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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밤이 시작되는 곳>



장례식장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진짜 우리의 밤이 시작된다!

 

서울의 밤을 환상처럼 꿈처럼 떠도는 청춘들

삶과 죽음을 껴안는 아름다운 애도와 성장의 서사

 



2022년 제18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우리의 밤이 시작되는 곳』이 나무옆의자에서 출간되었다.


고요한 작가의 『우리의 밤이 시작되는 곳』은 장례식장에서 일하는 20대 남녀를 주인공으로 청춘의 방황과 성장, 죽음의 의미를 깊고도 무겁지 않게 그린 작품이다. 일곱 명의 심사위원단(최원식, 은희경, 권지예, 정홍수, 하성란, 강영숙, 박혜진)은 “죽음의 이미지가 압도하는 장례식장을 배경으로, 서울 밤의 시내를 풍경으로 세계를 스케치하는 이 소설은 청춘의 막막함과 외로움을 군더더기 없이 표현하는 가운데 여백의 미를 보여 준다.”고 평했다. 권지예 소설가는 “죽음이 이토록 깊고 푸른 밤의 여행 같다면, 우리는 삶을 얼마든지 설레며 견딜 수 있다. 아름다운 애도와 성장의 서사가 청춘뿐 아니라 모든 세대에게 위안을 선물하리라 생각된다.”는 추천의 말을 보탰다.

‘나(재호)’와 ‘마리’는 자정이 넘어 장례식장 일이 끝나면 새벽 첫 차가 다닐 때까지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낸다. 처음에는 도보로, 그다음에는 오토바이를 타고 밤새 불을 밝힌 맥도날드를 찾아 광화문 일대를 떠돈다. “그렇게 걷고 또 걷는 모습을 보여주기만 하는데, 소설은 삶과 죽음의 시간을 껴안고 우리 시대 젊은이들의 가슴 시린 초상에 이른다.”(문학평론가 정홍수)

고요한 작가는 2016년 『문학사상』과 『작가세계』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해 소설집과 장편소설을 한 권씩 낸 기성 작가로, 단편소설 「종이비행기」가 세계적인 문학저널 『애심토트(Asymptote)』에 소개되어 화제가 된 바 있다.

 

걷고 달리며 생의 무게를 뛰어넘는 싱그럽고 아릿한 청춘의 밤

 

취업을 못 하고 아르바이트로 생활하던 재호는 그 아르바이트마저 잃고 장례식장 빈소에서 도우미를 한다. 그는 자정이 넘어 장례식장 일이 끝나면 오토바이를 타고 서울 시내를 돌아다닌다. 어릴 적 목조르기 게임을 하다가 자신이 누나를 죽였다고 생각하는 그는 하얀 뱀의 환상을 보며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누나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과 알바 인생의 고달픔을 잊기 위해 그는 밤이면 오토바이를 타고 달린다.

어느 날 새벽 재호는 같은 장례식장에서 일하는 마리가 맥도날드에 있는 것을 발견한다. 대학 졸업 후 공무원 시험에 떨어진 마리 역시 여러 아르바이트를 거쳐 이곳까지 왔다. 그녀는 집이 동인천이어서 장례식장 알바가 끝나면 교통비를 아끼기 위해 맥도날드에서 공무원 시험공부를 하며 밤을 보냈다. 재호는 새벽 첫 차가 다닐 때까지 마리와 함께 밤을 보내기로 한다.

밤거리로 나선 두 사람은 장례식장이 있는 서대문에서 광화문과 종로 일대를 걷는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봄밤은 산책하기에 더없이 좋다. 천국상조라는 글씨가 크게 쓰인 검은 조끼를 입은 재호와 길에서 주운 하얀 면사포를 쓴 마리, 그 모습을 보고 흠칫 놀라는 사람도 있지만 이들은 덕수궁 앞에서 ‘이리 오너라’를 외치고, 교보문고 앞 벤치에 앉아 있는 염상섭의 동상을 끌어안고, 역사박물관에 전시된 전차에 슬쩍 들어가 손을 흔들기도 한다. 어느 날부터 둘은 오토바이를 타고 밤에도 불을 밝힌 맥도날드를 찾아 시내 곳곳을 돌아다닌다. 라이딩은 광화문에서 종로로, 동대문을 거쳐 대학로로, 다시 서대문으로 돌아와 남산까지 이어진다.

소설이 스케치하는 서울의 밤 풍경은 우리가 알던 서울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때로는 스쳐 지나가며 때로는 멈춰 속을 들여다보며 골목과 거리가 품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독자는 서울 도심의 구체적인 지명과 건물 이름을 따라가며 재호와 마리가 달리는 모습을 영상을 보듯 떠올리게 된다. “서울의 밤이 환상처럼 꿈처럼 이렇게 아름다웠던가. 한 편의 영상 이미지가 윤슬처럼 빛나는 소설”이라는 권지예 소설가의 말이 가슴에 박힌다.

 

“우리도 언젠가 저 물고기처럼 훨훨 날아가는 날이 오겠지.”

 

순진무구한 이들의 밤 산책은 경쾌하고 싱그럽지만 한편으로는 쓸쓸하고 아릿한 감정을 자아낸다. 취업난과 불안한 미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 가족과의 문제 등 쉽게 풀기 어려운 삶의 무게가 그들의 어깨에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처럼 불 켜진 맥도날드에서 밤을 보내는 재호와 마리 역시 어둡고 적막한 현실에서 위로를 구하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역사박물관 맞은편에 있는 설치미술 해머링 맨 앞에서 나누는 두 사람의 대화는 알바 인생의 고충과 취업에 대한 갈망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해머링 맨은 죽지도 않고 이 자리에서 백 년 천 년 망치질을 하겠지.”

“기계의 숙명이겠지. 하지만 해머링 맨은 우리보다 나아. 적어도 해머링 맨은 정규직이니까.”

 

재호와 마리가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청계천에서 튀어 오른 물고기를 쫓는 장면은 밤의 라이딩을 환상적으로 보여주는데, 여기서도 둘은 정규직 일자리에 대해 생각한다. 두 사람은 청계천에 조성되어 있는 수십 마리의 물고기 등을 보고 그중 한 마리의 줄을 끊어 날아오르게 한다. 물고기는 청계천을 날아올라 광화문을 지나 인왕산으로 간다. 그들은 물고기를 잡기 위해 인왕스카이웨이에 오른다. 속도를 높여 따라가지만 물고기를 놓치자 하늘을 헤엄쳐 날아가는 물고기를 보면서 말한다.

 

“우리도 언젠가 저 물고기처럼 훨훨 날아가는 날이 오겠지.”

“우리에게도 그런 날이 올 거야. 우리도 언젠가는 정규직 일자리를 얻을 거야.”

 

삶 속에 스민 죽음을 수용하는 아름다운 애도와 성장의 서사

 

『우리의 밤이 시작되는 곳』은 장례식장이라는 배경과 가족의 죽음이라는 상처를 통해 삶 속에 스며 있는 죽음을 생각하게 만든다. 재호가 누나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재호의 부모 역시 그로 인해 삶이 바뀌었다. 두 사람은 누나의 죽음 이후 이혼했다. 아버지는 이른 나이에 은퇴하고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아죽사) 모임을 운영한다. 죽음에 대한 토론을 하고 책을 읽으며 새 회원이 들어오면 임종체험 센터에 간다. 그곳에서 영정 사진을 찍고 수의를 입고 관 앞에서 유서를 쓴 다음 관 속에 들어가 눕는 입관 체험을 한다. 일본 여행 가이드인 엄마는 이혼 후 다른 남자와 살면서도 아버지 집에 자주 오고 아버지와 일본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재호는 두 사람이 누나 때문에 서로를 놓지 못하고 삶의 한쪽을 서로에게 기대 사는 거라고 느낀다. 그리고 자신이 슬픔을 떨치기 위해 오토바이를 타는 것처럼 엄마 역시 슬픔을 잊기 위해 비행기를 탄다고 생각한다.

고베 지진으로 가족을 잃고 20년 넘게 재호네 집에 세 들어 사는 일본인 히로시 역시 가족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물이다. 그는 죽음과 친숙해지고 덜 슬프기를 바라는 마음에 빨간색 양복을 입고 조문을 가고, 아죽사 멤버들에게도 빨간 양복을 선물한다. 그는 모임을 통해 천천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난다.

고요한 작가는 수상 후 인터뷰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좀 더 가볍게 접근하고 싶어서 20대의 감정을 끌어”왔으며, 취업난을 겪는 청년들이 장례식장 아르바이트를 하며 죽음을 접하는 형식을 취했다고 설명한다. 죽음이라는 긴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을 애도하고 배웅하는 일을 하면서 재호는 스스로 위로를 얻고 자신의 트라우마와도 마주 볼 기회를 얻는다.


우리의 밤은 죽은 자들이 있는 장례식장에서 시작되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장례식장에서 보았던 창밖 풍경. 상주들의 울음소리와 시끄럽게 떠들며 술을 마시던 조문객들. 그 사이로 피어오르던 육개장 냄새와 국화 냄새와 밤새도록 꺼지지 않고 타오르던 향 냄새. 그런 냄새 속에 우리의 밤이 있었다. 그리고 일이 끝나 장례식장을 나서면 진짜 우리의 밤이 시작되었다. (217쪽)

 

장례식장을 둘러싼 하얀 벚꽃, 달빛을 받으며 날아오르는 오토바이, 우물 같은 달 속으로 들어가는 하얀 뱀, 물살에 흔들리는 운하 속 벚꽃과 꽃잎을 낚아채 달아나는 물고기 떼 등 선명한 이미지가 떠오르는 장면들도 삶 속의 죽음과 죽음 속의 삶을 상징하는 듯하다. “쓰이지 않고 말해지지 않은 침묵과 여백의 공간을 서사화하는 능력”(정홍수)이야말로 이 소설의 빛나는 부분이다. 또 하나 돋보이는 작품의 미덕은 인물들이 가족이나 타인과 관계 맺는 방식, 서로를 대하는 마음이 흔히 보이는 전형성을 탈피했다는 점이다. 개성적인 인물들이 보여주는 유연한 사고와 적정한 거리 감각, 다름에 대한 존중이 오렌지처럼 상큼하고 매력적이다. 

1. 100만 번 산 고양이 (사노 요코)

책을 읽다 찔끔찔끔이 아니라 정말 펑펑 운적이 몇 번 있는데 그 중 한 권. 살다보면 인생이 동화같지 않아서인지 동화책이 필요한 순간들이 있는데 그럴때마다 한번씩 꺼내보는 책이다.


백만 번이나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하던 고양이.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던 그 고양이가 처음으로 먼저 함께 하고 싶은 하얀 고양이를 만나 두 번 다시 태어나지 않은 이야기는 가슴속에 내내 남아있다. 한동안 이 동화만으로도 충분했었다.


사노 요코는 이 동화를 남편의 죽음 이후에 썼다고 한다. 다시 태어나지 않았다는 고양이의 얘기와 겉으로 보이기엔 상반되는 뜻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정말 좋아하는 드라마의 대사가 겹친다. <나의 아저씨>에서 사는 게 너무 힘들고 지겨워 그만 태어나고 싶다던 지안이 공중전화에서 아저씨에게 했던 마지막 대사. "다시 태어나도 괜찮아요" 난 이 드라마를 보면서도 울었다. 누가 봤다면 사연있을 정도로 펑펑.


22. 네 곁에 있어도 괜찮겠니?


24. 고양이는 하얀 고양이와 새끼 고양이들을 자기 자신보다 더 좋아할 정도였습니다.


28. 고양이는 하얀 고양이 곁에서 조용히 움직임을 멈췄습니다.


30. 그러고는 두 번 다시 되살아나지 않았습니다.

100만 번 산 고양이
100만 번 산 고양이
나의 젤리클 캣들에게

태어난지 며칠 되지 않아 바스라질 것 같이 여렸던 내 생애 첫 고양이 짱짱이와 너무 무지해서 보냈던 짱짱이 형제 찡찡이(를 오빠랑 밤새돌며 산동네 어느 빌라에 묻으며 펑펑 울었던 그 겨울과 한 달간의 칩거) 그리고 너희들과 보낸 작업실에서의 사계절


불쌍한 닝겐을 위해 작업실 앞에 쥐를 사냥해 툭- 던져두(면 깜짝 놀라 꺄악 지른 소리를 환호성으로 알고 더 갖다두)던 얼룩이


뮤지컬 캣츠에 밤업소를 관리하는 부자 고양이 버스토퍼 존스 같았던 까망이와 가게 주방에서 너의 첫 목욕이 불러온 아수라파티ㅋㅋ


(바닥난 탕을 거의 새것으로 만들어주시는 마법 같은) 서비스를 잘 주시던 단골집 사장님이 전세 놓는 종이를 붙이자마자 술김에 뜯고 들어가 저희가 들어가겠습니다 했던 2층집과 새벽마다 반찬과 장바구니를 걸어주던 정많은 민주언니. 그곳에서 오빠가 시작한 골프. 연습하러 간 골프장에서 당시 유행하던 게임 애니팡과 비슷한 효과음으로 오빠를 홀려 간택한 (다른 형제들은 무지개를 건넜다는 소식을 전해들어 내가 잘 키울수 있을까 더 조마조마했던) 애니와 잘못된 훈육을 따라하다 터진 코피로 또 펑펑 울었던 그 날 밤


집안의 반대로 시작한 동거를 접고 결혼 후 첫 집에서 맞이한 새벽이. 어둠을 밝히라고 성빈이가 지어준 그 예쁜 이름으로 치킨 가게에 쥐 쫓으러 데려갈거란 말에 절대 안된다고 지켜낸 아이. 2년 중 반년은 심장병으로 아팠지만 늘 애교 부리며 내내 맑고 예뻤던 아이 (쥐를 봤으면 쥐보다 더 빨리 도망갔을지도ㅎㅎ). 그러다 내 기도처럼 2살 생일을 넘기고 내 품에서 무지개 다리로 보낸 아이.


고양이 알러지가 있는 내가 쏟아부은 병원비, 새벽이가 쓰고 간 병원비, 아이들의 검사비와 사료&간식비가 하나도 아깝지 않다 말하며 열심히 벌어다주는 오빠와 나의 젤리클 캣들에게 내가 쓰진 못해도 내 맘 같은 이야기들로 채워진 책들.





* 뮤지컬 캣츠 - T. S. 엘리엇의 연작시인 <지혜로운 고양이가 되기 위한 지침서(Old Possum`s Book of Practical Cats)>를 대본으로 한 뮤지컬


* 젤리클 캣 - 뮤지컬 속 고양이들이 계속 노래하는 선택받은 고양이 '젤리클 캣'은 'Dear-Little Cat' 발음에서 파생된 재치있는 단어

캣츠
캣츠
화해의 몸짓 - 장성욱 소설집

짜친 인생들의 살고자 하는 버둥거림?

책을 다 읽고 난 뒤 한 줄 감상은 이랬는데 뒷 표지에


'출구가 꽉 막힌 생의 보통날, 그 순간 펼쳐지는 이야기의 향연' 이라고 편집부가 정제된 언어로 써 놓았다.


제대로 읽은 거 같긴 하다.


구의 증명

나는 너를 먹을거야. 살아서 너를 기억할거야


기억이 나의 미래

기억은 너

너는 나의 미래





<구의 증명> 최진영

구의 증명
구의 증명
자기계발의 10가지 진실 - 아나 카타리나 샤프너

455페이지,


소설은 등장인물의 삶에 우리 자신을 투사하여 그 삶과 일체되도록 우리를 초대하여, 소설 속 인물들의 삶의 세계에 우리가 지속적으로 정서적·상상적 개입을 하도록 요구한다. 말하자면 소설은 우리가 등장인물들 의 시각을 충분히 공유하여 그들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도록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위대한 작가들이 만들어내는 허구의 세계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는 능력과 우리의 방식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여러 시각에 맞설 수 있는 능력을 다듬고 연마하는 굉장히 멋진 훈련장이라 할 수 있다.

책과 세계

사자가 위장에 탈이 나면 풀을 먹듯이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 오늘날의 사람들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에서 책을 읽는 이는 전체 숫자에 비해서 몇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행하고 있다 하여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며, 압도적 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놓고 보면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은 소수의 책 읽는 이들이 벌이는 일종의 음모임에 틀림없다.


<책과 세계> 강유원

책과 세계
책과 세계
9. 설 콜드 IPA와 뒷산 오르기 신년회

  2021년 1월 1일은 금요일이었다. 그래서 HJ를 포함한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1월 3일까지 사흘 연휴를 즐겼다.

  흠, ‘즐겼다’고 표현해도 될까?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에 5인 이상 사적 모임을 가지는 것이 금지되었고, 해외여행은커녕 혼자 카페에 앉아 차를 한 잔 마시는 일조차 할 수 없었다. 좀처럼 외출을 하지 않는 나조차 답답하고 무료한데, 다른 사람들은 이 기간을 어떻게 견디고 있을까?

  “홈 트레이닝을 많이 한대. 넷플릭스도 많이 보고 인테리어 시장도 커졌나 봐.” HJ가 설명한다.

  “이 참에 책 좀 읽지.” 내가 푸념한다.

  “그러게. 사람들 책은 참 안 읽어.” HJ가 말한다.

  나는 1월 1일에 외출할 일정이 있었다. 방송국에 가서 신년 다큐멘터리의 내레이션을 더빙하고 왔다. 더빙을 그렇게 방영 전날 하는 건지 몰랐다. 우리 프로그램이 뭘 잘못한 게 아니고, 원래 그런다고 했다. 영상을 편집하고 거기에 맞춰 최종 대본을 마지막 순간까지 고치기 때문인 듯했다.

  “방영 전날 자기가 갑자기 감기가 걸리거나 목이 잠기면 어떻게 되는 거야? 방송국 입장에서는 참 도박 같은 일 아니야?”

  HJ가 합당하게 지적했다. 나도 궁금했다.

  방송국에서는 녹음실로 가기 전에 편집실에서 한번 대본을 들고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연습을 했다. 그걸 ‘예독’이라고 하는 모양이었다. 내가 읊어야 할 문장들을 시작하는 시점이 초 단위로 계산이 되어 있었다. 편집 감독이 ‘큐’라고 말하면 한 줄을 읽고, 편집 감독이 ‘포즈’라고 말하면 기다리고, 감독이 다시 ‘큐’라고 말하면 그 다음 줄을 읽는다.

  방송 발음에 대해서도 배웠다. 소유격을 만드는 조사 ‘―의’는 그냥 ‘에’에 가깝게 발음한다든가, ‘―입니다’는 ‘―ㅂ니다’로 줄여서 말한다든가. 목소리 톤을 높여 달라는 요청도 꾸준히 받았다. 낮고 조용한 내 원래 목소리가 나는 더 좋은데.

  녹음 때에는 나와 함께 일한 기자들의 상사인 팀장과 부장도 왔다. 나는 녹음 부스에서 혼자 대본을 읽고, 다른 사람들은 밖에서 내가 제대로 읽는지, 발음이 부정확하거나 타이밍을 놓치지는 않는지 주시했다. 방송 프로그램 참 정성들여 만드는구나, 새삼 놀랐다.

  예독을 할 때는 문제가 없었는데, 실제 녹음할 때는 내가 느리게 읽은 것인지 멘트가 미묘하게 장면과 안 맞아 떨어진 부분이 있었다. 그러자 작은 소동이 일었다. 그냥 내가 좀 더 빠르게 다시 읽으면 해결될 일이었는데, 제작진은 한 문장을 삭제하고 다른 문구들을 고쳤다.

  녹음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두어 시간 만에 마치고 집에 돌아와 떡국을 끓여 먹었다. 근력 운동을 하고 앨릭스 코브의 『우울할 땐 뇌과학』을 읽었다. 신경생물학의 관점에서 우울증을 살핀 책이다. 실제로 우울증을 극복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조언들이 많이 담겨 있었다. 하나하나 실천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1월 2일에는 HJ도 나도 온종일 집에 있었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연어회로 HJ가 김초밥을 만들어주었는데 아주 맛있었다. HJ의 김초밥에는 아보카도를, 내 김초밥에는 오이를 넣었다. 오후에는 머리를 염색했다. 그리고 메일이나 문자메시지로 신년 인사를 보내온 지인들에게 답장을 보냈다.

  1월 3일에는 동네 주변을 산책했다. 우리 아파트 뒤에는 매우 볼품없는 동산이 하나 있다. 집에서 창문으로 보기엔 소박하게 아름다운데 막상 가보면 별 경치가 없는 그런 산이다. 처음에 이 집에 이사 왔을 때에는 뒷산을 보며 반가워하고 자주 다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몇 번 올라 본 뒤에 마음이 바뀌었다.

  그래도 그냥 신년이니까, 하는 마음으로 찾았다. 우리 부부의 조촐한 신년 시무식이랄까. 작년에도 1월 초에 그렇게 올랐다. 1년에 한두 번 오르면 충분한 산이다. HJ나 나나 산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하늘은 흐렸고 상당히 추웠다. 눈은 쌓이지 않았고, 나무들은 가지가 앙상했다. 산길을 걸어도 자연 속에 있다는 기분은 거의 들지 않았다.

  산 중턱에는 토끼 사육장이 있다. 몇몇 주민들이 멋대로 지은 무허가 시설이어서 지저분하다고 구청에 철거해 달라는 민원도 있었던 모양이다. 반면 배춧잎이나 당근을 들고 가서 토끼들에게 먹이는 동네 사람들도 있다. 토끼들은 사육장 안이 아니라 밖에 있는데, 사람이 다가가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지만.

  토끼들은 몸을 잔뜩 움츠려 돌멩이처럼 가만히 길가에 앉아 있었다. 귀를 등에 찰싹 붙이고 있었다. 그래도 추위로 고통스러워하거나 얼어 죽을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산에서 내려와서는 근처에 있는 무한리필 소고기집에 갔다. 가끔 그렇게 배가 터지도록 고기를 먹고 싶을 때가 있다. 일요일이고 점심때였는데도 제법 규모가 있는 가게에 우리를 제외하고는 딱 한 테이블에만 손님이 있었다. 그나마도 그 손님들이 자리에서 일어선 뒤에는 우리만 남았다.

  손님이 없어서인지 식당은 난방을 하지 않았고, 우리는 덜덜 떨면서 고기를 구워 먹었다. 입에서는 김이 나왔고, 발이 얼면서 점점 감각이 사라져갔다. 1인당 1만9800원짜리 기본 메뉴를 주문하고, 추가 음료나 음식은 시키지 않았다.

  종업원 두 사람이 멀찍이 떨어진 테이블에서 조용히 밥을 차려 먹었다. 음악도 나오지 않았다. 우리가 식사 중에 이야기를 하니 종업원이 와서 “말씀을 하실 때에는 마스크를 쓰고 해 달라”고 주의를 주고 갔다.

  가게 바깥이 실내보다 더 따뜻한 것 같았다. 지하철역에 가서 화장실에 들르고, 좀 더 걸을지 집으로 돌아갈지 고민했다. HJ가 코인노래방도 사회적 거리두기로 영업 중지 중이냐고 물었고 나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휴대폰으로 검색해보니 가까운 코인노래방이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걸로 나왔다.

  가서 문이 닫혀 있으면 그냥 돌아오기로 하고 코인노래방을 찾아갔다. 거리는 을씨년스러웠다. 우리는 손을 꼭 잡고 걸어갔다. 노래방에는 정문에 집합금지명령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우리는 별로 낙담하지도 않고 발걸음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공원에 들렀는데 사람들이 많이 나와서 북적인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다들 집에 있기 괴로웠나 보다. 공원에서 오리가 붕어를 사냥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오리는 TV나 신문 사진에서 보던 것처럼 펄떡펄떡 움직이는 붕어를 한 입에 꿀떡 삼키지 않았다. 죽은 게 분명한 물고기를 무슨 이유에서인지 입으로 물었다 놓길 반복했다.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이 할인 판매를 한다고 해서 편의점에서 사 왔다. 점심을 배불리 먹었으므로 저녁은 걸렀다. 대신 맥주는 마셨다. 냉장고에 있는 맥주 중 설 콜드 IPA 캔을 골랐다. 눈 덮인 산 위로 눈이 오는 풍경이 캔에 그려져 있다. 보기만 해도 춥다.

  설 콜드 IPA는 속초에 양조장이 있는 한국 수제맥주 회사 크래프트루트의 제품이다. 캔에 그려진 산은 설악산이라고 한다. 맥주 이름의 ‘설’도 1월 1일이 아니라 눈(雪)을 의미한다. 이 회사의 맥주는 속초 지명이나 사투리, 혹은 속초의 명물에서 이름을 따 왔다. 속초 IPA, 동명항 페일 에일, 대포항 스타우트, 아바이 바이젠, 갯배 필스너….

  맥주를 마시며 HJ와 여행, 혹은 다른 도시에서 한 달이나 그 이상 살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처럼 움직이는 걸 귀찮아하는 사람이 그런 주제를 진지하게 논의하게 되다니. HJ나 나나 지쳐 있었다. 그 원인이 우리에게 있는 것인지 아니면 세상에 있는 건지 모르겠다. 우리가 한계에 온 것인지, 이 나이 때쯤 찾아오는 자연스러운 현상인지,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인지, 인터넷과 사회 변화 때문인지.

 HJ는 요즘 이직을 준비하며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고 있다. 최종 면접까지는 통과했고, 연봉 협상 중이다. 새로 옮긴 회사가 괜찮은 곳일지 아닌지는 가서 일해 봐야 안다. 영 아닌 곳으로 판명 나면 미련 없이 사표를 내고 둘이 같이 서울을 떠나 당분간 쉬기로 했다. 치앙마이 같은 곳으로 갈 수 있으면 좋겠는데 언감생심이고…. HJ는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몇 달간 살고 싶다고 한다. 어쩌면 속초도 후보가 될 수 있겠다.


 올 겨울 참 길다

  설산 감상은 그림으로 할게요

 발이 꽁꽁 얼었거든요




8. 세종 듀퐁과 12월 31일의 과메기

  12월 31일에는 마감에 시달렸다. 신문 두 곳에 원고를 보냈는데 각각 ‘새해 추천하는 책’과 ‘새해 도전하려는 책’이 주제였다. 둘 다 여러 필자에게 짧은 글을 함께 청탁해 지면을 채우는 기획이다.

  이런 기사들을 보내면 항상 기자들이 나중에 난감해 하면서 분량을 줄여도 되느냐고 되물어온다. 요청을 받은 필자들이 대부분 요청 받은 것보다 더 길게 써서 글을 보내오기 때문이다. 200자나 400자처럼 짧은 분량으로 청탁을 하면 늘 벌어지는 일이다.

  나는 비교적 분량을 엄수하는 편인데 그런 상황에서 내 원고가 제일 먼저, 또 많이 줄어드는 것 같다는 피해의식이 있다. ‘같은 기자 출신이니까 고충을 알고, 손대도 뭐라고 안 할 것 같다’고 문화부 기자들이 부담을 덜 느끼는 것 아닌지?

  두 신문 외에도 구독자에게 에세이를 메일로 보내는 서비스에 원고를 보내야 했다. 사흘째 마감을 어긴 상태였는데, 정말 글이 더럽게 안 써졌다. 별로 할 얘기가 없어서였다. 아무래도 이 서비스 제작진이 정한 콘셉트와 내가 잘 맞지 않는 것 같다. 하루 종일 붙들고 있었으나 결국 마감하지 못했다.

  낮에는 재택근무 중인 HJ와 밖으로 나가 근처 빵집에서 조각 케이크를 사 왔다. 가게에 손님이 많은 것도 아닌데 계산대 앞에 길게 줄이 늘어섰다. 우리 앞에 선 할머니는 빵을 사고 값을 치르는데 5분 가까이 걸렸다.

  속으로 할머니를 원망하고 있었는데, 우리 차례가 되어보니 문제는 할머니가 아니라 직원이었다. 일처리가 서툴고 느렸다. 채용된 지 얼마 되지 않는 아르바이트생인 듯했다. 자기도 길게 늘어선 줄을 보고 어쩔 줄 몰라 손을 벌벌 떨고 있었다.

  할머니에게, 또 직원에게 미안해졌지만 그렇다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그냥 잠자코 계산을 하고 나왔다. 그런 미안한 감정이 집에 올 때까지 가슴에 남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냥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나 할 걸 그랬다. 연말에 새 일자리를 얻은 직원의 사연이 궁금했다. 하루짜리 단기 아르바이트였을까.

  HJ는 집에서 오후 6시까지 일했다. 오후 6시부터 우리의 연말 의식인 과메기 파티를 준비했다. 과메기라는 요리를 내가 HJ에게 소개해줬고, 그 뒤로 겨울마다 둘이서 과메기를 온라인으로 주문해 집에서 먹는다. 2016년부터는 매년 12월 31일에 저녁에 과메기를 먹으며 한 해를 정리한다. 그때 유서도 써서 함께 낭독하고 녹음한다.

  올해도 며칠 전에 과메기를 주문하고 거기에 어울리는 맥주도 사 놓았다. 청어보다 꽁치로 만든 과메기가 우리 부부 입맛에 더 잘 맞는다.

  인터넷에 ‘과메기에 어울리는 맥주’를 검색하니 어느 맥주 칼럼니스트의 글이 나왔다. 세종과 복이 과메기와 궁합이 좋다고 나와 있었다. 세종은 비린 맛을 상쇄해주며, 복은 맥주의 비스킷 풍미가 과메기의 고소함과 어울린다는 이유에서였다.

  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 과메기는 의외로 레드 와인과 조합이 좋다. 풍미 강한 음식과 술이 서로 단단하게 붙잡고 또 받쳐주는 느낌이다. 정작 생선과 어울린다는 화이트 와인은 과메기를 당해내지 못한다. 그래서 가벼운 느낌의 세종에 대해서도 큰 기대는 걸지 않았다. 어쨌든 대표적인 세종 맥주인 세종 듀퐁을 준비하긴 했다.

  케이크에 초를 꽂고 불을 켠 뒤 부부가 함께 입김을 불어서 끄며 소원을 빌었다. 우리 계속 건강하게 해주세요, 하고. 그리고 HJ부터 유서를 낭독했다. 내 스마트폰으로 녹음했다. 2020년 HJ의 유서에는 과거와 달리 유머가 간간이 섞여 있었다. HJ는 올해 겪은 중요한 일 중 하나로 부동산 가격이 올라 스트레스를 받은 점을 적었다. 그건 유머가 아니었다.

  HJ와 나의 유서는 형식이 같은데, 처음 유서를 쓸 때 내가 HJ의 것을 베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는 매년 그 전해에 쓴 문서를 참고해서 조금씩 업데이트 하고 있다.

 유서에서 우리는 한 해에 있었던 일들, 느꼈던 일들을 먼저 간단히 정리하고, 그 다음에 유산 정리 방법을 길게 말한다. 뒷부분에서 장례 방식을 이야기하는데, 사람들을 불러 식을 올리거나 빈소를 차리지 말고 화장한 뒤 바다에 뿌려달라는 내용이다. HJ도 나도 그렇게 유골 뿌린 뒤 가족끼리 시원한 바람 맞고 뜨끈하게 식사 한번 하면 충분하다, 고 쓴다. 마지막은 서로에게 남기는 말이다.

  “그 이후는 그 어떤 추모도 하지 마세요. 원래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와서 이것저것 재미있게 해보다 가니 여한이 없고 행복합니다. 내 남편 장강명은 나의 죽음으로 좌절하지 말고 꼭 본인이 원하는 명작을 최대한 많이 써서 남기기 바랍니다. 킵 캄 앤드 캐리 온 라이팅. 사랑합니다.”

  “저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습니다. 서류에 작성한 상황이 발생하면 의향서에 제가 쓴 대로 처리해주시기 바랍니다. 내 아내 ○○○은 나의 죽음으로 좌절하지 말고 남은 인생을 즐겁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자기야, 나중에 좋은 곳에서 꼭 다시 만나자. 내 평생에 당신을 만난 게 제일 큰 행운이었어.”

  그렇게 유서를 낭독하고 나면 HJ나 나나 눈에 눈물이 맺힌다. 좀 쑥스럽지만 적당히 숙연하고 마음이 정화된 듯한 기분도 든다. 무척 값지고 좋은 시간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유서를 쓰고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낭독하는 경험을 하길 바란다.

 유서 녹음을 마친 뒤 드디어 과메기를 먹기 시작했다. 올해의 과메기는 예년보다 딱딱하고 살도 부족해서 다소 아쉬웠다. 그러나 세종 듀퐁은 무척 맛있었고, 깜짝 놀랄 정도로 과메기와 잘 어울렸다.


  세밑에는 유서를 씁니다

 밤이 되면 꽃향기 나는 술도 마실 거예요

  모두 고맙습니다


  낮에 몇몇 지인에게 메일로 송년 인사를 보냈는데 그 중 어떤 이는 그 사이에 벌써 답장을 길게 보내왔다. 그 답장 내용을 HJ와 보며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 요즘 어려움을 겪고 있는 또 다른 지인이 떠올라 그에게도 짧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내가 좋아하지만 여태까지 좋아한다고 마음을 표현한 적이 없었던 사람이다(나는 좋아하는 사람들 대부분에게 마음을 잘 표현하지 않는다). HJ는 그의 사정을 모르고 있었는데 내가 들려주니 무척 놀라워했다. 세상 잘 모르겠다, 인생 참 아이러니하다, 하는 이야기를 나눴다. 세종 듀퐁을 다 마신 뒤에는 호가든, 산미구엘 페일 필젠, 에델바이스를 마셨다.




7. 마튼즈 바이젠과 히가시노 게이고

 피트니스클럽에 다니면서 생활의 리듬을 되찾고 체중도 감량했다. 12월 초에는 63킬로그램 남짓이 되었다. 1킬로그램만 더 빼면 우울증에 걸리기 전으로 회복하는 건데, 그 마지막 1킬로그램이 잘 빠지지 않았다.

  그런데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로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올라가면서 피트니스클럽이 운영을 축소하다가 마침내 문을 닫았다. 집에서 홈 트레이닝을 하자고 마음먹었지만 아무래도 피트니스클럽을 다닐 때보다는 게을러졌다. 운동량도 줄었다.

  아침에도 6시 반에 못 일어나고 늦잠을 자는 때가 생겼다. 안 좋은 생각들, 기억들이 머리에 떠올라 한참 사라지지 않았다. 분노에 차서 벽을 치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하고, 부끄러워서 혼자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쉬기도 한다.

  이렇게 우울증이 오는 거구나. 알면서도 막지 못한다는 것, 내가 그 감정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점이 사랑과 닮았다. 참으로 운명 같구나.

  아침부터 맥주를 마시면 안 된다. 침대에 기어 들어가서도 안 된다. 하지만 몸을 움직이는 건 귀찮고 매사에 의욕이 안 난다. 그래서 책을 읽었다. 특히 일본 추리소설들을 많이 읽었다. 단편집이 가장 좋았고, 가벼워 보이는 소설일수록 환영이었다.

  하루는 가와사키 소시의 『서장 다나카 겐이치의 우울』을, 다음날에는 모리 아키마로의 『검정고양이의 산책 혹은 미학강의』를 읽었다. 『서장 다나카 겐이치…』는 수사에 관심 없는 젊은 경찰서장과 그런 서장을 오해하는 열혈 경찰관들이 벌이는 추리극인데 만화책처럼 유쾌하다. 『검정고양이…』는 ‘인문학 미스터리’를 표방하는데 라이트노벨 같은 서술과 거창한 소재의 결합이 독특하고 흥미롭다. 로맨스도 있다.

  셋째 날에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 세 권을 하루에 읽었다. 장편소설인 『하쿠바산장 살인사건』과 『11문자 살인사건』, 그리고 연작 단편집인 『살인 현장은 구름 위』. 모두 작가가 1980년대에 쓴 초기작들이다. 참고로 내가 좋아하는 히가시노의 작품들은 대부분 2010년대에 나왔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공허한 십자가』, 『매스커레이드 호텔』….

  『하쿠바산장 살인사건』에는 밀실 살인, 사고사로 위장한 살인, 암호 풀이가 나오는데 읽다 보면 ‘과연 이런 식으로 사람을 죽이거나 물건을 숨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만 재미있으므로 넘어간다. 『11문자 살인사건』은 그보다는 조금 더 톤이 무겁다. 『살인 현장은…』에서는 승무원 콤비가 비행기나 항공사와 관련된 수수께끼들을 해결하는데 작가도 진지한 마음으로 쓴 작품은 아닌 것 같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읽을 때면 늘 경이롭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이렇게 꾸준히 많이 쓸 수 있을까? 나는 왜 이렇게 쓰지 못할까? 집중력에 문제가 있는 걸까? 비꼬는 말이 절대 아니다. 나는 히가시노 게이고도 무라카미 하루키도 모두 진심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성실하게 쓰지 못하게 되면서부터 그 두 일본 작가의 대단함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히가시노의 책을 세 권 읽은 날에 글은 한 자도 쓰지 않았다. 대신 바닥을 청소하고 근력 운동을 했다. 점심은 굶고, 저녁에는 집 근처 사무용 건물 지하에 있는 구내식당에 가서 밥을 먹었다. 이 구내식당은 점심에는 두 가지 메뉴를 제공하지만 저녁식사 메뉴는 한 종류라서 뭘 먹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대체로 저녁 메뉴가 점심보다 부실하다.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가서 페트병에 든 마튼즈 바이젠을 두 병 사 왔다. 마튼즈는 1758년에 술장사를 시작한 유서 깊은 맥주 가문이고 생산량도 벨기에 2위라지만,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한국 소비자들에게는 가격 대비 성능비로 인식되는 브랜드다. 이날 내가 모처럼 이 맥주에 손을 뻗은 데에도 하루 종일 밥값을 하지 못했다는 자격지심이 한 몫 했다.

  그런데 아뿔싸, 집에 와서 뚜껑을 따고는 크게 실망했다. 오래된 제품이었는지 탄산이 다 날아가 밍밍했고, 맛도 살짝 변한 것 같았다. HJ는 마실 만하다고 했지만 나는 한 잔을 겨우 비웠다. 다시는 페트병 맥주는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위스키, 보드카, 소주에는 유통기한이 없지만 맥주에는 있다. 알코올 함량이 낮고 여러 가지 첨가물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도수가 특이하게 높거나 람빅 스타일이 아닌 한 병맥주와 캔맥주 대부분은 유통기한이 1년, 페트병 맥주는 6개월이다.

 홉은 단백질 성분이라서 직사광선을 받으면 맛이 변질된다. 맛의 측면에서는 병맥주보다 캔맥주가 더 안전한 선택이다. 특히 페트병은 유리병과 달리 표면에 미세한 구멍이 있어서 뚜껑을 따기 전에도 바깥의 산소가 안으로 들어가고, 안의 탄산가스도 밖으로 조금씩 새어나온다. 맥주 페트병은 일반 페트병과 달리 다중막 구조로 만들거나 차폐 성분이 있는 특수 재질을 사용한다지만(그래서 재활용도 어렵다).


 김빠진 맥주

  가성비에 너무 매달리지 말아요

  인생 짧아요


 우울증에도 유통기한이 있으면 좋을 텐데. 6개월만, 1년만 버텨내면 끝난다는 보장이 있으면 좋을 텐데. 김빠진 맥주 같은 날들을 보내고 있다. 하강 나선의 입구에 있는 것 아닌가 싶어 불안하다. 이 우울감에는 예전에 느끼곤 했던 감미로움 따위는 없다.

  오늘은 미야지마 겐야의 『고마워, 우울증』을 펼쳤다. 저자는 일본의 정신과 의사인데 본인 스스로 오랫동안 우울증으로 고생했고, 자기 병을 고치기 위해 전공을 정신과로 택했다. 환자들에게 항우울증 약을 권하지 않는 의사라고 한다.

  기록을 찾아보니 전에 이 책을 읽은 게 2016년으로 나온다. 그때는 우울증을 겪지도 않았으면서 왜 읽었나 모르겠다. 그래도 덕분에 책 제목과 ‘우울증은 삶을 바꿀 기회’라는 문구가 기억에 남아 다시 집어 들게 됐다.

  현대의학에서 우울증을 바라보는 방식을 비판하는 앞부분이 위로가 됐다. 정신과 의사들이 다른 검사 없이 오직 환자 말에만 의존해 우울증 진단을 내리며, 재발 환자에게 약을 계속 권하도록 교육받지만 그런다고 우울증이 치료되는 건 아니라고. ‘많은 정신과 의사의 치료는 약을 처방하는 것뿐’이라고.

  성실하고 사려 깊은 사람일수록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는 얘기는 듣기는 좋지만 썩 믿기지는 않는다. 뒷부분에 적힌 우울증을 극복하는 실천 방법들은 그냥 눈으로만 읽었다.

 우울증이 삶을 바꿀 기회라면, 우울증을 기회로 내 삶은 어떻게 바뀔까? 나는 희망적인 생각도 한다. 이 병을 완전히 극복하기만 한다면, 나는 보다 현명하고 의연한 사람이 될 것 같다. 그리고 음영이 있는 인간이 될 것이다. 이미 얼마간은 그렇게 됐다고도 생각한다.

  나는 전보다 미소를 더 자주 짓는 사람이 되어가고도 있다. ‘난 참 운이 좋다, 즐겁다’고 생각하면서 하루에 여러 번 의식적으로 미소를 짓는다. 혼자 박수를 치며 이상한 춤도 춘다. 50대, 60대에 늘 미소를 짓는 얼굴이면 좋겠다. 진심으로 “고마워, 우울증”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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