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게시물은 2024년 10월 17일 경향일보의 오피니언에 게시된 '‘이세계 퐁퐁남’, 기준 미달 작품과 네이버를 위한 빨간 펜 첨삭'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몇몇 분들은 이 글을 읽으면 화내시겠지만 나는 문학가로서의 루쉰을 굉장히 경멸한다. 내가 보기에 루쉰은 별다른 영양가없이 문제가 벌어진 곳과는 격리된 실내에서 한가롭게 글을 휘갈기면서 화만 낼줄 아는 사람같아 보인다. 문학적 재능은 라오서와 마오둔에 미치지 못하고 사회적 영향력은 후스의 발끝에도 견주지 못하며 사회에 대한 책임감은 취추바이를 모욕하는 수준이었다. 딱 트위터에서 인용공간에 보일 정도의 글솜씨였다.
허나 슬프게도 트위터에서 수많은 루쉰이 보이듯, 우리 사회는 그런 태도를 매우 높게 평가한다. 사회적 문제를 지적하고 그런 태도가 옳다고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태도가 정말 우리 사회에 도움이 되는지는 이제 생각해볼 때가 된 것같다.
이제 오늘의 본론인 칼럼으로 들아자자. 작가는 수년간 경향일보에 칼럼을 게재하면서 젠더 문제에 대해서 일관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여성과 남성은 편향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에 대한 문제를 외면하지 말고, 우리 사회는 여성 친화적으로 변화되어야한다는 게 그의 주된 논지다.
그런데 문제는 논리 전개의 일관성이 여성에게 불리한 사회 구조 못지않게 편향된다는 점이다. 9월 5일에 "검열보다는 여성 착취 문제가 우선시되어야한다"를 넘어서 10월 17일자에는 아예 대놓고 "빨간펜"이라는 이름으로 검열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수십 년 전 국가 건설 및 안보를 보호하기 위해서 국가보안법을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의 재현인 셈이다.
물론 작가 입장에서는 이런 유해한 표현이 사회에 그대로 노출되는걸 방관할 것인가라는 말을 하고싶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표현에는 두 가지 맹점이 있다. 첫번째로 공모전에서 떨어트리느냐 마느냐에 대해서 건전성에 대한 지적은 유효한 지적일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중국은 (공산당 입장에서의) 역사 왜곡, 미신 조장, 판타지 전개에 대해 제한을 한다. 일본은 사회적 갈등을 촉발시킬 주제에 대해서 무헝의 압력이 있다. 이것만 보더라도 사회적으로 무엇이 건전하냐에 대한 지적은 사실 "그냥 화자 개인의 차원에서 머무르는 것이지, 불특정 다수 전체가 공유할 담론이 되는 경우는 상당히 적다."
두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태도는 검열을 실시할 경우에 대한 이후에 대한 태도에 대한 고민이 결여되어있다는 점이다. 사전검열은 모든 가능성에 대한 공통된 억압으로 작용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정책의 기획이 아무리 인간적이거나 급진적인 가능성에서 비롯되더라도 실질적인 집행은 관료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래의 의도는 퇴색되고 오히려 새로운 억압만 생길 가능성이 농후하다.
물론 이런 지적에 대해서 저자의 평소 태도를 볼 때, 젠더 문제는 시급한 문제니까 독한 약을 쓸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고 하겠다. 논리적 비약이 농후한 태도라는건 잠시 접어두더라도, 그건 작가의 생각이지, 사회 구성원이 공유하는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인구밀도가 희박한 사람이나 특정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지방소멸을 논하고, 20~30대는 국민연금을 걱정할 것이고, 농어촌 및 외곽지대 사람들은 지구온난화에 대해서 걱정할 것이다. 이들 중에서도 여성이 절반이 있을텐데 과연 이들에게 젠더 문제가 시급한 문제일것인가? 나는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작가가 말하는 사회 갈등의 대상은 언제나 집단이지 개인이 아니라서 항상 그 모호하게 지적되고 처리된다는 말만 하고싶다.
그럼에도 작가는 이런 개인의 사고를 사회적으로 합의가 된듯하거나 다른 주제보다 우선시되야 한다는 태도를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 본인은 이걸 사회적 문제에 대한 일관된 자세를 견지한다고 생각하지 몰라도, 독자 입장에서는 그냥 그 주제 아니면 새로운 소리를 꺼낼 수 없는 (지성적) 탈진자가 된 것으로 보일 뿐이다. 그런 한 가지 주제에 함몰되어서 사회를 살아가는건 결코 건강한 태도로 보이지 않는다. 인셀의 인터넷 커뮤니티 함몰을 경계하면서 자신도 똑같은 괴물이 되었음을 알지 못한 자는 이 얼마나 슬픈가.
내가 보기에 저자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당하는 불평등한 처우에 대해서 진정으로 공감하는 사람이 아닌 것같아 보인다. 그리고 사회적 문제가 해결되기를 원하는지도 의문스럽다. 그보다는 그 사회적 문제를 통해서 자신의 사고를 사회에 관철시키기를 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사회적 문제와 공생관계를 맺은 자로 보인다. 즉 실제로 그는 여성의 억압된 태도를 해소시키는 자가 아니라 그것을 강화하거나 유지시키는 역할만을 할 따름이다. (그리고 반박당하면 백래쉬라 할 것이다. 편리한 원천봉쇄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은 오늘도 남성에게 착취당하면서 살아간다 아아, 여성이란 이 얼마나 슬픈 존재란 말인가....
나는 문득 다시금 루쉰의 글을 생각해봤다. 그는 자신이 가르치던 학생들이 사살당하자 "민국 이래 가장 어두운 날"이라면서 슬퍼했다. 헌데 내 부족한 관심사로는 그가 군벌전쟁이나 만주사변등의 거대한 사건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거나 특정 지역, 시간을 관심을 가진 문학 작품은 없어보였다.(학술적 연구라면 많다. 그는 사실 문학가로서의 명성이 연구가로서의 재능을 잡아먹은 사람이다.) 과연 루쉰이 오늘날 우리가 부활해 글을 쓴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지 의문스럽다. 단 나는 후스의 글이 더 좋다.
넷플릭스는 요 몇 년간 가장 성공한 기업 중 하나다. 그런 넷플릭스의 창업자 마크 랜돌프가 회고록을 냈는데 책 제목이 <절대 성공하지 못할 거야>라면, 살짝 식상한 스토리 라인이 그려진다. 주인공 M은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발단). 그러나 너무 시대를 앞서가다 보니, 사람들은 대부분 ‘실패는 불 보듯 뻔하다’며 M을 무시한다(전개). 오기가 생긴 M은 탁월한 재능을 발휘해(절정),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크게 성공한다(결말).
그런데 책을 펴자마자 보이는 ‘작가의 말’에서부터, 스토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절대 성공하지 못할 거라고 말했던 아내 로레인에게. 내 사업 구상은 믿지 않았지만, 나를 항상 믿어줬다는 사실은 알아. 사랑해.” 넷플릭스 창업 이야기가 이렇게 로맨틱할 일인가?
책을 읽다 보면 이 로맨틱한 몇 줄에 사업가 마크 랜돌프의 탁월함이 숨어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의 탁월함은 피드백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있다. 작가의 말을 다시 보자. 그는 ‘사업 구상’에 대한 피드백과 ‘나’에 대한 믿음을 구분할 줄 안다. 그래야 피드백에 초연할 수 있고, 불필요한 감정 소모 없이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다. 이러한 태도 덕분에 그는 공동 창업자이자 합리적인 조언자 리드 헤이스팅스로부터 받는 피드백을 매번 꼼꼼히 검토하고, 문제점을 찾아 개선할 수 있었다.
리드 헤이스팅스가 우리의 주인공 마크 랜돌프를 앉혀놓고 ‘왜 당신이 CEO로 적합하지 않은가’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결국 직급을 강등시켰다는 이야기는 가혹하다. 하지만 그때도 마크 랜돌프는 ‘듣고 보니 맞는 얘기 같아서’ 그냥 받아들였다고 한다. 넷플릭스를 그만둔 그가 앞으로 늘 성공 가도를 달릴지는 모르겠으나, 절대 불행하지는 못할 것 같다.
이 책의 띠지는 잘못됐다. 흥미를 끌어 구매를 유도하기는커녕 오히려 훼방을 놓는다. ‘늦깎이 천재들의 비밀'이라는 제목을 보고 ‘혹시 나도?’ 하는 희망을 품었다가 띠지에 큼지막하게 붙어 있는 두 개의 이름을 보고 팍 김이 샜다. ‘에이, 페더러가 무슨 늦깎이야…’
실제로 서문에서는 골프 선수 타이거 우즈와 테니스 선수 로저 페더러를 각각 ‘조기 전문화’와 ‘늦깎이 전문화' 사례로 소개한다. 우즈는 걸음마를 배우면서 동시에 골프채를 휘두르기 시작했는데 페더러는 10대 중반이 되어서야(?) 테니스를 집중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래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알겠는데, 우리가 기대한 ‘비밀'은 그런 게 아니란 말이다. 스물을, 서른을 훌쩍 넘어버린 우리에게 희망적인 얘기를 들려달란 말이다. ‘전문화된 세상에서 늦깎이 제너럴리스트가 성공하는 이유'라는 부제처럼.
다행히 서문을 지나면 기대했던 내용이 등장한다. ‘늦깎이'보다는 ‘제너럴리스트'가 이 책의 핵심에 더 가깝다. 우리는 대부분 ‘스페셜’한 뭔가를 찾지 못해 원치 않는 제너럴리스트가 된 케이스다. 이젠 뭘 시작해도 ‘늦깎이' 취급을 받는 제너럴리스트. 그래서 일찍부터 자기 길을 찾아 한 우물만 파온 사람을 보며 부러워하고, 그러지 못한 스스로를 자책하는 데 익숙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그럴 필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풍부한 사례와 연구 결과 덕에 ‘이것저것 손대다 늦깎이가 되어버린 제너럴리스트가 일찍이 한 우물만 판 사람보다 성공할 확률이 높다’라는 파격적인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박명수의 개그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이미 너무 늦었다'는 그의 말은 틀렸다. ‘너무 늦은 때’ 같은 건 없다.
미래를 예측하는 게 의미 있나 싶을 만큼 모든 게 수시로 변하는 세상이지만, 여행의 미래만은 꽤 선명해 보였다. 패키지에서 자유여행으로, 하나투어에서 마이리얼트립으로, 관광에서 경험으로, 트렌드가 바뀌는 와중에도 여행인구의 상승곡선은 기복이 없었다. 여행은 이제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이었다. 저자와 출판사가 이 책을 기획한 2019년 5월에도, 그 후 저자가 원고를 마무리했을 즈음에도, 여행의 미래는 분명 밝았다.
축제 분위기 속에서 풍선 불고 케이크 자르고 폭죽과 함께 샴페인을 터뜨리려던 순간, 갑자기 정전된 것처럼 모든 불이 꺼졌다. 두꺼비집이 내려간 원인은 합선이나 누전이 아니라 코로나19였다. 책이 출간된 2020년 봄, 여행의 현재는 ‘블랙아웃’이다.
그럼에도 5월 연휴에 18만 명이 제주도를 방문했다. ‘사회적 거리두기'에는 위험요소지만, 한숨만 푹푹 쉬고 있을 여행업계엔 희망적인 뉴스다. 이미 다들 여행에 중독되어 버렸다는 거니까. 떠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 것이다. 달력에 줄지어 늘어선 빨간색만 보면 습관적으로 비행기표를 예약하는 금단 증상은, 그 파괴력이 전염병 못지않다. 도박, 마약, 게임, 유튜브, 스마트폰 등 고객을 중독시키는 비즈니스가 실패하는 것 본 적 있나? 여행의 미래는 여전히 밝다.
언제가 됐든 코로나19는 끝날 테고, 일상도 제자리를 찾는다. 그럼 그땐 우리도 마스크를 벗고 다시 여행 계획을 짜야 할 것이다. 정전된 날 밤에 더듬더듬 촛불을 찾아 켜듯, ‘블랙아웃' 속에서 코로나19 이후의 여행을 그려보자. 책에는 온갖 ‘뜨는 여행 트렌드'가 가득해서, 여행을 끊은 게 아니라 참고 있는 분들이 대리만족을 통해 금단 증상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영화를 좋아한다. 담배는 피지 않는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혐오하는 것 Top 10 안에 담배가 넉넉히 포함된다. 그럼에도 이 책이 출간되자마자 바로 사들인 이유는 금정연이라는 이름의 저자 때문이다.
나는 금정연의 팬이다. BTS의 팬들이 새 앨범을 들어보지도 않고 콘서트 티켓을 예매하듯, 나는 금정연의 새 책이 출간되면 주제와 상관없이 일단 손에 넣고 본다. 서점 운영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탐방서점>을 샀고, 버스와 지하철을 사랑함에도 <아무튼, 택시>를 샀다. 그가 편집위원으로 참여한다는 소식에 읽지도 않을 문예지 <문학과 사회>를 계절마다 사들였다.
책뿐만이 아니다. 나의 소유욕은 무형의 하이퍼링크에까지 뻗쳤다. 몇 년 전 <시사인>에서 그의 서평을 처음 읽은 후, 나는 구글에서 ‘금정연'을 검색해 그가 쓴 모든 글을 인스타페이퍼에 저장했다. 팟캐스트를 한다기에 <일상기술연구소>까지 챙겨들었다.
뭐가 그리 좋았냐고 묻는다면, 팬으로서 오기가 생겨 괜히 답하기 싫다. BTS의 매력을 알려면 그들의 무대를 봐야 하고, 시얼샤 로넌의 매력을 알려면 그의 영화를 봐야지. 금정연의 매력을 알려면 그의 책을 읽는 수밖에 없다. 담배나 영화에 관심이 있다면 더 좋겠지만 딱히 관심이 없더라도 뭐, 저자의 팬이 되는 데에는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작년 10월 13일의 금요일은 저에게 잊지 못할 날입니다. 바로 인스타그램 해킹이라는 충격적인 경험을 하게 된 것인데요, '너의 비밀번호는 바뀌었다'는 메일을 받았을 때, 순간 머릿속에 정적이 흘렀습니다.
평소 인스타그램을 통해 그믐의 소식을 전하고 많은 분들과 소통해왔는데, 갑작스럽게 계정을 잃게 되어 정말 당황스러웠어요.
초보 사장의 좌절과 분노, 그리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결심까지, 그날의 이야기를 밀리의 서재 굶초식 에피소드를 통해 공개했습니다.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릴게요.
전작을 으흐흐흐 겔겔거리면서 봤으니,(이번엔 좀 나은 표현이 없을까 고민하지 않는다. 그런 거 따지는 사람이 사물 괴담을 뭐하러 집겠어) 번역이 나오면 예상 고민 이런 거 하지 않는다. 한국어판 독자의 말도 있고 추천사는 메인 주의 국제 신비동물학 박물관장(스티븐 킹의 도시는 역시 훌륭한 곳이야...)이 썼으니 아주 굿. 엑스파일과 기타등등으로 미쿡 괴물 전설의 기초를 뗐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모든 배움엔 전문서적(?)이 필요하다. 삽화가 적어 사진을 부지런히 검색하면서 봐야된다는 것 빼면 간만에 잇몸에 환기 잔뜩 시켜준 좋은 시간이었다.
소도시들에 낭만을 불어넣어주는 크립티드들 왜 이리 소소하게 귀여운가. 당장 시작의 챔프부터 동네 사진 검색하니 웃음 터짐. 플랫우즈 몬스터 티셔츠는 아마존에서도 파는데 굉장히 탐난다...직구...안...안 할거야...싱크홀 샘 삽화는 보자마자 갑자기 추억 속으로 시간 여행. 이거 불가사리 아냐! 그냥 만든 영화가 아니고 근거(?)가 있었다니...모든 항목에 토 달고 싶으나 참고...인면 늑대, 걸어다니는 바지(...) 등등을 거쳐 하이라이트는 익룡이니, 잠시 암벽 위를 해리스가 드래곤 타고 날면서 트럼프를 브레스로 굽고 "You know nothing Donald..."하는 망상을 해보고...
신비한 생명체를 구실로 어떻게든 풍악을 울려보고 때로 부수입을 올리면 흐뭇하니, 이 방면에서는 진정 미국이 선진국이구나 감탄. 길지도 않은 역사에 이만큼 괴물 목록이 있고 현재도 지역경제 발전을 위해 열심히 생산 중이니 이 책의 개정증보판을 볼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한국도 언젠가는 학교 안에 괴물 동상도 만들고, 동네 진입로에 '괴물 ○○의 고향' 현수막 걸고 하는 날이...안 올 것 같다 하아...
모임 기간은 최소 1일에서 최대 29일까지 입니다.모임이 종료되면 더 이상 글을 남기실 수 없어요.
물론 모임이 끝났다고 해서 기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 니다. 모임의 기록은 모두 보존되며 언제든 다시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모임의 종료일은 모임창 하단의 i 아이콘을 눌러 '모임 정보'를 살펴보시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또한 모임 참여자들에게는 끝나기 7일 전, 3일 전에 그믐레터로 알려드리고 있습니다. 어떤 모임이 D-1 로 표기되었다면 그날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마지막 날이며 자정이 되면 종료된다는 뜻이에요.
그믐의 모든 만남에는 아쉬움이 따르지만, 남겨주신 이야기들은 미래의 독자들에게 소중한 나침반이 될 것입니다.감사합니다!
"우리가 사라지면 암흑이 찾아온다"
<뉴욕도서관으로 온 엉뚱한 질문들>을 읽지 않았다면 책 제목을 보고 ‘우문'이라 무시했을 것이다. 늦어도 한참 늦은 질문이니까. ‘집어삼킬 것인가'가 아니고, 유튜브는 한참 전에 이미 책을 집어삼켰다. 아니 책뿐 아니라 모든 세상을 집어삼키고 있다.
전설적인 야구선수 칠봉이는 말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고. 동화 <피노키오>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대목은 향유고래가 피노키오를 집어삼킨 다음부터다. 피노키오는 위산에 소화되기 직전에 향유고래의 몸 속에서 불을 피우는 데 성공했고, 향유고래는 뜨거움에 몸부림치다 결국 피노키오를 몸 밖으로 뿜어내고 만다. 유튜브의 무지막지한 위장 속에서, 책은 과연 위산에 녹아내리지 않고 살아나올 수 있을까?
책의 생명력은 질기다. 당장 나만 해도 지금 유튜브 계정이 아니라 새로 나온 책을 소개하고 있지 않은가. 라디오, 영화, TV, 컴퓨터, 스마트폰, 전자책, 그리고 유튜브까지 새로운 미디어가 등장할 때마다 책은 위기설에 시달렸지만 미디어계의 대선배로서 2020년에도 고집스럽게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저자 두 사람은 책의 장수비결을 ‘리터러시(literacy)'에서 찾는다. 글을 읽고 쓰는 행위가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능력을 키워주기 때문에, 책이 유튜브 입 속에 빨려들어갈지언정 소화되어 사라지지는 않을 거라는 주장이다. 동시에 책이 ‘꼰대'가 되어서도 곤란하다고 말한다. 글을 읽고 쓰는 행위만큼이나 영상을 보고 듣는 행위 또한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능력을 키워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디 에디트는 글과 영상을 같이 만드나?)
A의 질문에 B가 그럴 듯한 답을 내놓으면 ‘캬~ 우문현답이네요'라며 치켜세우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나는 이 우문현답(愚問賢答)이라는 말에 불만이 있다. 첫째, 질문을 던져 현명한 답을 이끌어낸 A를 ‘어리석다' 할 수 있는가. ‘현답’을 이끌어낸 A야말로 좋은 인터뷰어, 좋은 질문자가 아닌가. 둘째, B의 그럴 듯한 대답은 과연 ‘현명하다' 할 수 있는가. 그럴 듯한, 있어 보이는 말일수록 우리는 그 속에 알맹이가 없는 경우를 자주 봐왔지 않은가.
<뉴욕도서관으로 온 엉뚱한 질문들>을 보면 ‘우문현답'이라는 말의 맹점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일단 이 책에는 ‘우문'이 가득하다. 내가 봐도 어리석은 질문 같아서, 자꾸 비웃고 싶어진다. “집에서 문어를 기를 수 있나요?(그건 집주인한테 물어보셔야지)” “어디에 가면 단두대를 빌릴 수 있을까요?(이렇게 공개적으로 빌리시려고요?)” “수박 한 통에 씨가 몇 개나 들어 있나요?(케바케, 수바수겠죠 뭐)”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는 모두 같은 사람인가요?(이거 진짜 바보 아냐?)”
그런데 뉴욕도서관 사서들의 답변을 보면 비웃음이 쏙 들어간다. 너무 사려깊고 친절해서, 비웃었던 내가 부끄러워진다. 집에서 문어를 길러도 되냐는 질문은 결코 어리석은 질문이 아니었던 것이다. “기를 수 있지요. 다만 손이 아주 많이 가고 특히 수조에 꼭 맞는 덮개를 덮어두셔야 합니다. 문어는 탈출의 귀재라서요. 관련 정보를 처음 알아보시려면 ‘옥토퍼스 뉴스매거진 온라인(www.tonmo.com)’을 추천합니다. 문어라는 생명체에 대해 전반적으로 더 알고 싶으신가요? 가까운 도서관에서 일련번호 ‘594.56’ 항목을 둘러보시면 문어에 관한 책을 찾으실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질문자의 의도를 이해하고자 애쓰는 이의 성실한 답변이야말로 가장 현명한 답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