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픽션 플랫폼 파이퍼에 <비전공자의 소설 쓰기>를 연재할 때 참고하려고 읽었던 산문집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읽은 산문집 중에서 이보다 우아하면서도 아름답다는 느낌을 준 작품은 없었다.
마치 김초엽 작가가 낸 첫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읽었을 때 들었던 기분과 비슷했다.
다음 책이 진심으로 궁금한 작가다.
동명의 영화를 보고 크게 실망해 원작까지 멀리했던 소설인데, 뒤늦게 읽고 후회했다.
이렇게 해학적이고, 이렇게 감동적이라니.
중국 현대사를 무리하게 이념과 엮지 않으면서도 감동적인 가족 서사를 만들어낸 작가의 필력에 크게 감탄했다.
몇 년 전에 읽다가 말았던 장편소설이다.
피아노 콩쿠르에 관한 소설인데, 내가 피아노에 관해 아는 게 별로 없으니 읽어도 별 감흥이 없었다.
음악을 함께 들으며 읽으면 감흥이 크지 않을까 싶어 오디오북으로 들었는데, 탁월한 선택이었다.
최고를 향해 나아가는 젊은 천재들의 행보가 이렇게 큰 감동을 줄 줄 몰랐다. 몇몇 부분에선 저절로 눈물이 흘러나와 당황했다.
하지만 내가 가장 감정 이입한 캐릭터는 천재보다는 가장 나이 많은 참가자 다카시마 아카시였다.
천재는 아니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천재와 다른 길을 여는 노력파.
어딘가 모르게 내 소설 쓰기를 닮아서 응원을 멈출 수가 없었다.
여러모로 놀라운 소설이다.
작가가 장편소설 <누운 배>로 데뷔했을 때, 이제 한국 문학계에도 이렇게 훌륭한 기업소설이 나오는구나 싶었다.
동명의 드라마로도 제작된 작가의 출세작 <사랑의 이해>를 읽었을 땐 섬세한 연애담과 감정선을 현실과 기막히게 엮어 기업소설의 범위를 넓히는 필력을 보고 감탄했었다.
하지만 나는 작가를 기본적으로 사회파 소설가로 여겨왔기 때문에, 이렇게 대놓고 치명적인 연애소설을 써서 내놓을 줄은 몰랐다.
이 작품은 돈에 미쳐 살아온 남자 '해원', 위스키 제조에 미친 여자 '하진', 음악에 미친 남자 '준연'의 관계를 중심으로 서로를 존경하고 사랑했지만 마침내 미워하고 증오하며 광기로 물들고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을 그린다.
제목처럼 그야말로 미친 사랑의 이야기이고, 때로는 막장 드라마보다 더 자극적인데, 절대 천박하지 않다.
심지어 우아하다는 느낌까지 받았다.
여기에 페이지 처음부터 끝까지 진동하는 위스키 향기까지 일품이다.
그래, 이런 게 바로 어른의 연애소설이지.
읽다 보면 독자는 자연스럽게 주인공 중 누구와 자신이 비슷한지 가늠하게 될 텐데, 나는 '해원'에게 가장 공감했다.
가장 평범해 보였으나 실은 가장 미친 사람인 '해원'.
'해원'의 선택을 용서할 수 없지만, 나는 그와 과연 다르게 행동했을까?
내게 '하진'은 사랑스럽지만 감당할 수 없는 여자이고, '준연' 또한 존경스러우면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친구다.
나는 '하진'처럼 투명하게, '준연'처럼 온전히 누군가를 신뢰하는 게 가능한 사람인가?
나는 그렇게 쿨하지 못해서 '해원'의 편을 들 수밖에 없다.
그가 비록 미친 선택을 했을지라도.
요즘 나오는 장편소설의 두 배 이상 분량(680페이지)인데도 불구하고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150페이지 남짓 되는 분량의 소설도 장편소설로 팔리는 세상에 정면으로 반기를 드는 작품이지만 분량을 잊어버릴 정도로 매혹적이다.
그래, 이런 게 바로 장편소설이지.
올해 읽은 모든 장편소설 중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다.
작가 본인도 이 작품을 지금까지 쓴 작품 중 최고작으로 생각하지 않을까?
끝내주는 소설이다.
한편으로 작가에게 묻고 싶다.
도대체 당신은 무슨 사랑을 어떻게 해왔기에 이런 소설을 쓴 거냐고.
이 작품은 '백말띠'의 기가 세다는 이유로 여아를 집단으로 낙태했던 1990년을 모티브로 쓴 장편소설이다.
1990년에 대한민국에서 조용하고 광범위한 학살이 일어났으며, 그 학살은 임신한 여성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뤄졌다는 서사.
황모과 작가의 장편소설 <우리가 다시 만날 세계>를 떠올리게 하는 서사인데, 표현 방식은 그보다 훨씬 과격하고 강렬하다.
프랭크 밀러와 로버트 로드리게스가 감독한 <Sin City>처럼 스타일리시한 연출도 보이고.
그런데 읽는 내내 불편했다.
불편한 감정의 근원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다가 한 질문에 다다랐다.
과거 여아라는 이유로 타의에 의해 낙태 당했던 태아의 생명과 현재 여성의 자기 결정권에 따라 낙태 당하는 태아의 생명의 무게가 서로 다른가?
이 작품에서 드러나듯 1990년에 타의로 태어나지 못한 여아가 많았으며, 그런 불행한 과거를 기억하고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다.
이제 여성단체가 나서서 낙태죄 비범죄화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세상이다.
헌법재판소도 형법상 자기낙태죄 조항이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제한하고 있고, 태아의 생명 보호란 공익에만 일방적인 우위를 부여했다며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조용한 학살' 당시 낙태 당한 태아는 기억해야 하지만, 여성의 자기 결정권에 따라 낙태 당하는 태아는 기억할 필요가 없는 걸까.
과거에 낙태 당한 생명과 오늘날 낙태 당하는 생명이 똑같은 생명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여성의 자기 결정권과 태아의 생명 보호를 바라보는 사회적 가치 판단이 바뀌었을 뿐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의 신생아 성비는 2000년대 들어 이미 자연 상태 수준을 회복했다.
출생 시 자연적 남녀 성비는 약 105대 100인데, 한국의 경우 지난 2022년 기준 104.7대 100이다.
오히려 자연적 성비보다도 여성 비율이 높아졌다.
그렇다면 불행한 과거는 기억하되, 바뀐 세상에 맞게 서사에 변화구를 던지는 게 옳지 않을까.
<우리가 다시 만날 세계>를 읽을 때 도발적인 소재를 왜 이렇게밖에 못 풀어내는가 싶어 답답했는데 이 작품 또한 그랬다.
나이가 한 자릿수였던 시절의 나는 지금 사는 세상이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 시절 기억을 더듬어 보면 수시로 맞은 기억과 뭐든 부족했던 기억만 남아있다.
당시 나는 지금 여긴 꿈이고 꿈에서 깨어나면 행복한 현실이 펼쳐질 거라고 진지하게 믿었다.
동네 아이들이 모두 유치원에 등교하고 TV 오전 정규 방송마저 끝나면, 할 일이 없는 나는 꿈에서 깨어나기 위한 통로를 찾기 위해 골목을 뒤지고 공터를 맴돌곤 했다.
그때 느낀 간절했던 마음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이 작품을 읽으며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집에서 학대당하는 어린 소년으로,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통해 과거로 돌아가 현재를 바꾸고 가족과 행복하게 살기 위해 애를 쓰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마치 영화 <나비효과>의 주인공처럼.
읽는 내내 다채로운 시공간에서 여러 다른 인생을 압축해 간접 경험해 보는 기분을 느꼈다.
간결한 문장과 빠른 장면 전환으로 쭉쭉 치고 나아가니 페이지도 휙휙 넘어간다.
앉은 자리에서 빠르게 완독하기 좋은 장편소설이다.
의외로 주제는 무거운 편이다.
이 작품은 주인공의 수백 년에 걸친 분투를 통해 삶이란 무엇이고 무엇을 위해 사는가를 묻는데, 내가 책을 덮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른 문장은 'Carry On'이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어떻게든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고.
그래야 스스로를 구원할 기회도 생긴다고.
시간여행도, 타임루프도, 시뮬레이션 우주도 경험할 수 없는 우리가 삶을 구원할 방법은 결국 그것밖에 없지 않은가.
깊이 들어가면 꽤 난해해질 설정과 주제인데, 독자가 이해하기 어렵지 않게 적절하게 끊어내며 수위를 조절한다.
문장의 미학 같은 걸 기대하고 읽는다면 실망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어른을 위한 동화로 여기며 재미있게 읽었다.
p.s. 여담인데 자꾸 소설 제목이 '크린토피아'로 읽혔다. 젠장...
언젠가 우리 모두가 별의 자식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충격을 받았었다.
인간을 구성하는 물질은 모두 별에서 왔고, 인간은 그 물질이 우주적 시간 기준으로 찰나 동안 모여있다가 흩어지는 존재에 불과하며, 언젠가 다시 어느 별의 일부가 될지도 모른다는 말.
태양은 항성 규모에 비해 중원소 함량이 높은데, 태양보다 먼저 그 자리에 있던 '퍼스트 스타'가 소멸한 뒤 만들어진 중원소가 태양의 재료가 됐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읽은 일이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사라지지 않는 수많은 원자가 별을 통해 순환하는 과정의 일부에 불과할 테다.
'창백한 푸른 점' 위에 우연한 계기로 결합한 물질 덩어리에 불과한 인간이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자아로 살아간다는 건 착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기운이 빠졌던 기억이 난다.
이 작품은 인간이 독립적인 자아라 살아가는 게 가능한지, 낯선 존재와 공존이 가능한지 처음부터 끝까지 집요하게 묻는다.
비슷한 주제를 다뤘던 작가의 단편 <인지 공간>의 규모를 더 확장했다.
원고량이 상당한데도 술술 읽히고, 영화를 보듯 장면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진다.
특히 작가의 전작들과 비교해 시각적인 묘사가 두드러진다.
다양한 색채로 이뤄진 위험하면서도 매혹적인 세계를 상상하며 읽는 일이 흥미로웠다.
동시에 기시감도 많이 들었다.
범람체로 불리는 외계 생명체가 지상을 차지한 설정에선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지상을 탐험하는 주인공의 행보와 선택에선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 <아바타>를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인간은 온전히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이미 다른 존재와 유기적으로 결합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 작품의 메시지는 설득력이 있었다.
인체 내 미생물 개체수는 약 100조 이상, 그 무게는 약 2kg으로 추정된다지 않던가.
심지어 그 미생물이 우리의 사고와 행동에 알게 모르게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하고.
인간이 다른 생물보다 특별하고 개별적인 존재라는 생각은 착각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읽는 재미와 작품의 밀도만 따지면 확실히 작가는 장편보다 단편에 훨씬 더 강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만큼 작가의 데뷔작인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대단했다는 말이겠지.
현재 대한민국에서 활동하는 소설가 중에서 가장 스펙트럼이 넓은 작가를 한 명만 꼽자면 정세랑 작가를 꼽겠다.
<보건교사 안은영> 같은 장르 소설은 물론 <이만큼 가까이> 같은 성장소설, <시선으로부터,>처럼 현대사와 여성 서사를 훌륭하게 엮은 장편소설까지.
특히 <시선으로부터,>는 최근 몇 년 사이에 나온 한국 소설을 통틀어 최고작이라고 생각한다.
한 작가가 어떻게 이렇게 다양한 소재를 자유롭게 다루고 심지어 잘 쓰는지 소설을 쓰는 사람으로서 짜증 날 때가 많다.
물론 질투 섞인 칭찬이다.
다음에는 어떤 작품을 내놓을지 진심으로 기다리는 몇 안 되는 작가인데, 역시 예상치 못한 장르의 소설로 뒤통수를 친다.
역사 추리소설이라니.
그것도 통일신라를 배경으로 다룬.
이 작품은 당나라 유학파 출신인 육두품 가문 남장여자가 신라의 수도 금성으로 돌아와 주변에서 벌어지는 이런저런 사건을 해결하는 수사물이다.
총 네 가지 사건을 해결하는 에피소드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담았다.
여기에 손재주 좋은 백제 출신 유민이 조력자로 등장해 홈즈와 왓슨처럼 콤비로 사건을 해결한다.
정세랑 작가의 작품답게 술술 읽히지만, 기대보다는 아쉬웠다.
배경이 통일신라이긴 하지만, 당대의 습속을 깊게 다루진 않는 편이다.
그 때문에 기존 역사물의 사각지대였던 통일신라를 다뤘다는 장점과 개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남장여자라는 캐릭터가 주는 특유의 아슬아슬한 매력이 잘 드러나지 않은 점도 아쉬웠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의 행보는 그냥 남성 그 자체여서, 주인공의 성별을 남성으로 바꿔 읽어도 크게 무리가 없을 정도다.
주인공의 비밀을 아는 조력자도 딱히 주인공을 전혀 여자로 보지 않아 '버디물' 같다는 인상이 강하다.
더 매력적으로 캐릭터를 만들고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끝까지 남았지만, 이 작품은 시리즈로 기획돼 2권과 3권도(어쩌면 그 이상도) 출간될 예정이다.
첫술에 배부르랴.
'슬로우 스타터'라고 여기고 다음 권에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기다려 봐야겠다.
1978년 대한민국 서울에 불시착해 여공으로 살아가는 외계인.
설정만으로도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흥미롭지 않은가.
설정만 보면 SF스럽지만, 이 작품은 이방인의 시선으로 과거 대한민국의 열악한 노동 현실이 요즘에 어떤 형태로 반복되고 있는지 보여주는 노동소설이다.
그렇다고 해서 읽기에 무거운 소설은 아니다.
오히려 경쾌하고, 심지어 웃기다.
주인공이 떠나온 행성의 생존 매뉴얼에 따르면, 낯선 행성에 불시착했을 때 생존율을 높이는 방법은 그 행성에서 가장 고등한 생명체로 변신하기다.
하필 주인공이 맨 처음 마주친 고등 생명체는 여공이었고, 주인공은 가장 평균적인 모습을 가진 여공으로 변신해 공장에 스며든다.
그곳에서 주인공은 그야말로 미친 학습 능력을 발휘해 말도 안 되는 단기간에 시다, 미싱사를 거쳐 재단사 자리를 차지한다.
공감 능력과 사회성이 전혀 없는 주인공이 본의 아니게 활약하며 이런저런 사건에 휘말리는 과정이 마치 시트콤처럼 펼쳐진다.
여담인데 주인공이 연구단지나 대학 캠퍼스에 불시착해 연구원이나 대학원생을 만났다면 노벨상을 타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봤다.
숲을 보려면 숲에서 나와야 한다지 않던가.
지구인을 가장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존재는 어쩌면 외계인일지도 모르겠다.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제대로 임금을 받지 못하고, 오래 일하면 골병들고, 일하다 다쳐도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는 등 주인공이 감정 없이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본 노동 현실은 가혹하다.
이젠 널리 알려진 가까운 과거이지만, 소설로 접하니 이 정도로 야만의 시대였나 싶을 정도다.
과거의 부조리한 현실은 세대를 건너 주인공이 가슴으로 낳은 아들에게도 이어진다.
고용의 책임 구조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 플랫폼 노동이라는 형태로 교묘하고 잔인하게.
이방인의 눈으로 바라보니 더 새롭고 선명하게 현실이 보인다.
주인공의 눈에 비친 인간은 답 없는 존재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희망 또한 인간에게 있다.
효율성과 이성만을 중시했던 주인공은 서서히 인간의 감정을 알아가며 누구보다 인간적인 모습으로 변화한다.
이 같은 주인공의 변화가 이와아키 히토시의 SF 만화 <기생수>의 주인공 '오른쪽이'의 심리 변화 과정과 비슷해서 인상적이었다.
'오른쪽이'도 남을 도와줄 수 있는 인간의 여유야말로 멋진 거라며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던가.
주인공의 마지막 선택(스포하지 않겠다) 역시 '오른쪽이'처럼 지극히 인간적이다.
그런 인간적인 선택을 하는 인간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삐걱거리면서도 굴러가는 게 아닐까.
재기발랄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작품이다.
평생 셋방을 전전하며 살다가 영끌해 평생소원인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뤘다.
그런데 세입자를 들일 때마다 문제가 생기고, 얼마 안 되는 월급은 버는 족족 주택담보대출 이자를 갚는 데 써야 한다.
어깨에 짐처럼 짊어진 집을 끝까지 지키는 게 옳은지, 집에서 벗어나는 게 옳은지 고민하던 주인공.
그런 주인공에게 더 큰 고민을 짊어지게 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회사 후배 직원이 상사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고 호소하다가 억울하게 회사에서 쫓겨났는데, 공교롭게도 주인공은 성추행 현장을 촬영한 사진을 증거로 가지고 있다.
후배의 처지는 가엾지만, 괜히 나섰다간 상사에 밉보여 회사에서 쫓겨나 월급이 끊겨 이자 상환이 밀리고 집을 내놓아야 할지도 모른다.
당신이 주인공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이 작품은 부당한 현실과 작은 양심 사이에서 고민하는 주인공을 통해 소시민의 작은 양심에 따른 행동이 이 사회를 지탱해주고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
다소 뻔한 질문과 결론을 담은 착한 소설이지만, 주인공이 처한 상황이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페이지를 넘기면서 고개를 끄덕일 때가 많았다.
사실 나는 이 작품에 담긴 메시지보다 오랜 셋방살이의 설움을 다룬 핍진한 묘사에 더 공감했다.
내 가족은 어린 시절에 정말 많이 이사를 다녔고, 꽤 오랫동안 단칸방에서 살았다.
어느 순간 동네 아이들 모두 유치원으로 가서 나만 홀로 공터에 하루 종일 남았던 일, 달동네에 산다고 부잣집 녀석들이 던진 돌에 맞아 코가 부러졌던 일,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다가 거기에 사는 아이들이 경비원에게 고자질에 쫓겨났던 일, 장마철에 집안에 물이 차서 자다가 일어나 쓰레받기로 물을 빼냈던 일 등 잊고 살았던 기억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소싯적에 지지리도 없이 살았다면, 울컥할 부분이 많은 작품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작가는 '작가의 말'을 통해 단 한 번도 이사를 가본 적이 없고, 평생 부모님과 함께 자가주택에서 살아왔다고 쑥스럽게 고백한다.
본인 경험 없이는 이렇게 자세히 쓸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반전이었다.
살짝 배신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철저한 취재가 실감 나게 소설을 쓰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해준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