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 준비 과정이란 게 언제 어디서 내릴지 모른 채 2호선 순환열차를 타고 뱅뱅 도는 일과 비슷하다.
괜찮은 일자리는 적고, 그 일자리를 원하는 사람은 많으니, 전공과 적성을 살리는 취업은 언감생심이다.
꿈과 이상만 좇다간 밥을 굶기 십상이니, 거지꼴을 면하려면 적당히 현실과 타협해야 한다.
여기서 비극이 시작된다.
회사라는 조직은 직원에게서 월급 이상을 빼먹으려고 달려드는데, 직원은 일에서 밥벌이 외엔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니 말이다.
취업 빙하기인데도 매년 신입사원의 1년 내 퇴사율이 점점 높아지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10여 년 동안 몇몇 직장을 경험하고 깨달은 사실은, 직종과 규모에 상관없이 직원이라는 존재는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는 부품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과연 대한민국에 직원의 개성과 자율을 반기는 조직이 있는지 의문이다.
대체할 수 없는 직원의 존재는 조직의 갑이라는 지위를 흔들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까지 몸통을 흔드는 꼬리를 곱게 바라보는 조직을 본 일이 없다.
그래.
조직이 갑이라는 걸 인정한다고 치자.
그냥 일만 시키면 마음이 편할 텐데, 일 외에도 신경을 써야 할 일이 지뢰처럼 튀어나온다.
누군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한 쓸데없는 업무 프로세스가 많고, 그런 예쁜 쓰레기를 처리하기 위해 직원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연기를 해야 한다.
아침 일찍 일어나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와 지하철에 몸을 욱여 넣고 출근해 피곤한데, 진상들에 머리를 조아리고 온갖 갑질과 꼰대질을 참아내야 하고, 성과를 내놓으라는 압박은 기본 옵션이다.
직장이라는 조직은 화려한 조명도, 환호하는 관객도 없는 어둡고 살벌한 무대다.
“등장하자마자 퇴장하고 싶은 무대에 선 기분이다."
이 작품을 읽으며 가장 공감한 문장으로, 주인공이 직장에 출근하며 느낀 심정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연극배우가 꿈이었지만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출판사 직원으로 취직한 20대 여성이다.
작가는 대학 시절에 연극에 매달렸던 과거의 주인공과 회사원인 현재의 주인공을 번갈아 보여주며,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청춘의 고단한 일상을 핍진하게 그려낸다.
"혹시 CCTV로 우리 회사를 엿본 거 아냐?", "내 뒤를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기록한 거 아냐?"라는 반응을 보이는 독자가 적지 않을 듯하다.
주인공의 선택은 자신을 회사라는 무대에 오른 배우라고 여기며 버티는 거다.
이렇게 말을 늘어놓으니 우울한 작품 같지만, 작품의 전체적인 톤은 내용과 반대로 따뜻하고 유쾌하다.
원고량이 상당하지만 가독성이 훌륭해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는 재미있는 작품이다.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예측이나 희망대로 이뤄진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어린 시절 장래희망은 문방구 주인이었고 사춘기 땐 로커를 꿈꿨는데,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 전공과 상관없는 기자로 일했고, 급기야 마흔에 퇴사해 소설을 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학창 시절에 적성 검사를 하면 늘 기술자나 농부가 나왔는데, 단 한 번도 검사 결과와 어울리는 밥벌이를 해보진 못했다.
지금까지 결과만 보자면 나는 장래 희망도 전공도 적성도 전혀 못 살린 채 여기까지 온 셈이다.
그래서 그런 걸까.
어느 곳에 속해 있든 내 머릿속엔 늘 딴생각만 가득했다.
공부에 집중해야 할 학창 시절엔 기타를 만졌고, 전공 공부를 해야 할 시간에 다른 전공 과목을 들었고, 기자로 일하던 시절엔 다른 밥벌이는 없나 늘 한눈을 팔았고, 소설을 쓰는 요즘에는 콘텐츠 사업으로 돈을 벌 방법이 없나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있다.
아무튼 지금 나는 삶이 지금과 달라지기를 기다리며 여기저기 영역 표시를 하는 중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가 의미심장하다.
희곡의 두 주인공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고도'라는 이름의 사람을 기다리지만, 그들은 '고도'가 누구이고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베케트 자신도 '고도'가 뭔지 모른다고 말했다지?
그런데도 노벨문학상을 탔다.
삶이란 무언가를 간절하게 기다리는데, 그 무언가의 정체도 모른 채 지나쳐버리는 일상의 연속이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을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게 최선이 아닐까.
'고도'를 찾지 못하고 삶을 마쳐도, 지나간 시간을 후회하지 않도록 말이다.
이 작품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그런 생각을 해봤다.
나는 국민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일기를 쓴 일이 (거의) 없다.
내가 일기 쓰기에 흥미를 잃은 이유는 일기가 숙제였기 때문이다.
쓰지 않으면 교사에게 혼나고, 썼어도 교사 마음에 들지 않으면 혼나는 숙제.
돌이켜 보면 그 시절에 내가 겪었던 교사 중엔 인격 파탄자라고 불러도 모자라지 않을 사람이 꽤 많았다.
나는 오늘날 교권이 떨어진 이유 중 하나가 학창 시절에 개차반인 교사를 경험한 학부모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처음으로 공부에 재미를 느낀 때는 도서관에서 혼자 3수를 준비할 때였다.
학교는 희한하게 재미있는 걸 재미없게 만드는 재주를 가진 공간이었다.
그랬던 내가 일기의 가치를 느끼게 된 계기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일기장 때문이다.
16년 전 나는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일기장을 발견했다.
당시 유품 대부분을 태우거나 버렸는데, 일기장만큼은 차마 버릴 수 없었다.
어머니가 남긴 생생한 흔적이 담겨 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차마 읽을 용기가 나지 않아 일기장을 오랜 세월 책꽂이에 꽂아둔 채 외면했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 속에서 겨우 빠져나오고 있는데, 그걸 보면 다시 슬픔 속으로 빠져들 것 같아 겁이 났기 때문이다.
제 나이 마흔이 되어서야 겨우 일기장을 펼칠 용기가 났다.
그 속에는 내가 아는 ‘어머니’가 아니라 낯선 ‘여자’가 있었다.
나는 일기장을 통해 19살부터 45살까지의 어머니를 만났다.
이제 돌아가신 어머니의 나이와 가까워진 나는 한 ‘여자’로서의 어머니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나는 장편소설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를 썼다.
만약 어머니의 일기장을 버렸다면, 그 일기장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죽을 때까지 오해하며 살았을 테다.
잡설이 길었는데, 이 산문집에 관한 감상으로는 이런 개인적인 이야기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었다.
작가는 13살부터 지금까지 50년 동안 150권이 넘는 일기장에 꾸준히 일기를 써 왔다.
이 산문집은 작가가 평생 써 온 일기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의 일기도 일부 발췌돼 담겨 있지만, 주된 내용은 작가가 경험한 일기 쓰기의 즐거움이다.
일기 속에서 작가는 온전히 주인공이다.
작가에게 일기장은 펼치면 언제든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는 타임머신이고, 어떤 힘든 상황에서도 나를 나로 살 수 있게 지탱해주는 든든한 친구다.
이 산문집을 읽는 내내 어머니의 일기장이 페이지에 겹쳐 보였다.
어머니에게도 일기장은 그런 존재였던 거다.
완독 후에 나도 일기를 꽤 오래 써왔음을 깨닫게 됐다.
작가에 따르면 아무때나 생각나는 대로 기록하면 그게 일기다.
그렇다면 내가 블로그,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에 오랫동안 끼적여 온 많은 글도 일기인 셈이다.
끼적인 날짜와 시간까지 정확하게 기록돼 있으니 이보다 확실한 일기가 없다.
그곳에 내가 끼적인 글을 시간순으로 살펴보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꽤 많이 변했음을 알았다.
쓰는 데 의무감이나 부담을 가지지 말라고.
매일 써도, 몇 달에 한 번 써도 상관없으니 진실하게만 쓰라고.
진실하게 쓰는 것이 일기의 전부라고.
따뜻하고 감동적인 산문집이었다.
정말 잘 읽었다.
작가의 이름을 가리고 읽으면 한국 소설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배경은 중앙아시아 지역인 키르기스스탄이고 등장인물은 현지인이다.
이국적인 풍경과 정취가 마지막 페이지까지 이어진다.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이 깊고, 이를 다루는 문장이 섬세하고 우아하다.
보편적인 주제를 다루는데, 이를 표현하는 방식은 낯설어 신선했다.
이런 작품을 쓴 작가가 젊은 작가이고, 심지어 이 작품이 작가의 첫 장편이라니.
많이 놀랐다.
이 작품은 키르기스스탄에서 어학연수를 했던 한국인 '윤'이 현지 하숙집 주인의 부고를 전해 듣고, 그로부터 수양딸의 유품인 공책을 전달받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후 펼쳐지는 이야기는 '윤'이 공책을 한국어로 번역한 내용의 연속인데, 따로 '윤'의 코멘트가 더해지지 않아 읽다 보면 공책의 주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기분이 든다.
우리는 대단한 사람으로 살지 못한 채 늙고 병들어 사라질지라도, 누군가에게 이야기로 기록되는 한 사라지지 않는다.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먼 나라에 도착한 공책이 생명력을 얻으며 전하는 메시지다.
돌이켜보니 나를 가장 많이 바뀌게 한 계기는 갑작스러운 이별들이었다.
책을 덮으며 지난 이별들의 의미와 그 이별들이 내게 남긴 게 무엇인지 생각해봤다.
내 이별은 늘 갑작스러웠고, 나는 제대로 애도할 시간을 갖지 못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별의 상처에서 벗어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소설, 특히 장편소설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를 쓴 뒤에야 애도의 시간을 갖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이 작품을 읽으며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 초고 집필을 마쳤을 때와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나는 죽을 때 얼마나 많은 이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을까.
내 이름은 과연 얼마나 많은 이의 마지막 기억에 남을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 가슴이 뻐근했다.
아름다운 소설이다.
우선 작품의 설정부터 살펴보자.
느닷없이 광화문 광장에 우주선이 불시착한다.
자몽을 닮은 외계인이 우주선에서 나와 한국어로 구성된 알아들을 수 없는 말 한마디를 남긴 후 침묵한다.
군이 광장을 통제하는 가운데, 우주선과 외계인을 연구하기 위해 여러 분야 전문가가 모여 머리를 맞대지만, 딱히 소득은 없다.
그러던 중 자몽 전문가인 전직 아이돌 걸그룹 멤버, 물리학자 출신 신부, 허당인 천체물리학자 교수가 광장에 전문가랍시고 모이고 여기에 유명 북튜버 소녀, 어린 시절에 과학자를 꿈꿨던 공무원이 끼어든다.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전혀 예상되지 않는 골때리는 설정 아닌가?
우주선이 불시착했든 말든 대한민국 국민의 일상은 평온하고, 외계인과 지구인의 충돌도 없다.
소소한 인물들이 외계인이나 우주선을 다룬 SF에서 흔히 보이는 이런저런 클리셰를 비껴가며 소소하게 좌충우돌하는 활극이 유쾌했다.
읽는 내내 웃기고 시끄러웠다.
파편처럼 흩어진 뜬금없는 이야기가 많아 어떻게 끝을 맺을지 불안했는데, 큰 무리 없이 이야기를 잘 모아 매듭을 짓는다.
정교한 서사나 개연성, 무게감 있는 주제를 기대한다면 난감할 작품일지도 모르겠다.
머리를 식힐 만한 가볍고 가독성이 좋은 장편소설을 찾는다면, 이 작품은 괜찮은 선택이다.
나는 이 작품을 대단히 재미있게 읽었다.
이 작품은 멸종된 동물을 복원했다가 인류에게 치명적인 바이러스까지 함께 복원돼 벌어지는 심각한 사태를 해결하는 과정을 다룬다.
이쯤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이 작품은 과학기술의 진보와 발전이 과연 인류에게 옳은 일인지 묻는다.
치밀하게 쌓아 올려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터트리는 반전이 놀라웠다.
정말 많이 놀라서 몇 차례나 반복해 반전 부분을 읽었다.
내가 장담하는데 작가는 이 반전을 쓰며 엄청난 희열을 느꼈을 것이다.
이 작품을 읽고 과학기술의 진보와 발전이 계급 사회를 공고하게 만들고, 사회적 약자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희생양임을 자각하지 못한 채 불쏘시개로 쓰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특히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 담긴 문장은 마치 묵시록처럼 읽혔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세상이 더 좋아진다면, 당연히 그럴 가치가 있다고 믿는 게 인간이다. 그 누군가가 자신이 아니어야 한다는 절대적 조건하에서 말이다."(253페이지)
자연스럽게 코로나 펜데믹 사태를 떠올리게 하는 문장이었다.
펜데믹 이후 코로나 예방과 치료를 위한 많은 의약품 개발이 이뤄졌다.
하지만 어떻게 개발이 이뤄졌는지 그 과정을 자세히 아는 사람은 드물다.
모르긴 몰라도 수많은 동물 실험이 이뤄졌을 것이다.
이에 관해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을 테다.
하지만 내 가족의 목숨이 달려있는데도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는 주장을 할 수 있을까?
심지어 동물이 아닌 인간을 실험 대상을 삼는다고 해도?
작품을 관통하는 메시지가 무겁고 이를 펼쳐내는 서사가 쓸쓸해 책을 덮은 뒤 여운이 길었다.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주인공의 마지막 선택이 서글펐다.
그런 선택 외엔 방법이 없었느냐고 따져 묻고 싶다가도, 그런 선택 외엔 방법이 없었겠다며 공감하기도 했다.
굳이 이 작품에 '청소년 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붙일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뭔가 '청소년 소설'스러운 표지 디자인과 타이틀이 독자 범위를 줄이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히트 작가의 신작인데 괜한 우려인가?
청소년 소설, SF소설이라는 범주에 묶을 필요 없이 그저 훌륭한 장편소설이었다.
이 작품은 세계적인 고인돌 밀집 지역인 고창을 배경으로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가 교차하는 혼란기를 그린다.
누가 먼저 강한 무기를 손에 넣느냐에 따라 무리의 운명이 정해지는 절체절명의 시대.
역사 이래 늘 그래왔듯이 전쟁은 약자에게 잔혹하다.
이 작품의 주인공 역시 어린 소년인데도 불구하고 전쟁에 끌려가 척후병 역할을 맡고 있으니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모인 곳에선 으레 편 가르기가 벌어지고, 혼란의 강도에 비례해 갈등의 폭도 커진다.
주인공이 사는 마을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갈등은 대부분 상호 이익 간의 충돌이다.
노사갈등을 예로 들어보겠다.
노동자 측은 노동시간을 줄이면서 사측으로부터 최대한 많은 임금과 복지를 쟁취하려 투쟁하고, 사측은 인건비를 가능한 한 줄이면서 매출을 늘리기 위해 머리를 굴린다.
그런 이익의 충돌을 조절해 균형을 맞추는 게 정치의 역할이다.
우리는 싫든 좋든 의견이 다른 사람과 공존하며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이를 선악 구도 프레임에 집어넣어 한쪽을 악으로 만드는 순간 공동체는 무너진다.
멀리 가서 실례를 찾을 필요도 없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퇴임 전까지 높은 지지율을 유지했는데도, 민주당이 정권을 내준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위험을 무릅쓰고 의견이 다른 세력을 오가며 절충안을 끌어내려 애를 쓴다.
독자인 아이들은 맑은 눈으로 정치가 나아가야 올바른 방향이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될 테다.
동화는 종종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에게도 좋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자화상' 중)
"을마나 크다란 슬픔으로 태여났기에, 저리도 징그라운 몸뚱아리냐"('화사' 중)
"해와 하늘빛이/문둥이는 서러워/보리밭에 달 뜨면/애기 하나 먹고/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문둥이' 전문)
"아스럼 눈 감었든 내 넋의 시골/별 생각나듯 돌아오는 사투리."('수대동 시' 중)
시를 읽을 줄 모르는 나도 이 시집에 실린 시어의 감각이 얼마나 탁월한지 알겠다.
나온 지 80년도 넘은 시집인데 구리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어디 이 시집에 실린 시뿐인가.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 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라던 '견우의 노래',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던 '푸르른 날', '서으로 가는 달같이는/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던 '추천사' 등...
아주 오래된 시집의 페이지를 넘기다가 한 방 크게 얻어맞았다.
그렇다고 '마쓰이 오장 송가'나 전두환 생일 기념시 '처음으로'까지 아름답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추리소설 작가가 예술 작품을 닮은 오래된 총을 둘러싼 살인 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이 이 작품의 큰 줄기다.
이야기는 총기 전문 잡지 인턴기자가 사장과 차장을 사살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여기에 정체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인터넷 카페, 과거에 근무했던 직원의 의문사, 의문사와 관련 있는 외부인, 잡지사 직원들의 수상한 행보가 가지를 뻗어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구조가 복잡하고 예상치 못한 반전이 매력적이었다.
이야기가 끝이 보이는데도, 어떻게 끝날지 예상이 되지 않아 흥미로웠다.
예상이 모두 처참하게 빗나가 당황스럽기도 했다.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이 마치 어려운 퍼즐을 맞추는 듯해 퍼즐의 모양이 어떻게 완성될지 읽는 내내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작품 초반에 패를 까고 시작한 터라 정해진 결론을 향해 나아갈 줄 알았는데, 막판에 뒤통수를 정말 세게 맞았다.
여기에 대한민국 문학에서 다뤄지지 않았던 총기 합법화 논의, 인간 내면의 폭력성, 친일파 청산 문제 등 묵직한 소재가 절묘하게 엮여 있어 사회파 소설 성격도 상당히 가지고 있다.
메시지의 무게감을 잃지 않으면서 장르 소설의 재미를 잡은, 낯설고 개성 있는 작품이었다.
읽는 내내 술 냄새가 진동했던 작품이다.
이 작품의 배경이 강원도의 허름한 바닷가 술집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은퇴 후 노년으로 접어든 주인공이 그의 생을 잘 아는 미스테리한 청년과 예고 없이 술집에서 만나 나누는 대화가 이 작품을 이끄는 물줄기다.
물줄기는 과거에서 현재로 흐르고, 청년은 연대기 순으로 주인공의 생을 흔들었던 사건에 닻을 내린다.
이를 통해 주인공이 생존이라는 핑계로 묻어뒀던 아픈 기억과 시대상이 선명하게 다시 제 모습을 드러낸다.
과거와 직면하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를 빌릴 가장 쉬운 방법은 술 아니겠나.
깨어나면 후회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이 작품의 전면에 흐르는 정서는 변방의식과 회한이다.
대한민국 인구 절반이 수도권에 거주한다.
수도권 과밀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 지 오래됐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간과하는 현실이 있다.
여전히 인구 나머지 절반은 지방에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이 작품은 50년대 삼척에서 태어나 70년대 강릉에서 대학에 다닌 주인공을 통해 당대에 서울이 지방에 미친 영향과 지방이 서울을 바라보는 복잡한 감정을 세밀하게 보여준다.
이를 통해 70년대와 80년대 현대사의 비극이 지방에 사는 청년과 이어지는 과정을 아프게 들여다본다.
이 작품은 나보다 한 세대 전의 역사를 다루지만 낯설지 않다.
내가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텔레비전으로 접하는 영화와 드라마의 배경은 대부분 서울이고, 중앙언론사는 물론 지방언론사까지도 서울 소식을 지방 소식보다 비중 있게 전한다.
이 때문에 지방에 살면서도 지방의 현실에 어두워지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온라인상에서 이뤄지는 담론을 살펴봐도 지방의 현실을 다루는 목소리는 크지 않다.
지방에도 수도권 못지않게 많은 청년이 살고 있지만, 파편화돼 흩어져 있어 힘 있는 목소리를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현실이 반복되다 보니 뭘 해도 안 된다는 패배의식이 내면에 쌓인다.
지방공동화가 가속화되는 이유다.
이 작품의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머릿속에 기시감이 맴돌았다.
내가 지방에서 태어나 지방에서 일하며 보고 느꼈던 감정이니까.
빛이 있으면 그늘도 있는 법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준 묵직한 작품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후회했던 순간은 언제였나?
만약 그때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이 작품에 실린 여덟 개의 에피소드가 다양한 형태로 이야기를 변주하며 던지는 질문이다.
이 작품은 <달러구트 꿈 백화점>처럼 옴니버스 형식으로 생활 밀착형 이야기를 전개한다.
완전한 허구의 장소를 배경으로 다루는 <달러구트 꿈 백화점>과 달리, <불편한 편의점>처럼 어딘가에 있을 법한 장소를 배경으로 다뤄 현실감을 높인다는 게 이 작품의 개성이다.
에피소드 전체에 작품을 이끌어가는 두 주인공인 바텐더 '문'과 달 토끼 '보름'의 로맨스가 드러날 듯 말듯 은은하게 깔려 있어 이를 따라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자신의 실수로 벌어진 교통사고로 어머니를 잃은 사람, 성공만 보고 달리다가 연인을 놓친 사람, 밥벌이에 매달리다가 꿈을 잊은 사람 등.
이 작품 속 등장인물은 우연에 이끌려 바에 들렀다가 바텐더가 만든 기묘한 칵테일을 마시며 인생에서 가장 후회했던 순간을 만난다.
이 작품을 등장인물이 전생의 기억을 바탕으로 먼치킨이 되는 회귀물이라고 오해하면 곤란하다.
등장인물의 선택은 종종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뤄지는데, 그 결말이 지극히 인간적이어서 설득력이 있다.
그래서 현실적이다.
회귀물이 인기를 끄는 가장 큰 이유는, 대한민국 사회가 낙오자에게 패자부활전을 치를 기회를 좀처럼 주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소설, 영화, 드라마를 통해서라도 과거를 되돌려 인생을 바꾸는 경험을 해보고 싶다는 대리만족의 발현.
하지만 그 끝은 대체로 '현타'로 이어진다.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현실은 '아 씨발 꿈' 그대로이니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소설은 책을 덮었을 때 "내가 만약 작품 속 등장인물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좋은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