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이고 분석적인 글을 좋아하고, 이 작가의 독서 칼럼을 좋아한다. 내가 은근히 로맨틱한 남자여서 사랑 이야기도 좋아한다. 그래서 매우 취향에 맞는 책이었다. 서태지와 신해철의 음악이나 노랫말이 아닌 사랑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일이 없어서 고개 끄덕이며 감탄. ‘결국 우리는 사랑 앞에서 버둥거리게 된다’는 표지 문구도 좋다.
《제인 에어》를 보고 사흘 뒤에 영화 《킹 리어》를 봤다. 그 사이에 HJ는 처가에 가서 하루 묵고 왔고, 나는 집을 청소했다. 내가 제발 그러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는데도 HJ는 또 친정에서 반찬들을 잔뜩 가져 왔다. HJ는 “엄마가 나한테 반찬 주는 걸 좋아해, 그게 엄마의 기쁨이야”라며 괜찮다고 하지만 나는 장모님에게 매번 너무 미안하다.
새해부터 신문 한 곳에 칼럼을 연재하기로 했다. 칼럼을 싣는 일간지가 두 곳이 됐다. 책 칼럼까지 포함하면 세 곳. 신문사에서는 대표 칼럼의 필진이 되어 달라고 했으나 거절하고 에세이 칼럼을 연재하기로 했다. 담당 부장은 대표 필진이 되는 게 부담스러우냐고 물었는데,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찾아보니 대표 칼럼은 주로 시사 문제를 다루던데, 그런 글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시의성이 높은 글들은 나중에 모아 단행본으로 출간할 때에는 낡은 느낌이 들기 일쑤고, 그런 글을 쓰기 위해 뉴스를 꼬박꼬박 챙겨보는 것이 싫기도 했다. 현재진행형인 정치적 사안에 대해 누가 옳다 그르다며 판관 역할을 할 마음도 없었다(그러고 보면 내가 신문에 쓰는 칼럼의 상당수가 ‘모르겠다’ 혹은 ‘두렵다’로 끝난다).
신문사에서 연재 코너의 제목을 정해 달라고 해서 ‘장강명의 군중 속에서’ 어떻겠느냐고 답을 보냈다. 담당 부장은 너무 낡은 느낌이라며, ‘장강명의 사는 게 뭐길래’를 대안으로 내놨다. 처음에는 내가 그렇게 가벼워 보이나, 하고 약간 발끈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제목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 같고, ‘사는 게 뭐길래’도 들을수록 괜찮게 들렸다.
《킹 리어》를 보는 날 낮에는 방송국에서 신년기획 다큐멘터리의 이음새 부분과 마지막 장면을 찍었다. 둘 다 야외 촬영이었는데 이번에는 날도 그리 춥지 않았고 시간도 덜 걸렸다.
선배 기자가 저녁을 같이 먹자고 했지만 사양하고, 돌아오는 길에 서브웨이에서 샌드위치를 사 왔다. 빵 종류를 묻는 종업원의 질문에 허둥지둥 대다 흰색 기본 밀빵을 골랐는데, 다른 곡물 빵을 선택하지 않은 것이 돌아오는 길 내내 후회되었다. 내 얘기를 들은 HJ는 “그게 사람들이 서브웨이에서 아주 흔하게 하는 실수지”라고 촌평했다.
영화를 보려는데 노트북과 빔 프로젝터의 연결이 갑자기 말썽을 일으켜 그래픽카드 드라이버를 다시 받는다, 윈도를 업데이트한다 어쩐다 하면서 한참 부산을 떨었다.
왜 지난번에는 멀쩡히 작동됐는데 이번에는 안 되는가? 왜 이 노트북에서는 잘 돌아가는데 다른 노트북에서는 안 되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모르겠고 깊은 좌절감만 든다. 전문가들은 원리를 알까? 애당초 원리가 있기는 한가? 컴퓨터 운영체제라는 것도 날씨나 주식시장처럼 복잡계 물리학의 영역 아닐까.
그렇게 한바탕 난리를 친 덕에 HJ나 나나 약간 기분이 꼬인 상태에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애당초 『리어 왕』은 내가 좋아하는 작품도 아니다.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에서 가장 가학적이고 인간혐오적인 작품 아닌가 싶다. 햄릿이나 오셀로나 맥베스는 리어만큼 추락하지는 않는 것 같다.
아니, 기분이 꼬인 상태에서 감상하기에 오히려 적절한 작품인가? 나보다 더 불행한 인간을 보면서 카타르시스와 연민을 느끼는 데 비극의 유용함이 있다고 하니. 그리고 『리어 왕』도 중간에 꽤나 부조리극 같은 대목이 있는데, 우리도 그런 기분을 조금 전에 살짝 느꼈잖아?
《킹 리어》는 셰익스피어 희곡의 대사는 그대로 살리되 무대와 소품은 21세기로 바꾼 작품이다. 그래도 스마트폰 같은 물건은 안 나오고, 인물들은 종이로 된 편지를 주고받는다. 바즈 루어만 감독의 《로미오+줄리엣》 같은 영화가 있으니 참신한 기획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덕분에 얄팍한 재미가 생기기는 한다. 현대 군인 복장을 한 젊은 남자들을 기사라고 부르고, 자동차와 오토바이를 말처럼 취급하고, 결투는 이종격투기로 한다. 그런 충돌과 부조화는 일단 눈길을 끌고, 어떤 장면은 우습게, 어떤 장면은 제대로 고증했을 때보다 더 날카롭고 실감나게 만들어준다. 군복 차림의 젊은 사내들이 현대식 건물 거실에 가득 들어와 있는 장면을 보면 절로 위협감이 들고, 리어의 첫째 딸을 좀 더 이해하게 된다.
기분이 꼬인 상태였기에, HJ는 앤소니 홉킨스가 연기한 리어 왕이 뭐라고 대사를 읊을 때마다 “저 할아버지 왜 저래?” 하며 툴툴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나도 앞부분을 보면서 리어의 ‘못된’ 딸들에게 꽤 감정이 이입되었다. 위에서 말한 연출 때문이기도 했고, 거너릴 역을 맡은 엠마 톰슨의 기품 덕분인 것 같기도 했다.
감독의 의도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영화는 뒤로 갈수록 화면 채도가 낮아져 마지막에는 거의 흑백영화처럼 보였다. 그때쯤 풀러스 런던 포터를 마셨는데, 맥주의 짙은 암갈색과 다크초콜릿 풍미, 적당한 묵직함이 영화와 어울린다는 생각도 했다.
“그래서, 『리어 왕』은 주제가 뭐야?”
영화를 다 본 뒤 HJ가 물었다.
“글쎄, 나이가 들어도 경제권은 절대 놓으면 안 된다는 거? 그리고 부동산은 함부로 증여하지 말자?”
내가 대답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셰익스피어 시대의 관객들 역시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며칠 뒤 방송작가와 전화로 사전 인터뷰를 할 때에도 같은 얘기를 했다.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대본을 써야 하는 방송작가는 내 말에 웃기는 했으나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사랑과 존경을 얻기 위해 사람들에게 경쟁을 붙이는 리어의 허영심과 오늘날의 소셜 미디어 세상, 지혜로워질수록 더 고통 받는 아이러니 등등에 대해서도 조금 떠들었다.
허영에 빠지지 않게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를 찾지 않게
어둠의 무게를 즐길 수 있게
모임에 새로운 기능이 생겼습니다.
바로 바로 ‘초대’ 기능이에요.
나의 카카오톡 친구들을 모임에 초대해 함께 이야기하고 싶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도우리가 개발자분들에게 카카오톡 초대 기능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어요.
초대 메뉴를 찾는 방법은요,
모임 들어가서 상단 메뉴를 보시면 모임지기의 말/모임 정보/모임 소재/참여 인원/공유가 차례대로 나올 텐데요, 제일 마지막에 초대가 있어요.
스마트폰을 이용하실 때는 화면 오른쪽 상단의 점점점을 누르시면 모임 메뉴가 나올 텐데 제일 마지막에서 초대 기능을 발견하실 수 있습니다.
초대 아이콘을 누르시면 카카오톡 공유하기와 같은 화면이 나올 거예요. 이때 내가 초대하고 싶은 친구와 지인들을 선택한 뒤 제일 아래 공유하기 버튼을 누르면, 해당 모임에 초대한다는 메시지를 초대장처럼 보낼 수 있어요.
이제 더 이상 외로워하지 마시고 친구와 지인들을 불러 책 이야기 함께 하세요.
우리가 사라지면 암흑이 찾아온다!
책 읽는 우리들이 더욱 더 많아지는 그날까지, 저는 또 새로운 기능을 들고 찾아뵐게요.
감사합니다.
감상평 :
요즘 시대에 '가성비' 보다 더 중요한 게 뭐가 있을까...
우리 시대의 새로운 종교, 가성비에 관한 5편의 소설들이 모였다.
단편이 두 세 편 정도 더 들어갔다면 좋았을 걸 싶기도 하고, '가성비'로 묶이기엔 좀 안 어울리는데 싶은 작품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들었을 때 혹하는 테마임은 분명
책장을 펼칠 때마다 위로를 받는 기분이 들었다.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있어도 고독과 자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사실을 글로 드러내고야 마는 사람….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다. 평균주의와 표준화에 그런 어이없는 함정들이 있는 줄 미처 몰랐다. ‘평등한 맞춤만이 평등한 기회의 밑거름이 된다’는 문구에 밑줄 두 번.
관료제를 야유한다고 써놓은 일화들이 내게는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을 깔아뭉개는 것처럼 보였다. 다들 당신만큼 똑똑하지 못하니 어쩌겠나.
흡인력 있고 생각할 거리도 던진다. 다만 같은 일본 추리소설로서 동일한 주제를 다룬 다카노 가즈아키의 『13계단』이 워낙 압도적이라…
경제학은 과학인가? ‘자유의지는 없다’는 신경과학자들의 실험결과를 반박하는 방법은? 과학은 과학의 의미를 스스로 설명할 수 있을까? 흥미로운 생각과 질문들.
의학, 경제경영, 사회학, NGO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이 ‘세계적 고령화 현상이 오히려 사회 혁신의 기회가 될 수 있으며, 그렇게 활용해야 한다’고 역설. 설득력 있다.
50세 이상을 경제력과 욕구가 각각 다른 세 종류의 인구집단으로 나눠야 한다는 주장이나, 중년과 노년 사이에 새로운 생애단계가 생겨나고 있다는 분석이 특히 흥미롭다. 개인적으로도 고민거리들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