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산문집에 실린 글 상당수는 구면이다.
나는 작가가 국민일보에 연재했던 이 책의 프로토타입을 인상 깊게 읽었다.
글이 모이면 단행본으로 엮이겠구나 싶었는데, 역시나 그렇게 됐다.
콜센터에서 힘겹게 일하다가 신춘문예 당선 연락을 받은 순간.
개인파산과 개인회생 때문에 흩어졌던 가족과 재회한 놀이공원.
셀프빨래방에 남긴 메모에 댓글로 달린 메모.
앓아누운 작가에게 시루떡을 가져다주는 고시원 옆방 언니.
손톱에 봉숭아 꽃잎 물을 들이는 할머니.
명절에도 가게 문을 열고 고향에 가지 못하는 손님을 기다리는 분식집 아줌마,
나는 작가의 글을 읽으며 마치 밥냄새를 풍기는 오래된 골목을 걷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순서와 상관없이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어도 상관없지만, 가능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일독하는 게 좋다.
이 산문집은 제목처럼 계절 순서대로 글을 엮었고, 봄-여름-가을-겨울-다시 봄으로 이어지는 계절감이 살아있다.
매년 계절이 돌아오듯 잔잔하게 흘러가는 일상이 삶을 버티게 해주는 힘이었음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글의 연속이다.
작가가 거쳐온 삶 중에 나와 겹치는 부분(특히 열악한 주거환경)도 꽤 있어서 원고지 5매 분량의 짧은 글인데도 몰입하기 쉬웠다.
가난이 글의 주된 소재이지만, 이를 표현하는 방식이 가난하지 않다는 점이 이 책의 힘이다.
부드러워 보이지만 단단하다.
소설 쓰기는 철저히 혼자 하는 작업이다.
사실 이런 형태의 작업이 내 성격에 맞긴 하다.
기자로 일했던 시절에 가장 힘들었던 건 누군가에게 수시로 연락하고 만나는 일이었는데, 목구멍이 포도청이어서 철저히 본성을 숨기고 살았다.
요즘 표현으로 I인데 E처럼 살았다고 말하면 적절하려나?
내 낯가림이 엄청나게 심하다는 걸 함께 사는 가족도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았다.
전화벨 소리만 울려도 가슴이 철렁하고 사람을 만나면 기가 빨리는 터라 숨어 사는 중인데, 기자 시절 경험 덕분에 소설을 쓰고 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문제는 그렇게 혼자 있다 보면 잡생각이 많아진다는 거다.
작업이라도 잘 되면 괜찮은데, 그렇지 않으면 불안감이 쌓인다.
하지만 작업이 잘 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럴 때면 자연스럽게 다른 소설가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그런 이유로 이 책을 펼쳤는데, 2023년에 처음 읽는 책으로 좋은 선택이었다.
지나간 일상이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라 빌드업의 시간이었다고 어깨를 토닥여주는 것 같아서 말이다.
짝사랑하는 사람들의 사연을 들어주고 지금 상황에 어울리는 초콜릿을 처방전으로 내주는 가게.
제목은 수상하지만 내용은 전혀 수상하지 않다.
다양한 형태의 짝사랑 사연이 뻔하고 유치하지만, 공감하지 않기가 어렵다.
사랑하고 있거나 했었다면, 이 작품에 실린 짝사랑 사연 중에 자기 경험과 비슷한 사연 하나는 있을 테니 말이다.
은근히 눈에 들어오는 문장이 많았는데 그중 하나가 가장 밟힌다.
주인공이 손님에게 사랑했던 과거를 예쁘게 잊는 법이라며 전하는 처방전이다.
"그 사람이 여전히 좋은 거라면 그 사람을 그리워하면 돼요. 근데 그때 함께했던 사랑이 여전히 그리운 거라면, 새로운 사랑을 찾으면 돼요."
이 작품은 이미 해외에 판권이 팔렸고, 국내에서도 몇 쇄를 더 찍었을 만큼 꽤 잘 팔리고 있다.
작가가 자신이 쓰고 싶은 이야기와 독자가 읽고 싶은 이야기가 일치하는 행운을 누리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자신을 양보하는 게 옳을까?
자신을 양보하지 않고도 독자를 압도할 수 있는 작품을 쓸 수 있는 역량이 내게 과연 있을까?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았다고 해서 작품이 잘 팔린다는 보장이 있을까?
이런 '로우텐션' 계열의 소설을 읽다 보면 고민이 깊어진다.
이 같은 고민은 각본 작업 피드백을 받을 때마다 하는 고민이기도 하다.
홀로 매달렸던 소설 쓰기가 상대적으로 참 쉬운 작업이었음을 요즘 들어 절실하게 깨닫고 있다.
1편과 2편을 합쳐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한국소설의 대박 히트작이다.
1편과 마찬가지로 읽은 뒤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로우텐션' 소설이다.
1편과 느슨하게 이어져 있는 이야기여서, 1편을 읽지 않고 2편을 읽어도 무방하다.
이 시리즈가 작가가 쓴 가장 좋은 작품인지는 1편을 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의문이다.
나는 이 작품보다 <망원동 브라더스>가 더 좋은 작품이고, 작가가 가장 힘줘 쓴 역작은 <파우스터>라고 생각한다.
<연적> 또한 한국소설에선 보기 드문 재치 있는 버디물이었다.
작가와 아무런 인연이 없지만, 작가의 생각도 나와 같지 않을까 관심법을 써본다.
작가도 이 시리즈의 성공을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을 거라는 데에 내 손모가지를 걸겠다.
도저히 가늠하기 어려운 게 출판 시장이라는 걸 이 작품을 읽으며 다시금 실감했다.
잘 쓴 소설이 잘 팔리는 게 아니고, 못 쓴 소설이 안 팔리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못 쓴 소설이라는 이야기가 절대 아니다.
단지 이 작품보다 더 주목받아야 할 작가의 전작이 주목받지 못한 게 아쉬울 뿐이다.
조만간 내 첫 산문집이 나오는데, 그 산문집이 내 소설보다 더 잘 팔리면 나는 마냥 기쁘지 않을 것 같다.
그동안 내가 해 온 작업은 무엇인가 하는 회의감이 조금 들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 시리즈의 히트 때문에 작가의 전작도 덩달아 조금씩 관심을 받고 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근엄한 단어인 '종친회'에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는 '노비'라니.
오로지 제목 하나에 끌려 집어 든 작품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서 읽고 후회하지 않았다.
한국 소설에선 드문 따뜻하고 유쾌한 코미디물이었다.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희성인 헌 씨들이 모여 종친회를 만들고 뿌리를 찾는 이야기'다.
주인공을 비롯해 이 작품에 등장하는 헌 씨들은 소싯적부터 설움을 많이 받아왔다.
'현' 씨로 오해받는 일은 기본이고, 조상을 알 수 없어 노비 집안 출신이라는 험담까지 들어왔다.
주인공은 종친회가 나름 돈이 된다는 말을 듣고 곳곳에 흩어진 헌 씨들을 모은다.
그렇게 모인 헌 씨는 몇 안 되지만 출신은 입양아, 탈북자, 주부, 전직 조폭 출신 횟집 사장, 정치인, 교수 등 다양하다.
도무지 공통점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이들이 모여 하나의 목표를 향해 움직이니, 이야기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돼 재미를 준다.
이들은 노력 끝에 자기 뿌리가 진주에 닿아있음을 확인하고 '진주헌씨'를 자처한다.
하지만 겨우 만든 종친회는 전국문중협회가 주최한 행사에서 푸대접받고, 심지어 겨우 찾은 조상이 족보를 조작한 듯한 정황을 포착한다.
그 와중에 돈을 들고 잠적하는 주인공.
과연 '진주헌씨 종친회'의 운명은 어떻게 흘러갈까.
다시 말하지만, 이 작품은 코미디다.
헌봉달, 헌총각, 헌신자, 헌학문, 헌자식, 헌금함, 헌소리, 헌정치 등 임성한 드라마를 닮은 등장인물 이름부터 대놓고 코미디를 지향하고 있다는 증거다.
하지만 이 작품이 단순한 코미디에 그쳤다면 이 잡글을 끼적이지 않았을 테다.
이 작품은 등장인물들의 좌충우돌을 통해 대한민국 사회에 깊게 뿌리내린 계급문화를 지적하고,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공동체의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가벼우면서도 진지하다.
시대착오적인 소재를 역설적으로 잘 활용한 신선한 작품이다.
내 경험상 재미있는 소설을 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등장인물을 극한 상황에 몰아넣는 것이다.
극한 상황에 놓인 등장인물은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쓸 수밖에 없다.
그런 과정에서 등장인물은 종종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멋대로 움직이는데, 그럴 때는 그 뒤를 쫓아가는 것만으로도 꽤 흥미로운 결과물이 나온다.
등장인물이 맞닥뜨릴 수 있는 최고의 극한 상황은 어떤 상황일까.
정답은 정해져 있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상황보다 극한인 상황이 또 있겠는가.
이 소설집에 실린 여덟 단편은 문학의 영원한 화두인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설화, 도시괴담, 역사, 고전과 엮어 다채롭게 변주한다.
가족물인 줄 알았는데 심령물로 반전하고, 사극인 줄 알았는데 SF가 끼어들더니, 동화의 한 장면이 고어물로 돌변한다.
작가는 장르, 시대, 배경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삶과 죽음의 풍경을 들여다보고 독자에게 묻는다.
당신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어떤 선택을 하겠느냐고.
어떤 선택은 섬뜩했고, 어떤 선택은 우스웠으며, 어떤 선택은 서글펐다.
작가가 전작인 장편소설 <인더백>에서 실감 나게 보여준 두렵고 황량한 풍경에 끌렸다면, 이 소설집 또한 마음에 들 것이다.
장편 한 권을 읽을 시간에 장편 못지않게 밀도 높은 단편을 여럿 즐길 수 있으니 말이다.
여덟 단편 모두 예상치 못한 반전으로 독자보다 앞서 나가고 흡인력이 대단하다.
최근에 읽은 소설집 중 가장 집중력 있게 읽었다.
거두절미하고 재미있다.
p.s. 24페이지 여섯째 줄과 넷째 줄의 오타를 고칠 수 있게 빨리 2쇄를 찍는 날이 오기를.
이 작품은 작가의 데뷔작인 장편소설 <고도일보 송가을인데요>의 후속작이다.
옴니버스 형식이었던 데뷔작과 달리,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결된 장편소설 형식을 유지하고 있다.
그만큼 이야기를 다루는 깊이도 데뷔작보다 깊어졌다.
작가는 인사청문회, 법안 심사, 국정감사, 예산 심사, 당 대표선거, 지방선거, 대선까지 정치부에서 경험할 수 있는 취재 현장을 두루 다루며 주인공의 성장 과정을 따라간다.
대한민국의 언론사 정치부 기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싶다면 이 작품을 정독하면 된다.
이념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기자의 모습이 잘 담겨 있다.
나도 이 작품을 읽은 뒤에야 현직에 있을 때 몰랐던 정치부 기자의 일상에 관해 자세히 알았다.
작품 곳곳에 반전이 지뢰처럼 박혀 있어 느닷없이 읽는 재미를 준다.
현직에 있을 때 "정치는 생물"이라는 말을 귀가 따갑게 들었는데, 왜 그런지 이 작품을 읽고 실감했다.
정치부에 들어온 지 1년도 안 된 기자가 정치판을 흔드는 특종을 마구 쏟아내는 먼치킨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는 소설만의 재미로 이해하자.
이 작품에서 꽤 비중 있게 다뤄지는 내용은 기업이나 정치권으로 이동한 기자들에 관한 이야기다.
기업 홍보실로 이동해 불리한 기사를 막으려 후배 기자에게 로비하고, 정치권 진출을 염두에 두고 기사를 쓸 때 눈치를 보는 선배 기자들의 모습.
몇 년 전 이재용 삼성 부회장의 구속영장이 기각됐을 때 가방 모찌를 했던 인물이 떠올랐다.
그 인물은 삼성의 상무급 임원이었는데, 삼성에 비판적인 언론사에서 활약했던 기자 출신이다.
어디 그뿐인가.
삼성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문자 메시지를 보낸 기자도 있었는데.
자신이 한참 선배라며 내게 은근히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던 기자 출신 모 기업 홍보실 직원의 얼굴도 간만에 생각났다.
이 작품은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내가 지금까지 조직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개 비슷했다.
적당히 착하고, 적당히 정의로웠으며, 적당히 나빴고, 적당히 비겁했다.
기자들도 다르지 않았다.
개중에는 '구악'으로 불리는 쓰레기 같은 인간도 있었지만, 어느 조직이든 그런 인간은 있기 마련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데뷔작과 마찬가지로 그런 군상의 모습을 담백하게 보여준다.
얼마든지 자극적으로 다룰 수 있는 소재를 그렇게 다루지 않는다는 점이 좋았다.
언론사의 주요 부서는 이른바 '정경사'로 불리는 정치부, 경제부, 사회부다.
'정경사'는 주로 스트레이트 기사를 다루는 부서인데, 이들 부서를 두루 거쳐야 편집국장과 같은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다.
편집부, 문화부, 체육부, 국제부, 교열부, 지방부, 온라인부 등은 사내 권력에서 먼 부서다.
문화부를 더해 '정경사문'이라고도 부르기도 하지만, 사내 권력은 어디까지나 '정경사'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경제부와 산업부가 앞자리를 차지하고 사회부가 한직인 경제지에서도 정치부의 위상은 상당하다.
나는 '정경사문' 중 '정'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기자에게 부서 이동은 이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언론사에선 부서 간 업무가 확연하게 다르다.
정치부 경험을 전혀 해보지 못한 나는 이 작품의 내용이 새롭고 흥미로웠다.
기자가 발휘할 수 있는 선한 영향력이 어디까지인지 설득력 있게 보여준 훌륭한 직업물이었다.
'시마' 시리즈처럼 후속작이 계속 나오지 않을까 싶다.
그 이유는 마지막 페이지를 읽으면 알게 된다.
제목과 표지로 이 작품에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는지 예상해보자.
'국자'라는 단어에 전통적 서사물을 의미하는 '전'(傳)이 붙어있다.
아마도 '국자'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이 주인공이고, 적절한 풍자를 곁들였을 테다.
조리기구 국자와 같은 주인공의 이름, 표지에 실린 젓가락과 접시 이미지를 보니 음식과 깊은 관련이 있는 이야기임이 분명하다.
오른손에 당당히 궐련을 든 여성의 실루엣으로 짐작하건대, '전'으로 불리는 전통적 서사물과 거리가 있는 듯하다.
내 예상대로 모두 들어맞았다.
그래서 실망했느냐고 물어보면 Nope!
안티히어로물(이견이 있겠지만 히어로물은 절대 아니라고 본다)에 따뜻한 가족 서사가 결합하면 어떤 케미가 일어나는지 직접 확인해보시라.
이 작품은 내 예상보다 훨씬 다채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단히 재미있다.
심지어 '작가의 말'까지 재미있어 이마를 쳤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전 세계에 곳곳에서 랜덤으로 초능력자가 태어난다는 게 이 작품의 기본 설정이다.
대한민국 국민은 일정 연령을 넘기면 초능력 검사를 의무적으로 받아야 하고, 검사 결과에 따라 능력자와 일반인으로 구분된다.
능력자는 대한민국에서 어떤 쓸모에 있느냐에 따라 등급이 나눠지고, 높은 등급일수록 사회에서 더 나은 대접을 받는다.
능력자는 일반인의 부러움과 질투를 사는 존재이지만, 모든 능력자가 그런 대접을 받는 건 아니다.
검사 결과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은 능력자는 사회에서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받으며 철저히 탄압받는다.
마치 군사정권 시절에 좌익 사범의 가족이 연좌제로 억압을 당했던 것처럼.
시대가 바뀌어 탄압 수준은 줄어들었지만, 부적합 능력자는 여전히 대한민국 사회에서 기피 대상이다.
이 작품은 '국자'와 그녀의 딸 '미지'의 시점,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인간을 쓸모에 따라 차별하는 세태를 유쾌하게 때로는 날카롭게 짚어나간다.
'국자'는 가족에게 능력을 숨기고 살아왔는데, 그 능력은 어처구니없게도 손맛이다.
'국자'는 자신이 만든 음식을 먹은 사람을 조종할 수 있는데, 초능력이라고 말하기에는 꽤 소박하다.
할리우드 히어로물과 비교하면 초능력이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다.
그 소박함이 '국자'를 분투하지 않을 수 없게 하고, 비현실적인 설정을 현실적으로 느껴지게 만든다.
이 작품이 히어로물이었다면 작품 속 정부가 내부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희생양을 찾고, 권력을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국민을 분열시키며, 대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소를 착취하는 모습에서 기시감을 느끼지 못했을 테다.
원고량이 상당한 작품인데, 가독성이 훌륭해 술술 페이지가 넘어간다.
읽는 내내 눈앞에 영상이 생생하게 그려진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예언하는데, 이 작품은 반드시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질 것이다.
제작사가 있다면 간 보지 말고 얼른 판권을 사가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나는 이 작품이 당연히 베스트셀러 순위에 상위권에 있을 거로 여겼는데 어느 서점 차트에도 보이지 않아서 놀랐다.
국내에서 첫손을 꼽는 문학 출판사에서 단행본을 출간했다는 버프를 받았는데도 순위에 없다니.
잘 만든 책이 잘 팔리는 게 아니고, 못 만든 책이 안 팔리는 게 아님을 다시금 느꼈다.
문방사우를 의인화한 '서재야회록'처럼 문구류를 의인화한 이야기의 모음인 줄 알고 가볍게 펼쳤다가 뒤통수를 맞았다.
문구류를 소재로 사춘기 소녀의 일상을 그리는데, 그 안에 담긴 메시지가 의외로 묵직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작가는 어른들의 승진 경쟁 못지않은 치열한 입시 전쟁,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향한 의문, 자녀를 마치 소유물 취급하는 어른들의 욕심, 다문화 가정 등 민감한 주제를 문구류로 엮어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청소년 소설이니 뭐 별것이 있겠냐고 생각하며 페이지를 펼쳤다간 강한 흡인력에 꽤 놀랄 테다.
2020년대 학교의 풍경과 학생의 심리를 묘사하는 디테일도 엄청나다.
현직 교사라는 작가의 직업이 빛을 발하는 부분이다.
나는 요즘 10대가 학교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를 내 20세기 말 학창 시절과 비교하며 흥미롭게 읽었다.
성인 소설과 다른 차원의 여운이 인상 깊었다.
사소하지만 뒤돌아 생각해보면 가슴을 따뜻하게 데우는 묘사가 많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망가뜨린 친구의 물건을 원래대로 되돌려 친구의 마음을 달래고 싶고, 빌린 지우개의 모서리의 지저분해진 부분을 닦아서 돌려주고, 모두가 외면할 때 먼저 말을 걸어주며 다가오고.
이런 표현이 닭살 돋을지도 모르지만, 단편 하나하나가 사랑스러웠다.
시대가 달라졌어도 10대의 고민은 과거와 비교해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확인하며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고개를 끄덕였다.
돌이켜 생각해보자.
그 시절 고민의 무게가 과연 지금보다 가벼웠는가?
나이가 들면 경험과 지혜는 쌓일지 몰라도, 사람 자체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점점 확고해지고 있다.
10대도 어른 이상으로 섬세한 자기만의 취향과 심미안을 가지고 있다.
40대인 내가 10대였던 나를 돌아보니 말이다.
여담인데, 나는 작가의 단행본을 꽤 오래 기다렸다.
작가는 지난 2012년 장편소설 <아홉 개의 붓>으로 제4회 조선일보판타지문학상을 받았는데, 3회 수상자였던 나는 시상식에 참석해 작가에게 꽃다발을 건넸었다.
조선일보판타지문학상은 비록 5회로 끝났지만, <아홉 개의 붓>은 역대 수상작 중에서 가장 훌륭했던 작품이었다.
이보다 상의 취지와 잘 어울렸던 수상작이 없었다.
그 이후 작가가 웹진에 단편을 발표하고 앤설로지에 참여하는 모습을 종종 봤지만, 단행본 소식이 한참 동안 없어 아쉬웠는데 반가웠다.
한국 문학계에서 소설은 단편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단편을 유의미하게 발표할 자리는 문예지 지면이나 일부 웹진밖에 없는데, 대부분 청탁으로 원고를 받는다.
청탁을 기다리다가 지쳐 좌절하는 작가가 부지기수다.
지난 2020년에 온라인상에 문을 연 '던전'은 가능한 한 많은 작가에게 멍석을 깔아주고, 독자와 접점을 늘리겠다는 목표를 가진 문학 플랫폼이었다.
비록 작년에 운영을 중단했지만, 그곳에서 나는 꽤 재미있는 작품을 많이 만났다.
김쿠만 작가의 단편은 레트로와 B급 정서를 뒤섞은 독특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어 관심을 가지고 읽었다.
한국 소설 신간을 체크하다가 작가의 이름이 눈에 띄어 바로 장바구니에 책을 담았다.
소설집에 실린 작품 상당수가 구면이어서 같은 책을 오랜만에 다시 읽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처럼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시절에 국민학교에 입학해 IMF 시절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이라면 "그땐 그랬지" 하며 공감할 만한 소재가 많다.
8편의 단편을 모았는데, 각 단편마다 소재(레드애플 담배)와 등장 인물(시게루, 제임슨, 안 교수 등)이 반복해 나오는 터라 연작소설 같은 인상을 줬다.
단행본으로 작품을 모아서 읽으니 따로 읽었을 때와 비교해 느낌이 많이 달랐다.
그것이 또 편집의 묘미 아닌가 싶다.
읽는 내내 쓸쓸했다.
시대의 조류에 밀려 사라진 것들을 추억으로밖에 재생할 수 없는 아련함.
지금보다 더 나아지리라는 기대가 없는 미래를 기다려야 하는 막막함.
마치 추석 당일 새벽에 홀로 고요한 서울 시내 한복판을 바라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 책이 다루는 곡은 1980년대에서 2020년대 사이에 발표된 다양한 장르의 가요와 팝을 망라하는데, 대부분 유명한 곡이다.
음악 좀 들었다는 30대 중반 이상이라면 모르는 곡을 찾기 힘들 테다.
여름이면 메가데스, 판테라, 크래쉬, 메써드를 듣는다고 고백하는 저자는 자신의 취향을 뒤로 미루고 어렵지 않은 언어로 친절하게 곡의 의미를 짚어나간다.
이 책은 '사랑과 이별의 순간'을 비롯해 6개의 대분류로 플레이리스트를 나누고, 대분류 아래에 다양한 상황과 감정에 어울리는 32개 소분류로 플레이리스트를 세분화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이 책은 곡에 관한 설명에 그치지 않고 스트리밍 사이트 벅스뮤직과 연결된 QR코드를 삽입해 책을 읽으면서 편하게 곡을 감상할 수 있게 배려했다.
우선 수록곡에 관한 자신의 의견과 저자의 의견을 비교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플레이리스트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지만, 서로 다른 주관이 만나 교집합을 이뤘을 때 특유의 즐거움이 있다.
음악 좋아하는 사람들이 밤새도록 음악 이야기를 해도 질리지 않는 이유다.
이를테면 천용성에게서 브로콜리너마저를, 김제형에게서 윤상과 통하는 점을 짚는 해설에서 "나도 그렇게 들었는데"라며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체리필터의 '낭만고양이'로 저자와 다른 2002년의 기억을 추억을 더듬게 하고, 자우림 초기 앨범의 야생성을 좋아한다는 의견에선 "나도 나도!"를 외치게 한다.
퀸의 'Love of my life'를 다루며 심은하 주연 MBC 드라마 'M'을 언급할 땐 자연스럽게 무더웠던 1994년 여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보다 더 큰 재미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곡에 관해 더 많은 걸 알게 되는 재미다.
김도향의 '바보처럼 살았군요'을 둘러싼 소유권 비화를 접하며 노래의 주인은 따로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최성수의 '풀잎사랑'이 서울올림픽 괌 선수단 입장 때 흘렀다는 뒷이야기, 이광조의 데뷔가 홍대 미대와 서울대 미대의 체육대회 뒤풀이 자리 때문이었다는 뒷이야기 등은 나중에 술자리에서 써먹기에 좋은 TMI다.
'비 오는 날의 수채화'에 강인원이 작곡뿐만 아니라 노래까지 부르게 된 계기가 김현식의 건강 문제 때문이었음을 알게 될 땐 기분이 무거워진다.
다섯손가락이 '젊음의 행진' 오디션 합격 때문에 대학가요제에 못 나갔다는 비화에선 피식 웃음이 나온다.
작사자와 작곡자뿐만 아니라 편곡자의 의미를 짚은 해설도 의미가 있다.
조덕배의 곡을 편곡한 변성용의 커리어, 보아의 '넘버원' 가사에 얽힌 뒷이야기, 노이즈의 히트곡 '상상속의 너'와 '어제와 다른 오늘'의 편곡자가 김건모였다는 정보 등은 새삼 곡을 다시 주의 깊게 듣게 만드는 기록이다.
무심코 지나쳤던 뮤지션이나 곡을 알게 해주기도 한다.
내겐 나태주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백효은과 오창민의 '끝끝내', 얼바노 같은 뮤지션이 그런 경우였다.
학창 시절, 용돈을 아껴 모아 산 '정품' 앨범을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듣는 건 사치였다.
나는 앨범을 몇 차례 반복해 들은 뒤 그중 마음에 드는 곡을 메모해 리스트를 만들었다.
리스트가 완성되면 쉬는 날에 더블데크 앞에 앉아 마치 의식을 치르듯 몇 시간에 걸쳐 공테이프로 내가 '픽'한 곡을 옮겼다.
세상에 하나뿐인 플레이리스트를 담은 공테이프가 워크맨 속에서 늘어질 때까지 나와 함께 했고, 귀하신 몸인 '정품' 앨범은 감히 케이스에 기스가 나지 않도록 보관에 신경을 썼다.
이후에도 매체의 형태만 달라졌을 뿐 음악을 듣는 방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MP3플레이어가 대세였던 시절에는 제한된 용량의 메모리에 어떤 파일을 집어넣느냐를 고민했고, 스마트폰으로 스트리밍을 즐기는 요즘에는 플레이리스트에서 수시로 곡을 빼거나 집어넣는다.
자신만의 플레이리스트를 만들기 점점 편한 세상으로 변하고 있다.
편한 음악 스트리밍 앱에도 맹점이 있다.
앱이 AI로 추천하는 곡은 기가 막히게 내 취향에 맞지만, 추천곡에만 매몰되면 AI는 또 비슷한 음악을 기가 막히게 골라와 다른 세계를 가진 음악과의 접근을 부드럽게 차단한다.
자신의 플레이리스트에 뭔가 문제가 있음을 느꼈다면, 이 책은 자신이 들어온 음악을 되새김질하고 플레이리스트를 재정리하는 계기를 마련해줄 것이다.
매일 의무처럼 신보를 허겁지겁 듣다가 오랜만에 책을 통해 음악을 즐길 수 있었다.
기대 이상으로 즐거우며 유익하다.
각 잡고 앉아 짧은 시간에 눈으로만 읽는 독법은 이 책과 어울리지 않는다.
며칠에 걸쳐 플레이리스트를 따라 들으며 읽기를 추천한다.
나도 그렇게 읽었다.
p.s. 나중에 2쇄를 찍어 17페이지 8번째 줄의 '김성욱'을 '이성욱'으로 고칠 날이 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