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RN에서 대중교육을 맡았던 물리학자가 쓴 교양서. 진공과 원자에서 힉스 장, 양자 거품, 허수 시간까지. 우리 우주는 생애가 엄청나게 긴 거대한 양자 요동일 수도 있다고.
어차피 깊은 내용은 이해할 수 없으므로 탐험가들의 모험담을 듣는 기분으로 읽었고, 저자가 독자에게 기대하는 바도 그 정도인 것 같다. 사이먼 싱의 책도 몇 번 언급된다.
이제 데이터 분석기술은 누가 불륜을 저지를지, 어느 직원이 곧 이직할지, 어떤 보험가입자가 18개월 안 에 사망할지 예견한다. 결혼과 직업과 죽음의 의미는 몰라도 상관없다.
나는 결국엔 이 책의 주장이 궤변이라고 결론을 내렸는데, 그런 고민의 과정 자체는 즐거웠다. 저자가 역설(力說)하는 ‘무의식 민주주의’는 이미 한국에서 실현된 것 같기도.
행복한 기분으로 읽었다. ‘21세기를 헤쳐 나아갈 희망은 바로 자전거에 있다.’ ‘자전거를 가운데 핵에 둔 어떤 사회를 만드는 것.’ 이런 구절들이 너무 좋다.
음모론자들을 놀리는 책. 음모론을 갖고 노는 건 좋아하지만 음모론 신봉자는 질색하는 나 같은 사람을 위한 책.
저자는 『25시』를 쓴 바로 그 게오르규. 책장을 덮은 뒤 의문이 한 가득 남았다. 마호메트의 위대한 점은 대체 뭔가? 그의 인생 어느 대목이 감동적인 건가? 정교회 신부인 저자는 왜 이 책을 쓴 걸까?
국내 추리작가들의 2009년 단편 모음집. 군더더기 없는 첩보물이자 블랙코미디인 「황금거위」가 가장 취향에 맞았다.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공포소설에 가까운 「다이어트 클럽」도 재미있었다.
늙고 눈 먼 개가 나오니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츤데레 캐 릭터인 ‘751’이 툭툭 던지는 허무개그 같은 대사가 재미있었다. 작가가 직접 책을 팔아야 한다면 정말 아무도 소설을 쓰지 않을까?
공중파 방송사의 신년기획 다큐멘터리 촬영을 하고 왔다. 내가 내레이터 역할을 한다. 아직 제목은 정하지 않았지만 정치 팬덤과 여론 양극화 현상을 다뤘다. 소셜 미디어, 유튜브, 뇌 과학 연구를 곁들인다.
촬영 뒤에 비난을 받게 될지 모른다며 제작진이 걱정해주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관심 있는 주제였다. 인터넷 시대 사람들의 행동 변화에 대한 논픽션도 따로 구상 중이다.
단독 단행본에 들어갈 글을 쓰는 게 아닌 다른 일들은 모두 부업이라고 여긴다. 강연이나 방송 출연이나 일회성 기고문 등등. 하지만 부업도 천차만별이다. 어떤 일은 하는 동안 제법 보람을 맛보기도 하는데 이번 촬영이 그랬다.
그런데 힘들긴 했다. 여의도와 서강대교 한가운데에서 각각 야외 촬영을 했는데 서울 평균기온이 영하 8.3도인 날이었다. 다리 위에서는 입이 얼어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핫팩 두 개를 틈틈이 뺨에 갖다 대고 입술 주변을 열심히 풀어보려고 하지만 대단한 효과는 없었다.
여의도에서 예고편을 찍고, 서강대교 위에서 오프닝을 촬영하고, 방송국 카페에서 오프닝 다음 장면을 찍었다. 그렇게 세 장면을 촬영하는데 꼬박 8시간이 걸렸다. 방송에 최종적으로 나가는 분량은 다 합해서 5분이나 될까? 그날 촬영분을 맡은 선배 기자가 “날이 너무 추워서 장 작가가 고생할까봐 정말 최소한으로 찍었어요” 하고 설명해주었다. 원래대로라면 이렇게도 찍고 저렇게도 찍어보면서 다양하게 화면을 확보한다고.
이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은 PD가 아니라 기자들이 연출을 맡는다. 선배는 신문기자 출신이다. 나와 같은 경찰서를 출입한 인연이 있다. 나는 이번 촬영 전까지 그가 방송기자가 된 줄도 몰랐었다. “방송이 신문보다 더 마음에 드세요?” 하고 물었더니 1초도 고민하지 않고 “아니요”라고 답한다.
이번 다큐멘터리의 주 연출을 맡은 후배 기자는 동아일보 출신이다. 나는 그와 같은 부서에서 근무한 적은 있지만 한 팀에서 일한 적은 없다. 국회에서 내가 야당을 출입할 때, 그는 여당을 맡았다. 단독 기사들을 쏟아내는 에이스 기자였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얼마 뒤 그가 방송사로 이직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촬영을 마치고 여의도의 한 레스토랑으로 가서 셋이 저녁을 먹었다. “뭘 드시겠어요?” 후배가 메뉴판을 내밀었을 때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클라우드라는 단어밖에 없었다. 와인은 여러 종류를 갖췄는데 맥주는 오로지 클라우드 병만 파는 식당이었다. 그리고 나는 촬영하는 내내 ‘아, 이거 마치고 시원한 맥주 한 잔 마시고 싶다’고 되뇌었던 참이었다.
나도, 선배도, 후배도 클라우드를 시켰다. 그렇게 즐거운 저녁 식사는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내가 사람들을 자주 만나지 않아서만은 아니었다. 기자 출신들이라서 더 잘 통하는 게 있었을 거라고 내심 생각한다.
선배는 내가 최근에 쓴 칼럼들을 인상적으로 읽었다고 했다. 한국 사람들이 모두 서로 존댓말을 쓰자는 제안을 적은 글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러고 보니 그 자리에 있는 세 사람이 모두 서로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선배는 나에게, 나는 후배에게 깍듯하게 존대했다. 40대 남자 세 사람이 모였는데 이런 분위기인 술자리는 꽤 드물겠지… 아니, 한국 사회도 이제 바뀌고 있나?
이것저것 이야기했다. 다들 조곤조곤 말하는 타입이었다. 선배는 등단한 영화평론가이기도 했고, 동물권과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 육식을 삼갔다. 후배는 자신이 컴퓨터게임에 푹 빠져 있다고 고백했다.
우리는 게임이 예술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해 이야기했다. 영화도 한때 그런 의심을 받았다. 《사이버펑크 2077》과 이창동 감독의 영화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뉴스산업의 미래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는데 세 사람 모두 극히 비관적이었다. 그런데 왜 그 일을 그렇게 열심히 하는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이번에는 다들 설득력 없는 답을 내놓았다.
셋이서 클라우드를 11병 마셨다. 내가 네 병, 선배가 네 병, 후배가 세 병. 후배는 그렇게 술을 마시고 회사로 돌아가 편집 작업을 한다고 했다. 전에는 사흘 동안 편집실에서 지낸 적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나라가 뒤집어진 어떤 뉴스를 혼자 사흘간 몰랐다고 한다.
선배는 버스를 한번 갈아타고 집에 간다고 했다. 아파트에 살지 않는다고, 종로구 어디에 작은 집을 지었다고 했던 것 같은데…. 나만 카카오 택시를 불렀다. 지하철을 타고 갈 수도 있었지만 너무 피곤했다. 기자 정신이 그새 많이 사라진 거야.
선배와 후배가 너무 정중하게 나를 배웅하는 것 같아 조금 서글펐다. 그 모든 호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스럼없는 친구가 되지는 못할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나이가 한 살만 차이 나도 친구가 되기 어렵다. 언론계에서는 입사연도가 중요하다. 그리고 모든 상대에게 존댓말을 쓰며, 조곤조곤 말하는 사람들은 친구를 잘 사귀지 못한다. 특히 어떤 나이를 넘기면.
클라우드는 내가 썩 좋아하지는 않는 맥주다. 다른 맥주를 마실 기회가 있을 때 굳이 클라우드를 고르지는 않는다. 국산 라거 맥주 중에서도 그렇다. 기존 국산 맥주와 다른 맛을 내기 위해 롯데칠성음료에서 3년 간 개발했다고 하는데, 다른 건 모르겠고 유통망은 열심히 관리했나 보다. 다른 맥주는 하나도 팔지 않고 클라우드 병만 파는 음식점이 있는 걸 보면.
이 맥주가 출시될 무렵에 나는 이미 어느 정도 미각이 트인 상태였다. 스무 살쯤에 만났더라면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더 일찍 만났다면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었겠죠?
아쉬운 가정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