이 녹은 눈이 졸졸 흘러가는 느낌이랄까...책 뒤에 한 줄 평들은 소름, 통쾌, 충격을 이야기하지만, 잃어버린 존재들을 끼고 살아가는 이들이 서로를 알아보는 것이 그저 내내 안쓰럽다. 결국 모든 것들이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일들이었으니, 낙엽 시즌에 읽었으면 더 센치해져서 무슨 글을 썼을지 모르겠음. 이미 넷플릭스 영화가 있다길래 트레일러 찾아봤다가 진짜 놀람. 세상에 나의 여신 질리언 앤더슨이 마퀴스 부인이라구? 인간 버전 애나벨 아니셨나요? 갑자기 머릿속에서 소설 내용이 바뀜.
마퀴스 부인 : 랜도 씨가 이 학교에 오셔서 은밀한 관계에 휘말리지 않은 게 놀라울 따름이에요.
랜도 : 저는 부인과 은밀한 관계에 휘말리고 싶습니다
마퀴스 선생 : 여보 날 버리지마!
마퀴스 부인 : (샴페인잔 들면서) 자연을 거스르는 것은 없어요.
망상은 그만 두고 다음 책이나 읽자.
괜찮아졌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별것 아닌 일에 비정상적으로 무너지는걸 느끼며, 나를 온전히 이해해줄 수 있을 무언가를 찾고자 허겁지겁 찾은 책이었다.
나는 그정도는 아니었지만 읽는 내내 조금씩
공감이갔고, 나와 비슷한 상황을 겪어낸 누군가의 문장들이 내가 그동안 아팠던 이유들과
표현이 서툴러 무시하고 지나쳤던 마음을
콕집어 대변해주는 것 같았다.
정말 오랜만에 가슴속 끝까지 울어내보았고,
외롭지 않았던 시간들이었다.
……마을을 유지하려면 돈이 들어. 넓으면 넓을수록 더 많이 들지. 인구가 같다면 마을은 좁을수록 좋아. 난하카마 시에는 미노이시를 유지할 만한 예산이 없어.”
주민들이 다 떠난 뒤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는 일본 시골 마을 미노이시. 지자체는 외지인들을 유치하기 위해 일명 I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그 와중에 일어나는 새 입주민들간의 다툼과 사건 사고들은 참신하긴 하지만 스케일이 소소하다. 대단한 미스터리를 기대하며 책을 집어 든 독자들은 나처럼 조금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진짜 공포는 책을 덮은 뒤 시작된다는 것.
오랜만에 체험하는 망작. 나쁜 시나리오의 전형인데 우선 각색에서 실패했고 무엇보다 대사가 나쁘다. 놀랍게도 강동원의 대사는 대화가 나래이션처럼 들림. <범죄의 여왕>으로 한때 주목받았던 이요섭 감독은 이 영화 이후 과연 재기할 수 있을까? 현실이 너무 잔인하다.
사람들은 왜 자꾸 소리를 지를까. 길을 걷다가도, 차를 타고 이동하다가도 길거리에서 종종 마주치곤 하는, 소리 지르며 싸우는 사람들.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해... 하야하나? 다짜고짜 일단 소리부터 빽 지르고 보는 그 심보를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이해하면 되는 것일까. 나는 화가 났고, 화를 분출하고 싶고, 에라 모르겠다 꽥. 뭐 이런 건가? 그 상황에서 그걸 고스란히 당하거나 목격하고 있을 타인에 대한 배려는? 존중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분노조절장애가 분노조절잘해라는 말로 희화화되는 것 또한 하루 이틀 일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정보에 따르면, 분노조절장애의 올바른 의학적 용어는 '간헐적 폭발성 장애'다. 이는 폭력이 동반될 수도 있는 분노의 폭발을 특징으로 하는 행동 장애로, 종종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건에 의해서도 상황에 맞지 않게 분노를 폭발하는 증상을 말한다. 호르몬 분비의 이상, 감정 조절과 관련된 뇌 영역의 기능 이상, 어린 시절의 학대 등 다양한 환경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발현되곤 한다.
혼자 살기 시작했던 건 30살 봄부터였다.
원가족에게서 벗어났다는 해방감에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자유롭게 뛰놀던 시기는 진작 지났다. 삶의 무게를 고스란히 혼자 짊어지며 산다는 건 주변에 산재한 다양한 위험에 더 쉽게 노출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걸 차근차근 온몸으로 체득했다. 그중 가장 적응하기 힘들었던 건 다름 아닌 타인들의 소음이었다. 6년 차가 된 지금도 이 불안감은 여전하다. 평소 청력이 좋은 편인데, 혼자 살고부터는 원래도 좋았던 청력이 더 밝아졌다. 층간소음으로 꽤 오랜 기간 고통받으면서 귀가 트인 것이다. 흔히 이걸 층간소음 귀트임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한 번 트이고 나면 그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게 함정이다. 그때 이후로 부쩍 더 원치 않는 소음에 고통받는다. 외국어를 배울 때, 귀트임은 좋은 말로 쓰인다지만, 이 경우는 오히려 반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쿵쿵, 쾅쾅, 드르륵, 지이익 같은 다양한 일상(?) 소음에는 어느 정도 면역력이 생긴 건지(포기한 건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진다(이건 어디까지나 넘어가는 게 아니고, 강제로 넘어가지는 것이다). 세상에 조용한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니까. 특히 타인에게 보여지지 않는, 밀폐된 자신만의 공간이라면 더하겠지. 사회적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고, 익명의 세계가 더 저열하고 날이 선 것도 마찬가지 이유일 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걸 다 차치하고서도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고통스러운 소음이 하나 있다. 바로 누군가의 비명소리다. 이건 단순 소음으로만 볼 수도 없고, 이유도 모르겠고, 이유를 알아도 무섭고. 어떤 상황을 대입해 봐도 도무지 긍정회로가 돌아가지 않는다. 물론 살면서 소리 한 번 안 질러본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하다못해 벌레를 보고 소리를 지를 수도 있으니까), 그 소리가 지속적으로 울려 퍼질 때면 정말이지 오만가지 생각들로 머릿속이 가득 찬다. 늦은 밤이나 새벽에 듣는 비명은 그 공포감이 배가 된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낯선 동네에 집을 보러 갔다가 건물 후면에서 난데없이 소리를 질러대는 한 여성을 목격하기도 했다. 훤한 대낮이었는데, 대체 어떤 사연이길래 저토록 날카롭고 처절한 소리를 질러대는 것인지. 처음 방문한 동네였는데, 그분의 모습이 잔상처럼 남아 일단 후순위로 미뤄뒀다. 경관도 좋고, 근처에 공원이 있어 산책하기 좋다는 평이 많아 일부러 찾아온 곳이었는데, 그분 덕분에 꽤나 강렬하게 '불호'로 각인돼버렸다. 물론 그분 한 분 때문에 동네 전체를 일반화시킬 수는 없겠지만, 막상 마주한 그 동네는 로드뷰로 살펴보며 상상하고 그려왔던 모습과도 확연히 달랐다. 이래서 발품을 들이는 게 중요하구나 싶기도 했다.
최근에 읽은 리얼리티 소설 《탕비실》이 떠오르기도 했다. 이 책은 여러 직장에서 ‘탕비실 빌런’으로 꼽힌 사람들을 한데 모은 7일간의 리얼리티 쇼를 배경으로 한 작품인데, 읽는 내내 알 수 없는 찝찝함과 기묘한 불쾌감이 공존한다. "누가 가장 싫습니까?"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작가의 전 작이《달러구트 꿈 백화점》이 맞나 싶을 정도로 불편한 감정을 한껏 자아낸다. 우리는 타인이 보지 않는 공간에서 어디까지 이기적일 수 있을까. 도덕과 윤리, 청결함이 사라진 그야말로 동물적인 감각만 낭자한 스산함이 느껴진다. 남이 보지 않아도 신호등의 신호를 묵묵히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이 보든 보지 않든 차가 오지 않으면(심지어 차가 오는데도!) 마구잡이로 손을 휘휘 저으며 신호를 건너는 사람들도 있다. 대중교통에서도 적당한 데시벨을 유지하려 노력하거나 대화 자체를 중단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자신의 사생활이 낱낱이 노출될 정도로 우렁차게 떠들어대는 사람들도 있다.
내가 사는 곳도 마찬가지다. 1인 가구가 많은 건물 특성상 어쩔 수 없는 것일까. 늦은 밤이나 새벽이면 유독 심하다. 내밀한 공간에서 건물이 떠나가라 소리 지르는 이들이 많다. 외로워서 그러는 것일까, 오후에 덜 풀린 화를 이렇게라도 표출하고 싶은 것일까. 가끔은 싸우는 소리도 들리고, 욕설과 고성이 같이 오가기도 한다. 비명을 지르면서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사람도 있다. 물건을 마구잡이로 던지는 소리가 날 때도 있다.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도대체 다들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어제도 오랜만에(?) 누군가의 비명을 들었다. 옆집인지, 윗집인지, 옆옆집인지 출처는 알 수 없다. 층간소음 유경험자로서 한마디 덧대보자면, 가까이서 들리는 소리라고 해서 꼭 근처라는 보장이 없더라. 저 멀리서 바닥과 벽을 타고 타고 넘어오는 경우도 허다하니 말이다(이건 관리실에 연락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어제 비명을 지른 사람은 여성이었고, 누군가와 싸우는 소리인 줄 알고 신고를 해야 하나 망설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만히 듣다 보니 무언가 자신의 비통함을 표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전부터 서서히 끌어내는 비명인데, 이건 마치 동물이 포효하는 듯한 느낌마저 풍긴다. 2차로 물건을 던지는 소리도 났는데, 방바닥에 무언가를 던지며 악을 쓰고 있는 듯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상상이자 추측일 뿐이다. 전에는 이런 상황이 생길 때마다 겁부터 잔뜩 집어먹고 덜덜 떨기 바빴지만 이제는 다르다. 침착하게 이성적으로 이 상황을 받아들이려 노력(은) 한다.
소설《탕비실》을 읽으며 등장인물들의 이기적인 모습에 생각이 복잡했는데, 어제의 사건 덕분에 한층 더 이 생각에 몰입하게 됐다. 사적인 공간에서도 자신의 모습을 가꾸고 다듬는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마저 올라왔다. 앞뒤가 다르고, 본능대로 행동하며, 일관성이 없고,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지독하게 싫어하는 나였지만, 보여지지 않는 나의 이면과 속마음은 과연 어떨까. 나는 과연 완벽한 사람일까?
뜬금없지만 나는 관계에서도 비슷한 속성을 바란다. 완전무결한 상태의 강박이 있다. 원가족 안에서 지난한 관계를 겪어왔던 터라 이 감각이 유독 더 강렬한 것인지, 미세한 균열이 시작되는 게 늘 두려웠다. 그 작은 균열이 만들어낼 파장이 무서웠다. 관계는 마치 유리와도 같아서 견고할 때는 끈끈해 보이지만 자칫 방심하는 순간 금이 간다. 금이 간 유리는 되돌릴 수 없다. 새롭게 다시 만들거나 그 금을 따라 조금씩 벌어지다 산산이 부서지길 기다리는 꼴이다. 그럴 때마다 올해 초에 읽었던 민바람 작가의《낱말의 장면들》속 문장들을 떠올린다. 그에게 관계란 훼손된 흔적을 지워야만 건강하게 지속되는 게 아니라, 시간 위에 함께 남기는 흔적 그 자체였다. 가시밭길 위에서 같은 경로만 맴돌더라도 그 시간이 쌓여 더 큰 연민과 사랑이 되기도 했다고. 마음만큼 잘 되지는 않을 것이지만, 앞으로 더 나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다는 진심으로 매번 새로워지기를 기대한다고. 관계는 지키는 게 아니라 누리는 것이라던 그의 문장을 다시금 마음에 새긴다.
머릿속을 휘젓고 다니던 온갖 상념들을 주르륵 쓰다 보니 도대체 결론이 뭔가 싶다. 근데 꼭 결론을 지어야 할까. 타인의 소음이든 관계의 불안함이든,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흘러가는 하루의 일부일 뿐이다. 과정을 온전히 자각하고 해결 방안을 찾을 뿐, 완벽할 수 있다는 기대 자체가 모순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닫는다. 그럼에도 다시 또 넘어지겠지만.
단순하게 살고 싶은 단순한 독자 1에게 가을맞이 감동과 절망을 안겨준 책이다. 시작부터 슬픈 내용이 나온다만, 역시 애정과 지식을 어울러 가진 이가 보여주는 숲은 한 줄 한 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혼자 마음대로 과학계의 윤동주라 생각하는 발비 선생도 있다만, 읽다보니 맙소사 영쿡 과학계에 김영랑이 있네...(누구 맘대로...) 놀라서 다시 저자 약력을 보니 애초에 과학 전공도 문학 전공도 아닌데 이떻게 이런 책을 쓸 수 있을까. 하늘은 공평하지 않다. 아름다운 글이란 건 번역자분의 공도 당연히 크겠으니 어이구 감사합니다 하면서 옮긴이의 말을 읽는데 심지어 이 글도 아름답다. 정말 하늘은 공평하지 않아...
죽어가는 것을 아름답게 말할 때는 그냥도 괴로움이 배가 되는데, 무슨 대비 효과마냥 큼직하고 호러스러운 팩트 폭탄이 투척되니 아름다운 글을 읽으면서 끔찍한 현실에 안 아름다운 욕이 나온다. 지금 아는 어줍잖은 지식만으로도 지구 가열이 끔찍스러워 죽겠는데 이 흉악함이란. 순록과 사미족의 너무나 아름다운 관계를 말하다가 몇 페이지 지났다고 '툰드라 녹아서, 이산화탄소보다 온난화효과 85배인 메탄(오늘 챙겨봤던 다른 나라 클립에서는 28배라고 나왔는데, 어느 쪽이 맞는지 다시 찾아봐야겠다만 28배도 충분히 끔찍하다...) 절찬 방출 중!', 고결한 기운의 잎갈나무 이야기하다가 '시베리아 동토대 바닥 지금 붕괴 중이라 도시들 다 바닥에 꺼지는 중!' 이러면 심장이 뛴다...그 와중에 빨리 화성에 기지 건설해서 지구 탈출해야 한다는 러시아 과학자씨...선생님 과학적인 희망을 좀 줘요...'잠수병 걸리듯이' 죽어가는 나무들(모자란 과학 지식 때문에 압력과 물관부 공동화가 언뜻 이해가 안 가다가, 이 한 마디에 눈이 번쩍 떠짐), 이 와중에 정치질이랑 인종 차별(언제나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인류의 존망을 논하는 시기엔 정신질환이 아닌가...), 이 중요한 지대를 끼고 있는 강대국 정부들의 태도(할 말은 많지만 굳이 나의 무지성을 대방출할 필요도 없으리라...)에 그냥 책 덮고 자면서 현실을 잊고 싶다. 그래도 계속 본다...
신기했던 건 다이애나 베레스퍼드크루거(...발음만 어려운게 아니라 타자로 한 번에 치기도 어렵다...)가 언급된 부분인데, 전에 오메오메 하면서 읽었던 '오버스토리' 주인공 중 한 명의 실제 모델이래서 깜짝! 선생의 약력에 맙소사 사랑에 빠질 것 같아...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산소 농도와 동물 전체의 존속에 대한 공포특급! 지구가 튀겨지면서 대기 중 산소 감소 > 영유아 노약자 부터 심정지 > 산소 부족으로 태아 유산..."제 생전이 아니더라도 당신 생전에는 틀림없이 보게 될 거예요." 공포에 떨면서도 선생님의 책을 장바구니에 클릭클릭...
이런 거대한 변화 속에 소시민은 무력할 뿐이지만, 벤 롤런스 선생(경건하게 불러야 할 것 같다...)의 말에 조금 용기를 얻는다.
"콩고, 수단, 우간다, 소말리아의 폐허와 난민 수용소에서 내가 배운 것은 희망이 분투를 낳는 것이 아니라 분투가 희망을 낳는다는 것이다. 희망은 가만히 누워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불활성 귀금속이 아니다. 달라지는 상황에 비추어 하루하루 제작되고 재정의되어야 하는 무언가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절망이 회복을 향한 첫걸음이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