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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미 산문집 『사소한 기쁨』(현암사)

살면서 지나치기 쉽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어떤 즐거움보다 특별한 즐거움이 되는 사소함에 관한 이야기.

제목만 봐도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지 짐작할 수 있는 산문집이다.

식상한 이야기 모음이 아니냐고 지레짐작하지는 말자.

같은 식자재라도 어떻게 조리하느냐에 따라 음식의 맛도 천차만별로 달라지지 않던가.


커피 한 잔, 단팥의 단맛, 새벽 출근길을 비추는 달, 퇴근 후 마시는 맥주, 좋아하는 노래 듣기, 친구와의 수다 등 이야기의 소재는 제목처럼 정말 사소하다.

사소한 이야기를 다룬 산문집과 비교해 이 산문집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는 책이다.

오랜 세월 책과 가까운 삶을 살아온 저자는 자신의 일상에 다양한 책을 엮어 조곤조곤 다정하게 이야기를 풀어낸다.


새벽달을 바라보며 하루키의 <1Q84>에서 주인공이 달을 바라보는 순간을, 커피를 마시며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서 주인공이 탈진해 깨어나 마시는 커피를, 서가를 걸으며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을 자연스럽게 소환한다.

알랭 드 보통의 <일의 기쁨과 슬픔>,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 김연수의 <세계의 끝 여자친구>, 천명관의 <고령화 가족>, 스티븐 킹의 <고도에서> 등 상당히 많은 문학 작품이 글에 인용되는데 현학적이지 않고 친절한 인용이어서 페이지를 넘기기 어렵지 않다.

이런 접근을 통해 작가는 우리의 사소한 일상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특별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종종 소설을 쓰겠다고 멀쩡히 잘 다니던 회사에서 뛰쳐나온 게 잘한 일인지 자문한다.

답은 늘 "잘했다"이지만, 미래가 불확실하다 보니 자문을 멈추기가 어렵다.

특히 통장에 월급이 꽂혔던 매달 25일에는 더 그렇다.

이 산문집에 담긴 몇 줄의 문장이 꽤 위로가 됐다.

그 문장을 여기에 인용한다.


"그게 바로 완주의 아름다움이다. 

뛰어왔건, 걸어왔건, 엉금엉금 기어 왔건 마침표를 찍는 것 자체가 멋진 일이다.

그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자신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승점을 통과할 때 비로소 이제까지 걸어온 길의 의미가 새삼스럽게 만들어진다.

그 길의 비밀은 중간에 그만두면 결코 알 수 없는 것이다."(174~175페이지 '시작이 취미' 中)

사소한 기쁨 - 산책과 커피와 책 한 권의 행복
사소한 기쁨 - 산책과 커피와 책 한 권의 행복
김금희 소설집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창비)

거의 1년 전에 산 책인데, 샀다는 사실도 잊어버렸다가 이제야 펼쳤다.

유명작가의 책은 나 아니어도 읽을 사람이 많으니 굳이 빨리 읽지 않겠다는 꼬인 성격도 늦은 독서에 한몫했고.


작가의 전작들이 그랬듯이, 이 소설집에도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그 시절의 좌절과 실패를 들여다보는 단편이 주를 이룬다.

황우석 사건, 미국의 이라크 침공, 세월호 침몰 사고, 재일 한국인 차별 등 사회적 이슈가 중간에 끼어들지만 결국 성장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의 변주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갈피를 못 잡던 내 20대 시절이 읽는 내내 페이지 위에 겹쳐졌다. 


하지만 내겐 거기까지였다.

책을 덮으며 이제 나도 나이가 들었다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언젠가부터 김연수 작가의 글을 읽는 일이 어색해졌다.

예나 지금이나 젊게 느껴지는 그의 글을 읽기가 예전처럼 쉽지 않다.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도 김연수의 작가의 글을 읽을 때와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메시지를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가독성이 훌륭하다는 작가의 장점은 여전했지만, 젊은 등장인물과 대학이라는 공간의 반복을 받아들이기에는 이제 내 나이가 적지 않은 듯하다.

한편으로는 여전히 청춘의 감성으로 글을 쓰며 젊은 독자와 부대낄 수 있는 작가가 부러웠고.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소설집이었다.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앤설로지 『코스트 베니핏』(해냄)

다섯 작가가 가성비를 주제로 쓴 단편소설을 모은 앤솔로지다.

종종 앤솔로지를 읽으며 이것이야말로 가성비를 진지하게 고민한 결과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소설은 시와 비교하면 발표할 지면이 턱없이 적다(평론은 그보다 더 적지만 아무튼).

청탁만 기다리다가는 세월이 훌쩍 흐르고 개점 휴업 상태가 된다.

출판사 또한 소설집은 장사가 안되니 출간이 부담스럽다.


내가 보기에 앤솔로지는 작가와 출판사 모두에게 이득이다. 

작가는 청탁을 기다리지 않아도 작품을 발표할 지면이 생기고, 출판사는 아이템만 잘 잡으면 손해 보지 않는 장사를 하니 말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앤솔로지 출간이 많이 늘어난 이유일 테다.

그런 변화 속에서 가성비를 주제로 다룬 앤솔로지라니.

흥미로웠다.


시간을 들여 관계를 쌓는 과정을 생략하고 돈으로 산 우정, 협찬을 받아 무료로 떠난 해외여행의 실상, 파이어족을 꿈꾸며 가상화폐 투자에 관심을 보이는 고등학생, 더 좋은 신혼집을 못 구하자 원하는 가전을 구입해 대리만족하려는 예비 신부, 탈출 로켓을 두고 서로 자신의 죄가 가볍다며 싸우는 조난자들.

모두 어딘가에서 벌어질 법한 이야기여서 씁쓸하면서도 썸뜩했다.

접근 방법은 서로 조금씩 다르지만, 다섯 작품 모두 우리의 삶을 가성비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는 점은 같다.


아쉬움이 없진 않다.

앤솔로지를 읽을 때마다 드는 아쉬움이 있는데, 그중 가장 큰 아쉬움은 작품의 질이 고르지가 않다는 점이다.

아쉽지만 이 앤솔로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떤 작품을 읽을 땐 작가가 정말 공을 많이 들인 게 보여 감탄했는데, 어떤 작품을 읽을 땐 작가가 지나치게 힘을 빼고 가볍게 쓴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가성비만큼 중요한 게 균형이다.

코스트 베니핏 - COST BENEFIT
코스트 베니핏 - COST BENEFIT
김유담 소설집 『돌보는 마음』(민음사)

이 소설집은 남들을 돌보지만 정작 자신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여성의 일상을 담은 단편 10편을 모았다.

베이비시터를 구하느라 애를 먹는 워킹맘, 가족에게 헌신했지만 누구의 돌봄도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는 노인 등 다양한 연령대를 가진 여성의 시선을 통해 한쪽에 일방적으로 부과되는 돌봄 노동이 과연 옳은지를 묻는다.


작가는 어떤 맥락에서 돌봄 노동이 여성에게 당연시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는지를 여러 사람의 시각으로 세밀하게 묘사한다.

아울러 작가는 같은 여성이어도 사안을 바라보는 온도 차가 세대별로 다르고, 사는 지역에 따라 들리는 목소리도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며 논의의 영역을 다각도로 넓힌다.

읽는 내내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마치 죄인이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피가 튀고 살벌한 이야기가 아닌데도 긴장되고 답답했다.


말해 봐야 입 아픈 이야기이긴 한데,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은 다양한 삶을 간접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여성의 일상과 심리를 엿보는데, 동시대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만큼 훌륭한 수단이 드물 것이다.

그런 작품을 읽을 때마다 자주 놀라곤 한다.

남성인 나는 살면서 경험할 일이 없고 느끼지도 못하는 상황을 겪는 여성이 많다는 사실이 말이다.

과장이 없는 담담한 이야기여서 더 생생하게 다가왔던 단편들이었다.

돌보는 마음
돌보는 마음
한강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문학동네)

한강 작가는 이제 취향을 떠나 의무감으로 작품을 읽어야 하는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나 역시 의무감으로 신작이 나오면 사는데, 이상하게 손은 가지 않는 작가였다.

<소년이 온다> 외에는, 읽은 뒤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지만 머리에 남는 기분이 들어서랄까.

이 작품도 작년에 나오자마자 샀는데 이제야 펼쳤다.


문장 하나하나를 뜯어 읽으면 아름답다.

묘사도 생생해서 냄새와 온도가 느껴진다

그 문장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한 장 한 장의 풍경도 인상적이다.

그런데 그 풍경을 한꺼번에 모아 놓고 보니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다.

거두절미하고 읽기 힘들었다.

그리고 작가 또한 쓰기 정말 힘들어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소년이 온다>와 달리 이 작품으로는 비극적인 사건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평론가든 누군가는 여기서 뭔가 심오한 의미를 찾아내겠지만, 내겐 그럴 능력이 없다.


나는 2년 전 퇴사 후 내가 굳이 매달려야 이어질 인연을 대부분 끊어냈다.

끊어내도 딱히 불편하진 않은 데다, 살아남기 위해 할 일도 많은데 그런 인연에 신경 쓸 여력이 없어서 말이다.

내가 문학 담당 기자로 기자 커리어를 마치기 전, 노벨문학상 관련 기사를 쓸 때 많이 참조했던 사이트가 영국의 도박 사이트 레드브록스다.

발표 직전에 한강 작가도 도박 사이트에 이름이(말석이긴 하지만) 오르는 걸 보고 나중에 뭔가 일이 일어나긴 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신작을 더 기다렸다.

아무래도 한강 작가는 나와 이어질 인연은 아닌가 보다.

여기까지가 내가 매달리는 노력의 마지막이다. 

어쩌다 보니 작품 제목과 반대가 됐네.


하지만 문장 하나는 건졌다.

이 문장이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를 요약한다고 생각한다.


"봉합 부위에 딱지가 앉으면 안 된대. 계속 피가 흐르고 내가 통증을 느껴야 한대. 안 그러면 잘린 신경 위쪽이 죽어버린다고 했어."

작별하지 않는다 - 한강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 한강 장편소설
이경준 평전 『딥 퍼플』(그래서음악)
  • 최근에 읽은 책 중에서 가장 긴 시간 동안 붙잡고 읽은 책이다.

이 책을 읽은 시간은 딥 퍼플의 모든 스튜디오 앨범과 라이브 앨범, 레인보우의 앨범 몇 장, 화이트 스네이크 앨범 몇 장, 토미 볼린 솔로 앨범 등의 러닝 타임을 모두 합친 시간보다 더 길다.

얼추 계산해 보니 일주일가량 걸렸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책 읽기였다.


딥 퍼플의 대표곡이나 대표 앨범 정도는 들어봤지만, 나머지는 지금까지 내게 미지의 영역이었다.

동시대에 활동했던 핑크 플로이드에 쏟았던 열정이나 레드 제플린 듣기에 비하면, 딥 퍼플에 관한 내 관심은 거의 무관심이나 다름없었다.

왜 딥 퍼플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나 인제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건반 때문이었다.

'레드 제플린보다 하드하고 블랙 사바스보다는 빠른데' 거기에 리드 기타 수준으로 끼어드는 건반 연주가 이상하게 거슬렸다.

프로그레시브 록을 들을 때면 그렇게 아름다웠던 건반 연주가 왜 딥 퍼플을 들을 때 왜 그렇게 거슬렸는지 모르겠다.


나는 이 책을 라이너 노트 삼아 딥 퍼플의 모든 앨범을 다 들어보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집필 일정과 무관한 시간이 있어서 이번 기회에 이 책과 더불어 딥 퍼플에 빠져 며칠을 보냈다.

방대한 해외 보도, 인터뷰, 다양한 참고 자료를 활용하면서 균형 잡힌 시각으로 앨범을 평가하는 서술이 매력적이었다.

공연장에서 다리가 부러진 프랭크 자파, 재결성 투어 도중 호텔에서 새벽에 난동을 부리다가 덩치가 들어오자 겸손해지는 밴드 멤버 들의 모습 등 다채로운 뒷이야기도 읽는 재미를 더한다.

마치 딥 퍼플의 투어를 따라다닌 듯 행복한 시간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많은 밴드의 음악의 원형을 딥 퍼플을 통해 뒤늦게 접하며 부끄러움도 느꼈고.

 

아쉬움이 없진 않다.

후반부 서술이 전반부보다 조금 헐겁다.

이를 저자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아무리 스티브 모스가 리치 블랙모어보다 딥 퍼플에 오랜 기간 적을 뒀어도, 딥 퍼플의 전성기는 리치 블랙모어가 적을 뒀던 기간에 집중돼 있으니 말이다.

21세기의 딥 퍼플보다 20세기의 딥 퍼플에 관해 할 말이 더 많은 건 사실이다.

그런데도, 딥 퍼플의 최근 행적까지 간략하나마 빠짐없이 다뤘다는 점은 분명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딥 퍼플이 21세기에도 꽤 괜찮은 작품을 꾸준히 냈다는 걸 이번 기회에 처음 알았다.

나처럼 딥 퍼플이 21세기에도 부지런히 활동했음을 몰랐던 사람도 부지기수일 테니 이 책은 그런 독자에게 좋은 참고서가 될 테다.


이 책의 출간은 사실 기적에 가깝다고 본다.

일부 아이돌의 앨범 외에는 유의미한 양의 피지컬 앨범이 안 팔린 지 오래된 나라, 종이책도 일부 베스트셀러 외에는 1쇄 판매를 못 하는 나라, 록을 듣는 사람이 점점 줄어드는 나라.

이런 나라에서 록 뮤직 아티스트의 평전, 그것도 한국인 저자가 직접 쓴 평전을 출간한다는 건 누가 봐도 무모한 일이니 말이다.

이런 무모한 시도를 멋지게 해 준 저자와 출판사에 경의를 표한다.

딥 퍼플 Deep Purple
딥 퍼플 Deep Purple
윤치규 소설 『러브 플랜트』(자음과모음)

씁쓸하면서도 따뜻한 온도를 가진 연애소설 모음이다.

단편 세 편을 모은 책이니 양은 가볍지만 내용까지 가볍진 않았다.

작가는 연인, 신혼부부, 돌싱을 각 단편의 주인공으로 내세워 사랑이라는 감정의 밑바닥을 섬세하게 들여다본다.


주인공들은 선량해 보이지만 사랑에 있어선 꽤 이기적이다. 

연인의 비혼 선언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그 이유에 관해선 깊이 생각해보지 않고, 사랑으로 연인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으며 결혼했다가 혼란을 겪으며, 자기 마음대로 결혼을 밀어붙였다가 자기 마음대로 이혼을 결정한다.

계획대로 되는 건 없는데 계획대로 하려다가 괴로워한다.

주인공들을 작가는 우리가 상대방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게 얼마나 큰 착각인지, 이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오해를 하는지 보여준다.


연애는 내가 생각하는 사랑과 상대방이 생각하는 사랑이 일치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차이를 조율하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새로운 연애를 할 때면 지난 실패를 까맣게 잊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경우가 많다.

사랑이란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마음보다는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마음에 가까운 감정이 아닐까.

표제작 '러브 플랜트'에서 식물을 키우듯 조심스럽게 새로운 사랑을 지켜보며 기다리는 이혼남을 보고 든 생각이다.

러브 플랜트
러브 플랜트
최유안 장편소설 『백 오피스』(민음사)

직장을 배경으로 다룬 밀도 높은 장편소설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유지하는 구성 때문에 마치 스릴러 드라마 한 시즌을 감상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작품은 행사 기획, 호텔, 대기업에서 근무하는 여성 직장인 셋의 시점으로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직장은 단순히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돈을 버는 공간이 아니다.

집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고, 그 안에서 마주치는 동료 직원은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온전히 익숙해질 수 없다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 작품은 그런 직장의 속성을 잘 보여주면서 노동 현장을 생생하게 묘사해 현장감을 높인다.


특히 이 작품은 호텔에서 고객을 대면하는 프런트 오피스 뒤에서 마케팅, 객실 예약, 행사 개최 등을 담당하는 백 오피스라는 보이지 않는 노동 공간을 주요 배경으로 설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보이는 풍경을 유지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풍경이 얼마나 바쁘게 돌아가는지 조명하는 구성이 기존 직장 소설과 차이를 보여준다.

여기에 조직의 이익과 구성원의 이익, 서로 다른 조직 사이의 이익, 욕망과 욕망이 충돌하는 모습의 생생한 묘사는 범죄물이 아닌데도 긴장감이 넘친다.


매우 흡인력 있고 흥미로운 장편소설이었다.

내가 거쳐온 직장과 비교하며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한편으로는 조직이란 다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씁쓸해졌다.

조직에 충성할 필요는 없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잘 사는 게 중요하지.

직장에서 삐끗해도, 다른 길로 걸어도, 안 죽는다.

백 오피스
백 오피스
황정은 장편소설 『백의 그림자』(창비)

황정은 작가가 지난 2010년 민음사에서 출간했던 첫 장편소설을 창비에서 복간했다.

아직 읽지 않은 작품이어서 이번 기회에 사서 읽었다.

따뜻한 질감과 섬세한 감정 묘사는 좋았지만 글쎄...

나는 <연년세세>와 <디디의 우산>이 훨씬 좋았다.

두 작품을 읽은 후에는 "나중에 거장 소리를 듣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예전부터 워낙 평이 좋았던 작품이어서 어떤 부분이 좋은지 찾으려고 애를 썼는데, 나는 잘 모르겠다.

장편보다는 단편과 중편이 훨씬 나은 작가라는 게 내 생각이다.

백의 그림자
백의 그림자
지영 장편소설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광화문글방)

테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는데, 모어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낯선 언어를 모어처럼 말하게 된다면?

이 작품은 이런 기발한 설정을 바탕에 두고 말과 세계의 관계를 탐구하면서 전 세계에 만연한 다양한 혐오를 돌아보게 한다.


이 작품의 중심에는 인도계 미국인 수키 라임즈가 있다.

그녀는 미국 시애틀의 한 쇼핑몰에서 일어난 총기 난사 테러 현장에서 파키스탄 이민자 소년을 구하려다 총상을 입은 뒤 사경을 헤맨다.

수십여 일 만에 의식을 되찾은 그녀는 놀랍게도 모국어인 영어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한국어를 원어민처럼 구사한다.

이 같은 그녀의 증상은 '수키 증후군'으로 불리게 되고, 전 세계 여러 테러 현장 및 분쟁 지역 생존자에게 무작위로 발생한다.

한국어를 잃어버리고 벨리즈 크리올을 말하고, 중국어를 잃어버리고 조지아어를 말하는 등 새롭게 구사하는 언어가 어떤 언어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발현자는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면 신체의 일부가 먼지로 변해 사라진다.

전 세계는 '수키 증후군'을 질병으로 정의하고, 발현 경로를 알지 못해 두려움에 떤다.


인도에서 태어났지만 미국으로 입양돼 미국인으로 살다가, 느닷없이 한국어를 말하게 돼 한국에서 관심을 받게 되고, 자신과 상관없는 여러 과정을 거쳐 혐오의 대상이 되고 고립되는 수키의 험난한 여정.

이 작품의 서사는 대부분 다큐멘터리 감독인 화자가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수키와 관련한 사람을 만나 진행한 인터뷰와 언론 보도로 진행된다.

좀비 아포칼립스를 그린 맥스 브룩스의 소설 <세계대전Z>와 거의 비슷한 서사 진행인데, 내가 지금까지 읽은 한국소설에선 처음 보는 서사 진행이어서 신선했다.

기발한 설정뿐만 아니라 이 같은 서사 진행도 심사위원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겠다 싶었다.


이 작품은 구사할 수 있는 언어가 바뀌면 인간의 본질도 바뀌는가를 물으면서, 동시에 소수자를 향한 혐오의 정서가 어디에서 오는지 집요하게 탐구한다.

내겐 전자보다 후자가 더 비중 있게 다가왔다.

'수키 증후군' 발현자(환자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어땠는지 코로나 팬데믹을 통해 경험했으니 말이다.

스포일러여서 더 언급하지 않겠지만, 작가는 먼지가 되어 사라진 '수키 증후군' 발현자들이 사실은 사라진 게 아님을 작품의 마지막에서 강하게 암시한다.

작품 중간에 우리 모두 별에서 태어났음을 언급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와 연결해 다시 읽으니 큰 그림이 보였다.

고독과 단절이라는 붓질로 그려낸 인간애라는 밑그림 말이다.

좋은 장편소설이었다.


다만 지나치게 성의 없는 표지 디자인이 마음에 걸렸다.

이건 여백의 미라기 보다는 그냥 여백 아닌가.

역대 수림문학상 수상작 중 가장 성의 없는 표지다.


느낌적인 느낌인데 올해나 내년쯤에 수림문학상이 폐지되지 않을까 싶다.

장편소설 공모가 점점 사라지는 추세인 데다, 당선작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거나 화제가 되는 경우도 드물어졌기 때문이다.

최근에 창비장편소설상도 사라졌고, 문학동네가 주관하던 여러 장편소설상도 문학동네소설상 하나로 통합되지 않았나.


이 작품은 명색이 큰 상금을 주는 장편소설 공모의 수상작인데도 지나치게 묻힌 감이 있다.

주최 측이 푸시를 제대로 안 하는 게 보이고, 출판사도 대형 문학출판사가 아니어서 홍보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대형 문학출판사와 출간을 연계했다면 더 뽀대나게 나올 수 있었을 텐데.

개인적인 평가이지만, 이 작품은 최근에 읽은 장편소설 공모 수상작 중 최고였다. 

이렇게 묻힐 작품은 아니라고 보는데 안타깝다.

리뷰도 거의 보이지 않아서 나라도 읽은 흔적을 남긴다.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 제9회 수림문학상 수상작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 제9회 수림문학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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