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은 읽을 때 내 영혼의 주파수와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루시>를 읽을 때도 주인공의 목소리가 하나하나 내 쪽으로 와서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읽다가 감탄하고 소리 내 다시 읽어본 구절도 있었다. 난 루시처럼 용기와 결단은 없지만, 새로운 곳에 터를 잡고 삶을 처음인 것처럼 다시 감각하는 상황들이 마침 요즘 내 일상과 닮아있다. 나도 요즘 그렇게 지낸다. 새로운 동네에서 길을 걸으며 눈에 보이는 것들을 보며 사진을 찍고 아름다움을 느끼고 내 나름의 문장으로 만들어본다. 꼭 다시 읽고 싶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길게 인터뷰를 했다. 예술지원 정책방향을 다시 짜려고 문학계 종사자 100명을 인터뷰하는데 인터뷰 대상으로 내가 들어간 것. 나는 문인이 아니지만, 예술위에서는 문인뿐 아니라 유통·홍보마케팅, 서비스 지원 분야 종사자들도 10여 명 인터뷰했고 그 중 한 사람이 나였다.
예술위도 이런 작업을 하는 건 처음이라는데, 미리 받은 질문에 깊은 고민이 담겨 있었다. 전날 하루 종일 답을 고민했다. 단순히 독서 커뮤니티 어렵다고 하소연하는 자리가 아닌, 생태계라는 관점에서 문학계, 출판계를 봐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예술 지원 정책은 단순한 창작 지원을 넘어, 생태계 전체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건강한 생태계에서 다양한 종이 공존하고 스스로 성장하듯, 문학 생태계도 여러 주체들이 상호 작용하며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루어야 한다. 번성한 생태계의 특징들, 즉, 총 개체수 증가, 종 다양성, 시스템의 자립성이 우리의 문학 생태계, 출판 생태계에도 동일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과연 지금 하는 지원대로 계속한다면 어떠한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까? 종 다양성이 늘어나는가? 야생화를 준비할 수 있는가? 지속 가능한가? 동물원은 생태계가 아니다. 방사를 앞둔 반달곰은 스스로 먹이를 찾는 훈련을 해야 한다.
창작자 지원 일변도에서 벗어나 생태계라는 관점에서 문학 지원 정책을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이제는 독자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문학 생태계, 출판 생태계를 복원하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예술위의 고민이 담긴 이번 현장 조사를 응원한다.
역시나 덮어놓고 집어왔으며, 저자의 최근 작품들에 비하면 꽤 소프트하다. 불만인 건 아니고, 추운 날 산 붕어빵 조심해서 씹었더니 생각보다 안 뜨거워서 한 입에 순삭한 느낌. 괴이 파트는 언제나처럼 피부가 스물스물하지만, 둘이 머리 맞대고 추리 내지 티키타카를 할 때는 훈훈(?)하면서 어릴 때 보던 괴담책들 주인공들이 이렇지 않았나 되돌아보기도 하고. 일관된 소름 레벨이나, 순한 맛보다는 매운 맛을 원하시는 분들한테는 어떨까 싶지만...공포에 살짝 약한 독자는 강약중강약이 편해유.
사실, 막판에 언급되는 이름에 이렇게 미츠다 월드가 연결이 되는가 다른 의미로 놀람. 작가의 여러 작품들이 동일 세계관에서 움직이는 경우가 드문 것도 아니고 그런 걸 찾는 것도 재미지만...이 인물들이 나온 시리즈의 번역이 끊긴 뒤 방법 없어 원서 완독한 입장에서, 그런 기대를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시리즈 뒤로 갈수록 공포 묘사와 판타지의 비중이 동시에 왕창 올라가니, 무서울 때는 우와 역시~ 하다가도 혼란스러웠다. 따지고 보면 괴이현상도 판타지에 속하고 판타지도 좋아하지만, 은근하던 요소가 갑자기 메인이 되고 작품 카테고리가 바뀌니...시리즈물은 분명 집필 단계부터 대략적인 것들이 정해져 있을테고, 다른 독자들은 이미 초반에 다 짐작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쓰다 신조 작품 매력은 퇴마가 아니라고 지금도 생각하니까...'아이젠'이 이야기에서 맡는 비중이 높아질수록 개그 판타지 지수도 급증해, 걷는 망자의 개그가 별책부록 훈훈같은 느낌이라면 이쪽은 가끔 부담스러웠다. 클라이막스는 빼박 판타지니, 미쓰다 작품들 내에서도 색이 다르다 여겼는데...이 인물들의 과거가 별도의 퇴마 탐정 시리즈가 아니라 도조 겐야 시리즈로 나오고, 이름만 언급한 게 아니라 마지막 장에 요약소개까지 해서 연결에 확실히 도장을 찍은 데는 뭔가 의미가 있겠지. 큰 의미는 없다 해도 작품의 아버지가 원하면 그러려니 하는 것이고...
문제의 시리즈 원서들은 다 읽고 도서관에 기증하러 들고 갔었다. 담당직원분이 체크하면서 라이트노벨은 안 받는다고 하심. 시리즈 번역본이 이 도서관에도 있다고 말씀은 드렸으나, 전체 내용을 생각하니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그때서야 생각하게 되었다. 직원분이 의심하는 눈으로 접수는 하셨으나, 이후 장서에 추가되지 않은 걸 보면 라이트노벨로 분류되어 폐기처분된 듯. 여러모로 착잡한 기억만 남기고 간 그대들이여...
어제는 화가 너무 나서 바깥으로 허겁지겁 나갔다. 기모 후드에 코트까지 잘 챙겨입고 빠른 걸음으로 오랫동안 안 찾던 카페로 향했다. 제일 단 쿠키와 화이트 아메리카노를 한 잔 주문해서 제일 현실과 동떨어진 일을 했다. 세계사 연표와 한국사 연표를 병치하고 받아쓰고...
오늘은 좀 났다. 나는 페니스 뒤에 숨으려는 사람은 모두가 싫다. 그것이 대부분 남성이고 아주 드문 경우 여성이었을 뿐이다.
월가 점령 시위가 한창이던 2011년, 미국 하버드대에서 수십 명의 학생들이 ‘이 수업을 듣지 않겠다’며 강의실을 빠져나가는 사건이 있었다. 그 유명한 그레고리 맨큐 교수의 경제학 입문 수업이었다. 수업을 거부한 학생들은 현대 사회의 모순과 불평등은 주류 경제학이 낳은 문제라고 봤나 보다. 주류 경제학을 배우는 일은 그런 모순에 눈감는 항복 행위라고 여겼던 듯하고.
실비아 나사르의 『사람을 위한 경제학』(반비)을 읽다가 문득 그 학생들을 떠올렸다. 가진 자들을 옹호하는 사악하고 단단한 율법이 세상을 지배하며, 거기에 입문하는 순간 자기들은 세뇌될 테니 처음부터 거부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얼마나 젊은이답게 순수하고… 어리석은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뷰티풀 마인드』의 저자이자 경제학 석사인 나사르는 19세기와 20세기 경제사상가들의 삶을 흥미진진한 연속극처럼 보여준다. 그녀가 고른 학자들은 모두 인간적인 흠결이 있지만 적어도 ‘부자 편에 서야겠다’ 따위 태도는 지니지 않았다. 그들을 사로잡는 것은 무려 ‘세상을 구하겠다’는 열정과 야심이다. 이 사상가들은 자신들의 학문이 세상을 더 낫게 만들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는다. 하지만 그들의 아이디어는 혁신적이기는 해도 늘 불완전하다. 그래서 다음 세대 사상가들로부터 논박 당한다.
816쪽에 걸쳐 책이 그리는 경제사상사는 사람들의 삶을 바꿀 수 있는 강력한 ‘생각 도구’가 진화하는 과정이다. 그 도구는 율법이 아니며 사악하지도 단단하지도 않다(이 책에서 가장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인물이 마르크스다). 현재의 경제학 교과서 역시 학문적 열정과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논박당하고 보완돼야 한다.
짧은 책 소개지만 이거 하나는 빠뜨리지 말아야겠다. 천재들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인지라 그런 건지, 아니면 천재들이라 자존심이 세서 그런 건지, 몇몇 인물들의 연애담이 정말 재미있다. 특히 비어트리스 포터 웨브와 조앤 로빈슨, 이 당당한 두 여성 학자의 삶은 여태까지 영화화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다. 경제학에 관심이 없어도, 그저 인물 이야기로 읽어도 푹 빠지게 될 책이다.
마키아벨리는 40대 중반에 『군주론』을 집필했다. 공직으로 복직하고픈 마음이 간절하던 때였고, 그래서 자기 추천서 성격이 강한 『군주론』은 이중으로 음흉한 책이 되었다. 군주는 음흉해져야 한다는 말을 음흉한 목적으로 썼으니. 삼켜내기 어려운 주장들을 담은 『군주론』은 이런 배경 덕분에 더 해석이 분분해지는 책이 됐다.
군주론을 쓰고 10여 년이 훌쩍 지나 마키아벨리는 말년의 역작 『피렌체사』를 썼다. 군주론 때와는 사뭇 다른 마음가짐이었던 것 같다. 다른 역사가들이 권력자들의 눈치를 보느라 피렌체의 내부 분열 문제는 대충 쓰거나 무시했다는 비판으로 책을 시작한다. ‘나 (이번에는) 눈치 안 보고 썼다, 그리고 내부 분열 문제에 집중했다’는 선언인 셈이다.
이 책은 한국에서는 『마키아벨리의 피렌체사』(무블)라는 제목으로 2022년에야 완역됐다. 번역본 기준 780쪽의 대작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군주론』보다 읽기 수월하다. 마키아벨리는 이 책에서 다급한 구직자가 아니라 냉철한 논평가다. 그가 고국에서 일어난 사건의 원인과 영향을 분석할 때, 행간의 숨은 의미를 파악하려는 노력은 덜 기울여도 된다. ‘귀족과 평민 간의 심각하지만 자연스러운 적의가 공화국에 창궐하는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진단도, 왜 똑같이 평민이 승리했는데 로마는 더 고결해졌고 피렌체는 반대로 비루해졌는가 하는 분석도 소화하기 전혀 어렵지 않다. 오히려 인간의 본성을 정확히 꿰뚫어본다는 감탄이 나온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 대목에서 한국의 계층 갈등 양상은 로마를 닮아 가는지, 피렌체를 향해 가는지 생각하게 된다.
인간 마키아벨리도 한층 더 가깝게 다가온다. 책이 중점적으로 다룬 13~15세기 피렌체와 이탈리아의 분열상은 징글징글할 정도다. ‘훌륭한 법과 제도로 다스려지는 도시는 다른 도시들과 달리 더 이상 어느 한 사람의 미덕에 의지할 필요가 없’지만, 그렇지 않은 도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전체적인 정부와 방종한 정부는 모두 틀림없이 단 한 사람의 미덕과 행운에 의지해 유지될 수밖에’라는 결론을 내리는 좌절한 지식인의 초상이 그려진다.
대개 써야 하는 글이 있는데 글이 안 써질 때 뭔가에 홀린 듯 초조하게 빌리고 사는 책들이 있다. 어떤 비법을 찾는 마음으로 빌렸던 책. 그런 것은 없는걸 알면서도 해독제처럼 그 책을 읽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실질적인 해법은 얻지 못했지만 불안으로 들뜬 마음이 조금 가라앉을 때까지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에는 도움이 되었을지도.
어떤 작가는 무언가 이것저것 찾아 읽고 보는 시간까지 작업의 일부이구나, 이미 작가가 된 사람도 불안을 낮추기 위해 책상에 잡다한 것들을 모아놓는구나, 루틴이 없는 채로 사는 것도 루틴이구나, 운동도 해야지⋯⋯ 그런 생각들을 했다. 읽고 쓰는 사람의 기운을 얻은 게 더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