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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발 하라리,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ㅡ 더 나은 오늘은 어떻게 가능한가 ㅡ

유발 하라리

* 1938년, 사람들에게 주어진 전 지구적 이야기의 선택지는 세 가지였고, 1968년에는 두 가지밖에 없었다. 그러다 1998년에는 한 가지 이야기만 득세하는 듯 보였다. 급기야 2018년 우리 앞에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세계의 상당 부분을 지배했던 자유주의 엘리트들이 충격과 혼미의 상태에 빠진 것도 당연하다. 하나의 이야기만 존재한다는 것은 가장 마음이 놓이는 상황이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급작스럽게 아무런 이야기도 없어진 상태는 끔찍한 일이다 아무런 의미도 파악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흡사 1980년대 소련의 엘리트처럼 지금 자유주의자들은 어떻게 해서 역사가 예정된 경로에서 벗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현실을 해석할 대안적인 프리즘도 가진 게 없다. 방향감을 잃은 이들은 마치 역사가 자신들이 머릿속에 그린 해피 엔딩에 이르지 못한 것이 아마겟돈을 향해 돌진하는 일이라도 되는 양 종말론적 사고에 빠져들었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면 정신은 재앙적 시나리오에 집착하게 된다. 지독한 두통을 치명적인 뇌종양의 신호라고 상상하는 사람처럼,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브렉시트와 도널드 트럼프의 부상이 인류 문명의 종언을 예언한다고 우려한다.

ㅡ 24page


개인적으로 나는 잔혹한 세계 정복자들보다, 남의 일에는 좀처럼 관심을 두지 않는 하챦은 사람들에게서 나온 사상을 좋아한다. 많은 종교들은 겸손의 가치를 받든다. 하지만 그런 다음에는 자신들이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라고 상상한다. 개인의 온순함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뻔뻔한 집단적 오만함을 뒤섞는다. 모든 종교가 겸손을 보다 진지하게 여기면 좋을 것이다.

모든 형태의 겸손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신 앞에서의 겸손일 것이다. 사람들은 신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언제나 자신을 극도로 낮춘다. 하지만 그런 다음에는 신의 이름을 활용해 신도들 위에 군림한다.


ㅡ page 293

 

 어떤 사람에게는, 원수에게 다른 쪽 뺨까지 돌려 대주라고 명령한 인정 많은 신을 믿는 것이 마음속 분노를 누르는 데 도움이 될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종교적 믿음은 세상의 평화와 조화에 막대한 기여를 해왔다. 하지만 불행히도, 똑같은 종교적 믿음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분노를 키우고 그들의 분노를 정당화한다. 특히 누군가 자신이 믿는 신을 모욕하거나 신의 바람을 무시했을 때 그렇다. 이렇게 볼 때 세상의 입법자로서 신의 가치는 궁극적으로 그것을 믿는 사람들의 행동에 좌우된다. 만약 그들이 행동을 잘한다면 그들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든 믿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종교적 의식과 성지의 가치도 그것이 신도들에게 불러일으키는 느낌과 행동의 유형에 달려 있다. 사원을 찾아간 사람들이 평화와 조화를 체험한다면 그것을 휼륭한 일이다. 하지만 특정 사원이 사람들 사이에 폭력과 분쟁을 유발한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왜 필요하겠는가? 그것은 명백히 사회에 역기능을 하는 사원이다. 열매보다 가시만 돋는 병든 나무를 두고 싸우는 일이 무의미한 것처럼, 조화보다 적의만 낳는 불량 사원을 두고 싸우는 일은 의미가 없다.

 어떤 사원도 찾아가지 않고, 어떤 신도 믿지 않는 것 역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다. 지난 몇 세기가 입증했듯이, 우리가 도덕적인 삶을 살기 위해 굳이 신의 이름을 불러들일 필요는 없다. 세속주의만으로도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가치를 얻을 수 있다........................... 모든 종교와 이데올로기, 신조에는 그늘이 있다. 어떤 신조를 따르든지 불가피한 그늘을 인정하고, "우리에게는 일어날 리 없다"라는 안일한 확신을 피해야 한다. 세속주의 과학은 전통 종교 대다수와 비교하면 한 가지 큰 이점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그늘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학은 원리상 기꺼이 자신의 실수와 맹점을 인정한다. 그것이 아니라 어떤 초월적인 힘이 계시한 절대 진리를 믿는 사람이라면 어떠한 실수도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럴 경우 자신이 믿는 이야기 전체를 무효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류를 범하기 마련인 인간의 진리 추구를 믿는다면, 실수를 인정하는 것 자체가 게임의 일부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독단적이지 않은 세속주의 운동은 상대적으로 겸손한 약속들을 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불완전함을 알기 때문에 작고 점진적인 변화를 일으키길 희망한다. 최저임금을 몇 달러라도 올리고 아동 사망률을 몇 퍼센트라도 낮추려는 식이다. 반면, 독단적인 이데올로기는 자기 확신이 지나친 나머지 습관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이루겠다고 서약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들의 지도자는 너무나 거침없이 '영원'과 '순수', '구원'에 관해 이야기한다. 마치 어떤 법률을 시행하거나, 어떤 사원을 짓거나, 어떤 영토를 정복하면 일거에 전 세계를 구할 수 있을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지금 생명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시기를 맞고 있다. 이런 때 나는 개인적으로 자신의 무오류성을 주장하는 사람보다 무지를 인정하는 사람을 더 신뢰할 것이다. 만약 자신의 종교나 이데올로기나 세계관이 세계를 이끌기를 바란다면, 내가 던지고 싶은 첫 번째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의 종교, 이데올로기, 세계관이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무엇이었나요? 무엇을 잘못했지요?" 아무런 심각한 잘못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나는 당신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ㅡ page 304~322


탈(脱)진실의 종 사실 인간은 늘 탈진실의 시대를 살아왔다. 호모 사피엔스야말로 탈진실의 종이다. 호모 사피엔스 특유의 힘은 허구를 만들고 믿는데서 나온다. 석기시대 이래 줄곧 자기 강화형 신화는 인간 집단을 하나로 묶는 데 기여해왔다. 실로 호모 사피엔스가 이 행성을 정복한 것도 무엇보다 허구를 만들고 퍼뜨리는 독특한 능력 덕분이었다. 우리는 수많은 이방인들과도 협력할 수 있는 유일한 포유동물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도 허구의 이야기를 발명하고 사방으로 전파해서 수백만 명의 다른 사람들까지 그 이야기를 믿도록 납득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같은 허구를 믿는 한, 우리는 다 같이 동일한 법을 지키게 되고, 그럼으로써 효과적으로 협력도 할 수 있다.

 그러니 무서운 틸진실의 새 시대가 도래한 것을 두고 페이스북이나 트럼프, 푸틴을 탓한다면, 수 세기 전 수백만 기독교인이 자기 강화형 신화의 버블 속에 자신을 가둬둔 사실을 떠올리기 바란다. 그때도 성경의 진위 여부는 조금도 의심하려 들지 않았다. 수백만 무슬림 역시 쿠란을 추호의 의심도 없이 신앙의 대상으로만 받아들였다. 옛 1,000년 동안 사람들의 당시 소셜 네트워크에서 '뉴스'와 '사실'로 통했던 것들의 상당수는 기적과 천사, 귀신과 마녀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그 시대의 대담한 리포터들은 지하세계의 가장 깊은 수렁에서 일어난 일도 생중계하듯 전했다. 하지만 이브가 사탄의 유혹에 빠졌다는 과학적인 증거는 전혀 없다. 모든 불신자는 죽은 후 영혼이 지옥에서 불탄다거나, 브라만 계급과 불가촉천민 계급의 결혼은 우주의 창조주가 싫어한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수십억 사람들은 수천 년 동안 이런 이야기들을 믿어왔다. 어떤 가짜 뉴스들은 영원히 남는다.

 이처럼 종교를 가짜 뉴스와 동일시 하는 것에 많은 사람이 분노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이 바로 그 점이다. 1,000명의 사람이 어떤 조작된 이야기를 한 달 동안 믿으면 그것은 가짜 뉴스다. 반면에 10억 명의 사람이 1,000년 동안 믿으면 그것은 종교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가짜 뉴스'라 불러서는 안 된다는 충고를 들어왔다. 신도들의 감정을 자극(하거나 분노를 촉발)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렇지만 지금 나는 종교의 효과나 그것이 품고 있는 자애로움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정반대다. 좋든 나쁘든 허구는 인류가 가진 도구들 중에서 가장 효과적인 것에 속한다. 종교적 신념을 통해 사람들을 군대와 감옥은 물론 병원과 학교, 다리도 지을 수 있다. 아담과 이브는 결코 존재한 적이 없지만, 그래도 사르트르 대성당은 여전히 아름답다. 성경은 상당 부분이 허구일지 몰라도 여전히 수십억 신도에게 기쁨을 줄 수 있고, 사람들에게 연민과 용기와 창의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 <돈키호테>와 <전쟁과 평화> <해리 포터> 같은 다른 위대한 소설 작품들처럼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과 <해리 포토>를 비교한 것 때문에 또 불쾌해 할지도 모르겠다. 과학적으로 사고하는 기독교인이라면 성경에 나오는 모든 오류들과 신화적인 요소들을 두고, 성경은 실화가 아니라 깊은 지혜를 담은 은유적인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거야 ,해리 포터>도 마찬가지 아닌가?

 근본주의 기독교인이라면 성경의 단어 하나하나가 진실이라고 고집하려 들 가능성이 더 높다, 잠시 그 말이 옳다고 치고, 성경이 진정한 유일신의 무오류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쿠란이나 탈무드, 모르몬교 경전, 아베스타(조로아스터교 경전-옮긴이), 이집트인의 사자의 서(고대 이집트에서 죽은 사람을 매장할 때 명복을 빌면서 함께 묻은 기도문-옮긴이)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런 문서들은 모두 육신을 가진 인간이(아니면 혹시 악령이?) 만들어낸 정교한 허구들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은가? 또한 아우구스투스와 클라우디우스 같은 로마 황제의 신성은 어떻게 봐야 할까? 로마 원로원은 자신들에게 사람을 신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고 주장했고, 황제의 신민들은 이러한 신을 섬기는 것을 당연시했다. 하지만 그 역시 허구가 아니었던가? 사실 우리는 역사에서 가짜 신이 자기 입으로 자신의 허구성을 인정한 사례가 적어도 한 번 있었다는 사실을 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1930년대와 1940년대 초 일본 군국주의는 히로히토 천황의 신성에 대한 광신에 의존했다. 일본이 전쟁에서 패한 후에야 히로히토는 천황의 신성을 부인하면서 자신은 신이 아니라고 공식 선언했다.

 그러니까, 성경이 진정 신의 말이라는 주장에 동의한다 하더라도, 그와 똑같이 수천 년 동안 자신들의 허구를 믿어온 독실한 힌두교도, 무슬림, 유대인, 이집트인, 로마인, 일본인도 있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이런 허구들이 반드시 무가치하거나 해롭기만 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들은 여전히 아름다우며 영감을 주는 것일 수 있다............................... 협력을 끌어내기 위해 허구를 사용한 것은 고대 종교만이 아니었다. 보다 최근에도 각 민족은 나름의 민족 신화를 만들어왔다. 공산주의, 파시즘, 자유주의 같은 운동 역시 정교한 자기 강화의 신조들을 창안했다. 나치의 선전 총책이자 아마도 현대사에서 가장 뛰어난 미디어 마법사일 요제프 괴벨스는 자신의 수법을 이런 말로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다. "한 번 한 거짓말은 거짓말일 뿐이지만, 천 번을 반복한 거짓말은 진실이 된다." <나의 투쟁>에서 히틀러는 이렇게 썼다 "가장 탁월한 선전선동가의 기술을 가졌다 해도 한 가지 근본적인 원리가 머릿속에 즉각 떠오르지 않으면 아무런 성공도 거둘 수 없을 것이다. 즉, 몇 가지 요점만 한정해 계속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어떤 가짜 뉴스 장사꾼이 이보다 나을 수 있을까?.............. 종교나 이데올로기 외에 상업 회사들도 허구와 가짜 뉴스에 의존한다. 브랜딩 작업에는 흔히 동일한 허구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려주는 것도 포함된다. 사람들이 진실이라고 믿을 때까지 계속된다. 코카콜라를 생각하면 어떤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가? 건강한 젊은이들이 운동을 즐기며 노는 장면이 연상되나? 아니면 과체중의 당뇨 환자가 병원 침상에 누워 있는 모습이 떠오르나? 코카콜라를 많이 마신다고 해서 젊어지지도 건강해지지 않고, 몸매가 좋아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비만과 당뇨로 고생할 확률만 높아질 뿐이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코카콜라는 수십 억 달러를 투자해 자사의 이미지를 젊음과 건강, 운동과 연결시켰고, 수십억 명의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이런 연관성을 믿는다.

 사실, 호모 사피엔스의 의제에서 진실이 높은 수위를 차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많은 사람들은 어떤 종교나 이데올로기가 현실을 잘못 전달하면 머지않아 지지자들이 그런 사실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럴 경우 현실을 더 정확히 반영한 경쟁자들에게 뒤질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글쎄, 그런 가정 역시 또 하나의 마음 편한 신화다. 현실에서 사람들 간의 협동력은 진실과 허구 사이에서 미묘한 균형을 유지하는데 달렸다.......................... 인간에게는 이처럼 알면서 동시에 모를 수도 있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무엇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하면 알 수 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그것에 관해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알지 못한다. 가령, 정말로 주의를 집중하면 돈이 허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평소에는 그런 식으로 주의를 집중하지 않는다. 누군가로부터 축구에 관한 질문을 받으면 그것이 인간의 발명품이라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시합 열기로 달아올랐을 때는 아무도 그것에 관해 묻지 않는다. 민족도 마찬가지다. 그 문제에 시간과 에너지를 바치면 민족은 정교한 교직물이라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다. 하지만 전쟁 도중에는 그럴 시간과 에너지가 없다. 종교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관한 궁극의 진실을 요구한다면, 당신은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가 신화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자주 궁극의 진실을 요구하는가?

 진실과 권력의 동반 여행은 어느 정도까지만 가능하다. 머지않아 각자의 길을 가게 돼 있다. 권력을 바란다면 어느 지점부터는 허구를 퍼트리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반면, 세상에 관한 모든 허구는 배제한 채 진실만을 알고 싶다면, 어느 지점부터는 권력을 단념해야 할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자신의 동조자를 얻고 추종자를 격려하기 어렵게 만드는 사실들마저 인정해야만 할 것이기 때문이다. 훨씬 더 결정적인 것은, 자신과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의 원천, 그리고 자신이 더 많은 권력을 바라는 이유에 관한 어떤 불편한 사실들마저 인정해야만 할 것이라는 점이다..... 호모 사피엔스 종으로서 인간은 진실보다는 힘을 선호한다. 세계를 이해하려고 애쓰기보다 통제하려는 데 훨씬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다. 세계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도, 그러면 통제하기가 쉬워질 거라는 기대 때문이다. 따라서 진실이 지배하고 신화는 무시되는 사회를 꿈꾼다면 '호모 사피엔스'에게서 기대할 것은 거의 없다. 차라리 침팬지에게 운을 시험해보는 게 낫다.

ㅡpage 350~364

 태곳적부터 인생은 두 개의 상호 보완적인 부분으로 나뉘었다. 배우는 시기와 그 다음 일하는 시기다. 인생의 전반부에는 정보를 축적하고 기량을 연마하며 세계관을 구축하고 안정적인 정체성을 확립하느라 시간을 보냈다. 비록 15세 때 하루의 대부분을 (정규 학교가 아니라) 가족의 논에서 일을 하며 보냈어도, 이때 했던 가장 중요한 일은 학습이었다. 일하는 중에 쌀을 경작하는 법과, 대도시의 탐욕스런 쌀 상인과 흥정하는 법, 그리고 다른 마을 사람들과 땅과 물, 분쟁을 해결하는 법을 배웠다. 그런 다음 인생 후반부에는 그동안 축적한 기량을 활용해 세상을 헤쳐 나가고, 생계를 꾸리며, 사회에 기여했다. 물론 50세가 되고 난 다음에도 계속해서 쌀과 상인과 분쟁에 관한 새로운 것들을 배웠지만, 이미 잘 연마된 능력에 약간의 조정을 더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21세기 중반이 되면 변화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는 데다 수명까지 길어지면서 전통적인 모델을 쓸모가 없어질 것이다. 인생은 조각조각 부서지고, 서로 다른 기간들 사이에 연속성도 점점 줄어들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전에 없이 다급하고 복잡한 질문으로 떠오를 것이다.

 이 과정은 엄청난 수준의 스트레스를 동반할 가능성이 크다. 변화는 거의 늘 스트레스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어떤 나이가 지나면 대다수 사람들은 아예 변화를 싫어한다. 15세 때만 해도 삶 전체가 변화다. 몸도 자라고 정신도 발달하고 인간관계도 깊어진다. 이때는 모든 것이 유동적이고 모든 것이 새롭다. 누구나 자신을 발명하느라 분주한 시기다. 대다수 10대는 이 시기를 두려워하지만, 동시에 이 시기는 흥미진진하다. 새로운 지평이 눈앞에 펼쳐지고, 온 세상이 나의 정복을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다.

 하지만 50세가 되면 변화를 바라지 않는다. 대다수 사람들은 세계 정복 같은 것은 포기한 상태다. 거기도 가봤고, 그것도 해봤고, 그곳 기념 티셔츠도 갖고 있다. 그러니 안정을 훨씬 더 선호할밖에. 이미 너무나 많은 것을 자신의 기량과 경력, 정체성, 세계관에 쏟아 부은 상태여서 이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고 싶지 않다. 무언가를 쌓는 데 열심이었을수록 그것을 떠나보내고 새로운 것을 위한 공간을 만들기가 어렵다. 여전히 새로운 경험과 약간의 조정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50대는 자신의 정체성과 인격의 심층 구조를 뜯어고치는 데 소극적이다.

 여기에는 신경학적 이유가 있다. 성인의 뇌가 과거에 생각했던 것보다는 더 탄력적이고 변덕스럽다 해도 10대에 비하면 가소성이 훨씬 낮다. 이들로서는 뉴런을 재연결하고 시냅스를 재배선하는 것이 너무나 힘든 일이다. 하지만 21세기에는 안정을 누릴 만한 여유가 거의 없다. 어떤 안정된 정체성이나 일, 세계관을 고집하려 들다가는, 세계는 휙 지나가고 자신은 뒤로 처지는 위험을 무릎써야만 한다. 게다가 기대수명까지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후로도 수십 년을 멍청한 화석 상태로 보내야 할 수 있다. 앞으로 세상에 뒤처지지 않고 살아가려면 ㅡ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사회적으로 ㅡ 끊임없이 배우고 자신을 계속 쇄신하는 능력이 필요할 것이다. 50세 정도의 젊은 나이라면 확실히 그래야만 한다. ㅡ page 395~397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 더 나은 오늘은 어떻게 가능한가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 더 나은 오늘은 어떻게 가능한가
Know What We Know

Knowing what we know:Transmission of Knowledge: From Ancient Wisdom to Modern Magic

April 25, 2023


“우리가 아는 것에 대한 앎?”: 지식의 전수傳授: 고대의 지혜에서 현대의 마법魔法에 이르기 까지


이 책은 지난 4월 25일 출간이 된 따끈 따근한 책이다. 지난 번 “태평양 이야기’를 읽고 저자의 박식博識polymath에 상당히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그래서 아마존에서 북 서핑을 하다 이 신서를 발견하고는 별 다른 주저없이 바로 선택을 했다. 하지만, 그의 박식博識한 영어 때문에 독서에 상당한 노고가 필요했다. 다소 익숙한 언어라 생각했던 영어의 깊이에 다시 한 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이 책을 쓰게 된 동기動機는 최근 Chat GPT로 대표되는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시대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말하고자 한 것 같지만 그의 의견은 마지막 장, 마지막 한 두 페이지에 가까스로 정리된 것 같아 아쉬움을 남긴다. 


닉스 보스트롬의 “슈퍼인텔리전스”를 읽다 보면 현재 인공지능을 만들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과 야심을 나름 짐작할 수 있게 되고 쇼샤나 주보프의 “감시자본주의”에서는 구글과 페이스북이 전체주의 사회의 빅브라더에의 야욕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특히, 닉스 보스트롬과 같은 인공지능 설계자들의 생각과 사상이 극단적 행동주의적 인지주의적 세계관에 단단히 묶여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인간의 뇌를 스캔해서 하드 디스크와 같은 용기에 저장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그렇기 때문에 USB만 인간에 뇌에 꽂을 수 있다면 그것이 어느 인종이건 또 남성이건 여성이건 관계 없다(성구분이 불필요)는 critical theories와 연결된다는 사상의 단서를 읽어낼 수가 있었다. 또 레이 커즈 웨일의 “싱귤래러티”역시 같은 생각의 연장 선상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AI시대는 그렇게 비관적인 전망으로만 이해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인류의 편리를 크게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클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래서 AI시대에 관한 다양한 의견을 갖는 책을 읽어낼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사이먼 윈체스터의 이 책은 인문학적 관점, 지식사적 관점에서 접근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인류가 최초로 문자를 통해 기록을 남긴 시기는 BC30세기 설형문자를 발명한 수메르인들의 진흙 태블릿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 인류의 지식사를 정리해 나간다. 파피루스, 동물의 가죽, 대나무, 비단 등을 사용해 지식을 전수하던 인류는 기원직후 중국의 한나라 채륜에 의해 종이를 발명하고 서방으로 보급되는데 거의 천년의 시간이 소요된다. 하지만, 역사의 여신은 다시 15세기 구텐베르크가 인쇄기를 발명하면서 알파벳을 사용하는 서구 사회에 미소를 보내게 되고 지식이 카톨릭 교회의 독점으로 부터 부르조아들에게 이양移讓되기 시작한다. 이어서 종교개혁 등과 같은 일련의 과정을 거쳐 서양의 근대가 출현하게 된다.(이 시기부터 서구사회와 동아시아 사회의 발전을 가르는 여러가지 요소 중 하나는 서구의 알파벳 그리고 동아시아 사회의 ‘한자漢字’라고 하는 두 이질적 문자체계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는 생각을 반복적으로 하게 된다.)


이어서 사구사회의 지식을 집대성하고자 하는 노력은 백과사전 등과 같은 형태로 나타나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 영국에서 만들어진 다음 미국으로 건너가 소위 ‘할부구매’라는 마케팅의 혁신을 통해 대중적으로 보급이 되기 시작한다. 1776년 미국이 독립선언을 하고 천부적 인권 등에 기초한 헌법을 작성하고 1789년 프랑스 혁명이라는 사건이 있기는 하지만 소위 대중민주주의란 양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난 뒤의 최근의 역사적 사실史實이란 사실事實을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아마도 이 백과사전의 보급과 같은 마케팅이 대중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한 요소 중의 하나로 작용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선전Propaganda宣傳란 용어가 처음 출현한 것은 1622년 카톨릭 교회의 그레고리 15세 교황 때가 처음이라고 한다. 그것은 프로테스탄트를 쳐부수기 위한 도구로 처음 등장했는데 이후 레닌 등은 자본주의를 타도하기 위한 적극적 도구로 사용했고 최근의 한국사회에서도 이런 현상을 자주 목격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네이버 사전에 따르면 “宣傳이란 의미는 사상, 이론, 지식 또는 사실 등을 대중에게 널리 인식시키는 일”이라고 규정하고 있어 한국사회의 그것과는 다소 구분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사회의 현상은 철저하게 대중의 무지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선동煽動Agitation에 가까운 것으로 개념으로 성격을 규정해야만 할 것 같다.


프로이트는 거의 정신병리학에 대한 분석 뿐만 아니라 대중들의 무의식을 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사실에서 그 어떤 정신분석학자 보다 위대한 인물처럼 보인다. 프로이트의 외조카 Bernay는 이를 광고에 처음 활용하고 정치적 영역에 까지 확장시킨 인물이라는 사실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어서 책은 ‘구글의 검생엔진’으로 이어진다. 탄생은 하이퍼텍스트, 인터넷, 월드와이드 웹이라는 세 가지 조건의 삼위일체적 결과물이었다고 한다. 이 구글을 통해 대중들이 접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은 비약적으로 증가하게 되었고 대중은 이제 지식을 instantly 소비하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 수많은 기계문명의 발전을 통해 인간의 엄청난 육체적 수고와 노고를 덜게 되었던 것처럼 이와 같은 4차 산업 시대, AI시대를 살아가는 인류에 육체노동에 대신해 정신노동의 수고를 덜어줄 것으로 기대가 되는 이 새로운 시대는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저자는 Wise, Wisdom이라는 단어를 자주 등장시키면서 신시대의 전망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지막 6장에서 저자는 버트란트 러셀과 같은 앵글로 색슨계의 박식博識한 천재들을 길게 여럿 소개한다.(나는 버트란트 러셀이 그렇게 요란한 바람둥이였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다.) 또 양념으로 아프리카, 인도와 같은 식민지의 박식博識한 천재들도 한 두 명 함께 소개한다. 하지만, 먼저 '태평양 이야기'에서 명백히 서론Prologue과 결론이라는 장章을 두고 서술했던 것과 다르게 이 책에서는 Prologue만 있다. 하지만, 그의 박식博識Polymath만은 시종일관이었다.

나를 찾지 마 - 김범

바야흐로 로맨틱 코미디의 시대는 끝난걸까? 철마다 무수히 쏟아져 나오던 그 수많은 로맨틱 코미디들은 어디로 갔을까? 


로맨틱 코미디는 두 남녀의 힘의 균형이 포인트다. 둘에게는 맺어지기 어려운 적당한 사유가 있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법적, 사회적, 신체적, 정신적 결합이 최종적으로는 가능해야 한다. 보통 둘의 관계는 아래와 같다. 

 

1. 오랜 친구가 연인이 될 수 있을까? (해리&샐리)

2. 서로 적대적인 비즈니스 관계, 나는 진보정당 대변인, 당신은 보수정당의 정치인 등 (유브 갓 메일)

3. 수저가 다른 우리들. 왕자님과 나, 재벌 3세와 나 (너무 많아서 언급하지 않겠다.) 

4.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난다. 나는 18세 여고생. 당신은 72세 할아버지 (코미디로 만들기가 어렵다. 일단 장르는 둘째치고 작가와 감독의 큰 결심이 필요)

5. 두 유부들의 만남. 왜 우리들은 이렇게 서로를 늦게 만났을까? (역시 코미디로 풀기 어렵다. 치명 격정 멜로 정도로 노선 변경 가능)

 

이 정도 리스트가 지금 생각나는 정도인데, 이 책의 김범 작가님은 정말 신박하게도 여기에 6번이라는 새로운 후보를 넣으셨다.

 

6. 오래된 부부사이

 

허걱! 이렇게 천재적일 수가! 생각해 보니 현대인이 정말 사랑에 빠지기 어려운 대상은 바로 내 남편! 내 아내! 옆에서 내 복장터지는 짓만 수십년째 골라 하고 있는 이 징글징글한 화상아. 

 

로맨틱 코미디가 주는 간질간질 설레임이 반갑다. 주말엔 역시 소설 한 권!    

  

 

나의 마음은 황무지 차가운 바람만 불고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그런 황무지였어요

그대가 일궈 놓은 이 마음

온갖 꽃들이 만발하고 따뜻한 바람이 부는

기름진 땅이 되었죠

 

내 마음은 황무지 / 산울림 

나를 찾지 마
나를 찾지 마
51. 애드넘스 고스트쉽과 항포포구

협재해수욕장의 게스트하우스 다음으로 묵은 곳은 애월리와 제주공항 중간 즈음에 있는 캠핑카 야영장이었다. 캠핑카를 9대 갖추고 숙박 체험을 제공하는 작은 단지였다. 우리는 12제곱미터짜리 2인용 독일식 캐러밴을 빌렸는데, 이번 제주 여행에서 이용한 숙소 중 가장 좁았고, 가격은 세 번째로 비쌌다.

한번쯤 이런 체험을 해보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며 HJ가 예약했는데, 말 그대로 딱 한번 정도 해보면 좋은 경험이었다. 우리는 2박 3일을 보냈는데, 하루 더 묵었다면 불편했을 것 같다. 캐러밴 안에 화장실은 있었지만 매우 비좁았고 냄새가 밸까봐 사용하기 어려웠고, 제대로 된 변기와 샤워 설비는 캐러밴 밖 공용 시설을 이용해야 했다.

그래도 캠핑카에서 지내는 시간은 즐거웠다. 모든 공간이 감탄스럽게 효율적으로 설계되어 있었고, 그런 설계에 우리 생활을 맞추는 경험이 신선했다. 캐러밴에 들어가기 전에 하루는 맑고 하루는 비가 왔으면 좋겠다고 농담을 했는데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 또 캐러밴 앞은 야트막한 바위 언덕 아래로 바다가 잘 보이는 전망이었다.

특히 각 캠핑카마다 바다 쪽으로 앞에 테이블과 의자가 놓인 작은 공간이 있었는데, 좌우로 나무가 울타리처럼 심어져 있어 이웃 투숙객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쓸 수 있었다. 거기서 바비큐를 해 먹지는 않았지만 바다를 내려다보며 차를 마시고 스트레칭을 하고 저녁도 먹었다.

첫째 날에는 항포 포구로 가서, SNS에서 유명한 두부요리 전문점에서 점심을 먹었다. 가게 영업 개시 전부터 사람들이 문 앞에 길게 줄을 섰고, 우리는 그 줄에서 두 번째였다. 손님들은 엄청나게 밀려 왔고 종업원들도 부산스러웠는데 정작 요리는 평범했다. 두부함박스테이크와 아게다시도후, 그리고 아게다시도후와는 다소 다른 두부튀김을 먹었다.

근처 마트 두 곳에서 족발, 빙떡, 컵라면, 맥주, 사과, 팝콘을 사왔다. 족발은 HJ가 그날 저녁으로 먹고 싶다고 해서 샀고, 다음날 한 끼는 빙떡으로 때울 생각이었다. 『올드독의 맛있는 제주일기』를 읽고 맛이 궁금해지기도 했고. 제주에 있는 동안 너무 잘 먹고 다녀서 체중이 슬슬 걱정이 되었다. HJ도 마찬가지였다.

컵라면은 흑돼지로 국물을 냈다고 하는 제주 제품이었는데 기념품 가게에서 계속 보다 보니 맛이 궁금해졌다. 사과는 HJ가 샀다. HJ는 여행 중에 종종 마트에 들러 바나나, 사과, 딸기, 당근, 오이를 사서 내게 먹였다. 사실 서울에 있을 때도 그랬다. 나는 야채는 그럭저럭 먹는 편인데, 과일은 싫어한다. 특히 딸기.

서울에서 출발할 때 신발을 두 켤레 챙겼는데, 둘 다 샌들이었다. 그 중 한 켤레는 밑창이 거의 떨어져서 버렸고, 신고 있던 다른 한 켤레도 밑이 반쯤 갈라졌다. 샌들을 한 켤레 사고 싶었는데 신기하게도 마트 앞에 옷과 신발 재고품을 할인해서 파는 크고 허름한 매장이 있었다. 거기서 마음에 드는 샌들을 한 켤레 샀다.

이날 저녁에는 캐러밴 앞 작은 개별 마당에서 족발을 먹었다. 코딱지만 한 크기인 주제에 캐러밴은 전자레인지도 갖추고 있었다. 바람이 세고 날벌레가 성가시기는 했지만 그렇게 바다 위로 지는 해를 감상하며 야외에서 식사를 하는 것도 흥겨웠다. 마트에서 파는 제품인데도 예상 외로 맛있는 족발이었다.

우리 캠핑카 뒤에는 큰 스피커가 있었는데, 야영장 운영자가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을 온갖 버전으로 몇 번이나 틀어줬다. 우리도 좋아하는 노래니까 처음에는 흠뻑 정취에 젖었는데, 나중에는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녀의 웃음소리뿐〉도 여러 번 나왔다. 결국 다음날 담당자에게 음악 소리를 좀 줄여달라고 요청했다.

앤드루 솔로몬의 『부모와 다른 아이들』 1권을 읽었다. 이 책은 두 권짜리인데, 1권이 872쪽, 2권이 760쪽이다. 아직 절반만 읽은 셈이지만, 정말 엄청난 책이다. 읽는 내내 감탄하고 감동했다. 올해 읽은 것 중에 가장 대단한 책이 될 것 같다. 앤드루 솔로몬의 다른 저작도 모두 찾아 읽을 생각이다.

캐러밴 숙박 둘째 날 오전에는 HJ가 작은 마당에서 차를 마시는 동안 나는 안에서 신문 칼럼을 마감했다. 낮에는 항포포구에 있는 거대한 커피점에 갔다. 밖에서 보기에도 컸지만 안에 들어가 보니 짐작하던 것보다 더 넓었다. 게다가 전망도 대단했다. 고래를 모티브로 했다는 독특한 모양의 건물 2, 3층에 여러 방향으로 대형 유리창이 나 있었고 각각의 방향으로 포구와 바다가 보였다. HJ는 건축가의 안목을 여러 번 칭찬했다.

그러나 그 카페에서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가격이었다. 오전 11시 전에는 아메리카노를 1400원이라는 경악할 만한 가격에 팔았다. 테이크아웃에만 매기는 금액도 아니었다. 오전 11시 이후에도 4000~5000원대의 커피를 주문하면 반값 할인을 받거나 샐러드, 샌드위치, 디저트 중 하나를 무료로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HJ와 내가 멋진 전망을 즐기며 아메리카노, 카페 라테, 샌드위치, 핫도그를 먹고 마셨는데도 만 원 남짓밖에 안 들었다.

뭐지? 입소문을 내야 해서 한동안 밑지고 장사하는 건가? 대기업의 사회공헌 사업인가? 궁금해서 인터넷을 검색해봤더니 제주에서 새로 생겨 사세를 무섭게 넓히고 있는 신생 프랜차이즈라고 했다. ‘제주의 스타벅스’라는 별명까지 붙었다나. 서울과 부산에도 매장을 냈다고 한다.

이날 낮부터 비가 왔다. 카페에서 돌아와서는 캐러밴에 틀어박혀 IPTV로 영화 《조선명탐정: 흡혈괴마의 비밀》과 《베이비 드라이버》를 봤다. 조선명탐정 3편은 전작들과 달리 판타지 요소를 가미했는데, 그건 상관없었지만 여주인공을 맡은 배우가 너무 연기를 못해서 몰입이 어려웠다. 《베이비 드라이버》는 나쁘지 않았고 개성도 있었지만 평론가들의 찬사를 받을 정도인가 싶었다. 그냥 둘 다 팝콘 먹으며 보기 딱 좋은 영화였다.

저녁으로는 빙떡, 컵라면, 남은 족발을 먹었다. 흑돼지 분말을 넣었다는 컵라면에서는 다소 탄 맛이 났다. 저녁을 먹으며 마트에서 사 온 애드넘스 고스트쉽과 버드와이저를 마셨다. 애드넘스 고스트쉽은 영국 애드넘스 양조장에서 만드는 페일에일인데, 유령선이라는 이름과 라벨 디자인이 재미있다. 그러나 밀어 붙이는 듯한 강한 향과 가벼운 바디는 다소 따로 논다는 느낌이었다.

밖에서는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밤이 되자 캐러밴이 덜컹거렸고 바닷물이 육지 반대편으로 쓸려 올라가는 듯 보이기까지 했다. 우리는 기상청 홈페이지에서 그날 밤 항포포구 주변 최대 풍속을 검색하고, 그 정도 바람이면 나무가 뽑히거나 차가 뒤집어지지 않을지 확인했다. 인터넷 설명에 따르면 그 정도는 산들바람이라고 했다.

 

비바람이 치던 바다

좀처럼 잠잠해지지 않고

우린 유령선을 마시네


632. 신곡: 연옥편 (단테 알리기에리)

질투를 속죄하는 이들은 눈썹이 철사로 꿰매져 고통 받는다. 질투가 시각에서 비롯되는 거라면, 현대인들은 훨씬 더 쉽고 크게 그 죄에 빠져들 테지. 인터넷 덕분에.

신곡 : 연옥편
신곡 : 연옥편
631. 신곡: 지옥편 (단테 알리기에리)

분노를 이기지 못한 이들은 스틱스 강의 진창에서 서로 물어뜯고 온몸으로 난투를 벌인다. 그러나 늪에 빠져 있기에 그들의 외침은 단테에게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신곡: 지옥편
신곡: 지옥편
#2. 불확실성의 시대 - 토비아스 휘터

근래 몇년 동안의 출판 트렌드인건지 아님 최근에나 내 관심 영역에 들어와서인지, 언제부턴가 과학자에 대한 이야기 혹은 과학사를 다룬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 것 같다.


양자 역학을 위주로한 1900~1945년까지의 물리학과 물리학자의 이야기인데 의외로! 가독성이 꽤나 높다. 물론 '양자 역학을 모두 이해하며 읽겠다!는 욕심은 살짝 옆으로 치워두고' 라는 전제 하인데, 전문적인 지식이 없더라도 독서에 크게 무리되지 않을 만큼 일반 대중서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책이다.


<찬란하고 어두웠던 물리학의 시대 1900~1945> 라는 부제에서 이미 책의 결말이 예상되지만, 그 의도치 않았던 결말까지의 과정에서 볼 수 있는 과학자들의 고민, 서로에 대한 존중과 갈등 등이 흥미롭고 무엇보다 그 갈등을 서로가 충분히 토론하고 서신으로 교환하는 부분은 꽤나 부러운 모습이기도 했다. 과학자들의 대화라기보단 철학자들의 대화같던 장면들인데, 하긴.. 언제부터 그 경계가 뚜렷이 나뉘어졌나 싶기도 하다.



p.222

아인슈타인은 세계가 저기 밖에 정말로 존재하고, 인간의 상상력이 그 세계를 철저히 파헤칠 수 있다고 확신한다. 하이젠베르크는 일상 세계를 넘어서는 상상을 신뢰하지 않는다. 수가 맞아야 하고 공식이 맞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상상에 대해 말할 수 있다.


p.316

아인슈타인의 생각은 달랐다.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목표를 추구한다. "무엇이 존재하는지 결정하기." 물리학은 모든 관점에서 독립적으로 객관적으로 현실을 이해하고자 한다. 이것이 아인슈타인과 코펜하겐 사람들의 차이이다. 하이젠베르크가 말한다. "원자 또는 원소 입자 자체는 실제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사물 또는 사실의 세계가 아니라, 잠재성 또는 가능성의 세계를 형성합니다." 관찰을 통해 비로소 그 가능성이 현실이 된다고, 보어와 하이젠베르크가 말한다. 그것은 자연과학이 아니라고, 과학은 자연을 발명하지 않고 연구한다고, 아인슈타인이 말한다.



누군가에겐 한낱 사소한 주제일 수 있는 한 분야를 누군가는 온 생을 바쳐서 고민하고, 그들만의 언어로 세상을 읽는다.

하지만 그들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관계로 상처 받고, 존경하는 대상이 어느 순간은 가장 자신을 힘들게도 하고, 누군가의 성취로 열등감에 휩싸이고, 불확실한 시대의 한가운데서 예측치 못한 방향으로 삶이 뒤틀리기도 하고.


수없이 상처받고, 환희하고, 또 좌절하고.. 그런 과정으로 쌓아 올린 세상을 지금의 내가 살고 있다. 그것도 역사상 가장 안전하고 풍요로운 시기를.

엄청난 큰 행운인 걸 잊지 말아야지.


불확실성의 시대
불확실성의 시대
마당이 있는 집

디아블로4는 3장을 거의 끝내가는데 3장부터 등장 인물의 밀도가 높아지면서 이야기의 몰입감이 높아진다. 사실상 1장부터 2장까지는 setting에 가까웠던 듯. 그럼에도 서브 퀘스트를 플레이 하는 동안에는 드라마를 틀어놓고 있는데 남편사망정식이 밈이 된 마당이 있는 집을 재생하게 되었다.


김태희와 임지연은 한국 영화계에 있어서 가장 연기력에 문제가 있는 여배우들로 손꼽히는 인물들. 임지연은 최근 더글로리를 통해 이 연기력 이슈를 어느 정도 증명했다고는 하지만 김태희의 경우는 결혼 이후 오랜 공백기를 지나 복귀하는 작품이기 때문에 여전히 물음표를 안고 있는 배우. 어떻게 이런 리스크 높은 더블 캐스팅이 진행되었는지(캐스팅 등 프리프로덕션 기간은 더글로리 제작 전으로 추정) 드라마 프로젝트의 과정이 궁금하다.


드라마 연출 자체가 배우 연기에 포커스하기 보다는 과도한 미술과 카메라 앵글에 중심을 두고 있는데 정작 게임 플레이 하느라 드라마 화면을 잘 못봐서 김태희의 연기가 개선되었는지 확인은 할 수 없었다.

마당이 있는 집
마당이 있는 집
630. 인간의 위대한 여정 (배철현)

인문학자가 본 인류의 초기 역사. 도킨스를 대차게 깐다. 농업혁명 전에 이미 정착문화가 있었다는 최근의 고고학 발견은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규정한다’는 유물사관에 치명타를 가하는 얘기 아닌가?

인간의 위대한 여정(양장본 HardCover)
인간의 위대한 여정(양장본 HardCover)
629. 창세기, 샤갈이 그림으로 말하다 (배철현)

샤갈의 ‘십자가 처형’ 시리즈도 비중 있게 다루는데, 창세기 회화보다 더 흥미롭다. 유대인인 샤갈은 이 주제에 매혹됐고, 메시아가 아닌 ‘고통 받는 유대인 순교자’로서 예수를 그렸다고.

창세기 샤갈이 그림으로 말하다
창세기 샤갈이 그림으로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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