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라기보다는 음악을 닮았고, 음악 중에서도 전위음악에 가깝다.
멜로디가 선명하진 않은 문장이어서 소설 제목처럼 잡음에 가깝게 들린다.
소설은 5부로 이뤄져 있는데, 각 부마다 다양한 형태의 비전형적인 사랑을 보여준다.
각 부의 이야기는 마치 돌림노래처럼 다음 부의 이야기 속에 차례로 스며들어 실체를 확실하게 가늠하기 어려운 덩어리를 이룬다.
의식의 흐름처럼 연결되는 이야기는 마치 즉흥연주처럼 느껴졌다.
매우 실험적인 소설이다.
하지만 그리 즐겁지는 않았다.
나는 서사도 멜로디도 선명한 게 좋다.
이 소설집에는 단편 11편이 실려 있는데, 대여섯 편은 이미 문예지나 앤솔로지 등을 통해 접한 작품이었다.
읽지 않은 작품은 정독하고 읽은 작품은 통독한 덕분에, 읽어야겠다고 마음만 먹었다가 자꾸 다른 책에 손을 대는 패턴을 끊을 수 있었다.
작가는 가족이나 주변인으로부터 배신을 당하거나 상처를 받은 이들의 일상과 심리를 작품마다 다양한 형태로 변주한다.
작품 속에 죽음, 질병, 상실 등 온갖 비극적인 상황이 넘쳐나는데 희한하게도 소설집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전혀 어둡지 않다.
오히려 경쾌하고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특별하지 않은 사건이 특별하게 보이고, 특별한 사건을 특별하지 않게 보인다.
서사 전개에 큰 굴곡이 없고 문장이 화려하지 않은데도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어떤 모양의 재미인지 비유하자면, 마치 '인간극장'을 여러 편을 한꺼번에 시청한 기분이랄까.
어떤 분야에 있든 고수들의 공통점은 힘을 뺄 줄 안다는 점이다.
읽을 때는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서 몰랐는데, 책을 덮고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야 강호의 절정 고수를 마주쳤음을 깨달았다.
이 소설집을 읽고 힘을 빼고 글을 쓰는 게 어떤 경지인지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한 방 세게 먹었다.
박상영 작가는 데뷔 때부터 민감하면서도 무거운 소재인 퀴어 서사를 유쾌하면서도 감각적으로 풀어내며 주목을 받아왔다.
나는 몇 년 전 문화일보 신춘문예 업무를 맡았을 때 퀴어 서사를 다룬 많은 응모작을 접수하며 작가의 영향력을 실감했다.
그만큼 작가의 첫 장편소설을 향한 기대감이 컸다
작가의 전작이 많은 독자에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진 이유는, 성소수자의 사랑 속에서 보편적인 사랑의 감정을 끌어내는 과정이 신선하고 설득력 있게 느껴졌기 때문이 아닐까.
이 작품에서도 그런 작가의 장점이 잘 드러난다.
그리고 대단히 재미있다.
작가가 묘사하는 2000년대 초반의 학창시절은 내 경험한 90년대 중후반의 학창시절과 상당히 비슷해 쉽게 작품에 몰입할 수 있었다.
서로에게 많은 상처를 주고받으면서도, 사랑에는 진심인 등장인물들의 감정이 읽는 내내 절절하게 다가왔다.
10대들의 사랑을 묘사하지만, 어지간한 성인 로맨스 뺨을 칠 정도로 감정의 깊이가 상당하다.
이 작품이 주된 배경인 2000년대 초반의 대중문화 묘사도 실감 나서 작품에 생생함을 더한다.
여기에 작품을 끝까지 읽기 전에는 쉽게 파악할 수 없는 스릴러의 요소까지 자연스럽게 스며드니 다음 페이지가 궁금해 몸이 달았다.
분량이 요즘 장편답지 않게 상당한 편인데도(원고지 1300매) 페이지가 쑥쑥 넘어갔다.
이 정도 분량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손에 틀어쥐고 흔들다니.
놀라웠다.
이 작품이 작가의 전작 『대도시의 사랑법』을 넘어선 작품이라고 말은 못 하겠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읽고 작가가 퀴어 서사라는 다소 한정적인 소재만 다룰 줄 아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의 상당 부분을 덜어냈다.
다음 작품이 더 기대된다.
다시 읽는데도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재미도 재미지만 품격이 느껴지는 SF다.
작가는 새로운 기술이 변화시킨 세상과 그 세상을 바라보는 인간의 변화를 깊이 있게 탐구한다.
소설마다 다채로운 설정과 전개로 새로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는데 그 상상력이 대단하다.
책의 문을 여는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부터 비범하다.
마치 ‘아라비안나이트’를 연상케 하는 신비롭고 이국적인 배경에 시간여행이라는 소재를 더하다니.
과거로 돌아가도 미래를 바꾸지 못하며, 그저 과거를 더 잘 알게 될 뿐이란 설정 또한 클리셰를 반복하지 않아 신선하다.
표제작 ‘숨’은 ‘엔트로피’ 개념에 착안해 무분별한 에너지를 사용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는 인간과 인공지능 사이의 유대 관계를 심도 있게 다루며 피할 수 없는 기술의 발전 앞에서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보게 한다.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 은 우리가 완전무결하고 정확한 기억을 가지는 게 옳은지 질문하고, ‘우리가 해야 할 일’과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고찰하며 인간의 가능성과 한계를 묻는다.
책의 마지막에 실린 창작 노트에는 작품 속에서 이해하기 어려웠던 개념이 짧고 명료하게 정리돼 있어 이해를 보탠다.
이렇게 친절하기까지 하다니.
그런데.
작가 이름을 보면 자꾸 영화 <극한직업>에 출연한 배우 오정세가 떠올라서 피식하게 된다.
나만 그런가?
젠장.
재개발로 철거를 앞둔 오래된 장갑 공장, 그곳에서 가족의 생계를 위해 중노동에 시달리며 청춘을 보낸 여자, 오래전에 가출한 어머니를 찾아 헤매는 아버지, 소싯적에 온갖 사고를 치며 다니다가 이제는 장송곡 같은 노래나 만드는 인디 뮤지션이 된 동생...
배경과 등장인물의 삶은 하나 같이 어둡고 팍팍하지만, 작품에서 느껴지는 온도는 따뜻해 마치 동화 한 편을 읽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작품에서 나오는 온기는 퉁명스럽게 굴면서도 은근히 서로를 챙기는 등장인물 사이의 정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이 작품이 동화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맑은 날에도 우산을 쓰고 다니며 공장 앞 광장을 배회하는 이름 모를 남자 때문일 테고.
띠지에 '감성 연애소설'이라는 표현이 보이는데, 연애소설보다는 가족소설이나 성장소설에 더 가깝게 느껴졌다.
한 단어로 이 작품을 요약하면 '쉼표'다.
그런데 몇몇 표현이 눈에 거슬렸다.
예전 같았으면 눈에 거슬리지도 않았을 표현이다.
하지만 이제는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서 몇 마디를 보탠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대단히 무능력해 늘 두 딸의 구박을 받는다.
두 딸의 구박이 어떤 맥락에서 이뤄지는지 모르는 건 아니다.
이 지적은 작품 전체의 맥락에서 벗어난 지엽적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표현을 남성 작가가 여성을 대상으로 했다면, 여성 독자가 과연 맥락에 맞는 표현이라고 너그럽게 받아들일지 궁금해진다.
아마 독자에게 닿기 전에 편집 과정에서 바로 걸러지지 않았을까.
"아버지 얼굴은 아버지의 좆처럼 풀죽어 있었다."
"나는 이제 엄마가 집을 나간 것은 아버지 좆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생활력도 경제력도 없는데 거기다 좆까지 무력해서 엄마가 떠났다. 이것저것 아무리 비교해봐도 가장 무능한 건 그러니까, 아버지의 좆인 것이다."
"아버지는 암컷도 차지 못하는 좆 작은 수사자잖아."
도둑으로 전업한 대학 강사(훔쳐드립니다), 살인을 저지른 승려(타클라마칸), 다른 남자와 함께 남편을 죽이는 아내(같았다), 소설을 쓰지 않는 소설가(그는 쓰다)...
이 소설집의 등장인물은 모두 난감한 처지에 놓여있고, 동시에 선악을 명확하게 구별할 수 없다.
피해자로 보이는 인물에게는 영악함이 있어 마냥 동정하기가 어렵고, 가해자로 보이는 인물에게는 유약함이 엿보여 대놓고 미워하기가 어렵다.
작가는 인간의 욕망을 다양하게 변주해 드러내 보이는 한편, 우리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윤리적인 생각과 행동을 유지할 수 있는지를 반복해 묻는다.
불편하지만 읽는 내내 끌렸다.
마치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을 활자로 읽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뭐 하나 즐겁게 끝나지 않는데도 다음 페이지가 궁금해졌다.
책을 덮을 때쯤에는 불편함이 극에 달해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아마도 이 소설집을 읽는 일이 내 마음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는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일 테다.
2019년에 사는 잘 나가는 40대 성공한 사업가, 1999년에 사는 20대 복학생.
서로 다른 시공간에 사는 두 남자가 한 여자를 매개로 기묘한 만남을 가지는데, 그 여자는 40대 컨설턴트의 아내이자 20대 복학생의 전 여친이다.
어떻게 서로 다른 시공간에 사는 두 남자가 같은 여자와 연결돼 있는지 논리를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여자야말로 이 작품에서 가장 설명이 되지 않는 존재이니까.
그냥 작품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몸을 맡기는 게 편하다.
작품 속에선 두 남자와 여자의 이야기가 반복해 교차한다.
페이지가 넘어갈 때마다, 셋을 포함한 몇몇 등장인물의 동선이 서로 이어지거나 어긋나면서 과거와 미래가 조금씩 포개진다.
이 과정에서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였던 두 남자의 삶이 연결돼 있음이 드러나고, 심지어 두 남자가 서로 다른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더 이상 언급하는 건 스포일러여서 생략한다.
읽는 내내 현실과 환상 사이의 그 어딘가에서 한참 동안 헤매는 기분을 느꼈다.
뚜렷한 서사를 선호하는 내게 이 작품은 미로 같았다.
그것도 꽤 복잡한 미로.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과거와 현재가 다르지 않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글쎄...
거기까지 동의하지는 않는다.
목차부터 의미심장하다.
1895년 4월 24일. 1956년 7월 19일. 2009년 5월 23일. 2014년 4월 16일.
작품을 읽다 보면 첫 번째 날짜는 전봉준의 처형일자, 두 번째 날짜는 박헌영의 처형일자임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세 번째 날짜와 네 번째 날짜는 굳이 작품을 읽지 않아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날,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날임을 짐작할 수 있을 테다.
이 작품은 서로 무관해 보이는 사건들을 소설적 상상력으로 엮어냈다
작가는 방대하고도 치밀한 자료 조사 위에 자신만의 통찰을 더해 사건 속 죽음의 의미를 살핀다.
이 작품에서 네 죽음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실패'다
전봉준은 동학농민운동에 실패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박헌영은 북한에서 사회주의혁명에 실패해 숙청됐다.
노무현은 자신이 꿈꾼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드는 데 실패한 뒤 죽음을 맞았으며, 세월호 참사는 국민을 보호해야 하는 국가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결과였다.
오늘날 우리가 죽은 이들이 꿈꿨던 세상보다 후퇴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적어도 2021년 대한민국 사회는 신분제 봉건제를 유지하고 있지 않으며, 사상의 자유를 대놓고 억압하지도 않고, 민주주의가 작동하고 있으며, 국민을 무책임하게 죽음으로 내몰지도 않으니 말이다.
죽은 이들의 꿈이 오늘날에 불완전하나마 실현됐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예언처럼 말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말'을 통해 "우리가 어떤 일을 했는지를 기록하는 게 역사라면 우리가 어떤 꿈을 꾸었는지를 기억하는 건 소설"이라고 말한다.
예언은 결국 삶을 이해하는 데에서 나온다는 의미일 테다.
작가가 작품 속 인물을 바라보는 시각에 온전히 동의하기는 어려웠다.
이 작품에는 역사에 이른 과거와 아직 이르지 않은 과거가 뒤섞여 있고, 작가가 작품 속 인물을 바라보는 시선은 온정적이다.
박헌영은 독립운동가이면서 동시에 한국전쟁을 일으킨 전범으로 평가가 극단으로 갈리는 인물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인간적으로 훌륭한 사람일지는 몰라도, 훌륭한 정치인이었는지는 의문이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도 이 작품이 의미 있는 이유는, 최근 한국소설에서 찾기 드문 무거운 주제 의식과 통찰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서점에 가서 한 번 한국소설 신간 매대를 살펴보라.
다양성 면에서 과연 과거보다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무게중심을 잡아줄 만한 작품이 오랜만에 등장한 것 같아 반갑다.
제목만 보면 SNS 셀럽이나 모델을 다룬 이야기인가 싶다.
처음 부분은 그렇게 오해할 만하다.
그런데 페이지를 더 넘기면 갑작스러운 실종 사건에 보험 이야기가 뒤섞인 제목과 영 딴판인 블랙코미디가 펼쳐진다.
여기서 끝이냐? 마지막에는 로맨스다.
그것도 가슴 아픈 로맨스.
윤고은 작가하면 떠오르는 건 역시 재기발랄한 상상력이다.
불확실한 미래를 다루는 작가의 상상력은 종종 예언이 되기도 했다.
재난 지역 여행상품을 다룬 작품 <밤의 여행자들>이 대표적이다.
다크 투어리즘을 한발 앞서 다뤘던 이 작품은 올해 영국 추리작가협회가 주관하는 대거상을 수상하며 화제를 불러일으킨 바 있다.
<도서관 런웨이>에서 작가는 결혼 제도를 보험 상품에 포함하는 상상을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작품에 등장하는 '안심결혼보험'은 결혼 준비 비용뿐만 아니라 배우자의 외도 등 결혼 생활의 안정에 필요한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보장한다.
게다가 건강한 사람만 가입할 수 있으니, 보험에 가입했다는 사실은 곧 결혼하기에 적합한 사람이라는 보증이 된다.
보험은 미혼인 사람에게도 이득이다.
만기까지 미혼으로 남으면 원금의 130%를 환급해주니까.
이게 과연 불가능한 상상일까?
지금도 결혼 전에 상대방의 학력이나 재력, 건강 상태를 서류로 확인하는 사례가 많은데?
작품을 읽고 머지않은 미래에 정말로 결혼보험이 등장할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작가가 여기서 이야기를 끝냈다면, 세태를 풍자하는 그저 그런 블랙코미디로 끝났을 테다.
작품의 마지막에는 사랑할 대상이 사라져 버린 후에도 사랑을 이어가려는 강한 의지를 다지는 인물이 등장한다.
작가는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사랑에는 정답이 없고 불확실성이 넘쳐날 수밖에 없다고.
사랑을 지키는 힘은 그 불확실성을 헤쳐나가고자 하는 용기에서 나오지 보험과 같은 제도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그러므로 사랑이라는 런웨이에선 눈치 보지 말고 자기만의 걸음을 걸어가야 한다고.
좋은 소설이었다.
거두절미하고 경쾌하다.
그리고 재미있다.
2017년에서 2018년 사이에 벌어졌던 가상화폐 광풍이 이 작품의 배경이고, 평범한 미혼 여성 직장인 셋의 투자기가 주된 서사의 줄기다.
게다가 장류진 작가는 직장인의 애환을 무겁지 않게 풀어낸 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으로 데뷔와 동시에 문단에서 스타로 떠오른 작가다.
흥미롭지 않을 수가 없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를 차지했는데, 가상화폐 광풍이 불 적에 어설프게 뛰어들었다가 몇백만 원을 날린 경험이 있어서 의도적으로 몇 달간 이 작품을 외면해왔다.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작품을 읽는 동안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이 생생하게 되살아왔다.
덕분에 작품에 빨리, 그리고 깊이 몰입할 수 있었다.
시세가 매초 급변하는데 거래는 24시간 멈추지 않고 이뤄진다.
잠들기 전에 끝을 모르고 오르던 시세가 잠에서 깨어나니 곤두박질치기 일쑤다.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다.
가상화폐로 벼락부자가 됐다는 사례가 여기저기서 들리니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수시로 호가창을 들여다보며 일희일비하다 보니 본업은 엉망이 된다.
하지만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부자가 될 기회를 만나지 못할 것 같아 불안하다.
작가는 평범한 청년이 왜 가상화폐 투자에 빠져드는지 그 심리를 실감 나게 묘사한다.
침실이 따로 있는 집에 살고 싶은 마음, 남들처럼 가정을 꾸리고 싶은 마음, 욕실의 물이 방으로 넘치지 않는 집에서 살고 싶은 마음, 곰팡이가 피지 않는 집에서 살고 싶은 마음, 유통기한이 임박한 우유 대신 유기농 목장 우유를 먹고 싶은 마음이 뭐 그리 대단한 욕심이라는 말인가.
하지만 쥐꼬리만 한 월급을 모아봤자 물가와 부동산 시세 인상을 따라갈 수 없으니 일하면 일할수록 가난해지는 게 많은 청년의 현실 아닌가.
욕심이라고 말하기에도 서글프다.
소설의 결말은 이런 서사와 어울리지 않게 해피엔딩이다.
하지만 가상화폐 투자가 주인공의 인생을 바꿔놓거나 직장을 그만둬도 될 만큼 큰돈을 벌어다 주지는 않았다.
적당히 현실감이 있는 해피엔딩이다.
혹자는 가상화폐 광풍이 대한민국 사회에 미친 영향을 작가가 지나치게 가볍게 짚은 것 아니냐고 지적할지도 모르겠다.
현실에선 가상화폐로 돈을 번 사람보다 잃은 사람이 더 많으니까.
하지만 그런 부분까지 꼭 작가가 짚을 필요가 있을까?
모든 투자에 대한 책임은 투자자 본인에게 있다는 걸 냉정하게 보여준 것만으로도, 가상화폐 투자의 명암을 드러내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싶은데 말이다.
딱 이 정도의 무게감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