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문학 출판 담당기자였을 때 신간으로 가장 많이 접한 책은 산문집이었다.
동시에 보자마자 거른 책 또한 산문집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책을 만드는 데 쓰인 나무가 가엾을 정도로 어처구니가 없는 책이 너무 많았다.
아무리 진입장벽이 낮다지만, 어떻게 이따위로 책을 내놓나 싶었다.
저자와 출판사 모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나도 산문집이란 걸 준비하다 보니 시장에서 잘 팔리는 산문집은 어떤 것인지 신경이 쓰인다.
서점에 들를 일이 있으면 산문집 코너에서 잘 팔리는 산문집을 살폈고, 종이책과 전자책을 가리지 않고 꽤 많은 산문집을 읽었다.
특히 '밀리의 서재'는 종이책을 샀다가 실패할 확률을 확 줄여줬다는 점에서 매우 유용했다.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산문집은 이 작품이었다.
우선 이 작품의 BGM으로 무키무키만만수의 '투쟁과 다이어트'를 깔고 싶다.
이 산문집과 딱이다.
글을 쓰고 싶어 미치겠고, 밥벌이는 해야 하고, 그러다 보니 늘 스트레스를 받고, 스트레스 때문에 밤마다 폭식하고, 폭식 때문에 건강이 나빠지고,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니 입맛이 좋아져 배가 고파지고, 하지만 밥벌이는 해야 하고, 글을 쓰고 싶어 미치겠고.
작가는 이 같은 악순환과 고민을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필터 없이 보여준다.
그 어디에서도 허세가 보이지 않고, 진솔한 자조가 "나도 그래"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내가 박상영 작가의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를 딱 하나만 꼽으라면 유머인데, 이 작품 역시 페이지 곳곳에서 유머가 넘쳐난다.
재미로만 따지면 최근에 읽은 모든 책 중에서 최고였다.
유머 감각은 타고나는 걸까?
내가 아무리 잘 써도 이 작품만큼 재미있는 산문집을 내진 못할 것 같다.
잘 팔리는 작가에겐 팔리는 이유가 있다.
이 양반 좀 짜증 나게 질투 나네.
에라이 살이나 더 쪄라.
잠에서 깨어난 공주는 칼을 들어 기사를 위협하고, 악당 취급을 받는 용은 알고 보니 꽤 괜찮은 녀석이다.
무슬림은 세간의 인식과 달리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살벌한 권력 투쟁을 벌이는 여성 사이에서 남성은 쩌리가 된다.
남편에게 학대받는 줄 알았던 여인은 실은 그 상황을 즐기는 흡혈귀였고, 적진에 뛰어들어 적을 섬멸하는 지휘관은 공주님이다.
고정관념을 전복하는 상상력이 생각보다 훨씬 흥미진진한 소설집이었다.
초반의 '높은 탑에 공주와' '달빛 아래 기사와' '사랑하는 그대와' 3부작은 읽는 내내 피식피식 웃게 했다.
세 작품은 연작이라고 볼 수 있지만, 사실상 한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 세 작품만 따로 떼어내 경장편으로 선보이고, 애니메이션(실사 영화는 놉!)으로 각색하면 대단히 재미있는 결과물이 나올 듯하다.
작가가 무척 신나게 썼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 작품들이었다.
연작의 바로 뒤에 이어지는 '사막의 빛'은 문명의 교차를 다룬 긴 여정을 다루는데, 작품 전체에 드리워진 신비로운 분위기가 매력적이었다.
다만 무협지를 방불케 하는 표제작 '여자들의 왕'을 비롯해 후반에 실린 작품의 밀도는 전반의 연작보다 떨어져 아쉬웠다.
제목만 보고 여성이 남성을 때려잡는 이야기의 모음이라고 오해하면 곤란하다.
쓸데없는 오해다.
현실에서 성별 때문에 겪는 한계를 극복하려고 고군분투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고전 형태로 변주하는 유쾌하고 의미심장한 이야기라고 보는 게 적절하겠다.
굳이 깊이 의미를 파고들려 하지 않아도 즐거운 독서가 가능한 소설집이다.
거두절미하고 재미있다.
나는 20대 말에 심한 불면증에 시달렸다.
깊은 밤에 좁은 고시원 방에 홀로 누워 아무런 미래도 보이지 않는 현실을 고민하다 보면 금세 새벽이 왔다.
사나흘 동안 깨어있는 경우도 잦았다.
억지로 잠을 청하려 술을 마셔도 취하기만 할 뿐이었다.
내 선택은 몸을 움직여 지치게 만들기였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나는 고시원에서 1km가량 떨어진 청계천까지 와서 광화문 방향으로 무작정 걸었다.
물길을 따라 황학교, 오간수교, 마전교, 관수교, 수표교, 광교, 광통교를 걷다 보면 어느새 청계광장 뿔탑 앞에 다다랐다.
거기서 잠시 쉬었다가 발길을 돌려 왔던 길을 거슬러 황학교까지 걷고 고시원으로 돌아가거나, 조금 더 걸어서 청계천과 중랑천이 만나는 두물머리까지 걸었다.
그렇게 걷고 고시원으로 돌아오면 언제 불면증을 앓았냐는 듯 쉽게 잠이 들었다.
그때 내가 청계천을 걸어서 왕복한 횟수가 못 해도 수십번이다.
청계천의 밤을 수백km나 반복해 걸었으니 그때 눈에 담은 야경이 머릿속에서 지워질 리가 없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내가 경험한 청계천의 밤이 페이지에 오버랩됐다.
취업에 실패해 장례식장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주인공은 일이 끝나면 스쿠터를 타고 도시를 방황하며 24시간 맥도날드 매장을 떠돈다.
광화문, 서대문, 정동...
주인공이 방황하는 공간은 내가 기자 생활을 10년 넘게 하는 사이에 익숙해진 공간이어서 생생했다.
어렸을 때 자기 때문에 누나가 죽었다는 죄책감, 대학 졸업 후 안정된 직장을 찾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불안감, 가족의 해체로 인한 상실감이 주인공을 짓누른다.
방황은 그런 답답한 마음으로부터 잠시나마 해방을 맛보게 하지만. 방황은 어디까지나 방황일 뿐이다.
현실은 방황으로 바뀌지 않으니 말이다.
나아질 미래가 보이지 않은 삶에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작품은 죽음을 상징하는 공간인 장례식장을 통해 그 질문에 관한 답을 내놓으려고 시도한다.
이 작품이 죽음을 다루는 방식은 심각하지 않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는 점을 독자에게 상기하려는 듯 담담한 일상으로 묘사할 뿐이다.
당연한 묘사인데도 신선하게 다가왔다.
죽음이라는 삶의 당연한 결말을 당연하게 묘사하는 경우는 드무니 말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서로 다른 죽음은 어떻게 살아야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게 하는 장치다.
지금의 삶을 제대로 살아가려는 의지가 아름다운 죽음을 맞는 방법이란 게 이 작품의 결론이다.
뻔한 결론인데, 결론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다정해 마음의 빗장을 풀게 한다.
주인공의 미래가 극적으로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주인공의 방황이 무의미한 몸부림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만약 내가 잠들지 못하는 밤에 청계천을 걷는 대신, 고시원 방에서 홀로 술에 취해 나를 파괴하고 있었다면 20대 말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을까.
스쿠터를 몰며 서울의 밤을 통과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건강하게 느껴졌다.
쓸쓸하면서 아름답고 따뜻한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블랙코미디가 지배하는 작가의 전작 소설집 <사랑이 스테이크라니>보다 내게 더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하비누아주의 '청춘'을 이 작품의 BGM으로 깔고 싶다.
사법시험, 행정고시, 7급 공무원 시험, 9급 공무원 시험에 차례로 10년 넘게 매달리다가 30대 중반을 넘겨버린 남자.
뒤늦게 간신히 취업한 직장의 월급 수준은 최저임금이고, 주5일은커녕 주말 근무에 고용주의 사적인 지시까지 받들어야 한다.
번듯하게 사는 동창들과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니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
가진 건 아무것도 없지만, 모든 걸 만회하고 떵떵거리며 살고 싶다.
급한 마음에 무리하게 갭투자를 시도하지만, 등기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탓에 근생을 구입해 낭패를 본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는 생각에 급기야 불법과 합법을 오가는 임대사업에 뛰어든다.
단시간에 강남에 무려 200채 이상의 빌라를 보유한 임대사업자로 변신하며 신분 상승이라도 한 듯한 기분을 느끼지만, 수많은 빌라의 보증금이 폭탄으로 돌아온다.
결론은? 파국이다.
제목만 보고 장류진 작가의 장편소설 <달까지 가자> 류의 투자 성공담을 기대했다면 페이지를 덮자.
정말 끔찍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가 폭풍처럼 펼쳐지니 말이다.
읽는 내내 소름이 돋았다.
이 작품 속에는 그 어떤 꿈도 희망도 없다.
그래서 지독하게 현실적이다.
주인공의 심리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더 소름이 돋았다.
나 또한 20대 말에는 주인공과 다를 바 없는 신세였으니 말이다.
솔직히 소설의 완성도가 높다는 말은 못 하겠다.
대신 그 안에 담긴 분노와 좌절이 완성도를 압도한다.
나는 점점 하락 중인 노동소득의 가치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좀 먹는 가장 큰 병폐라고 생각한다.
청년층의 가상화폐 투자 열풍도 결국 아무리 열심히 벌어도 내 몸 하나 쉴 공간을 소유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서 비롯된 것 아닌가.
허구헌날 세종시 정부청사에서 책상머리에 앉아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꼭 한 번 들여다봐야 할 작품이다.
지난 정부는 부동산 시장을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것 하나만으로도 청년세대에게 죽을죄를 지었다는 게 내 의견이다.
그렇다고 현 정부가 그 문제를 해결할만한 역량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총체적 난국이다.
제목부터 도발적이다.
고독사는 이제 노년층을 넘어 세대를 가리지 않고 벌어지는 사회적 문제다.
매년 큰 폭으로 늘어나는 청장년층 무연고 시신 비율이 이를 방증한다.
이 주제를 다룬 소설이 이제야 나온 게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제목에서 느껴지는 어두운 첫인상이 서서히 지워진다.
이 작품은 여러 등장인물을 내세워 각자 고독사를 준비하는 과정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그린다.
고독사하면 당연하게 떠올리는 빈곤층 노년이 아니라 젊은 직장인, 학생, 부부 등 우리 주위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읽는 내내 와닿는 부분이 많았다.
이들은 익명의 커뮤니티에 모여 고독사를 준비하는 과정을 서로에게 공유하는데, 그 과정이 참 시시하다.
그 시시한 이야기를 공유하는 행위가 묘하게도 서로 의지하고 연대할 힘을 얻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요즘 내 관심사 중 하나는 자연사다.
지금까지 내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죽음 중에 자연사는 드물었다.
사고사가 아니라면, 병원에서 오랫동안 천천히 시들며 죽어가는 게 전부다.
그런 죽음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다.
그 누구에게도 민폐를 끼치지 않고 자연사하고 싶은데 과연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다.
우리는 홀로 살든 모여 살든 죽을 땐 고독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죽음은 홀로 걸어가야 할 확실한 결말인데, 그런 고독을 인정하며 받아들이고 서로의 고독을 지켜봐 주면 덜 외롭게 죽을 수 있지 않을까.
비록 고독사일지라도 말이다.
이 다정한 작품을 통해 그런 생각을 해봤다.
여담인데 나와 박지영 작가 사이에 소소한 인연이 있다.
박 작가는 지난 2013년에 열린 제5회 조선일보판타지문학상 수상자였다.
제3회 수상자였던 나는 마침 조선일보 근처에서 일하고 있던 터라, 시상식에 참여해 박 작가에게 축하 꽃다발을 건넸다.
나는 앞서 제4회 시상식에도 참석해 구한나리 작가에게 꽃다발을 건넨 바 있다.
매년 여름마다 수상자에게 꽃다발을 전하는 일이 올 줄 알았는데, 제5회를 마지막으로 조선일보판타지문학상은 폐지됐다.
구한나리 작가가 장르 문학 필드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여러 단편을 발표하고 있지만, 단시간 내에 후속작을 단행본으로 출간해 반향을 일으킨 작가가 없다 보니 상의 존재감도 빠르게 사라졌다.
당장 나도 후속작인 <침묵주의보>를 수상 후 7년 만에 내지 않았던가.
박 작가의 소식이 궁금했는데, 수상 이후 9년 만에 낸 이렇게 신작으로 소식을 접하게 돼 반가웠다.
이 작품은 장기미제로 남은 20여 년 전 신촌 여대생 살인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을 그린다.
제목만 보고 긴장감 넘치는 수사물을 기대하면 곤란하다.
시종일관 차분하고 정적이며 치밀한 작품이다.
대한민국 경찰의 수사 과정을 이보다 현실적으로 자세하게 묘사한 소설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치밀한 취재가 돋보인다.
그런데도 가독성이 매우 훌륭해 읽는 데 막힘이 없고, 그 안에 담긴 메시지도 작가의 데뷔작인 장편소설 <표백> 이상으로 도발적이다.
분량만 보고 지레 겁낼 필요가 없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읽으며 나는 학부 시절에 형법을 공부할 때 나를 사로잡았던 의문을 다시 떠올렸다.
과연 대한민국의 형사사법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걸까?
국가는 형벌을 주는 권한을 독점한다.
이를 자력구제 금지의 원칙이라고 부른다.
쉽게 말해서 김승연 한화 회장처럼 아들이 밖에서 맞고 들어왔다고 직접 빠따를 들면 안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원칙 때문에 피해자가 형사사법시스템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다는 점도 분명한 사실이다.
가해자가 지나치게 낮은 형벌을 받아 홧병으로 뒷목을 잡는 피해자가 얼마나 많은가.
오래전에 홀로 며칠 동안 이 문제를 가장 공정하게 해결할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했었는데, 고민 끝에 나온 해결방안은 어이없게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였다.
많은 사람이 오해하는데, 함무라비 법전에 명시된 이 원칙은 미개함과 거리가 멀다.
상대방이 내 강냉이를 세 개 털었으면, 나도 상대방의 강냉이를 딱 세 개만 털어야 한다는 게 이 원칙의 핵심이다.
즉 피해를 본 이상의 대가를 치르게 해선 안 된다는 대단히 합리적인 원칙이다.
함무라비 법전에서 이 원칙은 범죄 행위의 고의와 과실을 구별하지 않는다.
고의와 과실을 구별하지 않고 이런 복수법을 허용하면 어마어마한 사회적 혼란이 벌어진다.
실제로 고려 초에 복수법이 시행돼 막장 사태가 벌어진 일이 있다.
귀족과 평민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원한을 가진 상대에게 복수를 할 수 있게 됐고, 백주대낮에 누군가를 때려죽여도 복수라고 주장하면 땡이니 사회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고의범에겐 국가가 대신 나서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에 따른 형벌을 대신 가하는 게 공평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진지하게 했었다.
그런데 여기에도 함정이 있다.
과연 물리적인 피해만이 피해일까?
누군가에게는 맞아서 입은 상처보다 마음에 입은 상처가 훨씬 클 수도 있다.
그런 사람에게 정신적인 피해는 어디까지 인정하고 어떻게 처벌해야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이뤄질 수 있을까?
오래전에 멈췄던 고민을 이 작품을 읽으며 다시 하게 됐다.
이 작품은 분량 자체만으로도 대한민국 출판시장을 향한 도전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장편소설의 기준이 원고지 1000매에서 800매로 내려온 지 오래고, 요즘에는 400~500매에 불과한 소설도 장편소설 취급을 받는다.
나도 의도적으로 800매에서 장편소설 분량을 끊어온 지 오래다.
그런 상황에서 원고지 3000매 이상 분량의 소설이라니 이게 도전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최근에 소설을 읽으며 이 정도로 깊게 무언가를 들여다본 일이 있었던가.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서사이고, 그런 서사를 온전히 담을 수 있는 그릇은 장편이다.
단편으로 아무리 문장이니 뭐니 장난을 치고, 단편을 억지로 장편으로 늘려 봐야 이런 사고실험까지 이르지는 못한다.
소설은 역시 장편이고, 취재를 제대로 해야 한다.
앉은뱅이 소설로는 어림없다.
그걸 다시 깨닫게 해준 작품이었다.
이 장편소설을 읽으며 지난 2009년의 봄, 여름, 가을을 떠올렸다.
그 시절은 뜻대로 되는 게 아무것도 없었고, 사랑하는 사람도 모두 내 곁을 떠나가던 20대의 끝물이었다.
그해 봄, 나는 초기 불경인 <아함경>을 접하고 내 잇단 불운을 조금이나마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이성적으로 나를 바라본다고 해도, 내 밑바닥에 단단히 쌓인 감정의 찌꺼기까지 정리하긴 어려웠다.
마음은 의지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초여름에 나는 3박 4일 동안 서울에서 고향인 대전까지 걸었다.
감정의 찌꺼기를 정리하고 내 안에 차오르는 무언가를 소설의 형태로 남기고 싶었다.
출간이 보장되지 않는 데다, 운이 좋아 출간해도 팔릴 가능성이 희박한 소설을 쓰는 게 무슨 의미인지 고민이 앞섰다.
내 몸을 힘들게 내몰면 뭔가 결론이 나지 않을까 막연하게 기대했다.
그런데 땡볕 아래에서 오래 걸으니 힘들다는 생각 외엔 아무런 생각도 안 들었다.
보상은 없어도 한 번쯤은 미친 듯이 매달려 소설을 써도 괜찮겠다는 결론을 내린 게 힘든 여정에서 얻은 몇 안 되는 수확이었다.
늦가을까지 절간에 머물며 소설을 썼다.
소설을 쓰는 과정은 나를 들여다보는 과정이기도 했다.
나는 지금까지 구제불능에다 불완전한 존재였고 앞으로도 크게 다르지 않겠구나.
초고 집필을 마친 후 든 생각이었다.
하지만 쓸모없는 과정은 아니었다.
내가 그런 사람임을 인정하니 과거보다 훨씬 마음이 편해졌으니 말이다.
이 작품은 삶의 균형이 무너진 30대 여성이 도망치듯 떠나온 인도에서 겪는 일상과 고백을 담은 편지를 교차시켜 이야기를 풀어낸다.
인도에서 주인공은 요가 수련을 통해 구원받으려 하지만, 오히려 번민만 더 깊어지고 일상은 한국에 있을 때보다 더 엉망이 된다.
그리고 솔직하고 절절하게 고백한다.
나를 알기 위해 노력할수록 더 나를 모르겠다고.
더 혼란스럽다고.
시간이 많은 문제를 해결해준다지만, 나이 든다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지는 않았다.
나를 보니까 몸만 나이 들었을 뿐, 딱히 정신이 성숙해지지도 않았다.
나중에 내가 50대, 60대, 70대가 되어도 지금과 딱히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이 작품의 주인공이 이유도 모른 채 가파른 차문디 언덕을 오르듯, 그렇게 삶을 살아낼 수밖에 없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오른 언덕의 정상에서 장엄한 풍경을 바라보며 감동했다가 언덕을 내려오고, 곧 다시 충동적으로 언덕에 오르고.
이 작품을 읽으며 나만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해 안도했다.
여운이 많이 남는 작품이었다.
반지하 월세를 전전하다 무리한 대출을 껴서 마련한 근생 빌라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중소기업 근로자.
북한 부동산에 투자한 뒤 통일만 기대하며 거리로 나서는 태극기 부대 노인.
자신도 정체를 모르는 독극물을 땅에 묻는 공공기관 하청업체 직원.
노인을 대상으로 성매매하는 박카스 아줌마
생리 도벽 때문에 가족에게 버림 받은 뒤 절도로 삶을 이어가는 초로의 여인.
자신이 개발한 철 지난 청소기를 팔러 다니는 연구원 출신 외판원.
이 소설집의 가장 훌륭한 부분은 우리 주변에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혹은 보지 않으려 했던) 사람들의 삶을 깊게 들여다본다는 점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모두 성실하게 살았지만, 내리막길 밖에 보이지 않는 인생이다.
현재 머무는 자리에서 밀려나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 보니 미래를 생각할 여유가 없는 삶.
작가 본인의 경험에 탄탄한 취재를 바탕에 둔 간접 경험이 깊게 녹아 있어 소설이란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실감난다.
작가는 축축한 곰팡내가 짙게 느껴지는 이야기를 웃프게 그려내는 전략으로 심각함을 덜어내고 재미를 더한다.
여기에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문장이 눈에 쏙쏙 들어와 가독성을 높인다.
이 소설집에 실린 6편의 단편을 소설로만 읽을 수는 없었다.
등장인물 모두 남들보다 조금 기회가 적었고 운도 따르지 않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 공통점이 나비효과처럼 이들의 인생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나 또한 삐끗하면 저들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꼈다.
웃픈 연출로 감추기 어려운 살벌한 풍경이었다.
우리의 삶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일종의 연극과 비슷하지 않을까.
몇 년 동안 서재에 묵혀 구간이 된 이 작품을 읽고 든 생각이었다.
평생 신분을 속이며 살아온 여자 '이유미'의 행적을 추적하는 주인공의 여정이 작품의 큰 줄기다.
주인공은 결혼 후 출산해 몇 년째 소설을 쓰지 못하는 소설가인데, 우연히 이유미가 자신의 미발표작으로 소설가 행세를 하고 다녔음을 알게 된다.
추적 끝에 드러나는 이유미의 인생사는 기가 막히다.
가짜 대학생이었다가 피아노 학원 강사였고, 대학에서 평생교육원 강사로 일하다가 교수로 임용됐으며, 요양병원 의사 행세도 했었다.
이유미는 결혼도 세 차례 했는데 심지어 이름을 바꾸고 남성 행세를 하며 여자와 산 일도 있었다.
인정 욕구와 그 욕구를 받쳐주지 못하는 가정사가 빚어낸 무리한 거짓이었지만, 놀랍게도 이유미는 들키기 전까지 모든 거짓 신분을 성공적으로 유지했다.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거짓이었고, 때로는 거짓이라고 볼 수 없는 무언가도 있었다.
반면 비교적 평탄하게 살아온 주인공의 삶은 거짓이 아닌데도 거짓처럼 위태롭다.
이 작품은 그 둘의 삶을 번갈아 보여주며 우리가 진짜라고 믿고 있는 게 정말 진짜인지 묻는다.
자연스럽게 십수 년 전 사회에 큰 이슈를 불러일으켰던 여러 유명 인사의 학력 위조 사건이 떠올랐다.
그들 대부분은 학력 위조가 드러나기 전까지 자신이 활동해 온 영역에서 실력자로 인정받아왔다.
학력위조가 대중을 기만한 행위임은 분명하지만, 그들이 남긴 모든 행적을 부정할 만큼 배경이란 게 중요한 건지 의문이 들었다.
배경이 가짜인 실력 있는 사람과 배경만 진짜인 실력 없는 사람 중 진짜에 가까운 사람은 누구일까.
이 작품은 우리가 배경에 얼마나 약한 존재이며,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게 무엇인지를 묻게 해줬다.
읽는 내내 누군가가 내 뒤를 쫓는 듯한 긴장감을 느꼈고 가독성도 대단히 훌륭하다.
재미와 의미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은 좋은 장편소설이다.
몇 년 전에 초반부를 읽고 페이지를 덮었다가 뒤늦게 완독했다.
'음악소설'이라는 타이틀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소설임과 동시에 하나의 앨범이다.
작가가 직접 만든 음악을 링크한 QR코드가 페이지 곳곳에 삽입돼 있어 마치 OST를 듣듯이 감상할 수 있다.
내가 작년에 출간한 장편소설 <다시, 밸런타인데이>에도 내가 작곡한 Book OST가 QR코드로 삽입돼 있는데, 실은 이 작품을 따라 만든 결과물이다.
그런 작품인데 이제야 완독했다니... 반성할 일이다.
이 작품은 인공지능 음악을 넘어 인공자아 음악이 등장한 미래를 배경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뮤지션 '러브비츠'의 자살 사건을 따라간다.
여기에 작가가 만든 가상의 미래 음악, 그 음악을 주제로 다룬 가상의 비평이 더해져 '러브비츠'의 실체를 둘러싼 논쟁에 불이 붙는다.
작가는 각종 전자음과 TTS(문자-음성 자동변환)로 합성한 음성을 음악에 활용하는 한편, 인간 디자이너와 인공지능 화가가 협업한 삽화를 더해 인간과 기계가 불안하게 공존하는 디스토피아 분위기를 연출한다.
SF 소설이 대중화된 지금 기준으로 봐도 파격적인 형식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단지 미래를 상상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개인의 취향이 조작되는 과정을 정밀하게 묘사하는 부분에선,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듯한 알고리즘에 놀라는 일이 많아진 현재가 겹친다.
경제 성장을 유지하기 위해 로봇도 적극적인 소비의 주체로 변모한 미래를 묘사하는 부분은 마치 예언처럼 느껴졌다.
최근에 읽은 그 어떤 SF소설보다도 뭔가 SF스러웠다.
하지만 지나치게 난해해 읽기가 쉽지 않았다.
페이지를 덮은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내가 무엇을 읽었는지 잘 모르겠다.
읽다가 이해가 안 되면 수시로 앞 페이지로 돌아가곤 했는데, 중간부터 그런 과정을 포기하고 페이지를 넘기는 데 의미를 뒀다.
조금 더 쉽게 풀어썼다면 더 많은 관심을 받지 않았을까.
하이브리드를 닮은 파격적인 시도에 비해 재미가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