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는 마음으로 집어든 책이었는데, 다소 딱딱한 편. 엘리자베스 로프터스 교수가 언급되어 반가웠다.
40층 주상복합건물, 층간소음으로 인한 갈등, 아파트로 상징되는 사회적 계급, 개고기. 지금 우리가 놀라거나 기분이 나빠지기에는 너무 익숙한 것들. 그야말로 SF 속을 살고 있구나.
병어회도 먹고 싶어지고 원조 필스너도 마시고 싶어지고 오아시스 도시에 가서 ‘내 육체도 기쁩니다’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변명처럼 시작하는 에필로그에는 기실 변명이 거의 없다.
쉽지 않았을 쓴 소리들을 용기 있게 한다. 탈북민이 통일시대의 다리 역할을 하지는 않을 것 같다든가, 정착지원 정책 수혜자들의 자립 각오가 크게 부족하다든가, 저소득층이 탈북민을 더 무시한다든가.
북한의 전력이 과장됐다는 주장은 잘 이해하겠다. 그런데 ‘전쟁에서 지지 않는 것’이 대북 안보의 의의였던 시대는 이미 지나지 않았을까. 도발을 억지하고, 충돌이 발생하더라도 최대한 피해를 줄이자는 것 아닌가.
이제 북한 경제는 사회주의는 아닌 것 같다. 주택 거래소가 생겨 부동산 매매를 할 수 있게 됐고, 많은 농장에서 가족 단위 경영제도 도입했다고 한다. 그 결과 빈부 격차와 부정부패는 날로 심해지고 있다고.
음모론자, 종교계의 성차별적 관습, 동물권, 결혼권, 이런저런 보상금의 모순 등에 정부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에 대해 조금씩 도발적인 아이디어들을 낸다.
저자는 연명 치료와 안락사에 모두 반대한다. 읽다 보면 이 문제가 윤리적으로 정말 모호한 영역에 있음을 알게 된다. 중간의 신앙 간증도 영 생뚱맞지는 않았다.
복잡계와 위상수학을 살짝 소개해 준다. “학교에 다니는 건 빳빳한 현찰을 많이 챙기기 위해서다, 덤으로 교양 부스러기도 건지고” 같은 명문도 나온다.
19세기 빈에서 상류층으로 태어나 2차 대전 중 눈을 감은 반듯한 평화주의자. 주변 세상은 점점 미쳐가기만 했다. 그럼에도 이 회고록을 읽다 보면 그가 누린 호사에 대한 부러움이 앞선다.
초인플레이션을 겪을 때 사람들이 오히려 인생의 참된 가치를 더 알게 되는 듯 보였다는 묘사가 기묘하면서 설득력 있다. 대중의 흥분에 휩쓸려 함께 전쟁 선동에 나섰던 지식인들의 행태는 그저 익숙할 따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