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양리 북스키친 같은 공간이 있으면 좋겠고, 그런 공간에 가서 쉴 수 있는 시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 어쩌면 북스테이라는 공간이 필요한 게 아니라 북스테이를 할 수 있는 시간이 더 중요한 게 아닐까? 제주도에 있는 게스트하우스 [꿈꾸는섬]이나 파주 헤이리에 있는 게스트하우스 [모티브원]에 몇 권의 책만 가지고 가서 실컷 책을 읽고 쉬다 오고 싶다. 머리가 맑아진다면 논문도 좀 쓰고.
그믐밤 덕분에 작가님의 북토크에도 다녀왔는데 진솔하고 밝은 작가님의 입담과 멋진 서점에 한 번더 기분이 좋아졌다.
한국 현대사의 굴곡이 워낙 심하다 보니 부모 세대의 삶을 상상하다 보면 이상한 죄책감과 부채감에 사로잡힌다. 대중영화라는 도구로 그 광경을 생생하게 스케치해주니 더욱. 뿌리를 찾으려는 노력은 본능적인 걸까?
음식과 맛집이 어떻게 미식담론이라는 서사의 대상이 됐는가에 대한 분석이 재미있다. 생산과 조리의 현장에서 분리된 채 소비만 하다 보니 ‘이걸 왜 여기서 먹어야 하는가’라는 해설이 필요하게 됐다는 것.
그믐은 독서생태계의 구성원 중에서도 작은 출판사, 동네 책방, 이름이 덜 알려진 작가님들을 지원하고 후원하는 행사를 적극적으로 펼치려고 합니다.
그 중 동네 책방과 함께 하는 사업의 일환으로 ‘그믐밤’을 만들었어요.
그믐밤은 음력 29일마다 전국의 동네 책방에서 열리는 오프라인 책모임입니다.
매달 그믐날 밤 7시 29분이 되면 어디선가 비밀리에 책 읽는 우리들이 모이는 것이지요. 일종의 비밀 독서단이라고 할까요? 음력 29일이기 때문에 매 달 날짜도 바뀌고 요일도 바뀌어요. 바뀌지 않는 것은 딱 하나! 책에 관한 우리들의 진심입니다.
모여서 1시간 29분 동안 책에 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거에요.
작가님을 모시고 책 이야기를 들어보는 북토크, 우리끼리 함께 모여 낭독하는 모임, 책방지기의 인생책과 인생 이야기를 들어볼 수도 있겠습니다.
꼭 어떻게 해야만 하는 것은 없어요. 다양한 형태의 모임이 가능합니다.
그믐밤이 널리 널리 퍼져 나중에는 전국의 모든 동네 책방들이 그믐날 밤 서점에 불 밝히고 지역 주민들과 도란도란 책 이야기 하는 그 날이 오기를 기원합니다.
행사에 와 주시는 분들께는 그믐밤 날짜와 특별한 문구가 담긴 책갈피를 그믐이 제작해서 선물로 드립니다. 달빛이 고고한 어느 그믐밤에 동네 책방에 모여 우리들이 함께 한 순간을 기억해 주시기 바라는 그믐의 작은 바람이에요.
그믐밤지도에서도 그믐밤을 확인할 수 있어요.
그믐밤을 열고 싶은 동네 책방은 contact@gmeum.com으로 연락 주세요.
그믐밤에 참여하고 싶은 그믐 회원들은 매월 열리는 그믐밤 모집 모임을 살펴봐 주세요.
"우리가 사라지면 암흑이 찾아온다."
2022년 10월 15일 오후 3시 30분경부터 16일 오전까지 카카오 데이터 센터의 화재 발생으로 그믐의 몇 가지 서비스들이 정상 동작하지 않았습니다.
그믐은 도서 관련 정보를 카카오 API를 통해 전달받고 있어 핵심 정보 처리가 잠시 불가능했던 바 이에 회원들께 불편을 끼쳐 드린 점, 대단히 죄송합니다.
또한 소셜 로그인 서비스 중 평소 카카오 로그인으로 입장하셨던 회원들께서도 접속 불가로 많은 어려움이 있으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추후 이와 같은 일이 발생 시 자체적으로 보다 빠른 해결 방안을 강구함과 동시에 신속 정확한 공지로 상황을 안내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위 사항 관련 보다 궁금하신 점 있으시면 contact@gmeum.com으로 문의 주십시오.
<결혼은 세번쯤 하는게 좋아>
이 소설이 나왔을 때 한 신문사를 방문했다.
세상에나, 한주간에 배달된 책들이 저렇게 많다.
살짝 내 책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결혼은 세번쯤 하는게 좋아>.
작년 책이 나왔을 때 한 신문에 소개된 편집.
편집을 아주 멋지게 했다.
오종우
왜 예술은 인류의 역사에서 한번도 사라진 적이 없을까
세상에 없던 새로운 생각은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
이 책의 기반이 된 강의인 '예술의 말과 생각' 은 성균관대 최고의 명강으로 꼽힌다
성균관대 러시아어문학과 교수로 있다.
수업에 앞서
피카소의 <춤>과 예술적 상상력
1부 새로운 생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1강 세상을 해석하는 능력 - 도스도옙스키의 <백치>와 만물박사
예술에 대한 통념, 편견, 전문적인 지식, 감각
예술의 반대말은 추함이 아니라 무감각
실질세계와 여분세계
여분세계의 핵심이 예술이다
해석
존재는 본질을 앞선다
2강 예술은 어떻게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내는가 - <톨스토이의 초상>의 비밀
예술의 실용성, 새로운 생각을 탄생시키는 원동력
언어
3강 경직된 생각을 파괴하는 일 - 귀머거리 베토벤이 작곡한 <합창 교향곡>
질문
의미가 명백할수록 상상력이 제한됩니다.
2부 보이는 것 너머를 보려면
4강 불완전한 인간의 완전한 비극 - <햄릿>의 재해석
Universal vs. General
5강 꿈과 현실의 이중주 - 가구같은 음악 <짐노페디>가 아름다운 이유
6강 그림에서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 샤갈의 <손가락이 일곱 개인 자화상>이 그린 것
7강 경험했지만 말하지 못했던 것들 - 타르콥스키의 <희생>이 남긴 것
3부 삶을 창조한다는 것
8강 예술이 삶의 진실을 담는 법 - 체호프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에 대하여
9강 여행과 예술의 공통점 - 호퍼의 <간이휴게소>에 그려진 '나'
수업을 마치며
로스코의 <지평, 어두운색 너머 흰색>과 예술이 스며드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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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
예술은 사람들의 고뇌와 고통을 이해하고 인간의 가치를 해석해 삶의 전망을 밝히는 인문학적 전위에 있습니다.
P.18
진짜 창의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두가지 전제조건이 꼭 필요합니다. 먼저 전문성입니다.
다음으로는 그 대상을 향한 애착입니다. 뭐든 제대로 알고 난 뒤에야 창의성이 나오는 법입니다.
전문성과 애착은 창의력의 기반인 셈이죠.
p. 33
<백치>의 두 주인공은 상대방에게 관심을 기울이며 대화를 통해 서로 알아가는 가운데 그들에 관해 지나치게 많은 것을 알고 개입하는 레베제프를 불쾌하게 여깁니다. 그의 많은 정보들이 정작 그들이 알고자 하는 바를 왜곡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p.35
세상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감각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예술의 반대말은 무감각
예술을 다루는 학문인 미학을 가리키거나 심미적이라는 뜻의 단어에 부정의 접두사를 붙이면
마비, 마취라는 뜻이 됩니다. 예술의 반대말은 추함이 아니라 무감각인 것이죠.
p.36
자기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
우리가 사는 세상은 두개의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실질세계와 여분세계.
p.43
실질세계만을 세상의 전부로 알면서 그것에 전념하여 산다고 그의 실질세계가 풍요로워지지는 않습니다. 도리어 생기 없이 건조하고 팍팍한 삶이 될터. 이러한 점은 니체도 강조한 적 있습니다.
여분의 세계가 실제로 살아가는 일을 의미 있고 넉넉하게 만들어줍니다. 따라서 제대로 된 사회는 즉각적인 실질에 얽매이지 않고 여분의 세계, 그 자유로운 정신을 소중히 여깁니다.
P.46
우리가 모르거나 관심이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셈입니다. 그런데 이때 중요한 점은 우리가 해석한 만큼 어떤 대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랍니다.
P.47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 하찮고 일상적인 경험을 잘 관리함으로써 그것을 경작 가능한 땅으로 만들어 1년에 세 번 열매를 맺게한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아주 많은 사람들은 운명의 솟구치는 파도에 휩쓸리거나 시대와 나라가 만들어내는 혼란스러운 물줄기로 밀려들어가서 늘 그 위에 코르그처럼 까딱거리며 떠 있다. 이런 것을 관찰하다 보면, 우리는 결국 인류를 둘로 구분하고 싶은 유혹, 즉 적은 것을 가지고 많은 것을 만들어내는 소수와 많은 것을 가지고 적은 것을 만드는 다수로 구분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된다.
p.50
요즘에는 모두 다 저울과 계약에 의거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유로운 정신, 순수한 마음, 건강한 육체마저 그런 기준으로 소유하려고 해요
p.65
플라톤은 실재를 모방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여겼습니다. 모방이론, 즉 미메시스, 예술이 현실을 반영한다느니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라느니 하는 관점이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나중에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이 구체적인 현실보다 더 큰 보편성을 담을 수 있다며 예술의 모방이론을 발전시켰고, 이것은 현재까지 예술에 관한 모든 미학 이론서나 교과서에 나오는 가장 중요하고도 가장 강력한 예술론이 되었습니다.
p. 74
예술은 어떠한가요. 인류의 역사에서 예술이 단 한번이라도 소멸한 적이 있나요. 없습니다. 이는 예술이 매우 생명력 강하고 실용적이라는 점을 시사합니다.
일정한 패턴을 지닌 것을 문화라고 합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문화가 고정되지 않고 변화하는 패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화가 탄생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예술입니다.
인간이 자신이 처한 삶과 환경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가 곧 예술이라는 점이죠.
이것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예술의 성질입니다.
p. 76
예술은 자유를 지향합니다. 예술은 언제나 여분세계에 위치해 있는 것입니다.
예술은 그렇게 여분세계에서 실질세계를 창출합니다.
예술은 문화를 형성하는 핵심이면서도 그 패턴에 결코 종속되지 않고 새로운 사고를 탄생케하는
가장 능동적인 원동력인 것입니다.
세상을 창의적으로 해석해서 이해하는 일, 기성의 질서에 단순히 편입되기를 거부하고 주체로서 살아가는 일, 바로 이것이 예술의 근본 성질입니다.
p.77
우리는 소심함과 창의성의 완전한 결핍을 언제나 실제적인 사람의 가장 중요하고도 뛰어난 특징으로 당연시해왔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한다. 이런 생각이 잘못이라면 왜 우리 자신만 탓하겠는가? 독창성 결핍은 전세계 어디에서나, 먼 옛날부터 언제나 실제적이고 실리적이며 실용적인 사람의 첫번쨰 자질이자 훌륭한 요건으로 간주해왔다. 품행이 단정한 소심함과 예의가 발라 독창성이 없는 것이 지금까지 사회통념상 실용적이고 올바른 사람에게 없어서는 안 될 자질이었기에, 아주 갑작스럽게 변하는 것은 지극히 무질서하고 심지어 무례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독창적인 사람은 모든 일에 그저 안주하지 않는다.
P.78
우리에게 실질적인 사람이 없다는 불평이 끊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정치하는 사람들은 많고
다양한 분야의 관리인들은 필요하면 원하는대로 금방 찾을 수 있지만, 실질적인 인물들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불평한다. 심지어 몇몇 기차역에는 괜찮은 근무자 한명 없고, 어떤 선박회사에는 간신히 봐줄 만한 행정체계마저 세울 수 없다고들 말한다.
그래서 새로 개설한 어느 철로에서는 기차가 충돌했다느니, 어떤 철교에서는 객차가 떨어졌다느니 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기차가 눈 덮힌 벌판에서 겨울을 날 뻔했다는 신문기사도 보게 된다.
5강 꿈과 현실의 이중주
가구 같은 <짐노페디>가 아름다운 이유
음악은 잠들지 않고 꾸는 꿈이다. 음악을 듣는 동안 우리의 자아는 새로운 단계로 전이되고
그 속에 사는 동안 그것은 현실을 지배하므로, 곧 꿈은 현실이다.
- 클라우드 슐츠 (독일의 전자음악가)
Erik Satie: Gymnopedie No1
에릭사티는 피아노를 위한 세개의 <짐노페디>를 작곡하여 까페에서 연주하면서, 가구음악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좋은 가구처럼 자기 음악이 일상의 일부로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의 짐노페디는 단조로운 반복으로 듣는 이를 번잡한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줍니다. 묘하게도
일상의 음악이 탈현실을 유도하는 셈이지요.
공간이동의 성질이 가장 큰 예술장르는 음악입니다. 음악이 실제로 보이는 세계가 아닌 보이지 않는 세계, 때로는 추상적인 세계를 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매우 감성적이고 추상적인 성격을 띤 음악이 뜻밖에도 논리적인 성질을 지닌 수학에서 출발합니다. 이성으로 감성을 담아낸 것이지요.
만물은 규칙적으로 반복하며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끝도 없고 소멸도 없죠. 봄이 지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겨울 다음에 다시 봄이 오니 말입니다. 피타고라스는 이렇게 주기적으로 순환하는 우주의 근원이 수에 있다고 파악했습니다. 우주와 수는 시간적 흐름, 즉 변화가 아니라 공간적인 변위의 속성을 띠고 있습니다.
시간의 흐름은 결국 마지막을 향해 갈 수 밖에 없어서, 죽음과 소멸이 곧 시간성의 속성입니다.
그러나 생명체가 살아 있음은 심장의 고동이 끊임없이 반복되기 때문이죠. 공간성은 생명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음악을 이루는 근본은 리듬입니다. 그렇다면 리듬은 어떻게 발생할까요? 리듬은 동일한 요소가 주기적으로 반복할때 나옵니다. 음악은 반복을 통해 소멸하지 않는 무한의 세계로 이끄는데,
바로 음악의 바탕이 리듬이기 때문입니다.
vivaldi - Concerto for two violins in A minor RV522
안토니오 비발디, <화성의 영감>, 협주곡 8번 A단조 알레그로
사제 서품을 받은 성직자이기도한 비발디의 여러 작품 가운데 12개의 협주곡으로
이뤄진 <화성의 영감>은 한정된 음들을 가지고서 무한한 음악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게 해줍니다.
20세기에 들어 사람들은 두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인류의 지성이 만든 각종 이념이 도리어 인간을 억누르는 광기와 폭력을 목도했습니다. 무한하게 발전하리라 믿었던 물질주의가 삶을 공황 속으로 밀어 넣기도 했지요. 이때 아르놀트 쇤베르크는 조성의 갑갑한 틀에서 벗어난 음악을 작곡합니다. 이른바 무조음악이 탄생합니다.
아르놀트 쇤베르크 <바르샤바의 생존자> by Czech Philharmonic Orchestra
현대음악을 이야기 할때 반드시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작곡가가 있습니다. 윤이상은 쇤베르크 무조음악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새로운 경지의 곡을 써서 현대음악의 지평을 넓힌 작곡가입니다.
윤이상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가사> by filip Saffray & Silva Gama
“배차 해드릴까요?”
방송작가가 물었고 나는 ‘설마 우리 집까지 차를 보내주겠다는 말인가?’ 하고 놀라면서 “네”라고 대답했다. 방송국에서는 정말 우리 집 앞까지 차를 보내주었다. 그것도 아주 커다란 스타렉스 차량이었다.
전에 해외에 있다가 귀국하자마자 바로 스튜디오로 가느라 방송사의 차량 지원을 받은 적은 있다. 하지만 이렇게 집으로 배차 서비스를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덕분에 영화 토크쇼 프로그램에 출연할 때에는 스타렉스 좌석 등받이를 뒤로 잔뜩 젖히고, 거의 드러누운 자세에서 편안히 방송국으로 향했다.
녹화는 오후 5시에 시작할 예정이었다. 집에서 오후 2시 반에 차를 잡아탔고, 오후 4시가 되기 조금 전에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오전에는 집을 청소하고 근력 운동을 했다. 점심은 굶었다. 대신 두유를 탄 홍차와 커피를 몇 잔이나 마셨다.
촬영장에 도착해서는 담당 방송작가와 대본을 최종 확인하고 화장을 받은 뒤 옷을 갈아입었다. 대기실에 도시락이 나왔으나 먹으면 졸릴 것 같아 먹지 않았다. 방송작가 한 명으로부터 인공눈물을 빌려 점안했다.
날씨가 우중충해서인지, 이제 내가 중늙은이어서인지, 녹화 직전까지도 마음이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거의 침울하다고 해야 할 정도였다. TV 교양예능 프로그램에 임하는 자세로는 매우 부적절했다. 뺨을 치며 “텐션 끌어올리자, 업, 업!”이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려봤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프로그램은 하루에 두 회분을 촬영했다. MC 두 사람과 고정 게스트 두 사람은 이미 한 회분 촬영을 마치고 지친 상태였다. 나는 그날의 두 번째 회차 촬영에 다른 게스트들과 함께 참여했다.
초보 방송인으로서 나는 다른 패널이 가볍게 나를 면박줄 때 말문이 막히거나 울면서 도망치지 않고 엉뚱하게나마 대꾸를 하는 수준의 능력이 있다. 그러면서 나 역시 다른 패널에게 면박을 주기도 한다.
초보 방송인으로서 내가 이런 토크 프로그램에 대해 아는 출연 요령 하나는, 하여간에 말을 많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가 뭐라고 말하면 끼어들어서 몇 마디라도 아는 걸 늘어놓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병풍마냥 멀거니 앉아 있다가 바보가 된 듯한 기분을 맛보며 귀가하게 된다.
아는 대로 그렇게 열심히 했다. 너무 열심히 했던 것 같다. 정신을 차려 보니 MC 두 사람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고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내용을 열심히 떠들어대고 있었다. 내게 ‘수다 모드’라는 버튼이 있어서 그게 눌려 있고 그 사실을 알면서도 제 힘으로는 그 버튼을 끄지 못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보통은 세 시간이면 녹화가 끝난다는데, 이날은 네 시간이나 걸렸다. 그다지 피곤하지는 않았고, 대신 몹시 착잡한 기분이었다. 돌아올 때에는 역시 방송국에서 제공한 스타렉스를 탔다. 창백한 가로등이 검은 도로와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휙휙 지나갔다. 내가 네 시간 동안 떠들어댄 말들, 끼어들었던 순간들을 곱씹으며 돌아왔다.
이것이 자의식 과잉에서 비롯된 건강하지 않은 증세임을 나는 알고 있다. 사람들을 만나 말을 많이 하고 온 날이면 자기검열을 하면서 자책감에 빠진다. 짧으면 한나절, 길면 며칠씩 그런다. 이날은 그 증세가 일찍 시작됐다. 자신에 대한 기준이 너무 높아서 벌어지는 일이며, 나르시시즘의 불쾌한 측면이다.
HJ가 마트에서 프라이드치킨을 사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화장을 닦으려고 세수를 할 때 그녀는 “비누로는 잘 안 지워져”라며 클렌저를 내밀었다. 치킨을 에어프라이어로 데우고, 냉장고에서 ‘스트레인저 댄 픽션’을 꺼내 마셨다. 캐나다 온타리오 주에 있는 맥주 회사 콜렉티브 아츠 브루잉에서 만든 포터 맥주다.
콜렉티브 아츠 브루잉은 지역 예술가들과 협업해 병이나 캔의 라벨을 만든다. 내용물이 같은 제품에도 다른 라벨을 붙이기도 한다. 내가 마신 캔에는 고양이 같은 두상에 눈이 세 개 있고 사막여우 같은 큰 귀가 달린 짐승의 얼굴이 검은 바탕 위에 그려져 있었다. 캐나다 워털루 시에 사는 로버트 카터라는 일러스트레이터의 작품이라고 했다.
눈 셋 고양이
그 고양이 주변의 어둠
그 안의 검은 술
포터와 닭튀김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 치킨을 먹다 남기고 찬장에서 캐슈넛을 꺼내 왔다. 어떤 맥주를 마시건 앞으로 마트에서 완제품 프라이드치킨을 사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전용 반조리제품들을 에어프라이어로 데워 먹는 편이 훨씬 더 맛있다. 에어프라이어를 경험한 이후 일반 술집들의 운명을 심각하게 걱정하게 됐다.
방송 녹화에 대해서는 별 말 없이 스트레인저 댄 픽션을 홀짝홀짝 마셨다. 얘기하면 HJ는 틀림없이 “괜찮아, PD들이 다 편집해줘”라고 위로해줄 테지. 그 말이 옳다. 나도 안다. 나는 내가 한 말들, 행동들을 너무 신경 쓴다. 그 버릇이 고쳐지지가 않는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평생 이러고 살겠지? 아, 지긋지긋해.
엄청나게 통렬하다. 감탄한 대목도, 본받고 싶은 지점도, 속시원한 부분도 많았다. 그런데 그토록 되풀이해서 욕을 퍼부을 정도로 문단을 증오할 필요까지야 있을까. 그냥 신경 끊으면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