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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기원 장편소설 『오빠 새끼 잡으러 간다』(문학세계사)

제목 하나만 보고 펀딩까지 참여했던 장편소설이다.

작가의 전작인 <구디 얀다르크>를 재미있게 읽기도 했고.

<구디 얀다르크>는 한국 문학에서 보기 힘든 디테일을 가진 노동소설이어서 정독했던 작품이었다.

지난 2년 동안 작가가 두문불출하며 장편소설을 여덟 편이나 썼고, 이 작품이 그 첫 작품이라는 소개에 경악했다.

나는 퇴사 후 3년 동안 장편 세 편을 쓰는 일만으로도 완전히 진이 빠졌는데 세상에...


이 작품은 태백과 서울을 배경으로 오빠를 찾아 헤매는 여동생의 행보를 그린다.

주인공은 학창 시절에 투포환선수로 활동하다가 기록에 매달리며 살 수밖에 없는 신세가 싫어 공장에 취직한 노동자다.

아버지는 무책임한 가장의 표본이었고, 어머니는 엉망인 가정을 홀로 건사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책만 읽으며 허송세월하던 오빠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태백에서 사라졌다가 느닷없이 유명 유튜버 변신해 여동생의 레이더에 잡힌다.

여동생은 오빠가 누군가의 조종을 받아 사기꾼이 됐다고 여기고, 오빠를 구하기 위해(라기 보다는 더 사고를 치지 못하도록 잡기 위해) 서울로 떠난다.


그런데 이상하다.

오빠의 정체를 파고들면 들수록 사기꾼 같지 않다.

오빠 주변의 인물들은 그를 사기꾼을 피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사람이라고 말하며 존경심을 드러낸다.

과연 오빠의 정체는 무엇일까?

누군가의 꼭두각시일까, 현자일까, 정말 대단한 사기꾼일까?

더 이상의 스포는 생략한다.


제목만 보면 사고뭉치인 오빠를 잡으러 떠나는 여동생의 활극인데, 내 예상은 절반만 맞고 절반은 틀렸다.

오빠를 만나면 바로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릴 것 같이 구는 여동생은, 사실 오빠를 잃을까 봐 누구보다 걱정하는 가족이다.

지식으로 사기를 치는 세태를 주요 내용으로 다루고 있지만, 실은 신파를 뺀 가족 이야기다.

제목이 준 강렬함 때문에 호쾌한 이야기일 거라고 기대했는데, 기대보다 심심하게 끝나 조금 아쉬웠다.


p.s. 사실 이 작품에서 아쉬운 부분은 내용이 아니라 디자인과 편집이다.

주요 문학출판사가 아닌 출판사가 만든 소설 단행본에선 미묘한 가벼움이 느껴질 때가 많다.

이 단행본을 낸 문학세계사를 비롯해 문학사상, 실천문학 등이 그런 출판사다.

주요 문학출판사보다 규모가 작고 디자인과 편집을 맡은 내부인력의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디자인과 편집만으로도 단행본의 퀄리티가 얼마나 달라 보이는지 모르는 걸까? 알면 외주를 활용하는 게 더 나을 텐데. 아쉽다.

오빠 새끼 잡으러 간다
오빠 새끼 잡으러 간다
김호연 산문집 『김호연의 작업실』(서랍의날씨)

리뷰보다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으려 한다.

2021년 봄, 내가 횡성 예버덩문학의집에 입주 작가로 머물고 있던 때다.

예버덩문학의집을 운영하는 조명 선생님께서 김호연 작가가 새 장편소설 <불편한 편의점>을 출간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조명 선생님은 종종 김 작가가 예버덩문학의집에 머물렀던 시절을 회상하며 부지런히 활동하는 작가라고 칭찬하곤 했다.

마침 예버덩문학의집 서재에 김 작가의 데뷔작 <망원동 브라더스>가 꽂혀있어 꺼내 읽었다.

정말 재미있었다.

왜 이제야 이 소설을 읽었나 싶었을 정도로.

순수하게 재미로만 따지면 <망원동 브라더스>보다 앞서는 장편을 그 이후 단 한 작품도 만나지 못했다.

이후 나는 <연적> <파우스터> 등 김 작가의 작품을 뒤늦게 찾아 읽으며 반가움을 느꼈다.

김 작가 또한 나처럼 소설은 서사가 전부라고 믿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후 내가 전국 곳곳의 작가 레지던시에서 머물며 글을 쓸때마다 김 작가의이름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김 작가는 내가 머무는 레지던시에 늘 나보다 먼저 흔적을 남긴 작가였다.

마침 <불편한 편의점>이 엄청난 인기몰이를 하기 시작하던 때여서 레지던시에 머무는 작가 사이에서도 김 작가는 늘 화제였다.

특히 지난해 여름 토지문화관에 머물 때가 기억에 많이 남는다.

내 옆 방이 김 작가가 <불편한 편의점>을 쓴 공간으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새 장편소설 <정치인>을 드라마 각본으로 각색하는 작업을 하던 나는, 그 방 앞을 오갈 때마다 내게도 대박의 운이 찾아오기를 빌었다.

내가 지난해 겨울에 머무른 담양 글을낳는집은 김 작가가 <불편한 편의점 2>를 쓴 공간이었다.

그곳에서도 나는 각색 작업을 하다가 김 작가가 머물렀다는 방 앞을 오가며 내게도 밀리언셀러의 기운이 찾아오기를 빌었다.


지난 2월 말, 나는 제주 '안녕, 릴라'에서 <정치인> 출간을 위한 최종 원고 작업을 하다가, 준면 씨에게서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김포에 있는 집에 생각지도 못한 작가의 신간 사인본이 도착했다는 소식이었다.

도착한 책은 김 작가의 새 산문집 <김호연의 작업실>이었다.

안면이 전혀 없는 작가가 내게 증정본을 보내는 경우는 드문데, 그 작가가 하필 김 작가라니.

아무래도 내 신작에 좋은 기운이 내려오려나 보다.


끝에 짧게 이 책을 리뷰하자면 작가 지망생에게 정말 좋은 내용이 많다.

작가는 글쓰기를 대하는 마음가짐과 자세, 지금까지 출간한 작품을 써 온 과정, 노동요 등 실전에 바로 써먹을 수 있는 팁을 자세하게 소개한다.

특히 내가 공감한 부분은 '작업실' 그 자체에 관한 이야기다.

왜 작가에게 작업실이 필요한지, 작업실이 창작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생하게 그 이유를 밝힌다.

김 작가가 소개하는 작업실 상당수가 내가 머물렀던 곳과 겹쳐 더 공감하기 쉬웠다.


나 역시 작업실이 없었다면 소설을 쓰기 어려웠을 것이다.

<도화촌기행>은 북한산 보덕사, <침묵주의보>는 광양 무등암,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는 토지문화관, <젠가>는 정읍 권번문화예술원이 없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장편이다.

곧 나올 <정치인>은 유난히 많은 장소에 빚을 졌다.

예버덩문학의집, 프린스호텔, 글을낳는집, 안녕 릴라가 없었다면... 상상하기 싫다.


작가의 일상이 궁금한 독자라면 대단히 흥미로울 산문집이다.

소설 이상으로 재미있다.


김호연의 작업실 - 김호연의 사적인 소설 작업 일지
김호연의 작업실 - 김호연의 사적인 소설 작업 일지
앤설로지 산문집 『작가의 루틴』(앤드)

이 책에는 김중혁, 박솔뫼, 범유진, 조예은, 조해진, 천선란, 최진영 등 현재 활발하게 소설을 창작하는 작가 7명이 자신만의 글쓰기 습관을 풀어낸 산문이 담겨 있다.

직간접적으로 여러 독자를 만나며 깨달은 사실인데, 독자는 작가의 작품만큼이나 작가의 사생활에 관심이 많다.

출판사가 그런 독자의 수요를 간파하고 기획한 책이 아닌가 싶다.


원고지를 집어 던지거나 줄담배를 피우며 얼굴을 구기는 등의 극적인 모습은 없다.

꾸준히 하루를 1초 영상으로 기록하거나(김중혁), 책상 앞에 앉아 서로 다른 종류의 아로마 오일을 바르며 잠을 쫓거나(박솔뫼), 건강 유지를 위해 이런저런 운동을 하거나(범유진), 여행을 떠나거나(조예은), 고양이를 돌보거나(조해진), 카페나 작업실로 가기 전에 5000보 이상 걷거나(천선란), 청소를 마친 후 세수하고 머리를 감거나(최진영).

신해철의 노래 '일상으로의 초대'의 가사를 빌어 말하자면 "산책을 하고 차를 마시고 책을 보고 생각에 잠기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고요하고 또 고요하다.


내가 장담하는데, 소설가의 일상을 쫓아다니며 영상을 촬영하면 정말 재미없는 모습만 담길 거다.

당장 내 모습만 봐도 그렇다.

누군가가 소설을 쓰는 내 모습을 몰래 지켜본다면, 30분도 지나지 않아 하품을 쏟아낼 테다.

하루 종일 노트북에 앉아 뭔가 끼적이다가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는 게 전부이니까.

내가 아는 한 소설가의 일상은 큰 틀에서 대부분 비슷하다.

나는 어느날 갑자기 영감이 왔느니 어쩌니 하는 소설가를 본 일이 없다.

소설을 쓰는 일은 끝이 보이지 않는 지루한 노동에 가깝다. 

소설가를 주인공으로 다룬 영화와 드라마가 보이지 않는 데엔 다 이유가 있다.

하지만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 가장 큰 힘은 결국 그런 지루한 일상을 버티는 데에서 나온다.

넥스트의 노래 '나는 남들과 다르다'의 가사를 빌어 말하자면 "현재도 그만큼 중요"하고 "순간과 순간이 모이는 것이 삶"이니 말이다.


소설가 지망생이 뭔가 창작의 아이디어를 얻고자 읽을 만한 산문집은 아니다.

다만 소설가라는 직업인의 삶은 어떤지 슬쩍 엿보기에는 괜찮은 책이다.

작가의 루틴 : 소설 쓰는 하루
작가의 루틴 : 소설 쓰는 하루
장강명 산문집 『아무튼 현수동』(위고)

이 산문집에 등장하는 현수동에는 가상의 공간과 현실에 존재하는 공간이 뒤섞여있다.

작가는 광흥창 일대라는 도화지 위에 붓을 들이댄다.

어떤 공간은 그대로 도화지에 남고, 어떤 공간은 새롭게 그려진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밥 로스가 그림을 그리며 다양한 썰을 풀듯이 현수동에 살아온 이름 없는 인물들의 삶, 그에 얽힌 다양한 전설(혹은 전설을 향한 태클)과 사건을 따라가며 독자에게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묻는다.

그렇게 작가는 자신이 살고 싶은 동네인 현수동이라는 동네를 만들어 나간다.

현수동은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데 없는, 사랑스러운 공간이다.


내겐 어떤 동네가 현수동을 닮은 공간일까.

이 산문집의 독자라면 자연스럽게 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나는 대전에서 태어났다.

이후 나는 대학에 진학할 때까지 20년 넘게 대전에서 살았고, 대전에서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했으며, 대전에서 첫 직장을 잡아 2년 남짓 다녔다.

내가 대전에서 보내는 세월을 합치면 26년가량이다. 

내 나이가 현재 만 41살이므로, 인생의 3분의 2는 대전 사람으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 정도면 대전 토박이라고 불러도 무방하겠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대전을 향한 애착은 별로 없다.

오히려 내게 고향처럼 뭔가 애틋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공간은 고작 4년을 살았던 서울 용산구 후암동이다.

후암동은 서울의 중심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고즈넉했고, 오래된 동네라는 인상을 풍기는 공간이었다.좁은 골목을 통해 동네가 거미줄처럼 이어졌고, 누가 봐도 동네에 오래 살아온 사람들이 그 골목을 오갔다.

계절마다 골목에 늘어선 화분에서 다양한 꽃이 피어났고, 특색 있는 가게가 발길을 붙잡았다.

공교롭게도 두 번째로 다녔던 직장이 후암동으로 사옥을 옮겨, 나는 걸어서 3분 만에 출퇴근하는 호사를 누렸다.

나는 후암동에 살던 시절에 준면 씨를 만나 결혼했고, 신혼집도 후암동에 잡았다.

하루 종일 후암동에서 지내도 심심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후암동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언젠가 돈을 많이 벌어 인서울할 기회가 오면 꼭 다시 살아보고 싶은 그리운 공간이다.


나는 실제 후암동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내 머릿속에 이상적으로 편집된 후암동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2년 전 여름에 입주작가로  프린스호텔에 머물 때 후암동을 찾은 일이 있는데, 내 기억에 미묘하게 다른 공간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후암동을 소재로 그런 내 생각과 경험을 정리해봐야겠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었다.

그런데 이 산문집이 선수를 쳐서 김이 샜다.

뭐든 먼저 찜하는 놈이 임자다.

아깝다.


아무튼, 현수동 - 내가 살고 싶은 동네를 상상하고, 빠져들고, 마침내 사랑한다
아무튼, 현수동 - 내가 살고 싶은 동네를 상상하고, 빠져들고, 마침내 사랑한다
최정나 장편소설 『월』(문학동네)

최근 몇 년 사이에 읽은 한국 문학 소설집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을 내게 묻는다면, 최정나 작가의 <말 좀 끊지 말아 줄래?>를 첫손으로 꼽겠다.

최 작가의 단편은 마치 소란스러운 술집 옆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쓸데없지만 흥미로운 대화 같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시끄러웠고,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듣기 어려웠는데, 이상하게 끌려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

단편보다 장편을 지나치게 편애하는 내게 <말 좀 끊지 말아 줄래?>는 깊은 인상을 준 몇 안 되는 소설집이었다.

신작이 나오길 기다린 작가인데, 반갑게도 소설집이 아닌 장편소설로 돌아왔다.


작가 특유의 맛깔나는 수다가 여전한데, 이야기를 장편으로 확장하니 수다가 매력적인 장광설로 변신한다.

주인공 없이 다양한 인물들이 느닷없이 끼어들어 저마다 자기 이야기를 쏟아내는데, 계통 없이 떠돌던 이야기들이 끊어질 듯 이어지다가 뒤틀린 시공간 속에서 하나로 뭉쳐 거대한 구조물을 형성한다.

마지막에는 마치 거대한 거미줄을 마주한 듯 압도당했다. 


이 작품은 기술의 첨단에 있는 '미디어 월'을 기술과 대척점에 놓인 환상을 부각하는 요소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미디어 월'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기술로 재현해 영상으로 보여주지만, 영상으로 재현한 상상은 결코 현실로 넘어올 수 없다.

아무리 현실보다 더 현실 같아 보일지라도 말이다.

코엑스 SM타운 외벽에 설치된 대형 LED 스크린 속 파도가 아무리 실감 나도 거리를 적실 수 없듯이.

마찬가지로 현실 또한 '미디어 월' 내부로 넘어갈 수 없다.

SF를 닮은 설정이지만, SF라고 부를 순 없다.

현실을 다루고 있지만, 리얼리즘 소설이라고도 부르기 곤란하다.


작가는 현실과 상상을 뒤섞어 구분할 수 없도록 넘나들다가, 마지막에 이르러 '미디어 월'의 너머에 존재하는 건 벽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독자에게 묻는다.

당신이 알고 있는 자신이 정말 자신이 맞는지 확신할 수 있느냐고.

책을 덮을 때 무언가에 깊게 홀렸다가 깨어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대단히 스타일리시한 장편소설이다.

월 - wall, 최정나 장편소설
월 - wall, 최정나 장편소설
류근 산문집 『진지하면 반칙이다』(해냄)

제목과 달리 진지한 내용이 많다.

힙해 보이고 싶은 아재의 향기를 물씬 풍긴다.

좋아할 사람은 무척 좋아하겠지만, 내 취향은 아니었다.

호불호가 갈릴 표현이 많이 나온다.

다만 곳곳에 등장하는 어머니에 관한 추억은 짠했다.

예술가의 쓸쓸한 장례식 풍경에 관한 이야기는 내 미래를 미리 엿본 것 같아 섬뜩했고.

진지하면 반칙이다 - 나보다 더 외로운 나에게
진지하면 반칙이다 - 나보다 더 외로운 나에게
앤설로지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자이언트북스)

앤솔로지를 읽고 만족한 기억이 별로 없다.

불만족의 가장 큰 이유는 고르지 못한 수록 작품의 질 때문이다.

수록 작품 모두가 마음에 들 순 없겠지만, 가끔 함정 같은 작품이 튀어나오면 읽다가 김이 샌다.

이미 밀리의 서재를 통해 읽은 김초엽 작가의 '수브다니의 여름 휴가', 천선란 작가의 '뼈의 기록' 정도만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작품은 기발한 소재에 비해 지나치게 가벼웠다.

다양성을 강조하는 것도 좋지만, 전체적으로 작품의 톤과 리듬을 맞췄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그래도 고민 없이 스낵처럼 즐기기엔 부담 없는 앤솔로지다.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김홍 장편소설 『엉엉』(민음사)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리는 남자가 이 작품의 주인공이다.

문제는 주인공이 무지개 연못에 사는 개구리 소년도 아닌데, 울기만 하면 전국에 폭우가 내리는 희한한 일이 벌어진다는 점이다.

여기에 금속 내골격과 액체 금속 외피가 별개의 개체로 움직이는 터미네이터 Rev-9처럼 주인공의 본체는 따로 존재하고, 백종원으로 추정되는 이는 홍길동처럼 전국 곳곳에서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다가 대통령에 당선되며, 고양이는 말을 할 줄 아는 쿠팡맨이다.

얌체공이 인조 대리석 바닥에서 튀듯, 예상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이야기를 쫓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가끔 뭔가 잃어버린 것 같긴 한데 무엇을 잃어버린지 몰라 혼란스럽고 슬퍼질 때가 있다.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는 자신이 껍데기 같고.

그렇다면 진짜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

문득 그런 답 없는 센치한 질문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날이 있다.

운다고 현실이 달라지진 않지만, 그래도 엉엉 울면 기분은 좀 개운해지지 않던가.

우는데 무슨 거창한 이유가 필요한가.

읽다가 중간에 "이게 뭔 시추에이션?"하며 갸우뚱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그냥 넘어가자.

어렵게 생각하면 한없이 어렵고, 쉽게 생각하면 한없이 쉽게 느껴지는 작품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하듯, 나 또한 내게 없는 능력을 갖춘 사람을 부러워 해왔다.

똑똑하고 공부를 잘하는 녀석, 잘 생기고 키가 커서 주변에 여자가 끊이지 않는 녀석, 돈 많은 녀석, 집안 좋은 녀석, 일 잘하는 녀석, 기가 막히게 운 좋은 녀석...

세상에 왜 이렇게 부러운 녀석이 많지?


소설가로 사는 지금의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성석제, 박상처럼 유머와 페이소스를 잘 표현하는 작가다.

미문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데, 웃픈 문장은 이상하게 볼 때마다 부럽더라.

이건 따라 하고 싶다고 해서 따라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여러 차례 웃픈 소설을 쓰려고 시도했는데 모두 실패했다.

내가 자전거를 다룬 장편소설 <되면 한다>(가제) 집필을 중단한 이유 중 하나도 그 때문이다.


작년에 읽었던 작가의 전작 <우리가 당신을 찾아갈 것이다>는 내가 한 번쯤은 구사해보고 싶었던 문장을 가득 담은 소설집이었다.

이 장편소설 역시 낯설고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엉엉
엉엉
정지향 소설집 『토요일의 특별활동』(문학동네)

사놓고 깜빡한 채 읽지 않았던 책을 꺼내 읽었다.

이 소설집에 실린 단편의 주인공은 대부분 예술을 전공한 10대 후반부터 20대 초중반에 걸쳐 있는 여성이고, 위태로워 보이는 연애 이야기가 서사의 주를 이룬다.

20세기 말에 남학교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예술과 먼 전공(법학, 컴퓨터공학)을 한 40대 중년 남자인 나는, 멋쩍게 낯선 세계를 몰래 엿본 기분이 들었다.


그 나이대는 성별과 상관 없이 인간적인 호감과 이성으로서의 끌림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지 않던가.

이 소설집은 그 시절에는 몰랐지만, 세월이 흐른 뒤에야 깨닫는 감정을 섬세하게 다룬다.

특히 플러팅과 가스라이팅에 관한 묘사가 상당히 적나라하다.

'베이비 그루피' 같은 단편이 그랬다.

몇 년 동안 음악기자로 일하며 홍대 앞을 자주 드나들었고, 클럽이나 술자리에서 팬과 사귀는 아티스트를 꽤 많이 목격했다. 

갑과 을이 명확한(갑은 늘 아티스트다) 그리 아름답진 않은 관계가 많았는데, 내가 봤던 풍경이 소설에 실감 나게 묘사돼 있어 꽤 놀랐다.


아무래도 나는 학생 신분인 주인공이 등장하는 전반부보다는 사회에서 밥벌이하는 청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후반부를 더 공감하며 읽었다.

발랄한 느낌을 주는 표지만 보고 달려들면 꽤 무거운 내용에 당황할지도 모르겠다.

토요일의 특별활동
토요일의 특별활동
니콜로 마키아벨리 『군주론』(현대지성, 김운찬 옮김)

학창 시절에 무턱대고 읽다가 버티지 못하고 포기한 고전이다.

고전을 공부한다는 마음으로 오디오북으로 며칠 동안 들었는데 와...

이렇게 좋은 책이었다니.


성우가 존댓말로 내용을 읽어주고 각 챕터마다 중세풍의 BGM이 울리니, 마치 내가 당대 이탈리아의 메디치가 귀족이 돼 신하의 조언을 듣는 듯한 기분이 들더라.

만약 이 책을 종이책으로 읽었다면 이런 감흥까진 없었을 것 같다.

내용이 대단히 현대적이어서 500년 전 책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이 책의 내용을 참고해 오늘날 정치에 그대로 적용해도 전혀 위화감이 없지 않을까 싶었다.


이 책이 유명한 이유는 필요에 따라 잔혹하고 비열한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도 된다는 파격적인 주장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수단과 방법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정적을 대상으로만 써야 하며, 그 결과는 반드시 국민의 행복과 안전을 보장해야 하고, 절대 지속해 행사해선 안 된다는 점을 학창 시절엔 배우지 못했다.

놀랍게도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국민의 지지를 받으면서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에 관한 조언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 조언이 이 책의 핵심인데 말이다.

이걸 못해서 모두의 존경을 받는 정부와 대통령이 지금까지 없었구나.

보국안민이 바로 이런 거구나 싶더라.

이 책을 읽지도 않았으면서 오랫동안 했던 오해를 이제야 풀었다.


제17장 '잔인함과 자비로움에 대하여 그리고 사랑받는 것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 나은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는 몇 번이나 돌려 들었을 정도로 압권이었다.

이왕이면 사랑을 받는 게 좋은데, 그럴 수 없다면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게 안전하고, 다만 증오의 대상이 되는 건 피해야 한다는 가르침.

평생 머릿속에 남을 가르침이었다.


군주론 (무삭제 완역본)
군주론 (무삭제 완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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