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다. 캐릭터는 만화적이고 소재는 사실적인데 안 어울릴 것 같은 그 두 가지가 위화감 없이 화학적으로 잘 결합한다. 캐릭터들은 애정이 가고 각자의 사연에도 관심이 생긴다. 사건들은 21세기 한국에서 일어날 법한 것들이라 더 몰입된다. 트릭은 억지 부리지 않으면서 궁금증을 자아내고, 주인공의 과거로 인한 서스펜스도 전체 이야기 속에서 조화롭게 역할을 해낸다. 시리즈로 이어지면 좋겠다.
쉽고 재미있는 의학 역사서들이 많고, 최근에 발견된 것들까지 보고 싶다면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책을 고르는 게 좋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항상 교훈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출간된지는 좀 지났지만 즐거움이 있는 책이기도 하다.
당장 책을 시작하는 첫 단어가 혁신이다. 저자가 소개하는 '매우 혁신적이고 사람들의 인식을 뚜렷하게 바꾼' 10가지 발견은 워낙에 유명하기도 하니 모두가 들어본 적은 있겠지만, 이렇게 설명을 다시 따라가면 놀라운 발견 뒤의 사람들 이야기에 또 놀라게 된다.
히포크라테스가 의학적 성과만 큰 게 아니라, 질병에는 원인이 있지 무슨 신 타령이냐고 당대의 개념을 뒤짚어 엎었다는 것부터(시대를 고려하면 살해당하지 않은 게 용하다...) 비위생적 환경이 질병을 일으킨다고 보고서를 만들고 공중보건법을 통과시킨 변호사 에드윈 채드윅, 분만통 완화하려던 여성을 불경하다고 화형(...)시킨 스코틀랜드 왕이 있었다는 언급, 엑스선 발견 초기의 말같지도 않은 사람들의 상상에 발견만 무시당한 게 아니라 정말 삶의 길이 왜 이리 불편한지 안쓰러워지는 멘델의 이력...다 읽고 나면 또 친절하게 에필로그에서 교훈까지 정리해준다. 좀 놀라운 건 원서 발간이 2009년이라 '교훈을 배웠는가?' 대목에 신종플루 이야기가 나오는데, 격리조치를 제외하면 코로나 때랑 똑같다! 아무리 고난이 커도 시간이 지나면 바로 잊는 게 사람인 것일까...그래도 사람도 의료 기술도 항상 더 나아질 거라고 믿기 때문에 이 책도 나온 것일테지. 역시나 두 세번은 더 봐야할 책인데, 읽고 싶은 책들이 밀려서 참...
새 장편소설을 출간하고 왠지 모를 현타와 자괴감에 사로잡혀 그 감정을 극대화해 보려고 간만에 이 만화를 다시 읽었다.
곽경수, 신득녕, 천종섭...
아...
이 나잇값 못하고 찌질하기 짝이 없는 예술가 아재들을 어찌할꼬.
그래, 나만 못난 게 아냐.
그들에게서 내 모습을 확인하니 웃음이 났다.
명작은 역시 결말을 알고 봐도 재미있다.
감사하게도 어떻게든 번역이 나오는 시리즈인데도, 출판 순서나 시기 때문인지 읽을 때마다 잠깐 전작들을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목소리는 재출간이다만 빼먹고 본 작품이니 이렇게 접할 수 있다는 것에 그저 출판사에 거듭 감사할 뿐이다.
산타 복장으로 죽은 도어맨의 주변을 파헤치며, 희생자의 씁쓸한 과거뿐 아니라 자신의 과거와도 씨름하는 에를렌뒤르. 살아있는 피로감을 묘사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북유럽 작가 그룹 답게(발전된 복지제도가 있어도 추운 데서 살면 행복감 증진이 어려운 건가...) 읽으면서 나까지 몸이 무겁다. 재능과 돈을 둘러싼 우울한 집착은 동서고금이 없다는 것도 갑갑하고...그래도 어쨌든, 범인을 잡 았고 전혀 매끄럽거나 훈훈하지 않아도 딸과 스스로의 마음과도 대면하고, 정신없는 와중에 나름 연애를 시도하기도 하면서 주인공은 할 일을 다 하였다. 대단한 요소는 아니지만, 마지막에 거액의 자산의 행방을 아무도 모르게 되며 끝났다는 게 마음 편하다. 그런 물건은 소설 속에서라도 그렇게 사라지는 게 제일 낫겠지...
매년 새해 첫날을 맞으면 습관처럼 포털사이트에서 신춘문예 당선작 소설을 검색해 살핀다.
신춘문예 경쟁률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과 비교될 만큼 치열하지만, 이후 의미 있는 작품 활동을 벌이고 단행본까지 내는 당선자는 그리 많지 않다.
당선작을 훑어보며 나중에 어떤 작가가 살아남을지 예상해 보곤 하는데, 정말로 살아남아 단행본을 내면 반가운 기분이 든다.
2년 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무겁고 높은'은 지금도 기억에 남는 단편이다.
탄광 폐쇄로 쇠락한 강원도의 소도시에서 역도 선수를 꿈꾸다가 포기하는 여고생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인데, 바벨을 드는 일보다 버리는 데 의미를 두는 주인공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앞으로 오래 보겠구나 싶었는데 내 예상을 넘어 젊은작가상, 이상문학상 우수상 등 굵직한 상을 휩쓸어서 깜짝 놀랐다.
불과 등단 2년 만에 말이다.
게다가 한국 문학에서 씨가 말라가는 남성 작가라는 점 때문에 더 눈이 갔다.
첫 소설집 출간 소식을 접한 뒤 바로 주문을 넣고 책을 기다렸다.
역시나 좋았다.
'세상 모든 바다' 등 몇몇 작품은 문예지를 비롯해 이런저런 경로로 접한 구면인데 다시 읽으니 새로웠다.
소설집에 실린 9개의 단편이 다루는 소재는 예능, OTT, 팬덤, 아이돌, 대중음악 등 무척 다채롭다.
작가는 이런 소재들을 교육, 노동, 차별 등 여러 사회 문제와 엮어 전방위로 다루는데 등장인물은 대체로 평범하고 우리 주위에 있을 것 같은 사람이다.
전 세계 여러 도시를 배경으로 다룬 '팍스 아토미카' 같은 단편을 제외하면 거대한 서사도 없다.
이래서 소설이 될까 싶은데 이 모든 요소가 빌드업해 기가 막히게 소설이 된다.
분명히 '지금' '여기'를 핍진하게 다루는 소설인데 질감이 기존의 '지금' '여기'를 다큐처럼 다룬 소설과 다르다.
현실을 비관이나 낙관으로 일관하지 않는 줄타기가 절묘하다.
사려 깊은데 연약하지 않다.
거대한 콘크리트 빌딩을 지탱하는 H빔처럼 단단하고 힘이 있다.
소설집에 으레 달리는 해설은 진부했지만, '작가의 말'이 없어서 신선했다.
작품으로 말하면 충분하다는 태도일 테다.
앞으로 작가를 정말 오래 보게 될 것 같다.
좋은 소설집이었다.
미스 마플과 함께하는 금요일 저녁의 즐거운 수수께끼 풀이 시간.
내가 느끼기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하거나 악한 게 아니라 뭐랄까, 어리석게 보이거든.
늘 생각하는 거지만 인간은 기억력이 짧은 게 축복이지요.
제가 보기에 요즘 젊은 사람들은 '생각'을 할 줄 몰라요. 진상을 파악하려 들지 않는단 말씀이지요.
갑자기 모든 것을 다 내던지고 뛰어드는 사랑을 이야기하는 책이라면, 정열에 화르락 불타오르는 인물들을 생각하게 된다. 이 책도 분명히 그런 인물들이 나오는데...온도가 너무 낮다. 꽁꽁 추운 건 아닌데 비오는 날 싸돌아다니다 몸 식을 때랑 비슷하다.
남자주인공의 태도는 종종 칙칙하기까지 하니 연애소설로 어디 추천하기에는 미묘하다. 만나자마자 목숨을 논하는 사랑 고백을 할 정도인데도, 한없이 방어적이고 사람에게도 정이 없으며 갑자기 보내놓고 갑자기 다시 찾아오고...여주인공도 끊임없이 전전긍긍하는데 행복을 논하는 순간에도 전혀 온기가 없다. 원래도 고독했지만 인연을 만나도 고독하고, 그렇게 11월, 언젠가를 위해 미뤄놓은 모든 것은 허무하게 끝나니...혼자서 아무도 없는 낙엽길 걷듯 책을 읽고 싶은 이에게는 꽤 좋은 선택일지도 모르겠다.
아래는 인터뷰 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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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문체부의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지난해 성인 종합독서율은 43%다. 쉽게 말해 1년간 성인 10명 중 6명이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는 의미다. 독서인구가 줄어들고 출판계는 불황이라는 익숙한 전망 앞에서 김새섬 대표는 오랫동안 사랑해온 책의 세계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책을 읽는 사람도, 책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도 없는 세상은 얼마나 척박할까. 온라인 독서모임 플랫폼 '지식공동체 그믐’은 그렇게 사랑하는 세계를 지키고 싶다는 한 사람의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그믐의 독서모임은 온라인을 기반으로 하며, 모두 29일이면 끝난다. 물리적 공간에 제약받지 않고 친목의 부담도 적은 이 플랫폼은 그믐달처럼 잘 보이지 않던 독서가들을 한데 불러 모았다. 현재 그믐은 약 1만 500명의 회원과 함께 책의 세계를 지키고 또 넓혀 가는 중이다. 김새섬 대표가 그믐에서 추구하는 것은 ‘느슨한 연대’다. 그는 이 연대감이 가능한 한 오래 책 읽는 이들의 세계에 머물기를, 그것을 바탕으로 더 많은 사람이 읽는 즐거움을 느끼기를 바란다. 지난 5일, 김새섬 대표를 만나 그믐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았다.
느슨한 연대가 있는 독서가들의 아지트, 그믐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독서모임 플랫폼, 지식공동체 그믐 대표 김새섬입니다. 15년간의 직장생활을 번아웃으로 그만두고 무엇을 해볼까 고민하던 중 예전부터 좋아했던 책이 눈에 들어왔어요. 책 읽는 사람이 줄어든다는 소식에 안타까워하다가, 재미있으면서 사회에 의미도 있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그믐을 만들었습니다.
그냥 독서모임 플랫폼이 아니라 ‘지식공동체’라는 표현이 귀에 들어옵니다.
책 읽는 사람들이 모여서 책을 중심으로 맥락 있는 대화를 나누면 그게 곧 지식과 지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모인 다양한 의견들은 미래 독자들을 위한 길잡이가 되고 더 나아가 2020~30년대 한국인이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 보여주는 자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믐은 일종의 지식공동체라고 생각했어요.
지난 4월 초 그믐은 회원 1만 명을 돌파했어요. 큰 홍보 없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요?
회원가입을 하거나 플랫폼을 다른 사람에게 추천하면 보상을 주는 마케팅이 흔한데, 처음부터 그런 건 계획하지 않았어요. 책을 생전 안 읽던 사람이 커피 교환권 받는다고 갑자기 책을 읽지는 않잖아요. 왔다가도 금방 떠날 거예요. 대신 정말로 책을 좋아하고 열정을 가진 사람들을 진득하게 모으고 싶었습니다. 광범위한 마케팅을 하는 대신 그분들에게 필요한 플랫폼, 좋아할 만한 플랫폼을 만드는 데 집중했어요.
그렇기에,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저희 사이트는 되게 지루할 수 있어요. 하지만 책을 좋아하는 분들은 이런 곳이 필요했다며 많이 아껴주시죠. 자연스레 회원들 대부분이 모임에 열심히 진지하게 임하고, 그런 특성이 또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가는 듯해요.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다 회원분들이 열심히 입소문을 내주신 덕분입니다.
그래서인지 그믐은 들여다볼수록 독특한 구석이 있어요. 회원가입을 하지 않아도 모든 모임의 글을 열람할 수 있다는 것, 어떤 모임이든 29일이 지나면 끝난다는 게 눈에 띄어요. 이렇게 설계한 배경을 들어보고 싶어요.
회원가입이 글을 읽는 장벽이 되지 않기를 바랐어요. 잘 읽다가 회원가입 창이 뜨면 귀찮아서 읽기를 그만두는 사람도 많잖아요. 그렇게 가입을 유도해 회원 수가 늘어나기보다 사람들이 그믐에 올라와 있는 좋은 글을 계속 보고 널리 퍼뜨려 이 모임들이 세상에 알려지는 게 더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29일이면 모임이 끝나는 건 실제 달의 주기가 29일이기도 하고, 지나친 친목을 지양하기 위해서이기도 해요. 29일이면 책 한 권을 다 읽고, 그 책에 관한 이야기도 충분히 나눌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그 이상으로 넘어가면 모임에 참여하는 사람도 부담스럽고, 주제에서 벗어난 이야기로 빠질 수도 있어요. 한 권을 다 읽은 후에는 또 다른 모임에 참여하며 활동을 이어가면 됩니다.
‘좋아요’가 없다는 것도 그믐의 큰 특징입니다.
다른 커뮤니티에서 인기 있는 의견이 곧 좋은 의견, 옳은 의견 취급받는 모습을 많이 봤어요. 그믐에서는 ‘좋아요’로 게시물의 우열이 결정되지 않았으면 했습니다. 모든 사람의 생각은 다 다르고 나름의 가치가 있어요. 그믐 이용자들은 ‘좋아요’ 개수 대신 내용 자체로 글을 판단하기를 바라요. 여기서는 어떤 의견을 읽고 난 후 정말 마음에 든다면 ‘좋아요’를 누르는 대신 답댓글을 달 수 있어요. 그러면서 자신의 의견을 한 번 더 정리해볼 수도 있죠.
‘좋아요’가 없으면 커뮤니티 분위기를 흐리는 회원을 막는 데에도 효과가 있습니다. 온라인에서의 ‘좋아요’는 관심이고, 관심은 곧 돈이 되거든요. 그믐에서도 아주 드물게 분란 자체가 목적인 글을 봤는데, 관심을 받지 못하니 사라지더군요.
책으로만 할 수 있는 일
대표님도 독서모임에서 긍정적인 경험을 했기에 그믐을 만들 결심을 하셨을 텐데, 그 기억을 들려주실 수 있나요?
책은 어릴 때부터 많이 읽었지만, 독서모임을 한 적은 없었어요. 그러다 직장 생활에 번아웃이 와서 독서모임에 참가해 봤죠. 첫 번째 모임 책이 제니퍼 이건의 『깡패단의 방문』이었어요. 끌리지 않는 책이었는데, 몇 장 읽다 보니 푹 빠져들더군요. 모임이 아니었다면 평생 관심을 안 뒀을 책이에요. 이렇게 놓치는 책이 세상에 얼마나 많을까 싶었죠. 정작 그 책을 추천한 분은 그 책이 취향에 맞지 않았다고 밝힌 지점도 재미있었어요. 독서모임이란 평소 안 보던 책의 재미를 알아가고 다양한 의견을 들어볼 수 있는 자리라는 걸 그때 실감했어요.
지금까지 약 3년간 그믐을 운영하시며 중요했던 순간들을 꼽는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처음으로 저희 팀원 외에 다른 사람들에게 그믐의 시스템을 선보였던 베타테스트가 기억에 남아요. 베타테스트가 고등학생 대상으로 이루어져서 솔직히 걱정도 되었는데, 의외로 진지하게 의견을 주고받는 학생이 많아서 깜짝 놀랐습니다. 누구나 자리와 환경이 마련된다면 거기에 맞게 행동할 수 있다는 것, 그믐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걸 배웠습니다.
베타테스트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예 모르는 사람이 그믐에 모임을 개설했던 사건도 강렬하게 남아 있습니다. 홍보도 하기 전이었는데 저희 팀원도 지인도 아닌 분이 어떻게 찾아왔는지는 지금도 몰라요. 수요조사도 없이 제가 원해서 만든 플랫폼이라 솔직히 사람들이 좋아해 줄지 걱정이 컸던 시절, 그믐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던 사건이었어요.
최근에는 교보문고 구독 서비스 ‘샘(sam)’과 협업을 진행 중인데, 이것도 저로서는 큰 사건이에요. 처음 시작했을 때는 상상도 못 했던 큰 회사인데, 그믐이 편집자들이 주시하는 사이트라는 말씀과 함께 먼저 협업을 제안해 주셨어요. 감격스럽고 또 감사했습니다.
그믐을 운영하며 처음 생각과는 다르게 진행되었던 것도 분명 있었을 테죠.
저는 출판계에서 일한 적이 없었기에 그믐을 만들 때도 순전히 독자 입장에서 좋아할 만한 플랫폼을 상상했어요. 저와 같은 ‘책 팬’을
모으겠다는 마음이었죠.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나며 작가와 출판사분들도 이 플랫폼에 많은 응원을 보내주신 게 감사하면서도 뜻밖이었습니다.
지금은 소수의 베스트셀러 작가를 제외하면 내 책을 읽은 사람들의 목소리 자체를 발견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에요. 하지만 그믐에서는 책 한 권에 관해 적게는 몇십 개에서 많게는 몇백 개까지 의견이 올라와요. 허공에 글을 발표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작가에게 힘을 주는 것 같아요. 출판사도 마찬가지예요. 비용 없이 독서 모임을 열어 독자들의 반응을 확인할 수 있어 작은 출판사들의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그만큼 독자 반응을 확인하기가 어렵다니, 독서인구가 적다는 게 실감이 납니다. 요즘은 손쉽게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어 책을 읽을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 같기도 해요.
정보는 책이 아니더라도 어디서든 얻을 수 있다는 말이 많은데, 저는 정보가 아니라 지식·지혜를 얻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고 생각해요. 정보가 아주 작은 단위의 뉴스라면, 지식·지혜는 그 정보들이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서 그 자체로 하나의 긴 논리를 갖추고 맥락이 있는 덩어리예요. 예를 들어 어떤 동네 아파트에서 화재가 발생해 몇 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은 정보예요. 하지만 그 아파트에 사용된 건축자재, 관련 법령을 조사하며 1년간 전국의 아파트에 발생하는 화재를 분석하고 어떤 결론을 내리는 것은 지식, 지혜가 됩니다.
오늘날에는 검색하면 바로 나오는 단편적인 정보는 별로 가치가 없어요. 지금 같은 AI 시대에 필요한 것은 손쉽게 얻은 개별의 정보가 무슨 의미인지 파악하는 능력입니다. 그 능력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은 아직까지 책밖에 없다고 저는 생각해요.
하지만 최근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 10명 중 6명은 1년에 책 한 권도 안 읽는다고 해요. 읽지 않는 사회가 읽는 사회로 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독서는 굉장히 능동적인 활동이에요. 시간도 체력도 필요하기에 쉬면서 자발적으로 하기는 어렵죠. 그래서 환경이 중요합니다. 모든 활동에는 전염성이 있어요. 내 주변 모든 사람이 농구를 좋아해 경기를 챙겨 본다면, 관심이 없더라도 한 번쯤은 보잖아요. 마찬가지로 책 읽는 사람이 늘어나기 위해서는 책을 읽는 분위기, 책을 읽고 대화하는 문화가 필요합니다. 그믐이 거기에 조금이라도 일조할 수 있다면 정말 기쁠 거예요.
그럼 대표님이 꿈꾸는 이상적인 ‘책 문화 생태계’는 어떤 모습인지도 궁금합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책을 살 때 베스트셀러 목록이나 유명인의 추천 도서 목록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아요. 저는 그보다 실제로 어떤 책을 읽은 누군가의 이야기에 주목하기를, 독자가 스스로 좋은 책을 발굴해내는 분위기가 형성되기를 바랍니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향하는 게 아니라 아래서부터 위로 향하는 독서문화를 꿈꾸죠. 책을 중심으로 둔 여러 활동도 더 활발해지면 좋겠습니다. 도서관, 서점, 독자, 작가 출판사 등 각각 다른 목적을 가진 책과 관련된 주체들이 더 긴밀하게 교류하고 협력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지속 가능한 그믐을 꿈꾸며
요즘 그믐의 고민은 무엇인가요?
가장 큰 고민은 지속 가능성이에요.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수익모델도 만들고 싶고, 기존에 책을 좋아하는 사람 외에 책을 읽기로 새롭게 결심한 사람들도 모으고 싶어요. 방법은 계속 고민 중인데, 일단은 사랑받는 사이트를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그래야 그다음도 생각할 수 있겠죠. 많은 실험을 해나갈 거고, 또 그만큼 많은 실패가 기다리고 있겠죠. 그래도 계속해보고 싶어요.
그렇게 계속하는 원동력은 어디서 나오나요. 15년간 하던 일을 그만두고 회사 밖에서 완전히 새로운 일을 하다 보면 불안할 때도 많을 텐데요.
잘될 거라는 생각보다 안 될 거라는 부정적인 생각에서 오히려 힘을 얻는 타입이에요. 의외로 죽음을 생각하는 게 많은 도움이 돼요. 만약 내가 내일 죽는다면 이미 한 일보다는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지 않았던 일을 더 후회할 것 같거든요. 언제든 삶이 끝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좀 더 용기를 낼 수 있어요. 다 망했고, 결국엔 죽는다면 지금 못 할 건 하나도 없잖아요.
그믐을 운영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대표님이 예상하는 출판시장과 독서문화의 미래는 어떤 모습인지도 궁금합니다.
점점 책이 재화에서 서비스의 영역으로 넘어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요즘 사람들은 책 자체보다도 책을 읽는 경험을 중요시해요. 책을 안 읽는 사람조차 책을 읽는 게 좋은 거, 멋진 거라는 생각은 하잖아요. 쇼츠 20개 보면 자괴감이 들지만, 책 한 권을 읽으면 좀 재미가 없었더라도 뿌듯해지고 더 나은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이 들죠. 오늘날의 책은 그런 긍정적인 ‘경험’을 선사하는 매체예요.
저는 그러한 독서 경험을 나눌 수 있는 북클럽이 지금보다 훨씬 더 활성화될 거라고 봐요. 10년 전만 해도 북토크라는 개념이 낯설었지만, 지금은 책을 내면 북토크를 하는 게 자연스러워졌듯이, 북클럽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출판사는 신간을 출간하며 그 책을 적극적으로 읽고 나눌 수 있는 프로그램도 같이 홍보할 거예요. 사람들은 이제 알아서 책을 읽지 않아요. 같이 읽자고 서로 끌어주고 격려해야 해요.
최근 그믐에서의 새로운 시도나 앞으로 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책을 중심으로 한 2차 콘텐츠 모임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최근에는 ‘연뮤클럽’이 하나 생겼어요. 작년에 도스토옙스키 3대 장편 읽기 모임을 했는데, 그때 참여자 중 한 분이 도스토옙스키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연극까지 같이 보면 좋겠다며 여신 거예요. 5월에 대학로에서 하는 연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함께 보고 온라인으로 이야기를 나눌 예정입니다.
이렇게 남겨진 기록을 보고 다음번에 다른 사람이 해당 공연을 예매할 수도 있을 거예요. 좀 더 욕심을 내면 비평들이 모일 수 있는 플랫폼이 될 수도 있겠다 싶어요. 평론가들의 비평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풀어낸 아카이브가 되는 거죠. 그렇게 그믐이 확장되기를 꿈꿔봅니다.
이 인터뷰를 읽으며 새롭게 책을 읽어보기로 결심하는 사람도 있을 듯해요. 인터뷰를 마치며, 그런 분들을 위해 어떻게 독서를 시작하면 좋을지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주변 도서관에 가보시길 추천드려요. 회원증을 만들면 다섯 권을 빌릴 수 있어요. 고민하지 말고 끌리는 책 아무거나 다섯 권을 빌립니다. 집에서 설렁설렁 읽다가 재미없으면 덮어둬요. 반납하고 또 새로운 다섯 권을 빌려와요. 서너 번 이러다 보면 한 권쯤은 재미있는 책을 발견할 거예요. 거기서부터 시작입니다.
재밌었던 책을 보며 같은 작가의 책을 읽어보거나 비슷한 분야의 다른 책을 시도해보세요. 필독서를 읽을 필요도 없고, 한번 빌렸다고 끝까지 읽을 필요도 없어요. 자유롭게 자신만의 책 취향을 만들어 가며 읽는 재미를 느끼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