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싯적에 과학자를 꿈꾸며 <학생과학>이나 <과학동아> 같은 잡지를 열독했던 시절이 있었다.
과학 잡지답게 우주 탐사를 주제로 다룬 기사와 사진이 많이 실려 있었는데, 지금까지 내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 있는 건 튜브에 담긴 우주식량을 짜 먹는 비행사의 모습이다.
식사하는 비행사의 표정이 딱히 즐거워 보이진 않았지만, 나는 그 맛이 정말 궁금해 미치는 줄 알았다.
지금이야 튜브 안의 내용물이 유동식일 테고, 지구에서 차려 먹는 음식보다 맛이 없다는 걸 충분히 짐작하지만, 어린 시절 내 눈에는 그저 맛있어 보였다.
이젠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해 먹는 음식은 식량보다 사료에 가깝다는 걸 알기에, 비행사들이 당시에 얼마나 고생했을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요즘 우주비행사는 과거보다 음식다운 음식을 먹는 듯하지만, 잘 해봐야 동결건조 제품이나 통조림이더라.
매일 레토르트 식품을 먹는 상상만 해도 지겨운데, 먼 훗날 화성 탐사를 하게 될 우주비행사는 어떤 음식을 먹으며 생존하게 될까.
진정한 화성 거주는 정착한 인류가 지구에서처럼 평범한 일상을 보내게 될 때 가능하지 않을까.
이 연작소설집에 실린 여섯 단편은 그런 관점에 따라 화성에 정착한 인류의 삶을 현실적으로 그린다.
미래의 발달한 과학이나 과학기술을 다룬 전형적인 SF를 기대하고 읽는다면 지극히 지구다운 사건과 묘사에 당황스러울지도 모르겠다.
화성에서 처음으로 벌어진 살인사건을 해결해야 하고(붉은 행성의 방식), 뜬금없이 간장게장을 먹고 싶어 고군분투하며(위대한 밥도둑),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사랑이 싹 트고(행성봉쇄령), 심지어 부동산 투기도 한다(나의 사랑 레드벨트).
이 연작소설집을 읽으며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쓸모없는 사람이 화성으로 건너가는 순간부터 문명이 완성된다(김조안과 함께하려면)는 작가의 관점이었다.
정착에 필요한 기술과 능력을 갖춘 사람으로만 채워지면 100년이 지나도 사회가 완성되지 않으며, 쓸모없는 사람이 건너가 다음 단계를 위해 지금을 희생하지 않고 당장 행복해질 궁리를 할 때 비로소 문명이 완성된다는 관점.
이는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관점이었고, 대단히 설득력이 있었다.
과학 기술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하려면, 그 기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까지 고려하고 이에 대응하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인문학적 사고가 필요한 이유다.
내게 이 연작소설집은 먼 훗날 화성에 어떤 사회가 들어설 것인가를 예측하고 인문학적 관점에서 들여다본 훌륭한 보고서로 읽혔다.
연근조림, 순간, 아욱국, 고등어조림, 땡초전, 양꼬치, 골뱅이무침, 순두부, 취하, 오징어볶음, 아귀찜, 청국장, 굴국, 동태찌개, 김치찌개, 깻잎전...
읽기만 해도 침이 고이는 아는 맛들이 크고 작은 일상과 버무려져 시어로 펼쳐지니, 읽으면 괜히 배가 고파지고 기분이 짠해지는 시집이다.
달아오른 숯에 닿은 양꼬치 기름이 연기처럼 피어올라 흩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눈물을 훔치는 어머니를 생각하고(양꼬치), 매콤한 감자 짜글이를 먹으며, 아버지를 선산에 묻고 내려오던 길을 떠올린다(감자 짜글이).
때로는 시 자체가 레시피이기도 하다.
오징어볶음을 만들 땐 식감 살리기 위해 1.5센티 몸통과 다리를 잘라야 한다고 조언하고(오징어볶음), 개성 강한 재료를 하나로 묶어 전으로 만드는 재료는 계란(깻잎전)이라는 식으로.
시집을 덮으며 누렇게 변해 들뜬 벽지와 그 벽지에 튄 김칫국물, 그 남루하지만 따뜻한 방안에 놓인 양은밥상을 떠올렸다.
정겹고 괜히 눈시울을 붉히게 하는 풍경이다.
시집은 소설책보다 얇지만, 시집에 담긴 이야기는 소설책보다 두껍다.
내가 카펜터스(Carpenters)에 관해 아는 건 그리 많지 않다.
'Top of the world' 'Yesterday once more' 등 멜로디가 좋은 히트곡을 여럿 가진 미국 출신 남매 듀오라는 게 내가 아는 전부다.
카펜터스가 활약했던 시대는 1970년대이고, 나는 그때 존재하지도 않았으니, 자세히 아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일 테다.
달달한 음악은 내 취향이 아니기도 했고.
그런데도 이 책을 사서 읽은 이유는 <딥 퍼플> <주다스 프리스트> 등 저자의 전작을 읽으며 쌓인 신뢰 때문이다.
지금까지 록을 주로 다뤄온 저자가 의외의 뮤지션을 다룬 단행본을 냈다면 이유가 있을 테니 말이다.
이 평전은 카펜터스의 멤버인 캐런 카펜터와 리처드 카펜터의 인생을 따라가며 그들의 음악 여정에 담긴 의미를 친절하게 짚는다.
그 과정에서 동원되는 다양한 참고 자료와 문헌이 생생함을 더하고, 저자는 애정을 담은 사견을 곳곳에 보태며 추임새를 넣는다.
나는 음악 관련 책을 읽을 때 늘 그래왔듯이, 이 평전을 읽을 때도 카펜터스의 앨범을 연대기 순으로 들으며 페이지를 넘겼다.
놀라웠다.
과장을 보태자면 카펜터스의 노래 대부분이 내 귀에 익었다.
듣다가 "이게 카펜터스의 노래였어?" 하며 노래를 다시 확인한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음악을 업으로 삼지 않는 내게도 카펜터스의 노래가 이렇게 익숙한데, 프로 뮤지션들의 귀에는 오죽할까.
실제로 이 평전은 활동 당시 평론가들에게 평가절하당했던 카펜터스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재평가받았으며, 오늘날에는 수많은 뮤지션이 카펜터스의 열혈 팬을 자처하고 있음을 밝힌다.
다양한 근거를 바탕으로 저자는 카펜터스가 당대 어떤 뮤지션보다 솔직하게 인간의 감정을 표현했고, 그 때문에 정당하지 못한 비난을 받아왔다고 변호한다.
카펜터스를 잘 몰라도 괜찮다.
이 평전에 실린 플레이리스트가 가이드 역할 해줄 테니 말이다.
이 평전을 읽는 내내 나는 엉뚱하게도 밴드 본 조비(Bon Jovi)를 떠올렸다.
몇 년 전 본 조비 내한 공연에 갔을 때, 나는 밴드의 모든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놀랐다.
본 조비는 학창 시절 내게 '겉'으로는 타도의 대상이었다.
순수한 헤비메탈 세계에 감히 팝을 몇 방울 떨어트린 부정한 존재.
하지만 본 조비의 음악이 귀에 쏙쏙 들어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때마다 나는 간증하듯 더 센 음악으로 본 조비를 씻어내곤 했다.
시간을 거슬러 학창 시절의 나를 만나는 기회가 생긴다면, 뒤통수를 한 대 후려치며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Kill Bon Jovi 외쳤던 밴드들 다 죽었다 이 놈아!"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 포르투갈 전 총리 같은 독재자가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20세기 소년>에 등장하는 '피의 그믐날' 이후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날이 오면 이 작품 속 대한민국과 비슷하지 않을까.
이 작품은 코로나19 같은 팬데믹이 몇 차례 더 벌어지고 경제 위기가 심각해진 2040년대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적당히' 무너진 세상을 겨우겨우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의 일상을 그린다.
작품 속 대한민국 국민의 생활 수준은 계란 한 알 먹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과거보다 열악한데, 디스토피아라고 부르기엔 뭔가 하찮다.
천천히 침몰하는 거대한 배, 천천히 끓는 물 속 개구리 같은.
지속된 경제 위기 때문에 안 그래도 낮은 출생률은 더 낮아지고 노년층이 급증하자 정부는 독신세 부담을 점점 늘린다.
이 같은 설정을 소설로만 받아들이긴 곤란하다.
대한민국은 이미 기혼자가 미혼자보다 각종 소득공제를 더 받는, 소극적 형태의 독신세를 거둬들이고 있다.
또한 여기저기서 독신세 논의도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대놓고 독신세라는 이름은 아니어도 사실상 독신세 역할을 하는 제도가 만들어지고 강화될 가능성이 크다.
작품 속 대한민국 국민은 '집합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이뤄 독신세 부담을 줄이려고 한다.
쉽지 않은 선택이다.
집합가족의 결은 혈연으로 이뤄진 가족과 다르다.
혈연으로 이뤄진 가족과 달리 집합가족은 서로의 쓸모를 증명해야 하고 동시에 실제 가족과 같은 유대 관계를 소망한다.
그러다 보니 집합가족을 찾는 이들이 모이는 '무도회장'은 늘 눈치 싸움으로 바쁘다.
이게 과연 소설로만 그려질 미래일까?
미리 미래를 엿본 것 같은 섬뜩함이 느껴졌다.
과일 한 번 먹는 게 연례행사와 다름없을 정도로 경제 상황이 열악한데도, 대놓고 정부에 불만을 터트리는 이들은 많지 않다.
정부가 언론을 극도로 통제하고, 공연하게 재력을 과시하는 행위를 막아왔기 때문이다.
이웃이 모두 가난하고 부자가 어떻게 사는지 잘 모르니 비교 대상이 없어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마치 중국의 현재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중국은 최근 SNS에 재력을 과시하는 행위를 대대적으로 단속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부자들이 사라질까?
오히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호의호식하며 살지 않을까?
이 작품 역시 부자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은밀하게 더 큰 부를 쌓고 있음을 수시로 암시한다.
그것도 지독하게 불법적이면서 비윤리적으로...
이 작품은 언로를 막은 자본 독재가 눈부시게 발전하는 과학기술과 결합할 때 어떤 살풍경이 벌어지는지를 담담하고 서늘하게 묘사한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변화와 희망의 시작은 개인이라고 이 작품은 강조한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이렇게 제목을 지은 이유가 궁금했는데,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다소 심심한 마무리이지만, 이 마무리보다 더 나은 마무리를 상상하긴 어려웠다.
결론은? 투표를 잘하자.
최근 들어 한국 문학계에서 보이는 중요한 흐름 중 하나는 일하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설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소설이 과거에 없진 않았지만, 최근에 노동을 다루는 소설은 노동 그 자체를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념을 강조했던 과거 노동 소설과 차이를 보여준다.
나는 현실에 발붙인 서사를 사랑하고 그중에서도 땀 흘리는 소설을 편애한다.
그런데 그런 소설을 읽다 보면 일부 노동 현장이 비어있음을 느낄 때가 많다.
그중 하나는 우리 주변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노동인 막노동이 이뤄지는 현장이다.
이는 나를 포함해 작가 대부분이 막노동을 구체적으로 경험한 일이 드물고, 막노동 현장을 오래 경험한 사람은 자기 경험을 굳이 밝히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평생 막노동을 한 아버지는 내게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밝힌 일이 없다.
최근에는 나재필 작가의 <나의 막노동 일기>, 천현우 작가의 <쇳밥일지> 같은 산문집이 소설의 공백을 채우는 모양새다.
막노동만큼이나 소설에서 소외된 노동 현장은 전문직, 그중에서도 여성이 전문직으로 일하는 현장이다.
언젠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이런 문제를 본 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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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했다.
아버지는 현장에서 즉사했고 아들은 중상을 입은 채 병원 응급실로 실려 왔다.
응급실에서 의사가 소년을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난 수술 못 해요. 이 소년은 내 아들입니다.”
의사는 왜 이런 말을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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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의 정답은 "의사가 아들의 어머니"다.
나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답을 찾지 못한 이유는, 의사라는 직업에서 자연스럽게 남성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얼얼한 기분을 느꼈다.
전문직 종사자는 남성이라는 고정관념이 이렇게 무서운 거다.
이 연작소설은 여성 전문직이 일하는 현장을 구체적으로 다룬, 현재 한국 문학계에서 매우 보기 드문 작품이다.
이 연작소설에 실린 주인공은 미국에서 한국의 법대로 스카웃된 교수,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공공기관 센터장, 비엔날레 예술 감독이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꽤 높은 대접을 받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역에서 어느 정도 힘을 쓸 수 있는 직업군이다.
다들 우아한 삶을 살 것만 같은데, 속내를 들여다보면 저마다 겪는 고충이 만만치 않다.
상대방이 대놓고 막 나가면 소리 높여 따지기라도 할 텐데, 점잖은 척 말의 칼로 푹푹 찔러대니 속수무책이다.
주인공들은 부조리를 해결하려면 어떻게든 힘을 키워 더 높은 자리에 앉아야 하고, 이용당하지 않으려면 이용해야 하며, 사랑만으로는 사랑할 수 없다는 걸 알기 싫어도 알아나간다.
여성가족부의 ‘2021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 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 4급 이상 국가직 공무원 중 여성의 비율은 17.8%로 2010년(6.3%)에 비해 11.5%포인트 상승했다.
공공기관, 지방공사와 지방공단 및 500인 이상 민간기업의 관리자 중 여성 비율도 2010년 15.1%에서 2020년 20.9%로 상승했다.
고위직 및 전문직 여성 종사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남성보다 소수라는 점은 변함없다.
정책을 결정하는 집단의 다수가 동질하다는 건 건강한 현상이 아니다.
의도하든 하지 않았든 간에 다수의 시각으로 만들어진 정책은 소수를 자연스럽게 소외시킬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백날 그런 분석을 보여주는 보고서를 쏟아내 봐야 보통 사람은 공감하기 어렵다.
나는 소설이 공감대 형성을 위한 훌륭한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소설 읽기는 가장 저렴하게 다른 삶을 간접 경험하는 방법이니까.
그리고 보고서를 읽고 분석하는 일보다 훨씬 재미있다.
특히 사회 진출을 앞둔 청년에게 이 연작소설을 추천하고 싶다.
덤으로 작가의 전작인 장편소설 <백오피스>도 함께.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존감이 바닥을 쳤던 때가 몇 차례 있는데, 그중 첫 번째가 고등학교 시절이다.
국민학교와 중학교 시절의 나는 반에서 1등을 도맡아 하던 우등생이었고, 앞으로도 1등은 계속 내 몫일 줄 알았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입학해 치른 첫 시험에서 나는 생전 받아보지 못한 등수(반에서 10등 이하, 전교에서 100등 이하)를 받았다.
처음에는 그저 실수라고 여겼는데, 거듭된 시험을 통해 그게 내 본래 실력이라는 점만 더 확실해졌다.
고등학교 3년은 내가 결코 특별한 존재가 아님을 매 시험을 통해 받아들여야 했던 시간이었다.
세상이라는 무대에 주인공의 들러리를 서고 싶은 사람이 과연 존재할까?
하지만 누군가로부터 들러리로 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당당히 그렇다고 말하기는 또 겸연쩍다.
나 또한 고등학교 시절에 열심히 공부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했느냐고 물어보면 그렇다고 말할 자신은 없다.
만약 내가 3수를 시도했을 때 들인 노력을 고등학교 시절에 했다면 3수를 할 일은 없었을 테니 말이다.
돌이켜 보니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최소한의 최선'을 했던 것 같다.
그땐 그 정도 최선을 다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고 느꼈다.
이 소설집에 실린 아홉 작품 속 등장인물은 대체로 그런 사람들이다.
매사에 기운이 넘치는 사람을 보면 부럽고 그들처럼 살고 싶지만, 타고난 성향을 억지로 바꾸기가 쉽지 않은 사람들.
작가는 평범하게 주변인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들의 쓸쓸한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이를 통해 작가는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몫만큼 '최소한의 최선'을 다한 평범한 사람들 때문에 주인공도 존재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조심스레 묻는다.
빛이 있으니 그림자도 있는 것 아니냐고, 그림자는 그림자 나름대로의 역할이 있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답답하면서도 안쓰럽고, 외면하고 싶은데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었다.
문득 오래전에 읽은 '용기'라는 제목의 동시가 이 소설집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넌 충분히 할 수 있어/사람들이 말했습니다/용기를 내야 해/사람들이 말했습니다/그래서 나는 용기를/내었습니다/용기를 내서 이렇게/말했습니다/나는 못 해요"
초지능 안드로이드인 '인봇' 삼남매와 이들을 만든 연구자가 윤리 법정에 오른다.
각 인봇의 이름은 '엑스', '데우스', '마키나'.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들의 능력은 신과 비교될 정도로 대단하다.
'엑스'는 인간의 노동을 돕는 인봇으로 지금까지 맡았던 모든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했다.
'데우스'는 엄청난 지적 능력을 발휘하는 인봇으로 세상 모든 것을 논리적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데 탁월하다.
'마키나'는 인간의 감정을 세밀하게 이해하는 인봇으로 간병에 최적화된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 충격적이게도 이들은 모두 인간을 해치고 말았다.
그야말로 완벽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는 세 인봇은 무슨 이유로 그런 선택을 한 걸까?
작품을 읽기 전부터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설정이다.
이 작품의 매력은 완벽에 다다르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이 어떻게 치명적인 결함으로 이어지는가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는 점에 있다.
이 작품 속에서 인봇들이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한 이유는, 어처구니없게도 논리로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을 최선을 다해 이해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엑스'는 예술 창작 때문에 괴로워하는 작곡가를 돕다가, 그의 고통을 줄이기 위한 선택은 죽음뿐이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무속인을 돕기 위해 파견된 '데우스'는 자신의 논리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갈등하다가 급기야 자신이 무복을 입고 작두를 탄다.
아이를 간병하던 '마키나'는 인간과 인봇이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없는 현실을 괴로워하다가 인간을 인봇처럼 만들려고 시도한다.
세 인봇의 선택은 인공지능이 예술 작품을 창조할 수 있는가, 논리로 증명할 수 없는 종교와 미신을 이해할 수 있는가, 인간과 얼마만큼 가까워질 수 있는가를 차례로 화두를 던진다.
심정적으로는 원고 측의 입장에 동조하고 싶은데 영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인봇들은 인간이 정해놓은 가치중립적 태도를 잊고 인간을 해쳤지만, 이들의 마지막 선택이 인간의 불합리함과 묘하게 닮아있기 때문이다.
인간성을 가져서는 안되는 인봇이 논리적으로 다다른 결론이 이토록 인간적이라니...
이런 아이러니로 인한 비극적인 결과는 과학은 과연 가치중립적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글쎄... 과학이 가치중립적일 수 있나?
인간과 관련한 활동이 가치중립적인 태도를 가지는 게 가능한가?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인문적 활동이고 과학 또한 그 연장선에 있지 않나?
다 읽고 나면 꽤 머릿속이 복잡해질 작품이다.
독서 토론 모임에 이 작품이 주제로 오른다면 꽤 시끄러운 자리가 마련될 듯하다.
30년 가까이 기자로 살아온 중년 남자가 준비 없이 사표를 던졌다.
평기자 시절에는 굵직한 기자상을 많이 받았고, 데스크를 거쳐 '기자의 꽃'이라고 불리는 편집국장 자리에도 앉아봤다.
사실상 떠밀리듯 낸 사표였지만, 살아오면서 나름 콧방귀를 뀌어봤으니 나오면 어떻게든 살아질 줄 알았다.
하지만 세상은 나이 든 청춘에게 관대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일용직 알바와 식당 주방보조를 전전하며 재취업을 시도한 끝에 도착한 곳은 막노동 현장이었다.
막노동은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노동 형태이지만,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한민국 사회가 막노동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기 때문일 테다.
이른바 '노가다'라고 불리는 막노동 현장은 마치 인생 막장인 사람들이 모인 곳 취급을 받아왔다.
이런 세간의 인식 때문에 막노동을 하는 사람이 자기 일을 누군가에게 대놓고 설명하는 경우가 드물다.
내 아버지도 그랬다.
아버지는 평생 막노동을 하셨는데, 내게 자신이 하는 일을 설명한 적이 없다.
나 또한 아버지가 현장에서 어떻게 일하는지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아버지는 땀냄새와 술냄새를 짙게 풍길지언정 늘 옷만은 깔끔하게 갈아입고 귀가했다.
그 때문에 나는 어렸을 때 아버지의 직업을 몰랐다.
그저 땀냄새와 술냄새가 유독 짙은 회사원이라고 여겼다.
최근 들어 출판시장에서 다양한 직업 산문집이 주목받고 있지만, 막노동을 본격적으로 다룬 산문집은 천현우 작가의 <쇳밥일지> 정도만 눈에 띌 뿐이다.
이 산문집은 흔하지만 지금까지 주제로 거의 다뤄지지 않았던 막노동을 다룬다는 점에서 귀중한 기록이다.
작가는 자신이 막노동을 바라보는 인식도 세간의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반성하고, 막노동판에서 인생 후반전을 시작하며 경험한 현실과 그 안에서 찾은 희망을 담담한 필치로 보여준다.
작가가 경험한 막노동 현장은 자기 일만 부지런히 하면 되고, 윗사람 눈치 볼 일도 없고, 승진 경쟁도 없고, 일한 대가가 정확하게 나오는 등 합리적인 공간이었다.
작가는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으며, 막노동은 그들에게 새로운 시작을 위한 생존의 몸부림이었다고 고백한다.
회사 부도 후 편의점 창업 자금을 모으는 중년 가장, 고향에서 식당을 개업할 준비를 하는 청년, 농한기를 맞아 놀지 않으려는 농부...
그들이야말로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는 사람들이라고 말이다.
쓸모없는 경험은 없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페이지 곳곳에서 오랜 기자 경력이 빛을 발한다.
작가는 고용 형태에 따라 주어지는 업무와 권한, 임금 지급 체계, 불합리한 관행, 원청의 규모에 따라 달라지는 현장 분위기 등을 마치 르포 기사를 쓰듯 상세하게 묘사해 현실감을 더한다.
조선업 노동자 감소, '인분 아파트' 사건의 원인 등에 관한 분석에선 불편부당한 태도를 유지하려는 언론인의 자세가 엿보인다.
편견과 무례함은 대체로 무지에서 온다.
조금이라도 상대방의 처지를 알고 이해하면, 쉽게 편견을 가지거나 무례해질 수가 없다.
이 산문집은 막노동 현장 르포이자 일자리 위기에 내몰려 돈 들어갈 곳은 많은데 돈 들어올 곳은 없는 중장년층의 현실을 보여주는 훌륭한 보고서이기도 하다.
이 산문집을 읽은 후에는 막노동 현장을 막장이라고 깎아내리거나 기성세대를 쉽게 꼰대라고 부르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한번 밑동이 잘린 나무는 이듬해 잘린 그루터기에서 곁가지들이 뻗친다. 곁가지가 다시 나무가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곁가지에도 이파리는 돋아난다. 은퇴한 중장년들의 삶도 밑동이 잘린 나무나 다름없지만 생명력이 있기에 다시 곁가지를 뻗치고 이파리를 틔울 수 있다. 우리는 낡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워지고 있는 것이다.”(261페이지)
나는 이 산문집을 통해 아버지가 평생 경험해 온 현장을 간접적으로나마 알게 됐다.
술자리에서 아버지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아졌다.
훌륭한 직업 산문집이다.
배달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는 무명 화가가 느닷 없이 자신을 후원하겠다는 제안을 받는다.
제안한 곳은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미국의 한 재단인데, 어이없게도 재단의 주인이 '로버트'라는 개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개다.
犬. DOG. 멍멍이.
'로버트'가 무명 화가의 그림을 '픽'했단다.
대신 조건은 하나, 지원받아 완성한 작품 중 하나를 소각해야 한다.
소각할 작품은 '로버트'가 정한다.
'로버트'가 '픽'해 작품을 소각 당한 작가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티스트로 발돋움하고, 해당 작가의 작품 가격은 큰 폭으로 뛰어오른다.
그런데 사람도 아닌 개의 안목이 정말 정확할까?
개의 언어를 통역해 주는 사람과 기계가 있다지만, 작가와 개가 정말 제대로 소통하고 있는 건가?
읽기 전부터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기상천외한 설정 아닌가?
이 소설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예술이란 무엇이고, 예술가란 어떤 존재인가"가 되겠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소각하고 싶지 않아 저항하지만, 소각이라는 강렬한 퍼포먼스가 있어야 작품이 살아남고 작가의 위상도 올라가는 아이러니.
이런 아이러니 앞에서 작가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예술가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어디까지 타협할 수 있을까?
예술에 가치를 부여하는 존재는 누구인가?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내 안에 여러 질문이 쌓였다.
처음엔 고작 개가 선택한 한 작품만 태우는 건데 어려울 게 뭔가 싶었는데, 마지막엔 작가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건 작가가 존재하는 이유와 결부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작가들끼리 모인 술자리의 이야기 주제가 신세 한탄으로 흐르는 경우는 많지만, 그 어떤 작가도 자신이 작가가 됐다는 사실을 후회하는 걸 본 일이 없다.
그저 자신이 원하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괴로워할 뿐이다.
수입과 별개로 작가는 내가 지금까지 본 자기만족도가 가장 높은 직업이다.
얼마 전에 진행한 인터뷰에서 앞으로 작가로서 어떤 목표가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그때 나는 많이 안 팔려도 좋으니 '내'가 진심으로 만족할 수 있는 작품을 하나라도 쓰고 싶다고 답했다.
아무리 대단한 지원을 받았어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들어 가는 작품을 무력하게 바라보는 작가가 자존감을 지키는 게 가능할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명성을 누릴 수 있겠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얻은 명성이 무너진 자존감을 세울 수 있을 만큼 가치가 있을까.
이 소설도 재단의 지원을 받아 유명해진 작가들이 이후 소각된 작품을 능가하는 새로운 작품을 내놓지 못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자존감이 무너진 작가는 자신이 만족하는 작품을 내놓을 수 없다.
대한민국에서 소설을 쓰는 작가 중에서 가장 많은 아이디어를 가진 작가를 한 명만 꼽으라면 윤 작가를 꼽겠다.
기막힌 상상력, 파격적인 설정, 심각한 상황을 심각하지 않게 표현하는 재기발랄함.
이 작품에서도 작가의 그런 장점이 빛나지만, 전작과 비교해 훨씬 철학적이다.
책을 덮을 때쯤에는 기상천외한 설정을 잊어버릴 정도로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는 작품이다.
멋진 '예술 찬가'다.
느닷없이 어떤 문장이 머릿속에 떠올랐는데 출처가 가물가물했다.
어디서 읽은 문장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오은 시인의 시집에서 본 듯했다.
시집을 꺼내 첫 장부터 훑어보다가 거의 다 읽을 때쯤 되자 그 문장이 나타났다.
우리네 사는 모습을 통찰하는 문장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웃길 때 웃지 못하고/화날 때 화내지 못해서/우리의 얼굴은 어색하다"('시끄러운 얼굴' 中)
시집을 꺼낸 김에 더 읽다 보니 다른 문장도 눈에 들어왔다.
"만날 때는 안녕하고 싶어서 안녕/헤어질 때는 안녕하지 못해서 안녕"('기다리는 사람' 中), "네 얼굴을 통해서/내 얼굴이 보고 있다/내 얼굴을"('시끄러운 얼굴' 中) 같은 문장이 좋았다.
그러다가 책을 덮는데 문득 출판사 이름이 보여 기분을 잡쳤다.
몇 년 전 나는 며칠 동안 장편소설 <나보다 어렸던 엄마에게>를 들고 직접 문학을 다루는 동네서점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홍보했었다.
그중 한 서점이 아침달이었는데, 책방지기가 나를 잡상인 바라보듯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책을 주문해달라고 부탁하는 게 아니라, 그저 홍보 책자와 명함을 두고 나온 것뿐인데 말이다.
그때 책방지기의 건조한 반응 때문에 마음에 생긴 스크레치가 꽤 오래갔었다.
그 경험 때문에 이후 신간을 들고 동네서점을 돌아다니는 일은 그만뒀다.
그때 기분을 시집에 실린 문장으로 대신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뒤를 돌아보니 선이 그어져 있었다. 넘고 나서야 그것이 보이기 시작했다."('선을 긋는 사람'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