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역사상 유일한 역성혁명을 주도한 혁명가,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문신 출신 관료, 형제는 물론 처가와 사돈까지 도륙 낸 냉혈한, 아들이 성군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기반을 닦은 명군.
조선 태종 이방원이 오랫동안 꾸준히 다양한 콘텐츠로 다뤄진다는 건 그만큼 그가 흥미롭고 입체적인 인물이라는 방증일 테다.
만약 이방원이 대한민국에 부활해 정치인으로 활동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 작품은 그런 상상력을 바탕으로 이야기의 가지를 다양하게 뻗어나간다.
작가가 오랫동안 정치부에서 일했던 일간지 기자 출신인 만큼 디테일이 좋다.
다양한 취재 경험이 없었다면 쓸 수 없었을 이야기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드라마 같은 영상 콘텐츠로 만들어지면 매력적일 작품이다.
이 소설집 속 등장인물은 대부분 일하는 사람들이고 위태로우며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
이렇게 말하니 현실을 핍진하게 그린 노동소설을 모아 놓은 소설집일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일하는 사람의 일상을 그리되, 그들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리진 않는다.
환상을 현실과 뒤섞어 현실에서 경험할 수 없는 상황을 수시로 연출하는데, 그런 연출이 현실을 다각도로 바라보게 하는 장치로 작용한다.
어쩔 땐 지독하게 핍진한데, 어쩔 땐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황당하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열악한 환경에 놓인 노동자가 비현실적인 상황에 던져지면 소설과 같은 기분을 느끼지 않을까 싶다.
일하는 사람들의 일상을 이런 방식으로도 묘사할 수 있다는 게 신선했다.
오래전 학창 시절은 내가 애매한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던 괴로운 시간이었다.
키가 크지도 않았고, 잘 생기지도 않았고, 머리가 딱히 좋은 것도 아니고,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지도 않았고, 성격도 내성적이고, 그렇다고 착하지도 않은.
악마는 악마인데 약한 악마?
나이가 들어 내가 애매한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니, 비로소 조금씩 자신에게 너그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않은가.
애매한 나를 벗어나기 위한 전략은 틈새시장 찾기였다.
나는 어디서 어떤 일을 하든 경쟁자가 적은 곳에서 괜찮아 보이는 먹을거리를 찾아내려고 애를 썼다.
소설가로 사는 지금도 전략은 비슷해서 늘 아무도 쓰지 않지만 재미있어 보이는 소재를 찾는 데 공을 들인다.
그게 주변인으로 살아온 내가 그나마 생존 확률을 높일 수 있는 전략이었다.
새 옷으로 갈아입은 이 작품을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섬세하면서도 담담한 발레 동작 묘사와 대비되는 주인공의 깊은 상처를 들여다보며 내 지난 시간도 다시금 곱씹어볼 수 있었다.
발레에 맞는 발을 가졌는데 춤을 추지는 못하는 주인공이 과거의 상처를 용기 내 마주하고 높이 날아오르며 춤을 추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누구도 과거를 바꿀 수 없다.
과거를 되새김질하며 후회 속에 갇혀 살아가느냐, 아니면 과거를 경험이라고 부르며 앞날을 위한 발판으로 삼느냐라는 두 가지의 선택지만 주어질 뿐이다.
어렵지만 용기 내 후자를 선택한 사람에게 이 작품은 좋은 선물이 되어 줄 것이다.
책은 꽤 좋은 선물이다.
마침 선물하기에도 딱 좋은 옷을 입고 나왔다.
문장과 이야기에 작가의 지문이 찍혀 있는 듯한 소설을 만나는 일이 가끔 있다.
여러 소설 단행본의 한 페이지를 뜯어와서 어떤 작가의 작품인지 블라인드 테스트를 하면, 다른 작가의 작품은 몰라도 김홍 작가의 작품은 골라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만큼 개성적인 소설을 쓰는 작가다.
마치 이병헌 감독이 연출한 영화나 드라마처럼.
모든 것을 사고파는 장사꾼, 베드로를 모시는 무당, 어떤 선거도 53%의 승률로 승리하게 해주는 성물 등.
이 작품 역시 기상천외한 등장인물과 소재로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건 팔지 않고, 돈으로 살 수 없는 건 기꺼이 구해주겠다는 장사꾼이라니.
어처구니없는 전개가 실소를 터트리게 하다가도, 언뜻언뜻 엿보이는 함의가 무거워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진다.
나는 이 작품이 자본주의, 아니 황금만능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어떤 가치를 붙들고 살아야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를 묻는다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 작품을 정치적인 소설로 받아들일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가족 서사로 읽을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이 작품을 몇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는 독자는 없을 것이다.
그럴 수 있는 소설도 아니고.
여러 독자가 모여 독서토론을 벌이면 어떤 이야기가 오갈지 궁금해진다.
결론이 똑 떨어지는 소설은 아니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 작품, 거두절미라고 재미있다.
굳이 의미를 찾으려 들지 않아도 충분히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장편소설이다.
마치 이병헌 감독의 최근작인 드라마 <닭강정>처럼.
<닭강정>의 유머가 마음에 들었다면, 이 작품도 반드시 마음에 들 것이다.
이 작품의 배경은 학창 시절에 놀지만 않았다면 들어봤을 귀주대첩이다.
어지간한 소설 단행본 두 권 분량에 가까운 두께만 보고 읽기를 망설인다면 아쉬운 일이다.
호흡이 대단히 빠르고, 어떤 내용이 펼쳐질지 쉽게 가늠할 수 없어서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흥미진진하다.
귀주대첩을 다룬 콘텐츠를 통틀어서 가장 파격적인 작품이 아닐까 싶다.
'구국의 영웅' 강감찬을 무협지에 등장하는 정사지간(正邪之間)처럼 묘사했다는 자체부터 파격 아닌가.
페이지는 넘기는 내내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심지어 페이지를 덮은 뒤에도 헷갈린다.
여기에 미스터리와 오컬트 요소까지 더해지니 소설이 어떻게 끝날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모두가 아는 인물과 모두가 아는 사건으로 모두가 상상하지 못한 이야기를 펼쳐내는 작가의 역량이 어마어마하다.
사료가 부족해 고증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을 텐데도, 끌어모을 수 있는 사료는 다 끌어모아 적재적소에 소설의 기둥으로 세워 현실감을 높였다.
읽다 보면 어디까지가 진짜인지 놀라게 되는 부분이 많다.
더불어 살육 장면 묘사가 생생하고 잔혹해서 전쟁이 얼마나 슬프고 참혹한 일인지 잘 보여준다.
무협지처럼 과장되거나 낭만적으로 보이는 살육이 아니다.
그래서 읽는 내내 정말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기분을 느꼈다.
귀주대첩을 단 몇 페이지로 쿨하게 넘겼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이 작품이 어떤 성격의 소설인지 잘 보여주는 것 같아서 말이다.
공교롭게도 이 작품이 출간됐을 무렵, KBS가 귀주대첩을 다룬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을 방송했다.
<고려거란전쟁>을 즐겁게 본 시청자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 작품은 드라마와 질적으로 비교 대상이 아니다.
드라마보다 새롭고 흥미로우며 훨씬 재미있다.
드라마를 방영하기 전에 출간됐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읽지 않은 사람은 그저 출간 시점만 보고 드라마에 편승했다는 오해를 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인터뷰 기사 중에서 가장 깊이가 없고 읽을거리도 없는 기사는 일간지 인터뷰다.
그렇게 볼품 없는 인터뷰가 나오는 가장 큰 이유는 신문 지면의 한계 때문이다.
일간지 인터뷰 작성은 지면에 싣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 때문에 기자가 욕심을 부려 긴 인터뷰를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다.
또 다른 이유는 기자의 업무 특성 때문이다.
기자는 늘 바쁘고 마감에 시달린다.
오래 기자로 일하다 보면, 기사가 되는 '야마' 뽑기에만 집중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상대방의 감정을 헤아리는 데 무심해진다.
마치 소시오패스처럼 말이다.
내 경험상 기자 중에는 소시오패스 성향인 사람이 꽤 많다.
그렇지 않으면 오래 일하기 어려운 구조이고, 그렇게 일해야 성공하기가 좋다.
그런 태도를 유지하며 살아가면, 마지막에 과연 무엇이 남을까.
행복할까.
저자는 지금까지 다양한 경로를 통해 만난 여러 인연을 대하는 태도, 자신의 직업과 업무를 대하는 태도, 실패를 대하는 태도 등을 무겁지 않게 풀어놓는다.
저자는 그런 언론 환경에서 오랜 세월 근무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깊이 있고 훌륭한 인터뷰 기사를 쓰는 기자로 유명하다.
저자가 최근 몇 년 간 선보여 온 인터뷰 시리즈 '삶도'는 지금까지 어떤 일간지도 보여주지 못했던 경지에 다다른 심층 인터뷰였다.
특히 기사 곳곳에서 드러나는 인터뷰이를 향한 저자의 애정은 기존 일간지 심층 인터뷰에선 보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일간지는 한 기자에게 큰 기획 지면을 오랫동안 맡기지 않는다.
그런데도 계속 같은 기획을 맡고 있다는 건 그만큼 조직 내부는 물론 외부에서도 진정성과 전문성을 인정받았다는 증거일 테다.
이 산문집에는 저자의 오랜 경험을 통한 깨달음이 따뜻한 문장으로 담겨 있다.
책을 덮은 후에는 주위 사람에게는 물론 내게도 조금 더 친절해져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 것이다.
다들 알지 않는가.
지금의 내 태도가 돌고 돌아 결국 내게 돌아온다는 사실을 말이다.
소싯적에 열광적으로 마왕을 좋아했기 때문에 나는 그에 관해 많이 안다고 자부해왔다.
이 책을 읽어보니 내가 마왕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건 맞는데, 오해하는 부분도 적지 않았다.
이 책을 통해 만난 마왕은 내 생각보다 훨씬 섬세하고 겸손하며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마왕이 밴드라는 포맷에 엄청나게 집착했다는 사실에 관해 처음 알게 됐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사실 나는 마왕이 굳이 밴드를 안 해도 되는데, 보여주기 위해 밴드라는 포맷을 자신의 도구로 이용하지 않았나 조금 의심했었다.
반성한다. 그는 진짜 밴드를 하고 싶어 했다.
다만 리더로는 그리 잘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던 듯하다.
저자의 지나치게 사적인 서술은 이 책이 마왕의 평전인지 일기인지 분간하지 못하게 만들지만, 그래서 더 좋은 점도 있었다.
특히 지난 20년간 두 차례에 걸쳐 이뤄진 대중음악 100대 명반 선정에서 신해철과 그가 존경하는 조용필이 모욕에 가까운 과소평가를 받았다는 강헌 평론가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개인적인 취향이 섞여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신해철 2집을 비롯해 조용필 1집, 4집, 7집, 13집이 고작 그 정도 평가를 받을 앨범은 아니지 않나.
마왕에 관해 적든 많든 추억을 가진 이들이라면 꼭 한 번 일독해 볼 책이다.
꽤 많은 글이 구면이어서 반가웠다.
가장 공감하며 읽은 글은 '제정신으로 살기 위하여', '불편함이 도덕의 근거가 될 때', '나는 왜 보수주의자인가', '대한민국 주류 교체와 두 파산', '저출생 대책을 넘어서' 등이었다.
작가는 편을 가르는 선동만 넘쳐나는 현상에 관해 우려하고, 우리 사회에 도덕적 감수성이나 공감 능력보다 합리적 이성이 부족하다고 지적하며, 반대 진영을 제거 대상으로 보는 극단적인 시각을 경계한다.
보수를 현실주의라고 보는 작가의 시각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읽고 "맞아 맞아!"라며 동의하는 독자도 많고, 불편함을 느낄 독자도 많을 것이다.
특히 후자는 뭔가 반박하고 싶긴 한데, 논리적으로 반박할 게 마땅치 않아서 식식대지 않을까 싶다.
상식적인 시각으로 상식적인 논리를 담은 상식적인 산문이라는 걸 본인도 알 테니 말이다.
작가는 "200자 원고지 10매는 복잡한 사유를 풀거나 논증을 치밀하게 펼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라고 엄살을 부리는데,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그보다 훨씬 원고량이 많은 글인데도 어처구니없는 논리를 펴는 글이 넘쳐나는 세상인데 뭐.
나는 평소에 관심이 있었어도 남들이 관심을 가지면 바로 흥미를 잃어버리는 청개구리다.
일례로 나는 2010년대 중반부터 마라샹궈를 직접 요리해 먹을 정도로 마라를 즐겼는데, 몇 년 사이에 마라 열풍이 불면서 흥미를 잃었다.
책도 마찬가지여서 베스트셀러는 어지간해선 구입하지 않고, 구입하더라도 잘 읽지 않는다.
정지아 작가의 장편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 최은영 작가의 소설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김연수 작가의 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 등이 사놓고도 읽지 않은 대표작이다.
이런 심보로 정세랑 작가의 장편소설 <시선으로부터,>를 뒤늦게 읽었다가 크게 후회했었지.
아무튼 심술 맞은 내게 지난해 베스트셀러로 큰 화제를 모았던 이 산문집이 손에 잡힐 리가 없었다.
지난해 내내 서재에 방치돼 있었다.
지난해 가족이 세상을 떠나고, 장례식장에 들를 일이 많아서였을까.
최근에 이상하게 제목이 뜬금없이 마음에 박혀 2024년에 처음 읽을 책으로 이 산문집을 선택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말 좋았다.
그저 인생의 황혼을 바라보는 배우의 회고만을 담은 책이 아니었다.
자신의 한계를 알고 이를 극복하고자 치열하게 고민하는 삶의 자세가 곳곳에서 드러나는데, 억지스러운 내용이 하나도 없다.
내용이 진심이란 게 느껴져 페이지 넘기기를 멈추고 눈물을 훔치는 일도 몇 차례 있었다.
읽는 내내 저자 특유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해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특히 배우로서, 인간으로서 자존감을 드러내는 모습은 감동을 넘어서 충격적이었다.
나는 저자가 문민정부 시절에 청와대 행사에 초대받았을 때 일화를 읽고 찐으로 감탄했다.
저자는 행사 전 정원 벤치에 앉아서 쉬고 있다가 직원으로부터 제지당했다.
영부인이 앉는 자리니까 일어나라고.
나라면 "어이쿠! 무례를 범해 죄송합니다!"하고 일어났을 텐데 저자의 대응은 놀라웠다.
“미안합니다만, 영부인께서도 배우 김혜자가 앉아 쉬었다고 말씀드리면 기뻐하실 거예요”라며 생글생글 웃다니...
얼마나 내면이 단단하고 자부심이 강해야 이런 반응을 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는 걸까.
그릇이 작은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저자처럼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하진 못할 것 같다.
그런 나조차도 아름답게 산다는 건 무엇일까 잠시나마 고민할 기회를 준 산문집이었다.
그야말로 '혜자스러운' 책이다.
인생의 황혼에 들어선 뒤에야 다시 공부를 시작한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나는 배우고 싶었는데도 배우지 못한 사람의 한스러운 마음을 조금은 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랬으니까.
어머니는 생전에 내게 자주 국민학교 밖에 나오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어머니가 만약 살아계셨다면 올해 66살(한국 나이)이었을 텐데, 공교롭게도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할머니들의 나이와 비슷하다.
할머니들을 어머니라고 생각하면서 소설을 읽으니 몰입감이 높았다.
뒤늦게 배움의 길에 들어선 할머니들이 등장하는 소설이라면 뭔가 감동적이고 따뜻한 이야기가 펼쳐질 것 같지 않은가.
그런데 나는 이 작품이 마냥 감동적이거나 따뜻한 작품이 아니라서 좋았다.
소설 속에 펼쳐지는 갈등이 날것의 느낌을 줘서 실감 났다.
연장자의 품격을 보여주는 할머니도 있지만, 대놓고 밑바닥을 보여주는 할머니도 있다.
심지어 인류애까지 의심스럽게 만드는 할머니도 나온다.
소설은 사람이 나이 든다고 자동으로 현명해지는 게 아님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여기에 노인의 아이 돌봄 문제, 부동산과 관련한 민감한 문제(참고로 작가의 첫 장편소설은 '부동산 누아르'다) 등이 더해져 생각할 거리를 여럿 남긴다.
캐릭터들이 각자 확실해서 읽는 내내 머릿속에 영상이 그려져 생생함을 더한다.
이 할머니는 이 배우가 연기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풀 수 있는 갈등은 풀되, 굳이 풀지 않아도 될 갈등은 풀지 않고 넘어가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해로운 관계를 억지로 좋은 척하며 유지할 필요는 없는 거니까.
동화 같은 표지만 보고 가볍게 페이지를 넘긴다면 의외로 무거운 내용을 담은 내용 전개에 놀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