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다. 평균주의와 표준화에 그런 어이없는 함정들이 있는 줄 미처 몰랐다. ‘평등한 맞춤만이 평등한 기회의 밑거름이 된다’는 문구에 밑줄 두 번.
관료제를 야유한다고 써놓은 일화들이 내게는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을 깔아뭉개는 것처럼 보였다. 다들 당신만큼 똑똑하지 못하니 어쩌겠나.
흡인력 있고 생각할 거리도 던진다. 다만 같은 일본 추리소설로서 동일한 주제를 다룬 다카노 가즈아키의 『13계단』이 워낙 압도적이라…
경제학은 과학인가? ‘자유의지는 없다’는 신경과학자들의 실험결과를 반박하는 방법은? 과학은 과학의 의미를 스스로 설명할 수 있을까? 흥미로운 생각과 질문들.
의학, 경제경영, 사회학, NGO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이 ‘세계적 고령화 현상이 오히려 사회 혁신의 기회가 될 수 있으며, 그렇게 활용해야 한다’고 역설. 설득력 있다.
50세 이상을 경제력과 욕구가 각각 다른 세 종류의 인구집단으로 나눠야 한다는 주장이나, 중년과 노년 사이에 새로운 생애단계가 생겨나고 있다는 분석이 특히 흥미롭다. 개인적으로도 고민거리들을 준다.
시간이 꼬여 있고 낯선 명사가 많아 초반이 다소 버겁다. 속편들은 천천히 읽는 것으로.
「복을 비는 제사」가 무척 슬펐다. 반쯤 실성한 채 내세에서 가족을 만날 수 있는지를 궁금해 하는 여인. 재혼녀는 염라대왕이 몸을 잘라 두 남자에게 나눠줄 거라고 놀리는 사람들….
신년기획 다큐멘터리 촬영을 하는 사이에 다른 방송사에서 또 다른 출연 요청이 왔다.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 게스트 패널로 나와 달라는 것이었다. 2011년 버전 영화 《제인 에어》와 아마존에서 만든 《킹 리어》를 다룬다고. ‘문학 원작 영화’라는 테마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소설가를 한 사람 섭외하고 싶다고 했다.
『제인 에어』도, 『리어 왕』도 읽은 지 오래 됐는데…, 내가 썩 열광하는 작품들도 아닌데…, 그런 영화들이 있다는 것도 방송작가의 연락을 받고 나서 알았는데……, 그리고 『제인 에어』는 여성 작가가 이야기하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잠시 망설이다가 출연료를 묻고 난 뒤에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로 강연 수입도 줄었는데 쏠쏠한 아르바이트 거리라고 여겼다.
두 영화 중에 《제인 에어》를 먼저 보기로 했다. 영화를 보면서 마실 영국 맥주를 보틀샵에서 사 왔다. 《제인 에어》를 보면서는 풀러스 런던 프라이드를, 《킹 리어》를 보면서는 풀러스 런던 포터를 마시기로 했다.
풀러스는 런던에서 가장 오래된 맥주 회사이며, 지금도 영국식 에일만 만든다. 홈페이지에 나온 설명에 따르면, 이 맥주 브랜드는 기원이 1600년대 후반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시절 런던에 있었던 개인 양조장 두 곳이 모태라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1616년에 사망했으니까 그 양조장들의 맥주를 맛보지는 못했을 것이다(셰익스피어는 맥주 애호가였다). 하지만 17세기 말에 글로브 극장에서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보던 관객들은 이 양조장 맥주를 마셨을 수도 있다. 당시에는 맥주를 마시고 바닥에 견과류 껍질을 버리면서 떠들썩하게 연극을 보는 것이 일반적인 관람 문화였다.
풀러스는 1816년에 자기 양조장에 ‘그리핀’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지금 것과 유사한 엠블럼을 채택한다. 같은 해에 샬럿 브론테가 태어났다. 샬럿 브론테는 요크셔에서 외롭게 살았으니까 멀리 떨어진 런던의 그리핀 양조장 맥주는 마시지 못했을 것이고 아마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제인 에어』는 대단한 화제를 모은 문제작이었으므로 당시 그리핀 양조장의 손님들은 그 책과 저자의 정체를 놓고 이러쿵저러쿵 떠들었을지도 모른다.
영화를 볼 준비를 하면서 HJ와 『제인 에어』에 대해 이야기했다. HJ와 나는 이 작품의 결말을 다르게 기억하고 있었다. HJ는 로체스터가 눈이 먼 채로 소설이 끝났다고 주장했고 나는 그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희미하게 시력을 회복하는 걸로 기억했다. 확인해보니 내가 옳았다.
“개연성 없이 왜 갑자기 눈을 뜨냐고! 내가 그래서 자기가 권해준 그 판타지 소설도 싫어했잖아. 난 심청전도 싫어.” HJ가 말했다.
내가 권해준 ‘그 판타지 소설’은 로저 젤라즈니의 『앰버의 아홉 왕자』다. 앰버 연대기 1권인데, 주인공이 시력을 잃었다가 되찾는 장면이 있다. HJ는 그게 도무지 말이 안 된다면서 2권 읽기를 거부했다.
《제인 에어》 영화는 거실에서 빔 프로젝터로 봤다. HJ가 빔 프로젝터를 사자고 했을 때에는 내심 얼마나 자주 쓰게 될까 조금 의문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사놓고 보니 상당히 자주 쓰게 됐고, 쓸 때마다 매우 만족스럽다.
우리는 거실을 카페처럼 꾸몄다. 가운데 공간은 여유롭게 비워두고, 그 경계에 긴 소파를 ‘ㄴ’자 형태로 배치했다. 소파 뒤로 식탁과 책장을 뒀다. 책장 위에는 썩 좋지는 않아도 싸구려는 아닌 스피커를 올려놨다. TV는 없고 한쪽 벽은 바닥부터 천장까지 아무 것도 없다. 그 벽을 빔 프로젝터 스크린으로 사용한다.
바닥과 벽에 그렇게 빈 공간이 있어서 낮에는 집이 넓은 것 같다는 착각이 든다. 밤에 빔 프로젝터를 켜서 뮤직비디오나 적당한 유튜브 영상을 틀어놓고 스피커로 음악을 들으면 웬만한 카페보다 훨씬 분위기가 낫다. 부부가 둘이서 도합 40년 가까이 애도 키우지 않고 차도 굴리지 않고 사치 부리지 않고 열심히 일만 했는데 이 정도는 누려도 괜찮지 않을까? 그러다가도 ‘그때 마포에 아파트를 샀어야 하는 건데’ 하는 생각이 들곤 하지만.
《제인 에어》는 큰 화면으로 봐야 하는 영화였다. 영화는 제인 에어가 손필드 저택에서 뛰쳐나오는 장면에서 시작하는데, 바로 뒤이어 관객 눈앞에 요크셔의 황무지가 펼쳐진다. 그 황무지 장면이 굉장해서 나는 숨을 멈췄다. 브론테 자매가 그렇게 공들여 묘사한, 거칠고 스산한 땅이 바로 저것이었구나, 영국에는 아직도 저런 장소가 있구나….
물론 두 시간도 안 되는 러닝 타임에 원작의 내용을 욱여넣으려다 보니 생략한 부분도 많고 줄거리를 가쁘게 쫓아가느라 인물들의 감정 선이 어색하다는 느낌도 든다. 하지만 영상미만큼은 빼어났다. 19세기 영국 시골의 대저택은 저렇게 어둡고 조용했겠구나 하고 실감이 났다. 음악이 별로 없는 영화라 각 장면들이 더 정적인 느낌이 들었다.
미아 와시코프스카는 제인 에어 역을 맡기에 지나치게 미인이고 순둥이처럼 생기지 않았나 싶었는데, 화면에서는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정말 고집스럽고 무뚝뚝하게 보였고, “저에게도 당신 같은 영혼과 감정이 있습니다”라는 소설의 명대사를 할 때에는 퍽 감동적이었다.
조용하고 쓸쓸한 땅
멀리서 들려오는 영혼의 소리
어쩌면 아주 오래된 듯한
영화는 제인 에어와 로체스터가 재회하는 장면에서 끝나기 때문에 “독자여, 나는 그와 결혼했다”는 소설의 유명한 문장은 극화되지 않는다. 로체스터는 영화에서 결국 눈을 뜨지 못했다. 로체스터가 제인을 부르고 제인이 그걸 환청으로 듣는 장면도 반쪽만 나온 셈이었다.
방송 프로그램에서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궁리하느라 영화에 아주 몰입하지는 못했다. 페미니즘, 독립적인 주인공과 작가, 아동 학대, 원작 소설과의 차이….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정작 내 머리에 가장 강렬하게 남은 것은 황무지 풍경이었다.
인적이 드문 시골에서 개를 키우며 살고 싶다는 건 내 흐릿한 소망 중 하나다. 나 자신도 내 마음을 그리 확신할 수 없고, HJ가 절대 반대하기 때문에 아마 이뤄질 수는 없을 거다. 이전까지는 그런 장소 후보를 상상할 때 캐나다의 삼림지대를 떠올렸다. 앞으로는 잉글랜드 북부를 연상하게 될 것 같다.
HJ는 나중에 부산에서 살고 싶어 한다. 나는 내가 도시의 삶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잘 모르겠다. 도시를 싫어하는 사람은 대부분 남자들이라고 한다. 남자가 정말로 동굴의 동물이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남자들은 안전 문제에 신경을 덜 쓰기 때문인 걸까.
솔직한 감상은 ‘(투표 과정에서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역시 휴고상!’보다는 ‘어… 음…’ 쪽에 가깝다. 아이디어는 풍성하지만 그걸 드러내고 풀어가는 장치와 전개는 퍽 투박하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에는 약간 배신 당한 기분이 들었다. 코난 도일이 탐정 역할을 맡은 팩션이라고 지레짐작한 게 잘못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