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인력이 대단한 작품이다.
읽는 내내 불편하고 낯설었는데, 페이지를 넘길수록 뒷부분이 궁금해져 몸이 달았다.
작품의 배경은 광산의 폐쇄로 쇠락한 지 오래된 시골 마을이다.
마을은 화성을 연상케 하는 황폐한 풍경 때문에 화성을 배경으로 하는 SF 영화의 촬영 부지가 된다.
마을에는 화성 우주기지가 세트장이 만들어지고, 주민은 영화에 엑스트라로 참여해 황폐한 풍경과 하나가 된다.
신재생에너지 사업이라는 호재도 이어진다.
마을에 부자연스러운 활기가 도는 가운데, 한 노인이 기괴한 방식으로 자살하고 야산에서 여러 시신이 발견되는 등 불길한 사건이 계속 벌어진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건과 음모가 읽는 동안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다.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려는 자와 은폐하려는 자의 시선이 교차하고, 파편화한 과거와 현재의 사건이 가상의 SF 영화 시나리오 속에서 교묘하게 뒤섞여 이야기가 유기적으로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지고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기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작품을 읽는 내내 제목처럼 무언가 위험한 게 뒤를 따라오는 듯해 등골이 서늘했다.
작가는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위험한 욕망이 잠재돼 있고, 누구도 그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불편한 진실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SF 영화에 엑스트라로 참여해 똑같은 우주복을 입고 무리지어 "하나가 되자"라고 외치는 마을 사람의 모습이 섬뜩했다.
내 안의 욕망은 진짜 내 의지로 만들어진 욕망일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쩌면 테마파크 같은 공간이 아닐까?
독자에게 분명한 해답을 주기보다는 생각의 여지를 많이 남기는 작품이다.
찝찝하지만 정말 재미있었다.
잘 만든 넷플릭스 드라마 한 시즌을 쉬지 않고 감상한 느낌이다.
과거와 미래, 지구와 우주의 중심을 오가는 장엄한 대서사.
읽는 내내 무한한 공간감과 몽환적인 기분을 느꼈다.
그 느낌이 오래전에 올라프 스태플든의 고전 SF <이상한 존>을 읽으며 느낀 경이감과 비슷했다면 과찬이려나.
핑크 플로이드의 걸작 [The Dark Side of The Moon]의 재킷 이미지를 닮은 표지도 마음에 들었다.
실제로 작품 속 이야기의 주된 배경이 달이기도 하고.
작품 속 세 이야기는 네트워크를 통한 확장 현실의 발달이 인류의 미래를 어떤 형태로 이끌어갈지 탐구한다.
이야기 속에서 구현되는 여러 기술은 논리적이면서도 상당히 구체적으로 묘사돼 현실감을 자아낸다.
이야기의 시간과 배경은 달라도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어 연작소설보다는 장편소설 읽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인간의 기억과 의식이 디지털 신호로 바뀌어 네트워크에 업로드된다면, 그 디지털 신호를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자신을 인간이라고 믿는 인공지능을 인간이 아니라고 부를 수 있을까?
작가는 발전한 기술을 통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다양한 측면에서 바라보고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 같은 질문은 작품 후반부에 이르러 우주는 과연 하나만 존재하는지, 완벽한 우주는 생명조차 필요 없는 우주 그 자체가 아닌지, 신은 과연 존재하는지 등 철학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곳곳에서 불교적 사유가 엿보인다.
붓다를 연상케 하는 인물이 등장하기도 하고.
자신이 서 있는 곳이 곧 세상의 중심이므로, 다른 곳에서 세상의 중심을 찾지 말라는 메시지가 묘하게 위로가 됐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누구도 보잘것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메시지 같아서 말이다.
중간에 익숙하지 않은 용어와 기술도 많고, 작가가 창조한 개념도 종종 등장해 읽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온전히 소설을 이해했다는 말은 못 하겠다.
하지만 소설의 분위기에 익숙해지니 진입장벽은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최근에 문학계에 대세로 떠오른 소프트 SF에 익숙해져 있다가, 진입장벽이 있는 SF를 읽으니 신선했다.
반려동물을 잃고, 사고로 자녀를 잃고, 연인을 자살로 떠나보내는 등 이 소설집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무언가를 상실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고민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를 이해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들은 저마다 어딘가를 걷거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며 아픔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지만 실패한다.
'사라지는 것들'의 마지막 부분에 주인공이 남긴 솔직한 고백을 읽으며 무릎을 쳤다.
"엄마, 나...... 이제야 뭘 좀 알겠어. 알았는데......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다. 이제 자자.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 자자."
작가는 등장인물들을 통해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런데도 살아갈 수밖에 없고, 또 살아지는 게 인생이라고 말이다.
작가의 담담한 태도가 가볍지 않은 위안이 됐다.
연말에 지난 1년을 돌아보니 기뻤던 날보다 그렇지 않았던 날이 훨씬 많았다.
지금까지 매년 그래왔고 앞으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잘 살아갈 것이다.
나쁜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고, 때로는 적당히 윤색돼 좋은 기억으로 바뀌기도 하니 말이다.
산책은 내 머릿속 나쁜 기억의 농도를 줄이는 데 많은 도움을 줬다.
가끔은 기가 막힌 문제 해결 방법이 산책 중에 떠오르기도 했다.
이 소설집을 읽고 마치 그런 산책을 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읽은 후 시간이 흐를수록 곱씹게 되는 내용이 더 많아지는 소설집이었다.
청년 서사는 대체로 우울하게 그려지는 편이다.
취업률을 비롯해 청년을 둘러싼 각종 현실 지표가 우울한 게 사실이고, 우울은 전염성을 가지고 있다.
힘들고 슬플 때 웃는 자가 일류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만큼 어려우니까 그런 말이 나오는 거다.
이 작품은 청년 세대의 우울한 현실을 보여주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슷한 주제를 다룬 기존 작품과 차별성을 보여준다.
주인공은 연이어 공무원 시험에서 낙방한 뒤 나이 서른에 강제로 독립을 당한 여성이다.
늦은 나이에 명동의 화장품 매장에 취업한 주인공은 어린 시절부터 '불알친구'인 남사친의 집에 얹혀살고 있다.
중국어는 물론 일본어와 한국어까지 잘하는 조선족 직원 사이에서 유일한 한국인 직원은 언제 매장에서 잘릴지 몰라 전전긍긍한다.
고객 대부분이 중국인인 데다 그나마 주인공이 상대할 수 있는 한국인 고객은 돈이 되는 물건을 잘 사지 않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매상을 올리고자 온라인상에서 익명의 드래그퀸으로 유명한 '불알친구'와 함께 유튜브를 시작한다.
처음에는 매장 점주에 오를 정도로 승승장구하던 주인공은 온라인상에 얼굴이 팔리며 원치 않았던 당황스러운 상황에 몰린다.
작가는 주인공이 궁지에 몰리다가 빠져나오는 과정을 시종일관 밝고 유쾌한 톤으로 그려 우울함을 느낄 틈을 주지 않는다.
가독성도 훌륭해 빠르게 페이지가 넘어간다.
오래전에 백영옥 작가의 장편소설 <스타일>을 읽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이 작품에서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화장품 업계에 관한 디테일과 이에 관한 친절한 설명이다.
작품 곳곳에서 낯선 화장품 관련 용어가 튀어나오지만, 설명이 자연스럽게 서사에 녹아들어 있어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겨울에 로션도 안 바르고 사는 나도 이해에 어려움이 없었으니 말이다.
에스티 로더, 메이블린, 샤넬 등 유명 화장품 브랜드의 역사에 관한 설명을 비롯해 도브 비누가 미국 해병대 용품으로 개발됐고, 아이보리 비누가 실수로 개발됐다는 뒷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작가의 말'을 보니 실제로 작가가 화장품 매장에서 직원으로 1년 동안 일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명동 묘사가 상세한 이유도 작가가 명동 호텔프린스 입주작가였기 때문이었다.
작품을 집필하는데 참고한 자료 목록도 정리돼 있는데 그 분량이 상당하다.
화장품 매장을 오가는 인간 군상, 함께 일하는 조선족 직원 묘사도 다른 소설에선 보지 못한 신선한 디테일이었다.
역시 취재한 만큼 소설의 재미와 디테일이 산다.
코로나 펜데믹 이전의 시끌벅적했던 명동 거리가 그리워졌다.
읽는 내내 내가 주인공이 된 듯 숨이 막혔다.
반지하부터 창 없는 고시원을 전전하던 시절, 홀로 부동산 이곳저곳을 돌며 전세를 알아보던 시절, 전세 보증금 반환을 놓고 집주인과 싸웠던 사건, 하자를 놓고 부동산 중개인과 시비를 벌였던 일 등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 작품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가장 첨예한 이슈인 부동산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장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며 아르바이트를 하는 20대 후반 여성을 중심으로 내 집 마련을 하지 못한 채 IMF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를 거치며 자식에게 가난을 물려준 베이비부머 세대 부모, 열심히 일하며 저축하면 좋은 날이 온다는 부모의 말을 믿은 청년 세대가 겪는 답답한 현실을 정밀하게 들여다본다.
내가 최근에 읽은 소설 중에서 부동산 문제를 이렇게 실감 나게 다룬 소설은 처음이다.
주인공의 소망은 대단한 게 아니다. 안정된 직장에서 때 되면 월급을 받고 싶고, 추울 땐 따뜻한 곳에서 더울 땐 시원한 곳에서 지내고 싶고, 친구들과 만날 때 지갑을 여는 일이 두렵지 않았으면 좋겠고, 가끔 맛있는 외식을 하고 싶다. 그게 전부다.
이 작품은 그 작은 소망이 어떻게 현실에서 배반당하는지 핍진하게 보여준다.
여기에 더해지는 갭투자, 주택청약, 가점 계산 등 다양한 부동산 관련 용어와 구체적인 현금의 흐름 묘사가 작품에 현실감을 더한다.
부자가 부를 대물림하는 방식을 죄악처럼 다루지 않은 것도 이 작품의 미덕이다.
자식들에게 그저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는 것보다 돈을 바라보는 거시적인 시각을 가르쳐 주는 게 더 현명한 부모 아닌가.
사실 이 문제는 작가들이 진즉 다뤘어야 했는데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
젊은 작가들의 현주소를 확인할 수 있는 문학동네 젊은작가상 수상작들의 면면을 보면 헛웃음만 나온다.
올해 이효석문학상 대상 수상작인 이서수 작가의 단편 <미조의 시대>를 제외하면 현실에 제대로 조응한 소설이 얼마나 있었나?
치열하게 생활전선에서 밥벌이해 본 사람들이 작가로 많이 진입해야 할 이유다.
나도 써야겠다는 생각만 하고 미뤄뒀던 문제인데, 이 작품을 읽고 내년에 발표할 단편에 바로 다뤄야겠다고 결정했다.
이 작품은 올해 목일신아동문학상 동화 부문 당선작으로 열두 살 아이가 경험하는 다양한 인간관계를 다룬다.
출판사의 작품 소개에는 어린이들의 사랑과 우정과 비밀에 관한 이야기라고 언급돼 있는데, 소개 이상으로 다루는 감정의 깊이가 상당하다.
여기에 정상가족 이데올로기, 다문화 가정 문제 등 민감한 사회적 이슈도 판타지 서사와 어우러져 부드럽게 서사를 이끈다.
작품을 읽으면서 내 어린 시절을 떠올려봤다.
돌이켜 보면 어리다고 고민이 없지 않았고, 그 고민이 그리 유치하지도 않았다.
어린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내가 하는 고민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 시절의 인간관계도 치열했다.
어떤 면에선 더 잔인했고.
작품 속 주인공처럼 나도 학교에서 무리에 끼는 일이나 또래와 친하게 지내는 일을 어색해하고 겉돌았다.
그러다 보니 나는 학창시절 친구가 거의 없다.
지금도 그 성격이 어디 가지 않아서 일행과 함께 걸을 일이 있으면 알아서 맨 뒤에서 홀로 걷는다.
겉보기에는 꽤 사교적인데 실제로는 누군가와 깊이 친해지는데 무척 어려움을 겪는 편이다.
계속 가면을 쓴 채 살아가는 일이 피곤해서 집이 혼자 있을 때 가장 마음이 편안하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주인공이 "너도 그러니?"라고 묻는 것 같아서 위로를 받았다.
책을 덮은 뒤 다가오는 여운 속에서 차차차기작으로 동화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가끔 어른에게도 동화가 필요한 시간이 있다.
작품 속 주인공은 답답한 인물이다.
문제가 생기면 침묵하고 회피하는 성격인 데다, 누군가와 처음으로 만나면 자기도 모르게 거짓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
이 같은 성격과 습관은 오해를 부르고 주인공을 외톨이로 만든다.
누군가에게 쉽게 마음을 내보이지 못하는 주인공이 오로지 진실하게 대할 수 있는 대상은 키우는 고양이뿐이다.
그런데 그 고양이가 사라졌다.
주인공이 사라진 고양이를 찾으며 좌충우돌하며 그동안 인연을 맺었던 이들과의 관계를 돌아보는 계기를 갖는다.
상처만 입은 줄 알았던 자신이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존재였을 수도 있다는 점을 깨닫고, 오해로 얼룩졌던 인간관계를 조금씩 회복하는 과정이 설득력 있게 그려진다.
주인공은 비록 소중한 존재를 잃었지만, 새로운 존재를 받아들임으로써 과거와 다른 긍정적인 사람으로 조금 성장한다.
책장을 덮을 때 잔잔한 장편 독립영화 한 편을 감상한 기분을 느꼈다.
최근 들어 신간을 읽으며 느끼는 문학계의 변화 중 하나는 영화계 출신 작가의 증가다.
영화계 출신 작가가 없지는 않았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천명관이라는 걸출한 작가가 있었고, 꾸준히 활발하게 작품을 내놓으며 베스트작가 반열에 오른 김호연 작가도 있다.
<아몬드>로 영어덜트의 지평을 연 손원평 작가, 지난해 한경신춘문예 장편소설 부문에 당선된 정대건 작가는 연출자 출신이다.
정지돈 작가나 서이제 작가처럼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한 작가도 보인다.
이 작품을 쓴 강진아 작가도 단편과 장편 영화 다수를 연출한 영화계 출신이다.
나는 영화계 출신 작가가 늘어나는 원인을 크게 두 가지로 본다.
첫 번째, 일단 영화를 만들기가 너무 어렵다.
투자를 받기가 어렵고, 어렵게 투자를 받아도 중간에 엎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영화 하나에 매달리다가 10년 세월이 금방 흘러가고, 지나간 세월을 누가 보상해주지도 않는다.
시간을 투자해서 영화를 만들었다고 해서 흥행이 보장되지도 않는다.
두 번째, 연출자들은 대부분 각본 집필을 겸하는 이야기꾼들이다.
시나리오는 각색하면 충분히 소설이 될 수도 있다.
각색은 영화 촬영처럼 큰돈이 들어가는 작업도 아니다.
영화계 출신 작가가 쓴 소설은 문학이나 문예창작을 전공한 작가의 소설과 결이 다르다.
읽으면 쉽게 영상이 눈앞에 그려지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드물다.
무엇보다 이들 작가의 큰 장점은 대체로 잘 읽히고 재미있는 작품을 쓴다는 점이다.
어쩌다 보니 작품보다는 작품 이외의 이야기를 더 많이 했다.
나는 영화계 출신이든 누구든 다른 분야 출신 작가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최소한 알아먹을 소설을 쓰니 말이다.
종종 작가가 자신이 무엇을 쓰는지 알고 쓰는지 의문이 드는 작품을 접할 때면 한숨이 나온다.
작품 마지막에 평론을 더하는 자들은 과연 그 작품에 정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 의미를 부여하는 걸까.
소설을 쓴다는 작가 중에서 나보다 많이 신간을 챙겨 읽는 작가는 드물 거라고 본다.
신간을 챙겨 읽으면 읽을수록 한국문학이 지금 이 사회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문만 늘어나고 있다.
점점 게토화되고 있다는 기분이 나만의 기분일까.
나는 이 소설집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칡을 떠올렸다.
첫맛은 쓰지만, 씹을수록 혀 위에 은은한 단맛이 감도는 칡.
온갖 기상천외한 이야기가 난무하는 이 소설집에는 이런 뜬금없는 감상을 남기는 게 어울려 보인다.
오른손이 브로콜리로 변한 남자친구, 사람 말을 할 줄 아는 이구아나, 말하는 돌멩이, 화분이 된 아버지, 반투명인간이 된 자신 등...
이 소설집에는 밑도 끝도 없이 황당한 설정이 뻔뻔하게 등장하는데, 등장인물 모두 이를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어서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한다.
웃기고 허무맹랑한데 묘하게 현실적이다.
그런데 이 소설집이 그저 웃픈 이야기 모음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는 문장 곳곳에 깃든 온기 때문이다.
이 소설집의 등장인물은 모두 마음에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
읽을 때는 황당한 설정에 홀려 무심코 지나칠지 모르지만, 등장 인물을 자세히 뜯어보면 모두 우울증을 피하기 어려워 보일 정도로 힘겨운 현실에 직면해 있다.
황당한 설정은 독자가 힘겨운 현실을 힘겹게 바라보지 않도록 완충재 역할을 하고 소설에 온기를 불어넣는다.
당의정과 비슷한 역할이랄까?
소설집을 읽는 내내 왠지 모르게 위로를 받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지난해 등단한 작가가 벌써 단행본을 냈다는 건 그만큼 이 바닥에서 주목을 받는다는 증거다.
이 소설집이 최근에 읽은 신인 작가의 작품 중 가장 좋았다는 말은 못 하겠다.
하지만 가장 개성적인 작품이었다.
다들 대놓고 말을 안 해도 알지 않나?
문학과지성사 스타일의 작품 중에 재미있는 작품이 드물다는 걸 말이다.
문학동네, 창비와 비교해 사세가 많이 약해진 이유도 그 때문이고.
이 소설집은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소설집답지 않게 재미있어서 흥미로웠다.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을 손꼽아 기다렸다.
첫 번째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보여준 서정적인 상상의 세계(언젠가 나는 이를 '심장을 가진 SF'라고 표현했다)에 매료된 독자라면 다들 비슷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독자 뿐만이 아니다.
문학동네, 문학과사회 등 각 단편이 실렸던 지면을 밝힌 마지막 페이지를 보면 작가가 기성 문단에서도 얼마나 환영받는 존재인지 알 수 있다.
이번 소설집은 전작처럼 다채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으면서도 주제 의식에 통일감을 갖춘 게 특징이다.
작가는 지금까지 장애를 작품 전반에 걸쳐 다양하게 변주해 다뤄왔다.
언어 대신 후각으로 소통하고, 기술로 감각을 느끼는 영역을 확장하는 등 작품 속에서 작가는 장애를 결함이 아니라 세상을 다르게 감각하는 방식으로 바라본다.
신체 일부의 장애는 다른 신체의 감각을 더욱 민감하게 만들어 세상을 평면적이 아니라 입체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열쇠가 되고, 나아가 신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계기로 작용한다.
이 같은 시선이 신선하면서도 묵직하게 느껴졌다.
<지구 끝의 온실>의 소재였던 환경 오염도 작품 곳곳에서 주제 의식을 환기하는 중요한 요소로 쓰인다.
작가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러 장애가 대부분 환경오염으로부터 비롯됐다고 묘사한다.
이미 수많은 뉴스를 통해 환경 오염이 부른 장애를 접했지만, 소설로 묘사한 장애는 뉴스보다 훨씬 실감이 난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이 행성의 시간을 잠시 빌려온 것에 불과하다고 역설하는 '오래된 협약'의 메시지가 강렬하게 다가온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보다 사회 문제를 다루는 태도가 구체적이어서 작가 특유의 서정적인 묘사를 기대했다면 당황할지도 모르겠다.
소설집 전체를 감싸는 주제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말은 거짓에 가깝지 않나?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는 말이 진실에 가깝지 않은가?
'로라'는 이를 잘 드러내는 작품인데, 사랑하지만 끝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등장 인물의 태도가 감동적이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번 소설집 또한 결국 SF라는 형식으로 풀어낸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사실 나는 작가의 전작이자 첫 장편인 <지구 끝의 온실>을 읽고 고개를 갸우뚱했었다.
가독성은 좋았지만 이보다 훨씬 분량을 줄여도 되는 이야기를 늘렸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이번 소설집에서도 지나치게 설명이 많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장편보다는 단편에 장점을 많이 가지고 있는 작가라고 생각했는데, 이번 소설집을 읽은 뒤 그 생각이 굳어졌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보이는데, 그 이야기를 자신만의 호흡으로 정리해 풀어놓기에는 단편이 더 적절해 보인다.
p.s. 여담인데 천선란 작가는 단편보다 장편이 좋았다. 또 여담인데 최근 몇 년 사이에 읽은 SF 서사 중에선 문목하 작가의 장편소설 <돌이킬 수 있는>이 정말 압도적으로 좋았다.
분량이 상당하지만 쑥쑥 읽히는 페이지터너여서 분량을 느끼기 어려웠다.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신비로운 분위기를 품은 풍경이 눈앞에 그려져 즐거웠다.
들꽃 덕후인 내게 작품 전면에 등장하는 식물 묘사는 무척 흥미로웠다.
식물이 서로 대화를 나누고, 인간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지켜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상상은 나도 자주 해봤으니 말이다.
이 작품을 한 장르로 구분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다.
작가의 전공인 SF이기도 하고, 스릴러이기도 하고, 학원물이기도 하며, 성장물이기도 하다.
작가는 전작인 <천개의 파랑>에서 인간이 아닌 존재로 세상의 부조리를 들여다봤는데, 이 작품에서도 인간이 아닌 존재(핵심 내용이어서 스포하지 않겠다)로 세상의 부조리를 꼬집는다.
작가는 청소년인 여러 등장인물의 눈으로 잘못을 저지르고도 반성하지 않으며 진실을 은폐하는데 급급한 어른들의 모습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꼬집는 강도가 전작보다 강하고 내용이 현실과 밀착해 있어서 어떤 면에서는 사회파 소설을 닮았다는 느낌을 주기도 했다.
특히 사람을 거주지로 등급을 나눠 다르게 대하고, 뭐든 돈으로 해결하려는 어른의 태도가 아이에게 대물림되는 모습은 익숙한 모습인데도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만큼 작가의 서사 전개가 설득력 있었다.
특히 후반부에 몰아붙이는 서사 전개가 압권이었다.
선한 의지를 따르고, 세상을 지키는 건 서로가 서로를 향한 믿음이라고 믿는 순수한 아이들의 모습은 감동적이면서도 사랑스러웠다.
다른 게 틀린 게 아니란 걸 잘 알고, 부조리를 차마 외면하지 못하며, 끝까지 약자의 편에 서는 아이들 앞에서 "세상은 원래 그래"라며 이런저런 일을 적당히 뭉개고 넘어갔던 내 모습이 떠올라 뜨끔해졌다.
아마 이 작품을 읽고 나와 비슷한 기분을 느끼는 독자도 많으리라고 본다.
작가에게 유명세를 가져다 준 작품은 <천개의 파랑>이지만, 나는 이 작품이 더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