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총체성이란 환상에 지나지 않을까. 서로 다른 각 시선들의 합이 존재를 온전히 재구성할 수 있는가. 우리는 본능적으로 물체의 속성을 파악하고 분류하려 한다. 근본적인 구조를 찾아 그것을 이해하고 통제하고 싶은 욕망이다. 그것이 예측할 수 있고 안전하기 때문이다. 총체성을 획득하고 조화로운 질서를 찾으면 다음에 올 것을 미리 짐작할 수 있다. 이성은 늘 이런 방식으로 작동하지만, 그렇게 구축한 세계 밖에도 분명 무언가 있다.
튜링은 바로 이런 무작위성이 지능을 가진 기계의 관건이라고 믿었다. (p. 229)
마음, 감정, 생각, 눈에 보이지 않는 대부분의 것들은 환원 불가능을 내포한다. 그러한 절망에 매혹된 폰 노이만처럼, 우리는 끊임없이 말하고 내보이고 쓴다. 상대가 온전히 이해해 주리란 믿음을 가지고. 이성이든 직관이든 인간은 무언가를 분명히 가지고 있다. 퍼즐의 빠진 구석을 바라보며 어떤 조각이 있어야 할지(혹은 있었는지)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없던 믿음보다 사라진 믿음이 더 나쁜 까닭은, 성령이 저주받은 이 세상을 버리고 떠나며 생긴 구멍처럼 떡하니 공백을 남기기 때문이다. (p. 112)
수학에 통약불가능성이라는 개념이 있다. 공통 기준으로 측정할 수 없는 값을 말한다. 총체성을 파악하는 시선이나 대상을 구조화하는 방식에 따라 우리의 이해는 달라진다. 그러나 이해가 부족할 때가 더 진실에 가까울지 모른다. 서로 다른 레이어를 모아 겹쳐 들면 모두가 어느만큼은 받아들이는 모양이 나올지 모른다. 다른 것을 태생적으로 증오하는 존재가 아니라 아직 공생의 올바른 방법을 찾지 못해 혼란스러운 상태라고 믿는다.
이 코드에 관해 아직 규명 못한 무언가가 분명히 있을 텐데요. (p. 223)
-
벵하민 라바투트는 매니악을 통해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추지’ 않아야 할 이유를 말한다. 끊임없는 소통과 공생의 노력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악마diable의 어원은 분열자이다. 인류가 가장 두려워한 적의 실체는 함께하지 못함이 아닐까. 이해한다는 말은 진술문이 될 수 없을지언정 수행문이 되어 우리를 다가서게 만든다.
익숙한 작법서이지만 소설가 문지혁 작가가 번역해서 괜시리 주목을 끈다. 북미권 작법서를 읽는 가운데 급텐션이 떨어지는 부분이 있는데 예시로 드는 영미 소설의 낯섦. 도입부는 나쁘지 않은데 역시나 온갖 예시들을 접하다가 길을 잃었다.
은행나무 (240307~240307)
❝ 별점: ★★★★
❝ 한줄평: 다채로운 색깔을 품은 몽환적이고 감각적인 소설
❝ 키워드: 가정교사 | 파티 | 사냥 | 욕망 | 감시 | 관찰 | 관음 | 시선
✦ 아름답고 매혹적이고 관능적이면서도 동시에 두렵고 섬뜩하기도 한 이야기. ‘시선’이라는 키워드에 주목해서 읽으면 더욱 재미있을 것 같아요! [📝 24/03/07]
———······———······———
✴︎
오늘 저녁 이네스가 돌아올 것이다. 셋이서 카드놀이를 할 것이다. 그리고 남자들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그리고 누가 알겠는가, 내일, 아니면 한 달 뒤, 혹은 일 년 뒤, 또 다른 낯선 남자가 그들의 내밀함 속으로, 갑자기 마법처럼 열리는금빛 철문 뒤에 놓인 밤처럼 감미로운 이 덫으로 걸어 들어오게 될지. (p.33)
✴︎
그리하여 결국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폭탄이 이 집 위로 떨어져야 삶이 갑작스러운 전환을 맞고, 철문이 활짝 열리고, 나무들이 뽑히고, 집이 자리를 바꾸면서 다른 풍경을 만들어내게 되는 걸까? (p.117)
———······———······———
두 주 전 쯤 참석한 북토크 책을 이제야 읽는데 그 말이 이 말이었구나! 뒤늦게 캐치하는 맛이 있음. 이를테면 이런 대사랄지~
"당신은 나와 결혼해야 해요."
"그래요. 당신 말이 맞아요. 할게요."
"좋아요. 그럼 내일 만나요."
이렇게나 간단하다니!^^
'나이브스 아웃: 글래스 어니언'을 보려다보니 전편인 나이브스 아웃을 보다가 말았다는 기억이 들었다. 아나 데 아르마스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재능이란 대체 무언인가라는 생각에 빠지게 된다.
터무니 없을 정도로 화려한 캐스팅인데 어리둥절할 정도로 연기를 못한다. 북미 남성들이 좋아할 법한 것들을 한 접시에 모두 담은 슈퍼볼 같은 느낌.
소설보다 낫고 파트1보다는 아쉬웠다.
김승섭교수님의 책은 단숨에 읽기가 좀 어렵다. 최대한 담담하게, 객관적인 연구결과를 토대로 풀어놓은 글임에도 그 속에 담겨있는 피해자들의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고통은 현재에도 진행형이라는 사실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왜 김승섭교수님의 책을 읽는걸까,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읽어야하는 걸까라고 가끔 생각한다. 이번 책에선 어느 정도 그 대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이 책의 제목 자체가 그 대답일 수도 있다. "타인의 고통에 응답 하기"위해서 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사람이 나아가는 건 답이 있어서가 아니에요. 질문을 잃지 않아서 나아가는 거예요. 중요한 질문들을 놓지 않고 있어서, 삶에 답이 있어서가 아니라 질문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갖고 있어서 그 긴장으로 나아가는 거거든요."라는 김승섭교수님의 말이 그 대답일 수도 있겠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고 '다정한 것이 살아남기'때문에 결국은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것이 다 내가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한다. 그렇게 이 책을, 김승섭교수님의 책을 읽는 이유를 정리해도 여전히 마음이 개운치 않은건 이 책이 던진 많은 질문이 여전히 온전히 응답받지 못했다는 걸 알기때문일테다.
『이상한 존』의 자매편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주인공이 인간이 아니라 개이고, 그 개의 지능이 인간을 뛰어넘는 게 아니라 딱 똑똑한 인간 수준이기에 몇 가지 장점이 더 생긴다. 주인공의 처지가 더 처연하게 다가오고, 그의 관점이나 견해도 보다 설득력 있다. 세상에는 나처럼 픽션에 말하는 개만 나오면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도 있고. 결말이 허망한 것은 작가도 시리우스에게 어떤 결말을 선사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