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초겨울, 나는 대학교에서 논술시험을 치렀다.
오른손에 깁스를 한 채 왼손으로 펜을 쥐고.
오른손잡이인 나는 왼손으로 삐뚤빼뚤 천천히 글씨를 쓰며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내 몸에 붙어있는 내 팔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게 이렇게 답답한 일인 줄 몰랐다.
주어진 시험지를 반도 채우지 못하고 나오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내 몸도 마음대로 못 하는데, 다른 사람이 내 마음대로 움직여주길 바라는 건 과한 욕심이 아닐까?
오래전 일이지만 지금도 생생할 정도로 인상적이어서, 나는 누군가에게 별 기대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이 앤솔로지를 읽으며 오래전 경험을 떠올렸다.
여기에 수록된 다섯 작품에는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몸을 고민하는 청소년들이 있다.
자기가 원하는 몸을 만들고 싶어서 미친 듯이 다이어트를 하고, 헬스장에서 쐬질을 한다.
그런데 어디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는가.
먹다가 토하고, 공부하려 앉으면 졸려 죽겠고...
나이 먹어 돌이켜 보면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는 추억이지만, 그 시절에는 그 어떤 고민보다도 무거웠던 고민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몸에 관한 고민 아니던가.
나도 그랬었다.
키는 작은데 머리는 크고 몸은 말라서 츄파춥스 같았던 외모가 싫었다.
무협지에 미쳐있던 시절이어서 내 안에도 무언가 특별한 능력이 있을 줄 알고 지식호흡 흉내를 내며 내공을 쌓으려고 해봤는데 숨만 막히더라.
차라리 빨리 나이가 들면 나을 줄 알았는데, 키는 그대로이고 몸에 살만 덕지덕지 붙어버렸다.
그래도 어찌저찌 잘 살아간다.
그런 몸도 그런대로 잘 사용하면 재미있는 일이 생기더라.
소설 속 청소년들도 나이 들면 그렇게 되겠지.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
이석원, 참 대단한 작가다.
그가 소설가로서 좋은 작가인지는 의문이지만, 에세이스트로서 좋은 작가라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음악으로 경지에 오르고, 산문으로도 경지에 오른 사람이 소설까지 잘 쓰면 반칙이지.
감상문을 쓰다가 허접해서 지우고 대신 읽다가 좋았던 문장을 발췌해(일부는 적당히 수정해서) 옮긴다
- 살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더 중요하다.
- 나 빼고 다른 사람들은 다 잘 사는 것 같아서. 그게 착각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해서. 그래서 우리는 늘 서로가 서로를 부러워하며 사는 일이 가능하다.
- 왜 어른들이 모든 것에는 다 때가 있느니, 그러니까 젊어서 많은 것들을 경험해 보는 게 좋다느니 하는 지를 알 것 같다. 스무 살의 나와 서른 살의 나는, 또 마흔 살의 나와 쉰 살의 나는 그 모든 순간이 다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흡수하는 감각도, 원하는 종류의 자극도, 그간 쌓아왔던 경험의 종류도 다 달랐으니 말이다.
- 진심이라고 해서 무조건 누구에게나 통하는 건 아니다.
- 아무리 오랜 세월 동안 축적해 온 삶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지혜라도 지키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
- 관계에 있어서 솔직함이란 결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그 사실을 모른 채 솔직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아무 때나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버리면, 관계는 오히려 종말을 고할 수 있다.
- 누군가와의 관계를 영영 끊어낸다는 의미의 그 '손절'이라는 카드를 너무 간편하게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면 어느 순간, 당신 주위에는 정말로 아무도 남지 않게 되는 사태가 올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카드를 신중하게 잘 쓰기만 한다면, 인생에서 불필요하게 상처받는 일도 줄이면서 나를 지키고 사랑하는 방식의 하나로 활용할 수 있는 것 아닐까.
-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남을 손가락질하기는 정말 쉽거든? 그런데 중요한 건 내가 그 손가락질을 받는 당사자의 입장이 되었을 때도 같은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란다.
이 책은 월급사실주의 동인의 두 번째 앤솔러지다.
지난해에 출간된 첫 번째 앤솔러지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가 많은 주목을 받았기 때문에, 두 번째 앤솔러지에는 어떤 작가가 참여해 어떤 작품을 선보일지 기대가 많았다.
첫 번째 앤솔러지는 전반적으로 내용이 무거웠고, 참여 작가도 많아(11명) 책도 무거운 편이었다.
그래서 두 번째 앤솔러지는 그보다 조금 가볍게 나오기를 기대했다.
다행히 기대한 대로 첫 번째 앤솔러지에서 느껴졌던 비장함이 줄어들었고, 참여 작가 수도 살짝 줄었다(8명).
덕분에 독자로서 읽는 재미는 더해졌다.
두 번째 앤솔러지 역시 첫 번째 앤솔러지처럼 저마다 다른 형태의 절박한 상황에 놓인 다양한 직업군의 현실과 애환을 실감 나게 보여준다.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프리랜서 아나운서(오늘도 활기찬 아침입니다), 가맹점주의 이익보다 본사의 이익을 우선해야 하는 프랜차이즈 업체 영업부 직원(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 풀어서 전달한 내용이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쓰이는 걸 보고 혼란스러워하는 프리랜서 통역사(쓸모 있는 삶)의 일상은 소설이 아니었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밥벌이의 풍경이다.
남의 돈 벌기가 제일 어렵다는 말처럼 곳곳에서 살풍경을 보여주기도 한다.
혐오와 차별을 역으로 사업에 이용하는 현실 앞에서 탄식하는 모습과(식물성 관상), 억울하게 전 직장에서 해고됐는데 또다시 억울한 일에 휘말려 일자리를 잃을 위기에 놓인 상황(등대) 등을 보여주면서 말이다.
소설이 내 안의 어둠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뜨끔해질 때도 있다.
화려해 보이는 유명인의 삶이 실은 텅 비어있는 걸 보며 씁쓸해하는 모습을(두 친구), 부모가 제때 돈을 내지 않는데 자꾸 찾아오는 제자를 미워 하는 모습을(피아노), 지나친 우월감 속에 열등감이 숨어있는 모습을 보면 말이다(빌런).
첫 번째 앤솔러지가 그랬듯이 이번 앤솔러지 역시 할리우드 히어로물 같은 대단한 스케일의 이야기는 없다.
특별한 교훈을 전하지도 않는다.
그저 우리 주위에서 충분히 벌어질 법한 이야기를 들려줄 뿐이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빈정대는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온갖 오해와 미움을 살펴보라.
대부분 상대방을 잘 몰라서 오해하고 미워한다.
적어도 이 책을 읽은 사람은 남의 밥벌이를 존중까진 하지 못해도 '누칼협' 운운하며 빈정대진 못할 테다.
첫 소설집과 새 장편소설 작업을 핑계로 읽기를 미루다가 뒤늦게 펼쳤다.
책을 덮을 때 든 기분은 착잡함과 서글픔 사이의 어딘가였다.
어렸을 때 읽었던 <그림 동화>에서 수위를 살짝 낮추고 배경을 현재로 옮기면 이런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까.
문득 오래전 어머니께서 헌책방에서 사 온 <그림 동화>의 종이 삭은 냄새가 느껴졌다.
이 동화집은 다양한 동물(혹은 인간이 아닌 무언가)의 시선으로 민담, SF 등을 차용해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들여다본다.
나는 어렸을 때 쥐가 손톱을 먹으면 나로 변한다는 말을 들은 기억 때문에, 지금도 손톱을 아무 데나 버리지 않는다.
당연히 말도 안 되는 미신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만약 내 손톱을 먹은 쥐가 나로 변했다고 치자.
나로 변한 쥐는 나를 대신해 온전히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이 복잡한 세상을 민증도 없이?(손톱)
이 밖에도 꽤 무거운 주제를 가진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
엄마를 잃은 새끼 고양이에겐 앞으로 어떤 삶이 펼쳐질까(마중), 사람에게도 까다로운 난민 심사를 외계인이 통과할 수 있을까(심사), 최초로 우주선을 타고 지구 밖으로 나갔던 개는 어떤 심정이었을까(라이카), 호랑이를 비롯해 동물원에 있는 동물은 어떤 기분으로 살아가고 있을까(호랑이와 아이).
과거에 잔혹한 민담이 동화로 읽힌 이유는 아이를 교정 대상으로만 바라봤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한마디로 동화는 아이에게 세상의 잔혹함을 미리 알려주는 교재였던 셈이다.
뭐 저 멀리 <그림 동화>까지 갈 필요도 없다.
당장 <콩쥐 팥쥐> 같은 이야기만 살펴봐도 얼마나 잔혹한 이야기인가.
그렇다고 이 동화집 속 이야기가 마냥 잔혹(?)하진 않다.
늙어서 치매에 걸려도 세상을 떠난 주인 할머니를 잊지 못하는 개의 모습과(늙은 개), 세심한 눈으로 학대받는 아이의 사정을 파악하고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어른의 모습은 슬프지만 아름다웠다.
아이들은 이 동화집을 읽고 어떤 기분을 느꼈을까.
나와 비슷한 기분을 느꼈을지, 아니면 다른 기분을 느꼈을지 궁금하다.
김호연 작가는 데뷔작 <망원동 브라더스>를 비롯해 모든 장편소설을 따라 읽었을 정도로 좋아하는 작가다.
작가의 삶을 바라보는 긍정적인 자세와 재지 않는 문장에 스며들어 있는 온기를 사랑한다.
엄청나게 유명한 작가가 된 지금이든 덜 유명했던 과거에든, 여전히 나는 작가의 신작을 손꼽아 기다리는 독자다.
이번에도 온라인 서점에서 예약 판매 중인 이 작품을 보고 바로 구매 버튼을 클릭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과거에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인연을 맺었던 소년 소녀들과 가게 주인이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어른이 된 소년 소녀들이 다시 모여 유튜브 채널을 만들고 돈키호테를 자처했던 가게 주인을 추적하는 여정을 담고 있다.
작가의 작품답게 당연히 따뜻하고 이야기는 흥미로우며 쉽게 읽히고 희망적이다.
그렇다고 작가의 메가 히트작인 <불편한 편의점>의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상상하고 읽으면 당황할지도 모르겠다.
이야기의 스케일이 훨씬 커졌으니 말이다.
그만큼 볼거리도 많다.
마치 <망원동 브라더스>의 주인공들이 옥탑방에서 벗어나 오만 군데를 쏘다니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선화동, 성심당, 대전천, 목척교, 진로집, 신도칼국수, 유성온천...
내 고향 '노잼도시' 대전을 이렇게 본격적으로 다룬 소설은 처음이 아닌가 싶다.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고향인 대전의 풍경이 겹쳐서 정말 반가웠고 쉽게 몰입할 수 있었다.
이 작품 아마도 '올해 대전시민이 함께 읽을 책'에 선정될지 모르겠다.
이뿐만 아니라 주인공 일행이 가게 주인을 추적하며 들르는 서울역 부근, 통영 다찌, 함덕 해변, 제주 선흘리도 모두 내게 익숙한 공간이어서 읽는 내내 마치 함께 여행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급기야 소설은 <돈키호테>의 본고장 스페인까지 무대를 넓히며 독자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꿈을 향해 마음을 다해본 적 있느냐고.
지금처럼 사는 데 만족하느냐고.
식상한 질문인데 낯선 곳에서 그런 질문을 받으니 새롭게 들린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에게 털어놓는 비디오 가게 주인의 고백을 읽고 울컥했다.
"여기 대형 서점 말이야, 마치 거대한 책들의 묘지 같아. 아주 서늘해. 책들이 저마다 자기 무덤 자리에 고이 누워 있다구. 웃기는 게 돈을 더 내면 큰 무덤을 주고 돈이 없으면 여기서 좀 누워 있다 파묘되어 죽은 듯 서 있게 되겠지. 나 있잖아, 그게 너무 무섭다. 내 모든 걸 담은, 세상을 뒤집을 책이 그냥 종이로 만든 좀비가 되어 여기 서 있게 된다고. 솔아, 너는 책을 안 내봐서 모를 거야. 내가 네 방송에 나간다고, 출판사에서 홍보하라고 해 쪼르르 간다고 책이 팔리겠니? 나는 이제 받아들이기로 했다. 책의 운명을. 이러다 서점에서 사라지고 대여점에 혹은 도서관에 꽂힌 채 가끔 돈키호테를 좋아하거나 범죄소설을 좋아하는 독자가 선택해 주면 좋을, 그 정도 삶을 살려고 한다."(410페이지)
가게 주인의 고백이자 작가 본인의 고백일 테다.
작가인 독자라면 반응하지 않을 수 없는 고백이다.
이 고백을 읽고 나도 돈키호테처럼 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여러 책을 냈지만, 그 책들 모두 대형서점 신간 매대에 잠시 머물다가 '책들의 묘지'로 향했다.
마음은 아프지만, 그렇다고 작가로 사는 걸 후회하진 않는다.
쓰는 시간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기분을 느꼈으니 말이다.
이 작품의 클로징 BGM으로 김동률의 '황금가면'을 재생하고 싶다.
나는 2000년대 후반 맥스 브룩스의 장편소설 <세계대전Z>에서 작가의 이름을 처음 봤다.
좀비 아포칼립스 마니아여서 관련 영화와 드라마를 섭렵했는데, 작가가 변역한 <세계대전Z>는 내가 좀비물에 빠져든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이후 디스토피아를 그린 장편소설 <카오스 워킹>에서도 작가의 이름을 역자로 봤다.
그 이름을 역자가 아닌 소설가로 다시 본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그것도 화사한 표지를 가진 청소년 소설의 저자로 말이다.
다문화가정 차별을 비롯해 한부모 가정, 학원 폭력, 성소수자, 권력과 갑을 관계, 작은 사회 등 표지는 화사해도 다루는 주제가 꽤 무겁다.
이런 문제가 학교뿐만 아니라 학교 바깥에서도 벌어지는 사회 문제이기 때문에 마냥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소설로 읽히진 않는다.
곳곳에 반전과 복선이 깔려 있어 흥미진진할 뿐만 아니라, 액션(?) 장면 수위도 상당히 높은 편이다.
성장 소설이긴 하지만 결말을 온전히 해피엔딩이라고 부르긴 애매하다.
그런 결말이 소설에 현실감을 높인다.
긍정적인 에너지를 가진 주인공이 아니었다면 '누아르'를 방불케하는 분위기가 연출됐을 테다.
요즘 들어 자주 하는 생각인데, 사람은 평생 마음만은 나이들이 못한 채 살아가는 존재 아닌가 싶다.
이제 빼도 박도 못하는 중년인데, 내가 과연 청년 시절 아니 어린 시절보다 정신적으로 성숙한 존재인지 의문이 들 때가 많다.
예나 지금이나 마음은 그대로인데, 몸만 나이 들어버렸다.
지금까지 살아온 짬밥이 있으니 생존의 지혜(라고 쓰고 잔머리로 읽는다)는 조금 늘었을지 몰라도, 학창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내가 딱히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진 않는다.
어렸을 때 했던 고민을 떠올려 보면, 지금의 고민과 비교해 가볍거나 유치하지 않은 게 많다.
이 작품, 나름 산전수전 다 겪어본 어른이 읽으면 "맞아 맞아!"라며 고개를 끄덕일 장편소설이다.
손원평 작가의 장편소설 <아몬드>가 그랬던 것처럼.
사다 놓은 지 꽤 됐는데, 이상하게 손에 잡히지 않아서 읽기를 미뤘던 작품이다.
책을 덮은 후에는 늦게 읽은 걸 후회했다.
어떤 어려움이 와도 이어질 인연은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걸 지독하면서도 섬세하게 보여주는 러브스토리다.
읽는 내내 사랑이란 과연 무엇이고, 무엇이 현실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를 끌리게 하며, 시간이 어떻게 사랑을 성숙하게 변화시키는지를 곱씹게 만든다.
내용과 결이 다르지만, 최진영 작가의 중편소설 <구의 증명> 속 커플이 페이지 위에 종종 겹쳐서(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비극으로 끝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스럽게도 마지막은 <구의 증명>보다 훨씬 희망적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전개와 훌륭한 가독성(작품 제목처럼 빠르게 페이지가 넘어간다!)이 매력적이다.
누군가를 구하고자 망설임 없이 급류로 뛰어드는 마음은 얼마나 지고지순한가.
"슬픔과 너무 가까이 지내면 슬픔에도 중독될 수 있다"며 "슬픔이 행복보다 익숙해지고 행복이 낯설어질 수 있어. 우리 그러지 말자. 미리 두려워하지 말고 모든 걸 다 겪자"(256페이지)는 다짐이 애틋하고 아름다웠다.
훌륭한 연애소설이다.
작가는 어떤 사랑을 해봤기에 이런 연애소설을 쓸 수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저출산을 우려하는 뉴스가 매년 늘어나고 있는데, 사실 이 문제는 기혼자와 미혼자를 나눠 판단해야 한다.
통계청의 ‘장래인구추계’에 따르면 2022년 기준 혼인 대비 출산 비율은 1.3명이다.
2023년 합계 출산율 0.72명과 비교하면 두 배 가까이 많다.
통계로 확인할 수 있듯이 기혼자는 여전히 아이를 낳으려는 경향이 크다.
다만 만혼 비율이 매년 높아지다 보니 과거보다 난임 부부와 노산이 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 작품은 그중 노산에 관해 풀어낸 장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40대 중반의 나이에 계획하지 않았던 둘째 아이를 갖게 된 작가의 경험담을 그린다.
주인공 이름이 대놓고 작가 본명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자전적인 소설이다.
늦게 결혼해 난임 전문 병원에 다니며 어렵게 첫째를 가졌는데 둘째는 자연임신, 그것도 '고오령' 임신이라니.
첫째를 손이 조금 덜 가게 키워놓고 슬슬 자기 일을 해보려는 계획은 틀어졌는데 여기에 코로나 팬데믹까지 겹치니 산넘어 산이다.
무겁게 흘러갈 수 있는 주제인데도, 작품의 전체적인 톤은 시트콤처럼 유쾌하다.
온갖 자학과 농담과 드립이 난무하는 가운데, 작가 본인이 경험하지 않았다면 알 수 없는 디테일이 생생해 눈길을 끈다.
임신과 출산 과정의 고충, 임산부의 심리, 미지의 공간인 산후조리원에서 벌어지는 일 등을 남자인 내가 무슨 수로 알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작품은 삶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엄살을 떨지만, 그래서 계획하지 않았던 기쁨을 만날 수 있다고 너스레를 떤다.
경험자의 여유다.
늘 오가던 길도 새로운 골목을 거쳐 가면 여행처럼 흥미롭지 않던가.
실패했든 성공했든 모든 경험이 소설의 재료가 된다는 점에서 작가는 참 좋은 직업이다.
새삼 소설이 다른 이의 삶을 간접경험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하고 값싼 수단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여기에 소설 속의 소설(장르가 다채롭다)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느낌적인 느낌인데 그중 일부는 나중에 새로운 단편이나 장편의 씨앗이 되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벌써 자라고 있을지도 모르고.
이 작품과 더불어 지난해 이맘때 출간된 김의경 작가의 장편소설 <헬로 베이비>를 읽어 보기를 권하고 싶다.
노산을 다룬 이 작품과 난임을 다룬 <헬로 베이비>를 교차해 읽으면 대한민국에서 출산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지형도가 그려질 테니 말이다.
소설은 종종 정부 기관이 작성한 그 어떤 보고서보다 생생하고 날카롭다.
내가 클래식에 관해 아는 수준은 소박하다.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 베토벤 교향곡 9번, 파헬벨의 카논, 비발디의 사계 등 남들이 다 아는 정도를 알 뿐이다.
그런 나도 한때 꽤 즐겨듣던 클래식이 있는데, 바로 헨델이 오라토리오 '메시아'다.
'메시아'를 찾아 듣게 된 계기는 남들이 보기엔 어처구니없겠지만 영화 <첩혈쌍웅> 때문이다.
<쳡혈쌍웅>은 내가 지금까지 과장을 보태면 200번은 넘게 본 최애 영화인데, 그중에서 가장 명장면은 후반부의 총격 신이다.
주인공 두 명을 죽이려고 성당에 처들어온 악당이 성모 마리아상을 총으로 쏴서 부술 때, 절망하는 두 주인공의 클로즈업된 표정 위로 비장한 음악이 흐른다.
신시사이저가 연주하는 처연한 멜로디의 정체를 알아보니 '메시아'의 서곡 '신포니아'였다.
신이 필요한데 신을 찾을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흐르는 멜로디가 '메시아'의 서곡이라는 아이러니.
내게 '메시아'는 2부의 합창곡 '할렐루야'보다 서곡 '신포니아'가 더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이 산문집에 작가가 실은 이야기는 대체로 내가 경험했던 '메시아'에 관한 기억과 맥을 같이 한다.
이 산문집 속 클래식은 대부분 잘 알려진 곡들인데, 곡들에 관한 얽힌 사연은 무척 개인적이어서 진솔하고 흥미롭다.
폭우 속에서 옛 애인을 떠올리며 비탈리의 '샤콘느'를 소환하고, 겨울에 겪는 우울을 고백하며 쇼팽의 '녹턴'과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의 뒷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새벽부터 순두부와 반주를 하려는 다급한 발길을 묘사할 땐 기가 막히게도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기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온다.
작가의 대표작인 장편소설 <인 더 백>에 관한 사연에 곁들여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를 소개할 땐, 맡아보지도 못한 아들의 머리 냄새가 느껴져 코끝이 시큰해진다.
작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클래식은 고상한 음악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작가의 문장을 빌려 말하자면 "돈 많은 자가 비싼 진공관 앰프로도 들을 수 있고, 가난한 자가 낡은 고무줄 둘둘 묶은 손 라디오로도 들을 수 있으며, 젊은이가 이어폰으로도, 어린이가 음악실에서도 들을 수 있"는 게 클래식이다.
작가는 자신의 부끄러웠던 경험을 들어 베토벤을 열심히 듣는다고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건 아니라고, 답이 보이지 않았던 시절에 들었던 말러의 교향곡 제5번이 왜 좋은지 모르겠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이 얼마나 솔직한 태도인가.
이 산문집은 클래식에 관한 위대함이나 들어야 하는 이유에 관해선 말하지 않는다.
좋아하는 음악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 관한 이야기다.
왜 사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딱히 할 말이 없지 않은가.
베토벤이 현악 사중주 14번에 적은 문구인 '쉬지 않고 연주하라'처럼 그저 살아 있으니 최선을 다해 살고자 애를 쓰는 거지.
그러다 보면 슬픈 일도 있고 기쁜 일도 있는 거지.
"걸작이다..."
뒤늦게 이 작품을 읽고 든 생각이다.
문목하 작가의 장편소설 <돌이킬 수 있는> 이후 오랜만에 그런 생각을 하게 한 한국 SF다.
이 작품은 지구를 지배하는 존재가 로봇인 세상을 배경으로 살아있다는 건 과연 무엇인가를 철학한다.
작품 속에서 로봇은 당연히 자신을 생물이라고 여기고, 인간의 기준으로 보면 극단적으로 오염된 환경이 로봇에겐 최적의 환경이며, 산소와 유기물질은 로봇에게 위협이 되는 오염원이다.
지금 우리가 생존 문제라고 여기는 게 과연 다른 종에게도 문제일까?
작품은 그런 세상에서 살아가는 로봇의 시선과 심리를 집요하게 쫓으며 자아와 생존을 고민한다.
지금까지 인간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세계를 모조리 뒤집어서 낯선 세상을 보여주는데, 그 세상이 낯설지 않아서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감탄했다.
로봇을 인간으로 바꿔 읽으면 바로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로 변하니 말이다.
차별 문제, 종교 문제, 환경 문제 등등.
인간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차지한 로봇이 다시 인간을 되살려내 로봇의 멸망을 초래하는 순환을 바라보며 왠지 모를 경이감과 경외감을 동시에 느꼈다.
마지막에 깨달음을 얻는 로봇을 보며 떠올린 문장은 <아함경>에서 부처가 말한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였다.
서글프면서도 아름다운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