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 보자마자 사형집행인의 딸 시리즈가 생각나서 안 볼 수가 없었다. 일기를 써서 남긴 사형집행인이 있었고, 심지어 사형집행인의 회고록이 한때 인기장르였다는 것부터 놀라움. 머리말 끝의 '먼 시대의 매혹적인 이야기이지만, 우리 시대와 우리 세계를 위한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말을 살짝 의심했다가, 다 읽고나서 완전히 흥미로만 시작했던 스스로를 반성. 선생님 말씀이 맞습니다.
엄연히 사법집행 업무를 맡고 있는데 사회적 매장을 당하는 상황 자체가 불합리하다만, '초'기피직업을 어느 날 갑자기 윗사람이 까라면 까는 거지 하면서 강제할 수도 있는 미친 시대라 생각하면 후대의 방구석에서 읽어도 희망이 안 느껴진다. 그래도 사형집행인들이 그 환경 속에서 자신들끼리 연대하고, 꾸준히 제도 안에서 자신들의 지위 향상을 꾀한 모습 자체가 감동. 특히 주인공격인 프란츠의 노력과 성과가, 이 상황들을 따져보면 거의 초인적이라 갑자기 나 너무 나태한가(...) 반성의 급물결...
잘 나갔던 지역의 특수성이라고는 해도 사형집행인에 대한 충분한 금전적 지원이 있었던 것이나, 명예 훼손이 상해죄보다 더 중했던 풍토, 부적 만들려고 영아 죽이는 게 드물지 않을 정도의 당시 사람들의 미신에 대한 강력한 믿음 등등, 빨려들어갈 것 같은 주제들이 수두룩. 특히 예전에는 인권이 부족했다고 여기면서 현대의 대학살에는 오히려 둔감한 우리들, 에필로그에서 꼬집는 관음주의 등등 생각할 면도 많고...이런 면들에서 나름의 답을 찾아야할텐데, 지도 받으면서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이 된 듯해 부끄럽다. 어쨌든, 읽을 수 있어 다행인 책이었고, 이참에 한국의 망나니에 대해서도 좀 찾아봐야지...
주인공 D-503이 사는 세상은 깔끔한 직사각형 도화지,
또는 유리만이 가득한 투명한 세상과도 같다.
'은혜로운 선생님'이라는 지도자의
지배 아래 모든 구성원은 이름이 없이
숫자와 알파벳의 조합으로 불린다.
도시에는 어떤 동식물도, 곤충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정해진 계급과 정해진 일, 정해진 제복을
입고 정해진 길로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박자에 따라
정해진 일터로 향한다.
사람들이 사는 주거지는 벽도 바닥도 천장도
모두 유리로 만들어져 있어 안에서 밖을,
밖에서 안을 누구나 서로 볼 수 있다.
자신만의 시공간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순수한 순백의 하얀 풍경이라기보다는,
표백제에 푹 담가 절여져 균 조차도 없이
헤진 창백한 허연 풍경이 떠오르는 세상이다.
D-503은 그런 세상에 사는, 이름없이
알파벳과 숫자로 불리는 그저 또 하나의 당원이다.
그는 다른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논리와
이성만을 숭배하고 우선하도록 교육받았다.
하지만 그런 그의 직각과도 같고, 날카로운 세계관에
불확실성이 찾아온다.
처음보는 매력적인 여성,
그 여성이 주는 불편함에 가까운 이끌림,
그로 인해 자신의 일상의 규칙이 깨져가며 만들어내는 불규칙들이
연쇄적으로 그의 삶의 균형을 무너뜨린다.
그때부터 그의 세계는 더이상 정수와 사칙연산이 아닌,
허수(i)가 들어차기 시작한다.
D-503은 학생 때부터 허수를 싫어했다.
그것은 실체화 되지 않는 그림자 속에 숨은 존재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수학적으로 그 수는 분명 어딘가에 존재한다.
논리라는 이름의 직각 유리집에
불확실함과 충동과 욕구가 들어왔다.
유리는 더이상 투명하지 않다.
태생적으로 태양을 닮은 사람들이 있다. 자기만의 태양계를 만들만큼 강렬한 반짝임과 끌어당김을 갖고 있는 사람들. 테츠야와 수민은 작은 태양들이다. 미노리와 희주는 그 따스한 반짝임에 끌려들어가 그 다정한 궤도에서 빙빙 돌다가 어느 순간 그림자를 인지하게 되었다. 그 깨달음이 비극, 혹은 깨달음의 싹이 되는 이야기.
나도 중고등학생 때는 남 부러워하기 바빴다. 친구를 잘 사귀는 아이들. 뭐든지 두 번생각하지 않아도 안전한 선택지를 고를 수 있는 친구들. 무난하고 둥글둥글해서 사랑스러운 사람들. 지금은 모르겠다. 지금은 작은 섬 같은 내가 좋다. 육지도 아니고 섬도 아니지만 어쨌거나 여기저기 연결 되어있어 필요하면 다시 궤도에서 빙빙 돌 수 있다.
그럼 날 필요에 의해 만나는거야?! 라고 머리 속 목소리가 시비를 건다. 중고등학생 때는 걔가 날 끌고다녔지만 지금은 내가 어, 맞아. 라고 말문을 닫아버리는 법을 터득했다.
'우리는 언제나 희망하고 있지 않나요' 덕에 결국 서간집을 보게 되었다. 낭독 때 읽은 편지 전후에 비타가 무슨 말을 썼을까 궁금해져서...그야말로 사람 살살 낚는 문구부터, 널 이렇게나 사랑한다는 표현들에 간질간질하기도 하고, 간간히 나오는 질투나 두 사람을 둘러싼 시시콜콜한 상황들이 재미나기도 하다. 홀림 문구 제조기 비타의 시집 번역이 없다는 게 언빌리버블. 그리고 비타가 편지에서 흥흥거린 휴 월폴의 버지니아 묘사가 궁금해서 검색하니 참...버지니아가 비타 사랑으로 올랜도를 쓴 것과는 비교할 수 없어도, 이 사람의 버지니아 사모도 상당한 수준이었던 것은 틀림없다. 버지니아는 아이돌...비타의 비서가 올랜도를 읽기 시작한 이야기를 하면서 비타가 "지금까지 현대소설은 전혀 못 읽어봤다는데~"라는 데서 빵터짐. 그렇지. 당연히 그때는 최신작이었지!
글 솜씨 + 시대 상황이 맞물리니, 연인 선물용 책갈피 세트같은 게 있다면 인쇄해 넣을 수 있는 문장들의 대홍수. 옮겨적으면 끝도 없다만 조금 골라보자면...
"당신 편지를 받는 일이 너무 좋아서 아침 우편물을 열 때면 가장 마지막까지 남겨두곤 해요. 아이가 마지막 초콜릿 조각을 남겨두듯이."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 일이 얼마나 즐거울까요. 잉크가 유일한 소통 수단임을 체감하며 얼마나 가슴이 미어질까요."
"당신이 꽤 그리우리라고 마음의 준비를 했음에도, 스스로도 믿지 못할 정도로 당신이 보고 싶어. 그래서 이 편지는 고통에 차서 지르는 단말마의 비명이나 다름없어."
"나와 있을 때는 원하는 만큼 슬퍼해도 괜찮아."
디지털의 개념이 없던 시기, 아름다운 글을 쓰는 것이 직업인 사람들이 쓰는 서신들은 이런 것인가...
'우리는 언제나 희망하고 있지 않나요'에도 실린 버지니아의 편지와, 그 전에 비타가 보낸 편지도 나란히 실려있다. 그런데 버지니아의 편지 뒷부분이 좀 달라서 당황스러워...뭐, 제일 중요한 부분은 똑같고, 한쪽엔 확연히 말줄임 표시가 있으니 다른 쪽도 아마 그렇겠다 하다만...어쨌든! 비타의 등대로에 대한 칭찬이 정말 폭풍같아서, 버지니아가 꽤 쑥쓰러워한 것이 제대로 와닿는다. 올랜도라는 책 자체가 사랑의 결정체지만, 비타가 포기해야했던 집을 작품에서나마 올랜도가 가질 수 있도록 버지니아가 써줬다는 건 처음 알아서 뭉클함이 밀려옴. "당신이 놀을 묘사한 단락들이 날 울렸어, 나쁜 사람."
연애의 결말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으니, 뒤로 갈수록 불안함이 밀려온다. 그래도 이 책에 선별된 서신들에선 마찰이 그리 크게 다뤄지지 않고, 공식적 관계가 끝난 뒤에도 다정하게 사랑하는 모습들이 나와 안도의 한숨. 마지막 서신 뒤 일주일도 안 지나 버지니아의 부고를 듣고 비타가 쓴 서신의 짧은 발췌가 마지막이니 씁쓸함은 어쩔 수 없다만...옮긴이의 글의 '버지니아와 비타는 역할이 아니라 자신에게 충실했다'라는 대목에, 그래서 서로 끌린 것일까 생각해본다. 그러나 아무리 편지들을 들여다본들 그 감정은 당사자들만 아는 것이고, 먼훗날 들여다보는 사람은 그저 상상할 뿐이지...
“한 가족이 있어요. 목사님 집안이에요. 아버지가 ‘나 이렇게 힘들어’ 하는 이야기가 1장이에요. 2장은 둘째 아들이 ‘나 이렇게 힘들어’ 하는 이야기예요. 3장에서는 첫째 딸이, 4장에서는 첫째 아들이, 5장에서는 어머니가, 6장에서는 다시 아버지 이야기가 나와요. 그런 식으로 쭉 진행돼요. 배경은 1970년대 미국이고요.”
조너선 프랜즌의 872쪽짜리 소설 『크로스로드』(은행나무)를 독서모임 회원들과 함께 읽었다. 먼저 진도를 나간 내게 다른 회원이 책 소개를 부탁했고, 나는 저렇게 설명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진짜 우울해요. 읽다 보면 마음이 아주 한없이 가라앉아요. 그런데 정말 재미있고 이거 걸작 아닐까 싶어요.”
그런 감상은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도 이어졌다. 후반부가 더 흥미진진했고, 중반까지 품고 있던 우려도 결말에 이르러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모든 인물들이 서로에게 악영향을 주며 함께 몰락하는 기하학적이고 가학적인 구조를 작가가 짜놓지 않았을까 두려웠다. 기우였다. 그렇다고 해피엔딩이라는 말은 아니지만.
『크로스로드』는 잘 짜인 구조나 치밀한 심리묘사 이상의 소설이다. 이 작품은 뭔가 거대한 것을 이야기한다. 삶, 가족, 현대, 붕괴 같은 것들을. 그래서 1년도 채 되지 않는 기간에 걸친 서민층 가족의 서사임에도 불구하고 묵직한 대하소설 같은 기분이 든다. 그 ‘거대한 것들’을 계속 고민하게끔 독자를 이끈다. 삶이란, 가족이란 뭘까. 현대는 어떤 곳인가. 우리는 왜 불행한가.
후속편에서는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이 나올까. 지난해 미국에서 출간된 『크로스로드』는 그 자체로 완결성 있게 마무리되는 소설이지만, 3부작의 첫 작품이기도 하다. 1959년생인 저자는 필생의 역작을 남긴다는 기분으로 이 연작을 준비한 듯하다.
2부와 3부는 미국에서도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은행나무 출판사는 3부작 모두 번역서를 자신들이 펴낼 예정이라고 밝혔다. 담당 편집자는 『크로스로드』 번역서를 만들며 등장인물의 나이와 호칭, 사건들의 날짜를 한국 기준으로 계산하고 확인하느라 꽤 애를 먹었다고 한다.
미처 몰랐다. 『침묵의 봄』을 쓴 레이철 카슨이 그토록 뜨거운 사랑을 했다는 사실을. 상대는 유부녀였고, 그때 카슨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음을. 천왕성은 윌리엄 허셜 혼자가 아니라 허셜 남매의 공동 발견이며, 키가 130센티미터밖에 되지 않았던 여동생 캐럴라인은 온갖 차별 속에서도 혼자 새 혜성을 8개나 찾아낸 위대한 천문학자였음을.
불가리아 출신 작가이자 문화비평가인 마리아 포포바의 『진리의 발견』(다른출판사)을 읽는 내내 기분 좋게 당혹스러웠다. 내가 얼마나 여성 과학자와 작가, 특히 그 중에서도 성소수자인 인물들의 삶과 업적에 무지했는지 깨닫는 독서여서 그런 면도 있었다. 한편으로는 이 책 뭐지, 싶은 독특한 구성과 진행 때문이기도 했다.
땅에서 멀리 떨어진 무언가를 열렬히 쫓고 고통스러워 한 사람들의 감동적인 이야기이기는 한데, 그들을 뭐라 불러야 할지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간질간질했다. 과학자만 모은 책도 아니고, 작가만 모은 책도 아니다. 여성과 성소수자를 중요하게 다루지만 그들만 다루지는 않는다. 그 삶들을 특정 테마에 따라 깔끔하게 정렬하지도 않았다.
책은 애초에 선별 기준과 순서 따위가 뭐가 중요하냐는 태도다. 한 사람을 이야기하다 과거나 미래의 인물로 훌쩍 건너뛰고, 다시 돌아오기를 거듭한다. 평전이라고 해야 할까, 에세이라고 해야 할까. 어떤 경계 안에 자기 글을 가둘 생각이 없는 저자는 운문의 영역까지 호시탐탐 노리는 듯하다. 어떤 부분은 끝까지 명쾌하지 않지만 그래서 독특하게 아름답다.
영어 원제는 ‘Figuring’이다. 이 애매한 단어를 한국어로 어떻게 옮겨야 할까. 한국 출판사가 바랐던 번역 제목은 ‘전복자들’이었다. 하지만 표지 디자인과 관련해서도 구체적인 지시를 내린 저자는 한국 출판사에 단어의 뉘앙스를 꼼꼼히 물어보면서 여러 후보를 검토한 끝에 ‘진리의 발견’을 골랐다. 글쎄? 나는 이 책 번역 제목에 사랑, 혹은 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다른 단어가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리를 향한 사랑, 생명을 향한 사랑, 천재들도 꼼짝 못한 에로틱한 사랑.
모차르트는 방탕했고 경제 관념이 적었으며, 관심종자였고 자기에게 쏠린 관심으로 남의 기분을 해치는 재주가 탁월한 당나귀 같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신이 노래하는 듯한 음악을 써내려가는 프리메이슨 단원이었다(고 한다).
책은 사후에 더 뜨겁게 사랑받고 있는 음악가의 사랑, 콘스탄체만을 조명한다. 노래를 부드럽게 부르고 그보다 더 부드럽게 웃는 재주가 있어 사랑 받는 언니 알로이지아를 질투하던 어린 동생. 세간의 환대와 증오를 동시에 받는 모차르트를 누구보다 사랑한 아내. 그리고 그의 죽음 이후 콘스탄체 베버 본인으로서의 삶을 더 행복하게, 더 말이 되는 방식으로 꾸려가려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담겨있다. 책은 역사적 기록에 살을 덧댄 방식이라 소설이고 다큐멘터리다.
얼마 전,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이름으로 발표 된 몇 개의 곡이 그의 누나인 난넬 모차르트의 작품이라는 글을 읽었다. 볼프강은 난넬의 작품을 발표하고 받은 돈으로 뭘 했을까? 그 돈은 둘의 아버지인 레오폴트의 지갑으로 들어갔을까, 아니면 볼프강의 집세나 게임비로 탕진 되었을까. 콘스탄체 베버가 끊임없이 모차르트의 경제적 어려움을 주도한 ‘방탕하고 음악에 대한 조예가 없는 몰상식한 여자‘라고 비판 받은 것처럼, 볼프강의 후광 뒤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파묻힌 여자들의 이야기가 더 있을 것만 같다.
그 사실을 제하고도, 레아 징어의 문장이 담대해서 좋다. 아름답고 끔찍한 감정들이 잘 느껴진다. 책은 어린 콘스탄체가 부모의 관심을 갈구하며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1984의 첫 시작은 하급당원 윈스턴이 자신의 방에서
기록장치가 볼 수 없는 사각에서 일기를 쓰는 것으로 시작한다.
1984 세계관은 아메리카 대륙과 영국, 대양주를
지배하는 '오세아니아'의 빅브라더와 당이 모든 기록물을
통제하고 재창조하는 곳이다.
윈스턴이 스스로의 의지와 욕구로 자신만의 기록을
써내려 가는 행동은 그 자체로 당의 억압에
그가 무의식적으로 불만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장치다.
줄이 그어져 있는 노트를 일부러 휘갈겨 써가며
문장 부호도 지키지 않는 그의 글쓰기는
빅브라더에 대한 가장 소심하면서도 가장 대담한
저항이자 불복종인 것이다.
21세기의 산업 키워드가 ‘인터넷'이라면 16세기는 ‘바다’였다. 잘나가는 유럽 국가 사이에서 해상 무역과 식민지 개척이 유행처럼 번졌고, 그에 따라 항해술이 중요해졌다. GPS가 없던 시절 항해술의 핵심은 지나온 길과 나아갈 길을 찾는 것, 그리고 현위치를 정확히 아는 것이었다. 어떻게? 태양, 별, 달의 위치와 모양을 GPS 삼아. GPS로 활용하려면 멀리서 작은 점으로 반짝이는 별과 달을 정확히 관측해야 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 했던가. 하늘을 볼 수 있을 만큼 성능 좋은 망원경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책은 1609년에 그려진 두 개의 그림으로 시작한다. 토머스 해리엇과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각자 망원경으로 달을 관측하고 그림으로 기록했다. 그런데 똑같은 대상을 그린 것치고는 두 그림이 너무 다르다. 둥글다는 것 말고는 공통점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왜 그럴까?
첫 번째 이유는 ‘관찰의 차이’다. 갈릴레이의 20배율 망원경에 비해 해리엇의 6배율 망원경은 성능이 떨어졌다. 두 번째 이유는 ‘표현의 차이’다. 그림 실력이 뛰어났던 갈릴레이에 비해 해리엇은 눈앞의 사물을 그림으로 옮기는 훈련을 받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림 실력이 비슷한 두 사람이 똑같은 망원경을 사용했다면 똑같은 그림을 그렸을까? 답은 No. 관찰과 표현 모두에 영향을 미치는 세 번째 이유가 있다. 정보의 차이.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정확히 그릴 수 있다. 화가나 만화가들이 괜히 인체 해부학을 공부하는 게 아니다. 갈릴레이는 해리엇보다 달과 우주의 운동원리에 대해 좀 더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고, 이는 그림의 차이로 나타났다.
물론 아는 것이 관찰과 표현을 방해할 수도 있다. 책에는 자기가 아는 것에 대한 확신이 지나쳐서 정확한 관찰과 표현에 실패한 사례도 등장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기 쉽다.
물론입니다.
2024년 11월 6일 날짜인 현재까지 개설된 그믐의 독서 모임은 무려 1746개입니다. 그 중에는 같은 책으로 만들어진 모임도 여럿 있어요.
좋은 책은 언제든 다시 읽고 싶은 법이죠. 같은 책이라도 시대와 개인의 상황에 따라 느끼는 점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과거 독서 기록과 비교하며 새로운 시각을 얻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거예요.
여러분이 남겨주신 독서 경험은 미래 독자들에게 좋은 영감이 될 수 있습니다.언제든지 용기 내어 모임을 만들어 보세요.
"우리가 사라지면 암흑이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