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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 (장기화 시인)

중독

                                       - 장기화


틈만 나면 게임한다고

중독이라 하지만 

 

난, 학교 갔다 와서 할 뿐

난, 학원 갔다 와서 할 뿐

난, 밥 먹고 할 뿐

난, 똥 싸고 할 뿐 

 

학교도 안 가 학원도 안 가 밥도 안 먹어 똥도 안 싸

틈도 없이 하는 게 중독이지 

 

틈도 없이 잔소리하는

엄마가 중독이지 

 

(강기화 동시집 '놀기 좋은 날') 

배낭이 커야 해 (박형권 시인)

배낭이 커야 해

                    - 박형권 

 

집 나올 때는 배낭이 커야 합니다

집을 가지고 다녀야 하니까요

아무 데서나 자려면 돗자리는 있어야 하니까요

지붕은 필요 없어요

별을 세다가 자야 하니까요

새벽을 위해서는 배낭이 커야 합니다

반짝 열리는 인력시장에서

뭔가 단단히 준비하고 온 걸 보여야 하거든요

고달픈 인생은 우리 사이에서 계급장이지요

흔해빠진 연애사건 하나와

술자리에서 펼칠 무용담 몇 가지 여유 있게 담으려면

배낭이 커야 합니다

오늘은 양평에서 고추 따는 일이 걸렸어요

일 끝내고 가져갈 만큼 가져가라는 인심을 담으려면

욕심껏 배낭이 커야 합니다

상품 안 되는 것 공원에서 팔면

피로 만든 선지국밥 한 그릇은 남길 수 있어요

아, 나는 그 선혈을 담기 위해 큰 배낭을 짊어졌습니다

벌써 환갑이 코끝에 닿은 나이

내 몸보다 큰 배낭을 짊어졌습니다

젊었을 땐 그게 무겁지 않았어요

청춘을 담을 공간이 필요했어요

왜 집을 나왔느냐고요?

아직은 담아야 하니까요 나는 담기기 싫었습니다

그러므로 배낭은 커야 합니다

별을 향해서라도

노숙을 향해서라도 

 

속리산에서 (나희덕 시인)

속리산에서

                      나희덕 

 

가파른 비탈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 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 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은 남아있는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산을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것은 정작 산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 아래서 밥을 끓여 먹고 살던

그 하루 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속리산은

단숨에 오를 수 있는 높이를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 주었다. 

혼자 울지 마라 (정용주 시인)

혼자 울지 마라

                                       정용주  

 

하늘 아래

어떤 슬픔도

온전히 한 존재의 몫으로

주어진 것은 없다 

 

먼 단풍도

홀로 붉지 않는다 

 

한 바람이

서늘한 능선의 가슴을 쓸면

마침내 모든 나무가

서로에게 물들어 

 

가난한 영혼의 연대가

온 산에 붉다 

 

들꽃을 바라볼 때

꽃의 귀는

너를 듣는다

  

홀로 슬퍼 자기를 연민할 때도

꽃은 피고 사랑은 간다 

 

한 마음 괴롭히는

그 까닭으로

모든 영혼이 운다 

 

우리는 모두

물들어 간다

혼자 울지 마라  

소주 한 병이 공짜 (임희구 시인)

소주 한 병이 공짜 

                    임희구 

 

막 금주를 결심하고 나섰는데 

눈앞에 보이는 것이 

감자탕 드시면 소주 한 병 공짜란다 

이래도 되는 것인가 

삶이 이렇게 난감해도 되는 것인가 

날은 또 왜 이리 꾸물거리는가 

막 피어나려는 싹수를 

이렇게 싹둑 베어내도 되는 것인가 

짧은 순간 만상이 교차한다 

술을 끊으면 술과 함께 덩달아 

끊어야 할 것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 한둘이 어디 그냥 한둘인가 

세상에 술을 공짜로 준다는데 

모질게 끊어야 할 이유가 도대체 있는가 

불혹의 뚝심이 이리도 무거워서야 

나는 얕고 얕아서 금방 무너질 것이란 걸 

저 감자탕 집이 이 세상이 

훤히 날 꿰뚫게 보여줘야 한다 

가자, 호락호락하게  

두 번은 없다 ( 비슬라바 쉼보르스카)

두 번은 없다

                  비슬라바 쉼보르스카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 바보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는 없는 법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하루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

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을 때

내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

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을 때

난 벽을 향해 얼굴을 돌려버렸다

장미? 장미가 어떤 모양이었지?

꽃이었던가? 돌이었던가?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 그러므로 아름답다 

 

미소 짓고 어깨동무하여

우리 함께 일치점을 찾아보자

비록 우리가 두 개의 투명한 물방울처럼 서로 다를지라도 

돌이킬 수 없었다 (허수경 시인)

돌이킬 수 없었다

                   허수경 시인 

 

언젠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치욕스럽다, 할 것까지는 아니었으나

쉽게 잊힐 일도 아니었다 

 

흐느끼면서도

혼자 떠나버린 나의 가방은

돌아오지 않았다 

 

비가 오는 것도 아니었는데

머리칼은 젖어서

감기가 든 영혼은 자주 콜록거렸다 

 

누런 아기를 손마디에 달고 흔들거리던 은행나무가 물었다, 나, 때문인가요?

첼로의 아픈 손가락을 쓸어주던 바람이 물었다, 나, 때문인가요?

무대 뒤편에서 조용히 의상을 갈아입던 중년가수가 물었다, 나, 때문인가요? 

 

누구 때문도 아니었다

말 못 할 일이었으므로

고개를 흔들며 그들을 보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터미널로 나가

돌아오지 않는 가방을 기다렸다 

 

술냄새가 나는 오래된 날씨를 누군가 매일매일 택배로 보내왔다 

 

마침내 터미널에서

불가능과 비슷한 온도를 가진

우동 국물을 넘겼다 

 

가방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예감때문이었다

그 예감은, 참 무참히 돌이킬 수 없었다 

편지 (김남조 시인)

편지

                 - 김남조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이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의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의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귀절을 쓰면 한 귀절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번도 부치지 않는다 

가난한 사랑의 노래 (김나연)

가난한 사랑의 노래

                                                                        - 김나연 

 

1. 

 

하루는 네가 술에 취해서,

이번 달 카드 값을 막느라 월세를 동생에게 빌렸다고 쓸쓸하게 웃었어.

차마 울지 못해 웃었겠지. 

 

가난한 애긴 아무리 가까운 사람에게라도 하기 힘든데, 네가 네 한 달 치 가난을 나에게 알려줘서 사실 기분이 좋았다고 하면 난 못된 애야? 그런 네 바닥을 얼마든 더 보고 싶다고 하면 난 모자란 앤가? 

 

2. 

 

나는 사실 네가 나만큼은 벌었으면 좋겠어.

사실 조금 더 벌면 좋겠어.

그래서 내가 너랑 하고 싶은 일이 생겼을 때 너에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네가 하고 싶은 게 생겨도 내 눈치 보지 않고 말할 수 있게. 우리가 하고 싶은 게 늘 검소하고 순수할 수 없으니까. 나는 이제 이런 내가 속물이라고 생각 안 해. 이 세상 누구도 손가락만 빨며 살고 싶어 하지 않잖아. 그렇다고 내가 크루즈를 타고 세계여행을 가자는 것도 아니고. 

 

그저 선택지 앞에서.

고민에서.

자유로웠으면 좋겠어. 그것뿐. 

 

3. 

 

나는 너한테서 나는 가난의 냄새가 너무 싫었어. 은유가 아니라 네 옷에선 늘 쿰쿰한 냄새가 났어. 볕은커녕 환기도, 습도 조절도 제대로 되지 않는 반지하 원룸. 그 원룸 벽면에 틈도 없이 쌓아 올린 다이소 플라스틱 서랍장, 2단 행어. 그 안에서 제대로 숨 쉬지 못해 모든 냄새가 베 버린 옷들. 

 

널 만나면 네 옷에서, 속옷에서 그 반지하의 냄새가 났어. 현관이 부엌이고, 부엌이 식당이고, 그 방인지 복도인지 알 수 없는 공간 구석에 높인 접이식  상. 너에겐 식탁이자 책상이고 TV장이었지. 셀로판지로 꾸민 그 합판에 올려둔 노트북이 TV를 대신 하는 방. 노트북으로 밀린 예능을 보다 그대로 식탁 앞에서 잠들어버리는 방. 그 모든 공간이 네 옷에 냄새로 녹아있었어. 

 

나는 그게 끔직하게 싫었어. 페브리즈조차 가릴 수 없는 가난의 냄새. 내가 사준 명품 브랜드 향수도 뚫고 나오는 우리의 처지. 처지의 민낯. 

 

내가 속물이라도 네가 날 욕이라도 하면 좋았을 텐데. 아님 내가 조금 더 능력 있는 집안 막내딸이면 좋았을 걸. 우리는 그 어느 것도 타고나지 못했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진 못했지만 이 악 물고 노오력이라도 할 수 있게 이라도 날카로웠어야 하는데. 혀라도 교활했어야 하는데. 

 

(김나연 독립출판 에세이집 ‘모든 동물은 섹스 후 우울해진다’ 중에서) 

모든 동물은 섹스 후 우울해진다
모든 동물은 섹스 후 우울해진다
사랑의 마약 밀매상적 요소 (전혜린)

사랑의 마약 밀매상적 요소 

                        - 전혜린 

 

남에게 보여서 부끄러운 사랑은 마약밀매상적 요소가 있다.

그것은 없느니만 못하다.

대낮을 견딜 수 있는 사랑이라야 한다.

(1964. 4. 1. 일기) 

 

(전혜린 에세이집 ‘그리고 아무말 하지 않았다’ 중에서 )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전혜린 에세이 1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전혜린 에세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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