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틴 모험소설 풍이었던 전작들과 달리 노예무역, 인종 간 섬멸전, 민간인 학살, 생물학무기, 여성의 경력 단절 문제를 작정하고 다룬다. 멋진 선택과 결말.
전편보다 더 재미있었다. 리엔 짱. 나폴레옹 짱. 슬슬 작가의 테크닉이 눈에 들어온다. 어떤 캐릭터도 절대 이야기 위에 두지 않고, 이야기도 때로는 과감히 건너뛴다.
여전히 재미는 있지만 중국에 대한 묘사는 꽤 아쉽다. 수수께끼와 음모가 둘 다 너무 쉽게 해결돼 허탈. 결말에 꽤나 묵직한 화두를 던지는데 어떻게 이어갈지?
천재적인 아이디어와 엄청난 필력. 용, 역사, 전쟁 중 하나라도 좋아한다면 강추. 어떤 대목에서는 읽는 내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듯했다. 전투 묘사는 제법 하드코어.
아이돌 산업 분석보다는 ‘걸그룹으로 본 알기 쉬운 경제학’에 가까운 쪽. 공동저자 중 글을 맡은 유성운 기자는 소녀시대 팬이기도 하지만 인포그래픽 덕후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선 이중의 덕업일치.
문학 자체를 소재로 삼은 참신하고 기발한 SF. 이야기 생성 방정식이 셰익스피어의 신작을 발표하고, 좀벌레 바이러스가 고전들을 개작하며, 추리소설로 시간여행을 한다.
『빈 서판』의 한국어 번역본은 901쪽인데, 2004년에 출간됐다. 이때만 해도 이 정도 분량이면 상·하 2권으로 나눠서 내는 게 출판계 상식이었다고 한다. 사이언스북스의 노의성 주간은 “분권을 해야 더 비싸게 팔 수 있는데, 쪼갤 수가 없는 책이었다”며 웃었다. 거듭 고민해도 독자가 한 흐름으로 읽을 수 있도록 편집하는 게 옳다는 결론이었다고.
『빈 서판』을 읽은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설명이다. 논지를 빈틈없이 이어가는 저자의 스타일 때문이기도 하지만, 도발의 열기로 가득한 책이라서 그렇기도 하다. 얼음 아래서 활활 타는 한 덩어리 불길 같은 느낌이랄까.
간혹 이 책을 ‘인간의 행동은 유전과 환경 양쪽으로부터 모두 영향을 받는다는 내용’이라고 소개하는 글을 본다. 글쎄? 이 책, 그렇게 얌전하지 않다. 그보다는 ‘유전이 진짜 중요하다니까! 제발 아닌 척 하지 말자!’가 더 제대로 된 요약이다. 몇몇 대목에서 스티븐 핑커는 거의 울분에 찬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 ‘아닌 척’들의 목록에는 이런 것들도 있다. 폭력과 범죄는 모두 잘못된 교육과 환경에서 비롯된다는 믿음, 남녀 차이는 생물학적 특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오로지 사회적으로 형성된다는 주장, 정치적으로 올바른 언어를 써야 한다는 강박……. 어떤가. 꽤나 위험한 책 아닌가.
핑커는 이런 ‘아닌 척’들이 얼마나 비과학적인지 폭로하고, 우리가 선천성이라는 개념을 왜 두려워하는지 분석하는 한편, 그런 선천성을 인정하면서도 계속 추구해야 할 가치와 그 방법에 대해 논한다.
심리학과 인지과학의 세계적 권위자가 너무나 유려하게 펼치는 주장이기에, 어떤 의미에서는 곱절로 위험하다. 일반 교양독자들은 더 정신 바짝 차리고 읽어야 할 물건 아닐까 싶다. 예를 들어 핑커의 비판 대상에는 엘리트 예술이나 포스트모더니즘도 있는데, 진화심리학의 관점에서 현대예술을 살피는 대목이 무척 흥미롭고 때로는 통렬하기도 하다. 그러나 ‘예술은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한 것’이라는 등의 전제에 전적으로 동의하긴 어렵다.
『빈 서판』은 출판사의 걱정과는 달리 국내 발매 석 달 만에 5000부가 팔리며 호응을 얻었다. 살짝 과장을 섞으면 ‘벽돌책 유행’의 선구자요, 개척자였다. 이후 사이언스북스는 마음 놓고 벽돌책을 펴내는 것 같다. 2014년에 나온 스티븐 핑커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한국어 번역본은 1400쪽이 넘어간다.
2016년부터 한 일간지에 ‘장강명의 벽돌책’이라는 문패를 달고 독서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그 코너를 챙겨 보는 독자가 몇이나 될지는 모르겠다. 칼럼 내용이 반향을 일으키거나 화제가 된 적도 없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무척 즐겁게, 보람을 느끼며 작업하고 있다. 마음 속 ‘계속 하고 싶은 일’ 목록 우선순위에서도 상위권에 있다.
신문사로부터 두꺼운 책들을 소개해달라고 구체적인 요청을 받은 건 아니었다. 여러 필자가 돌아가며 독서 칼럼을 토요일자 지면에 싣고 있는데 적당한 주제를 정해 합류해 달라고 제안을 받았다. 잠시 궁리하고는 ‘저는 벽돌책들을 다뤄보겠습니다’라고 답장을 보냈다. 내가 두툼한 책 제법 읽었지, 하는 은근한 자부심도 있었고 그 즈음 들은 ‘벽돌책’이라는 신조어가 재미있다고 느껴서이기도 했다.
이후로 대략 한 달에 한 번 글을 썼는데, 명절이나 연말, 여름 휴가철이면 특집 기사에 밀려 쉬곤 해서 여태껏 소개한 책은 50종이 조금 넘는다. 관련 있는 두 책을 한 회에 소개한 적도 있다. 역사가 피터 왓슨의 『생각의 역사 1』(1240쪽이며 원제는 ‘Ideas’)과 『생각의 역사 2』(1328쪽이며 원제는 ‘Terrible Beauty’)나, 댄 시먼스의 SF 소설 『일리움』(942쪽)과 그 속편 『올림포스』(997쪽)처럼.
연재 초반에 고민했던 문제는 ‘이 책을 다뤄도 될까, 이 정도면 벽돌책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벽돌책이 어디에 규정된 용어도 아니니. 인터넷 검색 결과를 보면 『사피엔스』나 『정의란 무엇인가』를 벽돌책으로 부르는 이들도 있는데, 얇은 책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벽돌에 빗댈 정도인가 싶다. 벽돌책은 좀 더 위압적이어야 할 것 같다.
내가 개인적으로 정한 기준은 700쪽이었다. 조너선 하이트의 『바른 마음』을 무척 인상적으로 읽었는데 국내 번역서 기준 692쪽이라 이 코너에서는 소개할 수 없어 아쉽다. 696쪽인 마크 굿맨의 『누가 우리의 미래를 훔치는가』도 좋은 책인데. 652쪽인 폴 존슨의 『지식인의 두 얼굴』도 안타깝네.
700쪽이 넘는 책들을 1000자 정도로 소개하니, 수박 겉핥기라는 표현도 아까울 지경이다. 아예 원고를 쓸 때도 이게 리뷰라는 생각 자체를 안 한다. 그보다는 ‘이런 책이 있는데 흥미로워 보이지 않습니까? 한번 읽어보세요’ 하는 느낌으로 쓴다. 책 내용을 요약하려고 무리하지도 않는다. 나는 벽돌책의 매력은 저자의 주장이 아니라 그 메시지를 펼치는 과정에 있고, 벽돌책 독서 역시 그 과정을 쫓아가는 게 핵심이라 본다.
벽돌책 칼럼을 쓰면서 그런 매력을 깨달았다. 연재를 시작하고 몇 년이 지나자 전에 읽은 벽돌책 재고가 떨어졌다. 연재를 계속하기 위해서 매달 한 권씩 700쪽이 넘는 책을 새로 집어 들어야 했다. 그 책을 다 읽는 데 걸리는 시간과 벽돌책 칼럼을 쓰고 받는 고료를 비교하면 수지라고는 조금도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게 싫지 않았다. 벽돌책들을 찾아 읽는 게 재미있었다. 다양한 저자가 다양한 분야에 대해 쓴 책들을 분량 외에 특별한 기준 없이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들었는데도 다 읽고 나면 높은 확률로 만족스러웠다. 벽돌책이 아닌 다른 책들을 그렇게 읽었을 때와 비교해 확연히 그 확률이 높았다.
‘이렇게 두꺼운 책을 해치웠다’는 단순한 뿌듯함이 아니었다. 마치 벽돌책이라는 하나의 장르가 따로 있는 듯했다. 벽돌책에는 두껍다는 사실 말고 정말 특별한 점이 있을까? 있다면 그게 뭘까?
처음에 나는 그런 흡족함이 출판사들의 선택과 안목에서 비롯된다고 추측했다. 벽돌책을 만드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 시류에 편승해 후딱 찍어내는 책을 일부러 두껍게 낼 필요는 없을 테지. 그리고 벽돌책들은 대개 제작비는 많이 드는데 판매 가격이 비싸 베스트셀러가 될 가능성이 낮으니 기획 단계에서 고민도 많이 하겠지. 그러다 보면 그 단계에서 자연스럽게 쭉정이들은 걸러지고 ‘이건 꼭 내야 한다’는 확신이나 사명감을 주는 기획안들이 살아남아 책으로 만들어지는 것 아닐까?
그런 면도 있을 것 같다. 여기에 더해 나는 요즘 벽돌책, 혹은 분권을 해 벽돌책이 아니더라도 분량이 긴 책에만 담기는 내용도 있다고 생각한다. 복잡하고 다면적인 진실, 그리고 깊은 사유의 과정이다. 도발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가치는 얇은 책에 담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니 우리는 반드시 대작들을 읽어야 한다(대작들만 읽으라는 얘기는 당연히 아니다).
과학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쾀멘이 쓴 벽돌책 『도도의 노래』(884쪽)에서 소개하는 생물지리학계의 논쟁을 비유로 삼으면 좋을 것 같다. ‘SLOSS’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논쟁이다. 자연보호구역을 크게 하나 만드는 편이 나은가, 작게 여러 개 만드는 편이 나은가(Single Large Or Several Small)?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논쟁이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생물종마다 살아가는데 최소한으로 필요한 생활공간이 있다. 큰 육식동물은 이 생활공간도 크다. 10제곱킬로미터짜리 자연보호구역이 10곳 있다면 곤충류는 무리 없이 잘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활동 반경이 수십 킬로미터에 이르는 곰이 살기에는 좁다. 곰에게 10제곱킬로미터짜리 자연보호구역 10곳과 100제곱킬로미터짜리 자연보호구역 한 곳은 결코 같지 않다.
나는 책의 두께와 내용의 관계도 이와 비슷할 거라고 짐작한다. 실제로 글을 쓰는 입장에서 경험적 근거는 상당히 갖춘 주장이다. 200자 원고지 10매 분량의 칼럼에 담을 수 있는 내용이 있고, 도저히 그럴 수 없는 내용이 있다. 오래 쓰다 보면 대충 견적도 나온다.
어떤 새롭고 복잡한 생각은 최소한의 분량을 요구한다. 설명과 논증의 과정이 길기 때문이다. 내용이 도전적일수록 더 그러하다. 반면 진부하거나 명쾌한 메시지, 비교적 단순한 아이디어, 과정이 생략된 결론, 감상과 감성은 짧은 팸플릿에도 실을 수 있다.
즉 200쪽짜리 책 네 권을 읽는 것과 800쪽짜리 책 한 권을 읽는 것은 같지 않다. 200쪽에 담을 수 없는 사유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800쪽짜리 책 한 권을 완독하는 것과 그걸 요약본으로 읽는 것도 완전히 다른 경험이다. 요약본에는 결론은 있지만 거기까지 이르는 생각의 과정이 없다. 그런데 많은 경우 독서의 힘과 기쁨은 결론이 아니라 과정에서 온다.
‘장강명의 벽돌책’ 칼럼 1회에서 다룬 책은 2004년에 한국에 번역서가 나온 스티븐 핑커의 『빈 서판』(901쪽)이었다. 사이언스북스의 노의성 주간은 그 책이 벽돌책 유행의 선구자라고 말했다. 그 무렵에는 벽돌책이 많지 않아 한 권으로 내도 괜찮은지 고민을 많이 했다고.
확실히 요즘은 벽돌책이 당시보다 많이 나온다. 그런데 얇은 책은 그보다 훨씬 더 증가했다. 전반적으로 책들이 얇아지는 듯하다. ‘이 두께로 나온단 말이야?’ 싶은 단행본도 많다. 다양성이 커졌다고 평가해야 할까, 길고 복잡한 사유가 고가화 전략으로 겨우 살 길을 찾는 서글픈 양극화라고 봐야 할까. 벽돌책 애호가로서 마냥 반갑지만은 않은 풍경이다.
쉽고 유머러스하다. 한 챕터를 할애해 과시적으로 해리 포터를 분석하기도. 문학성 평가가 객관적일 순 없지만, 개인적 선호가 아닌 ‘공적 기준’은 있다고 주장한다.
현대인의 특징 중 하나로 나르시시즘을 꼽는다. 나르시시스트들이기에 모욕을 두려워하고 인기에 집착한다. 이는 이미지를 중시하는 기만적인 삶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