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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설 대장정
오랫만에 재미있는 소설을 읽었다. 이 책(다섯권짜리다)을 헌책방에서 발견했을 때, 망설임없이 구입한 것은 출판사 이름 때문이었다. 중국공산당 홍군의 대장정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지식이 있었으므로 내심 대단할 것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며칠 전 이 책을 처음 읽기 시작하면서 내가 가졌던 선입견이 잘못이었음을 깨달았다.
이 소설은 읽기 시작하면 중간에 책을 덮기 어려울 정도로 재미있다. 중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홍군의 대장정이고, 그 결과가 이미 알려져 있어 흥미가 반감될 것으로 예상할 수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물론 이 소설을 쓴 작가 웨이웨이는 중국 인민을 대상으로 창작을 했으므로 인민들이 '대장정'에 대한 기본 상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즉, '대장정'에 아무런 지식이 없는 사람은 이 소설이 그다지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이 소설을 읽기 전에 '대장정'에 관한 약간의 상식을 알아두면 좋겠다. ('대장정'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도 소설 자체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이 소설은 역사적 사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은 거의 모두 실존 인물들이다. 작가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대장정'의 실제 코스를 세 번이나 답사를 했다고 한다. 거리만으로도 무려 1만2천km나 되는 엄청난 거리이며, 그 길이 하나같이 험난하고 척박한 땅을 지나가고 있어서 그냥 지나가는 길이라고 해도 힘든 길이었는데, 당시 홍군은 최악의 상황에서 목숨을 내놓고 그 길을 지나갔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결코 평온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중국 남부에 자치정부인 소비에트를 구축할 정도로 세력을 키웠지만 반공을 기치로 내세운 최대 군벌 장제스(장개석)에 의해 공격을 받아 쫓기게 된다. 당 지도부는 궤멸 직전의 당을 이끌고 남부 내륙에서 북쪽 연안까지 탈출을 하는데, 이 과정이 바로 '중국공산당 노농홍군 대장정'이다. 장제스는 중국공산당과의 내전에서 초기 공산당원의 약 80%를 학살했다. 장제스를 비롯한 중국 군벌들은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의 군사조직이었으며, 중국공산당은 중국 전체 인민의 약 90%를 차지하는 농민과 노동자를 위한 정치조직이었다.
이 소설은 '대장정'의 과정인 약 1년(368일)간의 시간을 압축했으며 거리는 약 1만km에 이르는 공간을 그렸다. 중국공산당의 상징 인물들인 마오쩌둥(모택동)은 물론이고 저우언라이(주은래), 주더(주덕), 펑더화이(팽덕회), 덩샤오핑(등소평), 린뱌오(임표) 등 공산당 지도자들이 등장하고, 홍군의 중간 간부들은 물론 일반 병사까지 고르게 등장한다.
중국공산당은 혁명집단으로, 노동자와 농민, 소수민족의 정치적 해방을 위한 투쟁을 하고 있으므로 이들이 보여주는 태도는 모든 인민의 모범이 된다. 공산당 최고 지도자인 마오쩌둥이 나이 어린 병사를 대하는 태도는 극진하다. 홍군에서 일방적 명령은 있을 수 없다. 모두가 동등한 동지로서 단지 직위에 따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데, 기본은 인간에 대한 존중과 존경이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역사에서도 '동학'이 보여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과 매우 비슷하다. '동학'도 서양의 침략에 맞서 힘없는 백성들이 뭉쳐 새로운 세상(개벽)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현실에서는 실패했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은 대장정을 통해 약 8만 명의 홍군이 목적지인 연안에 도착했을 때는 90%의 병력을 잃고 불과 7천명만이 남게 되었지만 이 병력으로 마침내 10년의 투쟁 끝에 중국 전체를 해방하는 혁명을 성공하게 된다.
작가는 '성공한 역사'인 '대장정'을 그리면서 크나큰 자부심과 자긍심을 보여주고 있다. 조금 삐딱하게 본다면 중국공산당을 미화한다고 하겠지만, 나는 이 소설이 '대장정'을 미화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이 당시의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혁명에 관한 열정에 불타고 있었고, 인민의 해방을 위한 모범을 보이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마오쩌둥을 비롯한 지도자들이 보여주는 고결한 품성은 마르크스-레닌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인간해방의 이론이 혁명의 과정에서 실천적으로 드러날 때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지를 상징하고 있다.
알려진 것처럼 '대장정' 과정에서 홍군은 90%의 병사들이 낙오하거나 국민당군에 포로로 잡히거나 길 위에서 죽어갔다. 전투로 죽은 병사들이 가장 많지만 포로로 잡혀서 죽은 병사들도 몇 만 명에 이른다. 이들은 중국의 혁명 과정에서 이름 없이 스러져간 진정한 영웅들이다. 마오쩌둥도 대장정을 마치고 대장정 과정에서 죽은 모든 홍군 병사들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라고 말했다.
이 소설이 대단한 것은, 소설만큼이나 훌륭한 그림이 거의 매 페이지마다 있다는 것이다. 그림은 션야오이가 그렸는데, 한컷 한컷에 온 정성을 들여 그 자체로 작품이다. 그림은 아름답고 선명하게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어서, 소설만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실제 인물과 똑같이 닮은 얼굴이어서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홍군의 '대장정'은 중국의 최고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삼국지'에 견줄 수 있다. 실제 소설에서도 등장인물들은 자신들의 대장정을 삼국지와 비교하기도 한다. 중국의 역사에서 '삼국지'는 단지 소설이 아니라, 살아 있는 교훈이기도 하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중국인의 저력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중국을 낮춰보고 때로 비하하기도 하지만, 중국공산당은 소수의 인원이 결집해 농민과 노동자 속으로 들어가 결국 혁명에 성공한 뛰어난 힘을 가진 나라이고, 저력이 있는 나라다. 이제는 정치체제는 공산주의, 경제체제는 자본주의라는 조금은 이상한 형태의 나라로 변했지만, 그들이 현대사에서 보여 준 혁명의 과정은 여전히 빛바래지 않고 있다.
"상영이. 나는 니가 이렇게 될 거라고 항상 생각해왔다.
고등학교 때부터, 쭉."
현재였던 과거를 공유하는 대상으로서의 친구 이야기.
나를 공유하고 나를 구성하고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내 삶에 주는 행복.
모임에서 우리들은 책을 읽은 감상과 서로의 생각들을 즐겁게 나누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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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을 만드는 데 인생을 건 사전바보들의 이야기. 단어를 적절하게 정의하는 것의 어려움부터, 단순히 뜻을 찾고 풀이하는 수단으로서의 사전을 넘어 말을 통해 마음을 전하고, 때로는 용기를 얻거나 잃기도 하는 매개로서 사전의 무게감, 또 그 무게감에 인생을 건 사람들의 이야기를 즐겁게 읽어나갔다. 다만 결말 부분은 감동을 자아내기 위해 조금 작위적인 상황을 만들어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다. 미우라 시온의 다른 작품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도 그렇고, 이 작가는 우직하게 한 길을 파고드는 장인 캐릭터를 좋아하는 것 같다. 물론 나도 그렇다.
서울에 폭설이 쏟아진 날 낮에 라디오 독서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역시 신간 에세이를 홍보하는 자리였다. 10년 전에 첫 출연했던 프로그램인데 진행자도 담당 방송작가도 모두 그대로였다. 그 10년 사이에도 여러 번 출연해서, 이제는 만나는 것이 제법 반갑고 편안했다. 녹음하면서도 그 얘기를 했다.
공중파 방송사 두 곳에서 라디오 독서 프로그램 진행자 제안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두 제안 모두 거절했었다. 집필에 집중하겠다는 이유에서였는데 이후로 소설을 열심히 썼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그 제안들 거절하지 말 걸. 매일 진행하는 프로그램은 몰라도 일주일에 한 번 진행하는 프로그램은 무척 아쉽다.
방송국에 가는 데 한 시간이 넘게 걸리고 오는 데에도 한 시간이 넘게 걸렸는데 정작 녹음 시간은 30분이 채 되지 않았다. 가는 길에 전화 영어 수업을 했다. 나는 영자신문을 읽고 그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수업에 등록했다. 이날 기사는 세계 최고령 노인인 일본의 어느 할머니가 117세 생일을 맞았다는 내용이었다. 몇 살까지 살고 싶으냐고 묻기에 “영원히 살고 싶다”고 대답했더니 강사가 당황해했다.
점심을 걸렀기 때문에 집에 돌아왔을 때에는 배가 무척 고팠다. 에어프라이어용 치킨 텐더스트립을 조리하고, 처가에서 보내준 가래떡과 캐슈넛을 저녁으로 먹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밤에 술집에 가지 못하게 되면서 에어프라이어를 샀는데 대만족이다. 술집에서 나오는 것보다 더 맛있게 안주들을 만들 수 있다. 거실 분위기도 어지간한 가게 못지않다 보니 사회적 거리두기가 끝나도 술집에 가지 않을 것 같다.
물론 맥주도 꺼냈다. 보틀숍에서 사 온 ‘루포닉 디스토션: IPA 시리즈 No.016’이라는 병맥주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수제 맥주 회사인 파이어스톤 워커의 컨셉 양조 제품이다.
이 회사는 여러 가지 홉을 섞어서 다양한 향을 내는 인디아 페일 에일을 만들어 분기에 한 종류씩 한정 판매하는데, 그 16번째 제품이다. 이번에는 복숭아, 눈깔사탕, 용과(龍果) 향을 내봤다고 한다. 첨가제 없이 오로지 홉만으로 그런 향을 냈다는 게 파이어스톤 워커의 자랑이다.
거실에서 그렇게 맥주를 마시고 닭가슴살 튀김을 먹고 있는데 창밖 먼 곳이 뿌옇게 보였다. “지금 눈이 오는 거야?” HJ가 물었고 나는 유리에 김이 서린 것 아니냐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는 사이에 바깥 풍경은 점점 희뿌예져갔다. “눈이네! 눈이다!” 우리는 몇 분 뒤에 함께 소리쳤다. 폭설을 머금은 구름이 남쪽에서부터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HJ나 나나 눈이 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깜짝 놀랐다. “오늘 눈 온다고 했었어? 기상청이 예보했었어?” 우리가 흥분해서 지켜보는 사이에 눈발은 점점 강해져 마침내 앞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200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길 건너 건물의 윤곽이 보이지 않았고, 건물 꼭대기의 네온사인만 유령처럼 둥둥 떠 있었다.
탄수화물 덩어리인 가래떡을 안주로 잔뜩 먹어서인지 평소보다 식곤증이 심하게 밀려왔고 나는 침대에 가서 눈을 붙였다. 30분쯤 자고 일어났더니 HJ가 밖에 나가 눈 구경을 하자고 했다. 집 앞 놀이터에 아이들이 나와서 놀고 있다며.
“그럴까?” 나는 망설이다가 그러기로 했다. 가장 두꺼운 내복을 찾아 입고, 가장 두꺼운 점퍼 아래 두툼한 셔츠와 스웨터를 걸치고, 가장 두꺼운 비니 모자를 썼다. HJ도 발목까지 내려오는 롱 패딩을 입고 귀 모양 장식이 달린 귀여운 털모자를 썼다. 하도 옷을 껴 입어 걷기 힘들 정도라고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밖을 나가니 이미 제법 눈이 쌓여 있었다. 하늘이 하얬고, 가로수에는 눈꽃이 가득 피어 있었다. 처음에는 집 바로 앞에 있는 놀이터까지만 갈까, 아니면 그보다 조금 멀리에 있는 공터―동네 흡연자들이 주로 찾는―까지 갈까 했는데 기왕 나온 김에 좀 더 걸어보기로 했다. 500미터쯤 떨어진 공원까지 걸어가서 풍경을 감상하고 오기로.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며 한 발 한 발 천천히 아장아장 걸었다. 자동차들도 엉금엉금 다녔다. 대단치도 않은 경사를 차들이 오르지 못하고 바퀴가 헛돌았다. 내려서 승용차 뒤를 미는 승객들도 곳곳에 보였다. 이런 큰 눈이 몇 년 만인지. 그리고 사람들은 어른이나 아이나 할 것 없이 왜 눈이 오면 다들 마음이 들뜨는 건지.
공원에 가보니 산책을 하러 나온 사람들이 꽤 많았다. 썰매를 가지고 나온 가족도 있었다. 그런데 젊은 어머니가 썰매를 타고 어린 딸이 그걸 끌었다. 개와 함께 걷는 사람들도 있었다. 신이 난 개도 있었고, 눈을 보는 게 처음인지 어리둥절한 듯한 개도 있었다. 어떤 개 한 마리는 내게 달려들어 발을 내 허벅지에 올리고 갔다.
산책로는 무척 아름다웠다. 우리는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발자국이 찍히지 않은 바닥에서 HJ가 영화 《러브 스토리》의 한 장면처럼 누워 보겠다고 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포기했다. 폭이 좁은 길에서 나는 HJ를 앞장세웠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경치를 보고 새 눈을 밟으라는 뜻에서였다. 그렇게 걷던 HJ가 “이렇게 걸으니 기분이 정말 이상해”라며 나와 자리를 바꾸었다. 뺨과 마스크 사이에서 입김이 올라와 안경이 자꾸 흐려졌다.
의외로 춥지는 않았다. 눈은 그 사이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내렸다. “홋카이도가 바로 여기네.” 그 말을 HJ가 몇 번이나 했다. “이런 게 인생이야. 이런 걸 많이 봐야지.” 나는 그런 말을 여러 번 했다. 나는 HJ에게 데리고 나와서 고맙다고 했다. 문득 로맨틱한 기분이 들어 뽀뽀를 해 달라고 했더니 HJ는 마스크를 쓴 채로 내게 입을 맞추었다. 이걸 ‘코로나 뽀뽀’라고 한단다.
흔치 않아 기쁜 것들
음미하며 기꺼이 즐기겠습니다
욕심 부리지 않고
돌아오는 길에 보니 자동차 운전자들은 길에 갇혀 패닉 상태에 이른 것 같았다. 제설 작업은 전혀 진행되지 않았다. 어떤 운전자는 보도에 승용차를 주차하고 그냥 가버렸다. 버스 안에 있는 승객들은 넋 나간 표정들이었다. 내려서 카페에 갈 수도 없을 텐데. 설마 이런 날에도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킨다고 밤에는 대중교통을 축소 운영하나?
흡연자들의 공터에서 한 사내가 열심히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다. 아파트 앞에는 이미 누군가 3단 눈사람을 세워 놨다. HJ는 집에 돌아와서 그녀가 다니는 독서동호회 사람들이 단체대화방에 올린 설경 사진들을 보여줬다. 우리가 찍은 사진에는 턱없이 못 미치는 풍경들이었다. 우리 동네가 최고였다.
매년 부천판타스틱영화제를 보러 가는 친구가 있다. 올 해는 그 친구 덕분에 나도 처음으로 영화제 상영작을 보게 되었다. 최면을 소재로 한 영화. 울트라사운드. 나쁘지 않았다. 중간중간 약간 갸우뚱하는 포인트가 있었지만 그래도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는 영화였다.
여러가지 설정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사람마다 최면에 대한 감수성이 다르고, 최면에 특히 약한 사람을 고르는 장면이었다.
나는 최면에 대한 감수성이 높은 사람이다. 어찌 아냐고 물으신다면, 물론 걸려보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5학년때 담임 김소주선생(가명)은 학생들을 데리고 최면 연습을 했다. 어디서 배워왔는지는 모르지만 수업시간에도 하고 방과 후 ‘산수’경시대회 준비반을 지도할 때도 최면을 걸었다. 몇 번 교실에서 최면을 당했지만 ‘팔이 무겁다. 나도 모르게 떨어진다’ 등등 시시한 느낌만 있었다.
산수경시대회 당일 김소주선생 인솔하에 나를 포함한 학년대표 세명은 군청소재지에 있는 국민학교엘 갔다. 고사장에 들어가기 전 스탠드에 앉아서 김소주선생은 우리들에게 최면을 걸었다. 최면이라고 해 봐야 교실에서 하던 것 처럼 본격적으로 한 것도 아니고 ‘문제가 쉽다. 정말 쉽다’ 이런걸 몇 번 얘기해 주었던 것 같다.
문제가 정말 쉬웠다. 경시대회 문제가 이렇게 쉬워도 되는가 싶을 정도로 쉬웠다. 스무문제 중 열아홉문제는 너무 쉬워서 후딱 풀었고, 한 문제만 약간 어려운 듯 해서 고민해서 풀었다. 그 한문제가 아쉬워서 선생님께 물어보려고 수험표에 문제를 적어 나왔다.
결과는 30점. 같이갔던 친구녀석이 35점, 또 다른 친구만 45점으로 우수상을 탔다. 우수상을 탄 친구에게 물어보니 문제가 정말 어려웠다고 했다. 확실히 여자가 철이 빨리 드는 것인지, 우수상을 탄 친구는 김소주선생이 최면을 걸 때 ‘뭐하는 짓이야… 유치하게…’ 라는 생각을 했고 문제가 하나도 쉽지 않았다고 한다.
최면에 잘 걸리는 나… 를 다시 생각하게 한 영화. 울트라사운드.
권유지수: 별 세개(다섯개 만점)
어딘가의 블로그에서 누가 언급한 것을 보고 인터넷서점에서 바로 주문해서 읽은 책.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의 예고편 같은 느낌. 이 책의 내용을 좀 더 다듬고, 추가해서 직업으로서의 소설가가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도 너무 좋았다. 늙어가는 육체를 달래가며 운동하는 느낌이 잘 전달되었다.
실제 그리스에서 마라톤까지 달린 에피소드와 100km 를 달리는 울트라마라톤을 한 직후의 기록이 가장 재미있었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끊은 지 1년여가 지났고 처음으로 인터넷에 쓰는 글이 책에 관한 것이라서 그뭄이라는 플랫폼이 있음에 감사한다.
권유지수: 별 셋 (다섯 개 만점)
나도 너희들처럼 돼지 새끼를 대놓고 미워할 수 있으면 좋겠어. 하지만 난 그럴 수가 없어… 내가 그 애 엄마니까
『우울할 땐 뇌과학』도 조언하는 내용은 다른 책들과 같았다. 그러나 신경생리학적인 근거를 붙여 놓으니 더 믿음이 갔다.
몇 번이고 강조하는 것은 운동이었다. 다음은 춤이었고, 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래를 부르는 일도 추천했다. 자주 웃는 것, 박수를 치는 것, “나는 행복하다”고 혼잣말하기, 감사한 마음 갖기도 권장사항이었다.
운동은 꾸준히 해야겠다고 새삼 다짐했고, 자주 미소를 짓고 “나는 행복하다, 운이 좋다!”며 손뼉도 치기로 했다. 틈틈이 흥얼거릴 수 있는 노래도 가사가 쉬우면서도 심오한 곡으로 한 곡 외웠다. 그런데 춤추는 것만큼은 하겠다고 쉽게 결심할 수 없었다. 워낙 몸치라서.
그래서 대신 악기를 배워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0년 가까이 연습은 하지 않고 곁에 두기만 했던 색소폰 말고, 막연히 동경하기만 했던 기타를 배워볼까? 기타 학원이 근처에 있나? 기타 레슨비는 얼마나 할까?
찾아보니 집 근처에 걸어서 갈 만한 음악 학원이 세 곳 있었다. 기타 레슨비를 검색해보니 견적을 내준다는 사이트가 나왔다. 악보를 읽을 줄 아느냐, 레슨은 집에서 받고 싶으냐 강사가 있는 곳으로 와서 받을 수 있느냐 같은 질문이 나왔다. 내 연령대와 희망하는 강사의 성별을 묻는 질문도 있었다.
질문들에 다 답하고 나자 갑자기 메시지가 오기 시작했다. 우리 집 근처에 사는 기타 강사들의 연락이었다. 나는 기타를 배울지 말지 아직 결심을 내리지 않은 상태였고 그냥 단순히 강습비가 궁금했던 건데, 내가 정보들을 입력한 사이트는 실제로 강사와 학생을 연결해주는 곳이었다. 어쩐지 처음에 이메일 주소 같은 걸 묻더라니.
메시지에 답하는 동안 ‘이렇게 된 김에 정말 기타를 배워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초에 걸맞은 결심이기도 하고 말이다. 집에 통기타가 한 대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HJ가 치던 물건이다. 미처 몰랐는데, 우리 집에는 일렉트릭 기타도 한 대 있었다. 내가 기타를 배워보겠다고 말하니 HJ가 집에 기타가 두 대 있다고, 한 대는 통기타이고 또 한 대는 일렉이라고 말해주었다.
집 근처 강사를 연결해주는 사이트에서는 기타 연주자 6명을 소개 받았다. 모두 자기 스튜디오에서 악기를 가르친다고 했는데, 걸어서 갈 수는 없는 거리였다. 연휴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학원에도 문의를 해보기로 했다. 사회적 거리두기 기간에 학원 영업을 하는지도 궁금했다.
집 근처 기타 학원 중 가장 가까운 곳은 무한리필 소고기 식당 근처에 있다고 인터넷 지도에 나왔다. 가깝기도 하고, 기타 전문에 규모도 가장 커 보여서 제일 마음이 갔다. 다른 학원 두 곳은 웹사이트나 블로그도 없었고, 지도에 나온 사진만 보면 다 꾀죄죄한 낡은 건물에 작고 볼품없는 간판이 걸려 있는 게 다였다.
그러나 가장 번듯해보였던 무한리필 소고기 식당 근처 학원은 식당에 가는 길에 확인해 보니 이미 문을 닫고 간판도 내린 상태였다. 다음날인 4일 오전에 전화도 걸어 봤지만 받지 않았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이기지 못한 것이었다.
꾀죄죄한 두 학원은 전화를 받았다. 응대하는 목소리에서 간절함이 느껴져서 가슴이 아플 정도였다. 두 곳 중 집에 더 가까운 곳이 레슨비도 더 쌌다. 강습비와 연회비를 따로 말하는 꼼수를 부리기는 했지만. 그곳에 다니기로 했다. 마침 코로나 바이러스로 중단됐던 학원 영업도 1월 4일부터 소규모 강습에 한해 허용됐다고 했다.
강사가 학원에 오는 날이 목요일 저녁과 토요일 오후라고 했는데, 나는 1월 첫 목요일과 토요일 그 시각에는 모두 일정이 있었다. 그래서 둘째 주부터 하겠다고 얘기했더니 학원에서는 다급하게 다른 요일도 괜찮다며, 내가 편한 시간에 맞춰 강사를 올 수 있는지 알아보겠다고 했다. 한시라도 빨리 학생을 붙잡고 싶은 모양이었다.
통화를 몇 통 더 하다가 일단 첫 수업은 바로 다음날인 화요일 저녁에 하고, 그 다음 수업일은 강사와 내가 만나서 정하기로 했다. 전화영어도 신청했다. 오후에 한강진역에 있는 서점에서 동영상 촬영이 있어서 전화영어 수업도 다음날부터 하기로 했다. 집중력이 떨어지는 오후 시간대에 기타 연습을 하거나 영어 공부를 한다는 계획이었다.
서점 동영상 촬영은 독자와의 만남 대신 하는 신간 홍보 행사였다. 한강진역까지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한 시간, 촬영에 한 시간, 돌아오는데 한 시간이 걸렸다. 텅 빈 서점에 MD와 촬영 담당자 두 사람, 출판사 마케터 한 사람, 그리고 나, 그렇게 다섯 사람이 있었다. 출판사에서 준비해 온 질문 10개에 내가 답하는 식으로 진행했다. 그 답들을 궁리하는데 오전을 거의 다 썼다.
촬영을 마치고 서점에서 나오는데 출판사 마케터가 근처에 핫한 수제 도넛 가게가 있다며 같이 가보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마케터 본인이 그 도넛 가게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도넛에는 큰 관심이 없었지만 카페인이 필요해서 그녀를 따라갔다.
과연 서점 바로 아래 골목에 있는 가게였는데, 지나가다 궁금해서 찾아 들어갈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다. 간판도 작았다. 철저히 인터넷 입소문에 의지하는 곳이었다. 인테리어가 ‘우리는 힙스터 전용 가게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큰 창문, 높은 천장, 꾸밈없는 흰 벽, 고풍스러워 보이는 목재 진열대, 포장에 활용한 민화 이미지. 전반적으로 손님들에게 무심하고 시크한 분위기였다.
저녁에 HJ와 함께 가게에서 사 온 도넛을 먹었다. 토핑이 풍성하고 도넛 안에 잼이나 크림이 들어 있다는 점이 특징이었는데, 내 입맛에 썩 맞지는 않았다. HJ와 기타에 대해 이야기했다. HJ는 기타를 띄엄띄엄이기는 했어도 10년 가까이 배웠고, 한때 기타 동호회에도 열심히 나갔다. 그런데 몇 년 전에 완전히 그만뒀다.
“악기와 운동은 참 달라. 내가 매일 2, 3시간씩 수영이나 웨이트트레이닝을 한다면 몇 년 안 되어서 몸짱이 될 거야. 노력한 만큼 고스란히 내게 효용이 돌아오지. 그런데 기타는 몇 년을 그렇게 연습해도 나 혼자 즐겁지 어디 내보일 수준은 못 돼. 이름 없는 밴드의 세컨드 기타 수준이나 되려나. 그런 생각을 하니까 의욕이 사라지더라. 자기는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배우겠다는 거니 상관없겠지만.”
HJ가 말했다. 내가 기타 동호회에 나가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HJ는 조금 놀랐다.
“거기엔 뭐 하러?”
“내가 사람들을 너무 안 만나는 거 아닌가 싶어서. 『우울할 땐 뇌과학』에 보니까 사람들과 어울리라고, 어울릴 사람이 없으면 그냥 사람이 많은 광장 같은 데라도 나가 있으라고 하더라고. 그런데 문학이나 글쓰기처럼 내 본업이랑 관련이 있는 모임에 나가면 은근히 대우에 신경 쓰게 되고 다른 사람이랑 평판 경쟁을 벌이게 되는 게 싫어. 기타나 맥주 모임 같은 데 가면 나는 아무 실력도 없으니까 남이 나를 어떻게 대접하든 상관없을 것 같아.”
“기타 모임도 가보면 사람들끼리 은근히 신경전 벌여. 나이 갖고 그러더라고.”
전날도 적지 않게 술을 마셨기 때문에 참으려 했지만 밤이 되니까 무척 맥주가 마시고 싶어졌다. 결국 냉장고에서 호가든을 한 캔, 버드와이저를 한 캔 꺼내서 마셨다. 정말 맛있었다. 나는 늘 냉장고에 호가든을 한두 캔은 준비해 두려 한다.
누가 인생 맥주를 묻는다면 호가든 아니면 버드와이저라고 답할 것 같다. 언제 만나도 기분 좋고 지루하지 않다. 언제나 믿을 수 있다. 평생 호가든과 버드와이저 외에 다른 맥주는 마시지 말라고 한다면 괴롭겠지만 말이다. 인생 맥주는 아마 그런 뜻으로 묻는 질문이 아닐 터다. 가장 친한 친구를 묻는 질문 같은 것 아닐까?
그러고 보니 내가 좋아하는 호가든과 버드와이저는 둘 다 OB맥주가 국내 생산을 하는구나. 맛있는 맥주니까 많이 팔리고 OEM 생산도 하게 된 거겠지. 기타도 내게 인생 친구가 되어주면 좋겠다. 나는 사람을 잘 사귀지 못하는 인간이라 그런 사물 친구들이 필요하다. 내 쪽에서 들여야 할 정성은 충분히 들일 생각이다.
다용도실에서 기타를 꺼내왔는데, 기타 케이스를 들어 올리려고 하자마자 손잡이가 찢어져 떨어져 나갔다. 나일론 천이 바짝 마른 낙엽처럼 부스러졌다. HJ와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고 새 기타 가방을 인터넷으로 주문했다.
부드럽고 향긋하죠
언제나 믿을 수 있다, 그걸로 좋아요
순위 따윈 매기지 말아요
다음날 저녁에 첫 기타 레슨 수업을 받았다. 손잡이가 찢어진 기타 가방을 안고 학원까지 걸어갔다. 주로 동네 어린이를 대상으로 피아노를 가르치는 곳이었다. 난방을 전혀 하지 않아 발이 시렸다. 이날 학원에 있는 사람은 원장 선생님과 젊은 기타리스트, 그리고 나 셋뿐이었다. 원장과 강사에게 내 이름은 ‘장맥주’라고 알렸다.
기타 강사는 20대로 보이는 얌전한 청년이었다. 아무 거나 물어보라기에 혹시 학생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대학원을 졸업했다고 대답했다. 내 질문에 기분이 상했던 것일까? 젊은이들은 마흔이 넘은 사람의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워하지만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다.
강사는 수업 시간을 내가 편한 요일에 맞추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화요일 저녁으로 정했는데, 학원 원장이 나중에 목요일 저녁으로 바꿔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했다. 강사가 목요일에 다른 레슨 일정이 있으니, 한 번 와서 두 사람을 가르치고 가는 게 그에게 편하지 않겠느냐고. 물론 그러겠다고 했다. 강사의 집이 학원에서 왕복 세 시간쯤 걸리는 거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