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보 대비 생각보다 실망했다. 영화 중 강동원과 박정민의 관계성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올랑말랑하는데, 흘리면 자존심 상할 것 같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특히 박정민, 강동원, 정성일 셋이서 칼춤 추는 장면은.... 뭘까...? 솔직히 좀 웃겼다. 전과 란이 한 곳에 모여 휘말린다는 의미인가...? 계급 사회의 부조리함에 화를 내야 할지, 두 사내 간 계급을 뛰어넘는 브로맨스에 감동을 느껴야 할지, 영화의 정체성도 묘하다. 감동 속에서 화도 잠깐 났다가 황당함에 가벼운 웃음이 새어나오는 느낌...
소설만큼 재밌다. 그치만 아무래도 소설이 더 재밌다. 찰진 말맛이 더 살아있음.
땅 속 깊은 곳. 지상의 어둠보다도 더 어두운 탄광 속에서 사는 검은 사슴. 구석진 화전마을 연골에서 도망친 의선과 닮았다. 검은 사슴의 꿈은 햇빛을 보는 거지만, 이를 위해 끊임없이 도망쳐야 한다. 빛나는 뿔과 이빨이 뽑히기 전에, 햇빛에 붉은 물로 녹아버리기 전에, 족제비나 사냥꾼에게 잡히기 전에. 어둠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빛을 보면 녹아버리는 검은사슴의 운명을 닮은 사람의 이야기다. 역시나 너무나도 처절하고 필사적이라 아프다.
정말 아프다.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슬픈적은 오랜만이다. 눈이 내리면 산속 어딘가에서 두런두런 세상 가장 어두운 곳으로 하강하는 경하와 인선의 말소리를 상상할 수 있을 것 같다. 쓰러진 인선 위로 경하가 촛불을 들고 눈을 닦아내며 바라본다. 그 위로 소리없이 눈만이 내리는 그 마지막 장면이 소설을 다 읽은 머릿속에 남는다.
거짓말 맞추기 게임은 나도 해본 적 있다. 물론 소설과 같이 어릴 때 자기소개 시간때였다. 하지만 암묵적 약속에 따라 어느 누구도 무거운 얘기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우와 아저씨는 눈오는날 트럭에 탄 채 거짓말 게임으로 진실을 말하고, 지우 엄마의 얘기를 하며 가까워진다. 감동 포인트. 오랜만에 나온 김애란 작가의 신작이지만 마무리는 다소 아쉽다. '제자리에 있는 것 같지만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새에 성장해 있다'는 메시지의 마감처리가 난데없이 직관적이고, 성기다.
닫히지 않은 이야기, 닫히지 않은 믿음, 닫히지 않은 시간은 아름답다.
운동권 세대 주인공의 이야기라 조금 지루하기도 했지만...
꼼수, 라는 말이 얼마나 적절한 표현인가 생각한다. 옛날에는 어떤 잘못을 '꼼수'라고 생각했다. 그 정도 반칙은 누구나 저지를 수 있으니 괜찮다고, 오히려 조금 눈치 좋게 요령을 피워서 효율성을 높이는 선택지라고 생각했다. 콕 집어서 예를 들 수 없는데, 이게 내가 생각보다 '꼼수'를 고른 일이 적어서인지 아니면 아직도 그 '꼼수'에 대한 죄의식이 없어서인지는 모르겠다.
지금은 내 선택에 대한 무서움이 있다. 투표권 부터 시작하여 내가 남기는 덧글 하나까지. 누군가의 1분, 혹은 인생 전체를 바꿀 수 있는 나비효과의 일부라는 생각을 항상 안고있다. 나의 선택이 나 뿐만 아니라 그 바깥에 끼칠 수 있는 영향은 상상만으로 무시무시하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라는 말의 무게가 달리 느껴진다. 나는 돌이 될 생각이 없는데, 그것도 심지어는 흉기가 될 생각은 더더욱 없는데 내가 주의하지 않으면 언제든 남이 다칠 수 있다.
결국엔 항상 나와 남을 동시에 생각할 수 밖에 없다. 남을 나보다 먼저 혹은 나중에 두지 않고 꼭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어른으로 기능하기가 이렇게 겁나고 까다롭고 무섭다. 그래도 어른으로 기능하고 싶은 이유는, 나와 남을 동시에 고려하는 개인이 많은 사회가 내가 살고 싶은 사회이기 때문이다.
주택 구입이 빠를까, 면허 취득이 빠를까. 나는 차에 딱히 관심이 없다. 아니, 차가 무섭다. 택시보다 지하철을 선호하고, 어쩌다 승용차 조수석에 앉으면 초긴장 상태가 된다. 서너 달에 한 번씩, 차를 운전하다 어딘가에 부딪치는 꿈을 꾼다. 당연하게도 아직 면허가 없고, 딸 생각도 없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시금치를 싫어하는 아이들도, 시금치를 잘게 다져 리조또로 만들어주면 맛있게 잘 먹는다고 한다. 그렇게 몇 번 맛을 들여 놓으면 그냥 시금치에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내게 이 책은 시금치리조또다. 본인의 ‘운전 경험'을 잘게 다져 ‘읽는 맛'이 있는 에세이 29편으로 완성했다.
에세이의 감칠맛을 내는 건 저자가 재밌게 읽었던 소설들이다. 저자는 등장인물이 처한 상황이나 선택들을 운전자의 입장에서 재해석한다. 예를 들면,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는 것이 힘들었던 소녀의 이야기를 도로 위 ‘안전거리’에 빗대어 얘기하는 식이다. 레이먼드 챈들러, 찰스 부코스키 등 유명 해외작가의 대표작을 다수 번역한 저자의 이력을 알고 있던 터라, 그가 언급한 소설 리스트에 더욱 믿음이 갔다. <스토너>, <깡패단의 방문> 등 평소 읽고 싶었던 소설 얘기가 나올 때면 집중력이 더 높아졌다. 그렇게 책 한 권을 다 읽다 보니 ‘면허를 따긴 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전이 두려운 이유는 평소 성향과 관련이 있다. ‘통제할 수 없는 변수'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나에게, 도로는 ‘변수 덩어리’다. 앞차, 옆차, 뒷차와의 ‘안전거리'를 스스로 결정할 수가 없다. 이쪽에서 아무리 거리를 두려고 해도 그쪽에서 더 빠른 속도로 다가오면 피할 도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변수가 도로에만 있나? 어차피 100% 통제할 수 있는 일은 어디에도 없다. 결과를 알려면 우선 믿고 뛰어들어봐야 하듯, 운전 역시 믿고 도로 위로 나가봐야 하는 것 아닐까. 이 책을 계기로 면허 딸 생각이 들었던 것처럼, 인생은 원래 알 수 없는 것이니.
제가 기획한 <킬러 문항 킬러 킬러>와 제가 첫 번째 에피소드를 쓴 <소설, 한국을 말하다>를 한국일보에서 기획기사로 다뤄주셨습니다. 두 책 모두 테마를 정한 뒤 작가들이 종합일간지(한겨레, 문화일보)에 원고를 연재하고 이후에 책으로 엮은 방식이지요. 경쟁 매체의 작업에는 언급을 피하는 게 언론계 관행인데 이렇게 호평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의미 부여도 반갑습니다.
거친 분석이지만, 2010년대 중반 이후 한국 문단문학에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방식으로 사회 문제를 소설화하는 시도가 많은 것 같습니다. 젠더나 퀴어 이슈 등에 작가의 당사자성을 바탕으로 접근하는 것, SF 기법을 활용해 일종의 우화 소설을 만드는 것, 혹은 근현대사의 서사를 활용하는 것.
물론 그런 작품들도 의의가 있지만 저는 보다 차분한 관찰자의 시선으로, 당대 문제를 사실적으로 포착하려는 시도에 갈증이 있습니다. 그런 작품이 지금 부족하다고 느껴요. ‘정통 사회파 소설’이라고 불러도 좋겠지요. 그래서 비슷한 갈증을 느끼는 작가님들과 월급사실주의 동인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기술의 충격에 대해서도 같은 문제의식이 있고, STS SF 미니픽션을 조선일보에 연재 중입니다. STS SF도 내년 초에 뜻을 함께 하는 한중일 작가님들과 작품집을 내려 합니다. 작가님들은 다 모았네요.
특히 지금 한국문학에 부족한 게 발품 아닌가 하는 생각을 오래 했습니다. 그 생각이 이어진 새로운 기획연재를 며칠 뒤에 말씀드릴 수 있을 거 같네요. 월급사실주의 작가님들과 모 종합일간지에 함께 글을 싣습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꾸벅...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111517010001105?did=NA
기술이 발전하면 사람들의 삶이 정말 나아지는 걸까? 몇 년 전부터 진지하게 고민하는 주제다. 페니실린에는 감사하지만 인스타그램에 대해서는 별로 그렇지 않다. 그런 문제의식을 담아 지난해 SF 소설집을 냈는데 작가의 말에서 간단한 삼단논법으로 딴에는 과감한 주장을 펼쳤다: ‘기술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이 점점 커지고 있다. 나는 좋은 삶을 살고 싶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술을 통제해야 한다.’
앞으로도 같은 문제의식으로 SF와 논픽션을 더 쓰려 하는데, 그때마다 대런 아세모글루와 사이먼 존슨의 ‘권력과 진보’(생각의힘)를 자주 펼치게 될 것 같다. 기술과 번영의 관계를 깊이 성찰한 이 736쪽짜리 책의 첫째 장 제목이 ‘테크놀로지에 대한 통제’다. 두 MIT 경제학자들은 기술은 정해진 경로를 따라 발전하는 게 아니라고 강조한다. 기술의 발전 방향은 공공선을 향할 수도 있고, 그 기술을 개발하거나 소유한 특정 계층의 이익을 향할 수도 있다. 산업혁명 초기 생산성 향상은 공장 노동자들의 삶의 질 개선이 아니라 몇몇 공장주들의 수익을 증대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책은 그 외에도 다양한 사례들을 소개한다.
따라서 기술 발전 방향을 둘러싸고 의제를 설정하고 사람들의 인식에 영향을 미치는 힘이 중요한데, 저자들은 이를 ‘설득 권력’이라고 칭한다. 오늘날 기업계와 ‘테크 지배층’이라 불러야 할 소수가 이 설득 권력을 쥐고 있다는 게 저자들의 진단이다. 테크 업계의 억만장자들은 기술 진보가 현재의 여러 가지 위기를 다 해결해줄 거라는 비전을 당당하게 내세우지만, 실제 그들이 개발하는 기술은 자동화, 감시, 데이터 수집, 광고 쪽으로 치우쳐 있다. 특히 인공지능을 비롯한 몇몇 첨단 기술들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듯하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자들의 해법이 다소 막연하게 들리기는 하다. 그 막연함을 나는 이렇게 받아들였다. 첫째, 너무나 근본적인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기에 추상적으로 쓸 수밖에 없었다. 둘째, 여태까지 구체적인 방법이 제대로 논의된 적이 없다. 이제부터 모두 머리를 맞대야 할 문제라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