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쉽게 사람을 포기했을 때 그랬을 때......
데미지는 오히려 자신에게 온다는 걸
회환과 한탄이 뒤섞여 스스로를 괴롭힌다는 걸
누군 가를 포기하고자 한다면
미련이 남지 않을 만큼 최선을 다 해야 한다.
그래야 선택에 책임을 질 수 있고 자신을 괴롭히지 않게 된다.
- 미생 두번째 시즌(41수) 중에서
마침표 하나
- 황규관
어쩌면 우리는
마침표 하나 찍기 위해 사는지 모른다
삶이 온갖 잔가지를 뻗어
돌아갈 곳마저 배신했을 때
가슴 깊은 곳에서 꿈틀대는 건
작은 마침표 하나다
그렇지, 마침표 하나면 되는데
지금껏 무얼 바라고 주저앉고
또 울었을까
소멸이 아니라
소멸마저 태우는 마침표 하나
비문도 미문도
결국 한 번은 찍어야 할 마지막이 있는 것,
다음 문장은 그 뜨거운 심연부터다
아무리 비루한 삶에게도
마침표 하나,
이것만은 빛나는 희망이다
어떤 시인이 그러더라
사랑이란
가늠하는 것이 아니라 빠지는 것이라고
빠진다는 것은 발목 하나 쯤 담가 보는 것이 아니라
양 발끝이 바닥에 닿지를 않아서 목숨을 거는 것이라고
사랑은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라고
있지, 나는 너를 그만큼 사랑하진 않은 것 같아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고 그렇게 마음이 아팠는데
내 사랑은 무릎 정도 깊이 밖에 안 됐나 봐
언제든 일어서서 자박자박 걸어 나갈 수 있는 깊이
그러니까 이제 그만 봐주려고
그녀는 그 말과 함께 가방을 집어 들고 일어섰다
그녀가 걷는 걸음걸이마다, 물이 뚝뚝 떨어졌다
권미선 저 '아주, 조금 울었다' 중에서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 도종환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몇 길은 거쳐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가지 온 것이다
한번쯤은 꼭 다시 걸어보고픈 길도 있고
아직도 해거름마다 따라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길도 있다
그 길 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으면서도
내가 걷는 이 길 나서는 새벽이면 남모르게 외롭고
돌아오는 길마다 말하지 않은 쓸쓸한 그늘 짙게 있지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 길이 내 앞에 운명처럼 파여 있는 길이라면
더욱 가슴 아리고 그것이 내 발길이 데려온 것이라면
발등을 찍고 싶을 때 있지만
내 앞에 있던 모든 길들이 나를 지나
지금 내 속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엔 안개 무더기로 내려 길을 뭉텅 자르더니
저녁엔 헤쳐온 길 가득 나를 혼자 버려둔다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Timing(타이밍)
일과 사랑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그래서 타이밍이 중요하다.
때로는 동시에 찾아 오기도 한다.
그래서 당황하게 만들때도 있다.
생각해보면 타이밍은 시간이 아니었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였다
- ‘나이먹는 그림책’(저자 탁소) 중에서
가난한 사랑의 노래
-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잠시 후의 나를 위하여
김혜순 시인
내가 왼손에 담배를 들고
오른손으로 라이터를 켤 때는
기저귀 찬 갓난아기인 내가, 흰 칼라를
달고 선 소녀인 내가, 하이힐을 신고
기우뚱거리는 처녀인 내가, 오늘 밤
너와 욕설로 술 마시는 내가, 잠시 전
의 내가, 모든 사람인 내가, 수만 개의
내가 왼손으로 담배를 들고
오른손으로 라이터를 켜는 것입니다
잠시 후 내가 두 콧구멍에서 연기를 내뿜을 때도
수만 개의 콧구멍들이 두 줄기
흰 연기를 내보내는 것입니다
다시 내가 손가락 사이에 술잔을 끼우고
벌려진 입 속으로 술을 부으면
수만 개의 손가락 사이에 술잔이 끼워지고
수만 개의 벌려진 입이 술을 마시며
수만 개의 염통이 아앗 취한다!
그 중에서도 기저귀 찬 갓난아기인 나와 잠시 후에 나의 아가에게 기저귀 채울 내가 가장 큰 목소리로
아앗 취한다!
그런 잠시 후 네가 내 뺨을 정신 차렷! 처얼썩 갈기며 일어서면
수천 수만 개의 내가, 내가내가내가내가내가
벌떡 일어나서
그 중에서도 서른 살 넘은 내가 가장 늦게 일어서서
수만 개의 입술을 벌려
수만 개의 파장을 울려
한 살짜리 고사리 같은 손가락을 곧추세워
두 살짜리, 세 살 짜리, 네 살짜리
점점 길어지고 낡아지는 손가락을 곧추세워
그 손가락에다 반지까지 끼운 손가락을 곧추세워
오직 하나인 나를 가리키며
돼지 멱 따는 목소리로
나는 나란 말이야!
─ 『어느 별의 지옥』, 문학동네
슬픔이 기쁨에게
정호승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 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즐거운 편지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대접
- 안도현
내가 아는 한 선배는 술에 취하면,
야, 내가 전방에서 밥풀때기 두 개 붙이고 소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을 적에 말이야, 우리 소대에 애새끼를 둘이나 든 나이 든 사병이 하나 있었거든 전라도 해남이 고향인 놈이었는디 좆도, 불알 두 쪽밖에 없는 놈이 어쩌자고 지 식구들을 강원도까지 끌고 와서 부대 바로 앞에 셋방을 얻어 살게 했어야 짬밥 퍼먹으면서 저도 얼마나 식구들이 보고 싶었겄냐, 내 참, 물어보나마나지 아닌게아니라 사내자식이 눈물은 많아가지고 외출 나갔다가 사나흘 쯤 지나면 새끼들이 보고 싶다고 내 앞에서 소대장님, 소대장님, 하면서 찔찔 짜는 게 하루이틑이 아녔지 내가 어쩌겄냐, 이 눈치 저 눈치 봐가면서 바깥출입 할 수 있도록 자주 편의를 봐줬다는 거 아냐 쓰발, 지놈이야 한번 나갔다가 지 각시 배를 몇번이나 타고 오는지 모르지만 나는 뭐냐, 그때가 스물여덟 새파란 나이 아녔냐, 나는 어쨌겠냐고 말이야, 여하튼 그놈이 하루는 지네 집에 한번만 다녀가달라고 통사정을 하는 거야, 그래 할 수 없이 저녁때가 다 되어서 그놈하고 같이 그놈 식구들 사는 단칸방엘 갔는데 야, 말도 마라 말이 집이지 시멘트 벽돌 몇장 쌓고 슬레트 몇장 얹어놓은 그 시답잖은 집에 컴컴한 굴 같은 방에 그놈 식구들이 오소리같이 살다라니깐, 백 촉도 아니고 육십 촉도 아니고 전기세 아낀다고 삼십촉 알전구 달랑 하나 켜놓은 방구석에 들어섰더니 웬걸 근사하게 밥상이 차려져 있더라 집에서 닭 두마리를 키우는디 날 위해서 그중 한 마리 모가지를 콱 비틀었다는 거야 야, 그 새끼 궁상떨던 것 머릿속에서 다 사그라지고 그때는 감동이 혀끝으로 스윽 밀려오데, 앉자마자 소주 몇잔 주고받았지 목구멍에서 똥구멍까지 단번에 찌릿찌릿 기분이 끝내주더구먼, 그런디 그놈하고 머리통 굵은 그 놈 새끼 둘하고 그놈 각시하고 다섯이서 닭 한 마릴 앞에 놓았으니 숟가락이 냄비 바닥 긁는 소리 나는 건 시간 문제지 안그랬겠냐, 애새끼들은 고기, 고기 더 달라고 자꾸 보채는디 그놈 각시가 건더기 하나를 내 앞에다 터억 떠맡기듯 집어주는 거야 그게 뭐였는지 알아, 썰지도 않은 닭똥집이었다는 거 아냐, 사양해도 안 통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억지로 그걸 입에 우겨넣었지 뭐냐 야, 그런데 그 닭똥집 환장하겠더라, 칼로 갈라서 모래를 털어내야 한다는 걸 몰랐나봐, 씹을수록 좁쌀인지 모래인지 버석거리고 입안에 닭똥 냄새가 고이는디 나 정말 미치겠더라 그렇다고 대접받는 처지에 뱉을 수도 없고 먹자니 속이 메슥거리고 나 원 참, 그래도 어쩌겠냐 그걸 우물우물 씹다가는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겉으로는 겁나게 느긋한 표정을 지으면서, 꿀꺽 삼켜버렸지 뭐냐, 나 그날 대접 한번 징그럽게 받았지야, 그게 70년대 중반이었다야,
하면서 오래된 소대장 시절 이야기를 몇차례나 늘어놓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