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위한 서시(序詩)
-김춘수
나는 시방 위험(危險)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未知)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存在)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無名)의 어둠에
추억(追憶)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 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新婦)여,
<꽃의 소묘(素描), 백자사, 1959>
바람의 냄새
윤의섭
이 바람의 냄새를 맡아 봐라
어느 성소를 지나오며 품었던 곰팡내와
오랜 세월 거듭 부활하며 얻은 무덤 냄새를
달콤한 장미 향에서 누군가 마지막 숨에 머금었던 아직 따뜻한 미련까지
바람에게선 사라져 간 냄새도 있다
막다른 골목을 돌아서다 미처 챙기지 못한 그녀의 머리 내음
숲을 빠져 나오다 문득 햇살에 잘려 나간 벤치의 추억
연붉은 노을 휩싸인 저녁
내 옆에 앉아 함께 먼 산을 바라보며 말없이 어깨를 안아주던 바람이
망각의 강에 침몰해 있던 깨진 냄새 한 조각을 끄집어낸다
이게 무언지 알겠냐는 듯이
바람이 안고 다니던 멸망한 도시의 축축한 정원과
꽃잎처럼 수없이 박혀 있는, 이제는 다른 세상에 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전혀 가 본 적 없는 마을에서 피어나는 밥 짓는 냄새가
그런 알지도 못하는 기억들이 문득문득 떠오를 때에도
도무지 이 바람이 전해 준 한 조각 내음의 발원지를 알 수 없다
먼 혹성에 천년 전 피었던 풀꽃 향이거나
다 잊은 줄 알았던 누군가의 살내거나
길을 나서는 바람의 뒷자락에선 말라붙은 낙엽 냄새가 흩날렸고
겨울이 시작되었다 이제 봄이 오기 전까지
저 바람은 빙벽 속에 자신만의 제국을 묻은 채 다시 죽을 것이다
사랑의 물리학
김인욱
질량의 크기는 부피와 비례하지 않는다.
제비꽃같이 조그마한 그 계집애가
꽃잎같이 하늘거리는 그 계집애가
지구보다 더 큰 질량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순간, 나는
뉴턴의 사과처럼
사정 없이 그녀에게 굴러 떨어졌다
쿵 소리를 내며, 쿵쿵 소리를 내며
심장이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 운동을 계속하였다
첫사랑이었다.
펭귄 연인
정끝별
팔이 없어 껴안을 수 없어
다리가 짧아 도망갈 수도 없어
배도 입술도 너무 불러
너에게 깃들 수도 없어
앉지도 눕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 껴안고 서 있는
여름 펭귄 한 쌍
밀어내며 끌어안은 채
오랜 세월 그렇게
서로를 녹이며
서로가 녹아내리며
-정끝별 시집 <은는이가>(문학동네, 2014)
진정한 여행
나짐 히크메트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쓰여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너무 아픈 사랑
류근
동백장 모텔에서 나와 뼈다귀 해장국집에서
소주잔에 낀 기름때 경건히 닦고 있는 내게
여자가 결심한 듯 말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
라는 말 알아요? 그 유행가 가사
이제 믿기로 했어요
믿는 자에게 기쁨이 있고 천국이 있을 테지만
여자여, 너무 아픈 사랑도 세상에는 없고
사랑이 아닌 사랑도 세상에는 없는 것
다만 사랑만이 제 힘으로 사랑을 살아내는 것이어서
사랑에 어찌 앞뒤로 집을 지을 세간이 있겠느냐
택시비 받아 집에 오면서
결별의 은유로 유행가 가사나 단속 스티커처럼 붙여오면서
차창에 기대 나는 느릿느릿 혼자 중얼거렸다
그 유행가 가사,
먼 전생에 내가 쓴 유서였다는 걸 너는 모른다
- 시집『상처적 체질』(문학과지성사, 2010)
밥그릇
정호승
개가 밥을 다 먹고
빈 밥그릇을 핥고 또 핥는다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몇 번 핥다가 그만둘까 싶었으나
혓바닥으로 씩씩하게 조금도 지치지 않고
수백 번은 더 핥는다
나는 언제 저토록 열심히
내 밥그릇을 핥아보았나
밥그릇의 밑바닥까지 먹어보았나
개는 내가 먹다 남긴 밥을
언제나 싫어하는 기색 없이 다 먹었으나
나는 언제 개가 먹다 남긴 밥을
맛있게 먹어보았나
개가 핥던 밥그릇을 나도 핥는다
그릇에도 맛이 있다
햇살과 바람이 깊게 스민
그릇의 밑바닥이 가장 맛있다
새 벽밥
- 김승희
새벽에 너무 어두워
밥솥을 열어 봅니다
하얀 별들이 밥이 되어
으스러져라 껴안고 있습니다
별이 쌀이 될 때까지
쌀이 밥이 될 때까지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사랑이 무르익고 있습니다
사모
-조지훈
사랑을 다해 사랑하였노라고
정작 할 말이 남아 있음을 알았을 때
당신은 이미 남의 사랑이 되어 있었다
불러야 할 뜨거운 노래를 가슴으로 죽이며
당신은 멀리로 잃어지고 있었다
하마 곱살스런 눈웃음이 사라지기 전
두고두고 아름다운 여인으로만 잊어달라지만
남자에게 있어 여자란 기쁨 아니면 슬픔
다섯 손가락 끝을 잘라 핏물 오선 그어
혼자라도 외롭지 않은 밤에 울어 보리라
울다가 지쳐 멍든 눈흘김으로
미워서 미워지도록 사랑하리라
한 잔은 떠나버린 너를 위하여
또 한 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를 위하여
그리고 한 잔은 너와의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마지막 한 잔은 미리 알고 정하신
하나님을 위하여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쉽게 사람을 포기했을 때 그랬을 때......
데미지는 오히려 자신에게 온다는 걸
회환과 한탄이 뒤섞여 스스로를 괴롭힌다는 걸
누군 가를 포기하고자 한다면
미련이 남지 않을 만큼 최선을 다 해야 한다.
그래야 선택에 책임을 질 수 있고 자신을 괴롭히지 않게 된다.
- 미생 두번째 시즌(41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