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에서 오래된 분식집 아닌가 싶었지만 막상 들어가니 젊은 청년 두 명이 활기차게 일하고 있었다. 계란김밥과 새우튀김,왕잡채김말이튀김,오징어튀김을 주문.
계란지단으로 꽉 찬 정성이 들어간 김밥은 아침에 미리 싸 놓은 듯 조금 차가웠지만 튀김은 주문 받고 다시 튀겨 나와 따뜻하고 바삭했다.
동생이 입양할 개를 정했다고 알려왔다. 지난번 경험을 교훈 삼아 이번에는 나에게 묻지 않고 전격적으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토이 푸들이었다. 너무 소형견 아닌가 싶었는데, 부모님이나 조카들이 좋다고 했을 테니 내 의견이야 뭐 중요할까 싶다. 언제 데려올지에 대해서는 동생은 말하지 않았고 나도 묻지 않았다. 밤에 멍하니 있다가 동생이 보내 준 강아지 사진은 다음날에야 봤다.
늦잠을 잤고, 몇 군데에 밀린 답장을 메일과 문자메시지로 보냈다. 그런데도 보내야 할 메일을 다 보내지 못했다. 가끔은 메일 답장하다가 인생이 다 지나간다는 생각이 든다. 기타를 조금 연습했고, 전화 영어 수업을 받고, 화장실을 청소했다. F 코드는 여전히 소리가 잘 안 났고, 처음에는 잘 되는 듯했던 D 마이너 7 코드도 이제 헤매고 있다. 점심에는 삶은 계란과 견과를 먹었고, 낮에는 빵집에 가서 고로케와 토스트를 사 왔다.
전에는 바닥과 화장실을 청소하는 요일을 정해 놨었다. 그런데 HJ가 부정기적으로 재택근무를 하게 된 이후로는 그렇게 요일을 정해놓고 청소를 할 수 없게 됐다. 바닥을 청소할 때에는 가구를 옮겨야 하니 HJ가 집에 있으면 청소하기 어렵다. 그녀도 옆에서 내가 청소하는 모습을 불편해 한다.
금요일에 HJ가 다음 주 재택근무 날짜를 알려주면 그 자리에서 ‘그러면 나는 무슨 요일에 바닥 청소를 하겠다’고 말한다. 그러지 않으면 결국 청소를 자꾸 미루다 하지 않게 된다. 다음 주에는 수요일에 바닥 청소를 할 계획이다. 미리 적어둔다.
화장실 청소는 HJ가 집에 있을 때에도 할 수 있다. 내가 청소하는 모습이 그녀에게 잘 보이지도 않고, 화장실이 두 개니까 청소하는 중에 볼 일을 볼 수도 있다. 이 역시 청소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날이 있으면 그 계획을 전날이나 당일 아침에 입 밖으로 말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미루게 된다.
한파가 몰아친 날이었다. 월말이라 칼럼과 단편소설 마감일들이 다가오고 있었는데 글은 거의 쓰지 않았다. 단편소설을 청탁해 온 잡지사에서 ‘마감이 다가왔다, 시간이 부족하면 말해 달라’고 물어왔기에 며칠 말미를 달라고 요청했다. 편집자는 ‘마감이 다가왔다’는 말을 하고 싶었고, ‘시간이 부족하면 말해 달라’는 말은 그냥 예의상 덧붙인 게 아닐까 싶었지만. 대강 구상은 해 놨는데, 썩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아니어서 애정이 안 간다.
얼마 뒤에 나올 소설집에 들어갈 단편 원고도 우편으로 교정지를 받아 저자 교정을 봐야 하는데 며칠째 손 놓고 있다. 역시 막판까지 참신한 구상이 떠오르지 않아 마음에 들지 않는 평범한 아이디어로 숙제하듯 쓴 소설이다. 그랬더니 원고를 다시 보는 일조차 내키지 않는다. 나 요즘 왜 이러나.
헬스장에서 달리기를 하고 돌아와서는 HJ와 맥주를 마셨다. 우리의 화제는 이번에도 한국 경제와 자산 투자였다. 낮에 사 온 빵과 집에 있던 가래떡을 안주 삼아 빅웨이브, 호가든, 스텔라 아르투아를 마셨다. 내 흐리멍덩한 정신 상태는 빅웨이브 캔 라벨에 그려진 시원한 하와이 바다 풍경과는 정반대였다.
빅웨이브는 하와이의 맥주 회사인 코나 브루잉 컴퍼니에서 만든 산뜻한 골든 에일이다. 나도 HJ도 좋아한다. 부드러운 질감에, 향이 곱고 깔끔하며 쓴 맛은 거의 없다. 이 회사는 맥주에 ‘하와이 정신’을 담으려 애쓴다고 한다. 이런 맥주는 화창한 하늘 아래서 하루 일과를 보람차게 마친 뒤에 꿀꺽꿀꺽 마셔야 하는 건데.
다음날에는 또 늦잠을 잤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맥주야말로 요일을 정해서 일주일에 두 번만 마셔야겠다고 다짐했다. 화요일, 토요일, 그리고 여행 가는 날에만 마시자. 내 간이 남들보다 튼튼한 것 같긴 하지만, 술을 마신 다음날에는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다. 술을 마시건 마시지 않건 잠자리에도 지금보다 일찍 들리라 다짐했다.
맥주에 미안해지지 말자
태양을 밝히고 파도를 일으켜라
그리고, 꿀꺽꿀꺽!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을 옆에서 지켜볼 때의 조마조마한 기분. 끝내 그들이 제대로 걷지 못할 것임을 알기에 예감하는 파국.
사제가 주인공인 소설들은 어떤 면에서 가장 반종교적이다. 신 없이 신성이 가능함을 보게 되기에. 그런데 섭리는 왜 스스로 실현되지 않고 인간 따위의 희생을 요구하는 걸까.
‘소설가의 인생책 함께 읽기’ 2탄에 관한 기사들을 소개합니다.
헤럴드경제 기사 읽기
줌파 라히리의 ‘저지대’, 엔도 슈사쿠의 ‘깊은 강’… 소설가의 인생책 함께 읽어요!
독서신문 기사 읽기
요즘이 수면 연구의 황금기라고 한다. 꿈은 대부분 최근 경험의 반영이고, 매트리스는 숙면과 별 상관이 없다고. 몽유병자들이 저지른 ‘범죄’가 상당히 많고 소름끼친다.
대중은 소외를 경험하며 ‘진정한 것’을 찾기 시작했고, 그러다 진정함을 과시하며 마케팅 전략으로 삼게 됐다. 오늘날 진정성 추구는 거대한 기만극이며, 우리는 관광객들이다.
‘어둡고 무겁고 혼미 한 느낌이 드는, 좀처럼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 인물들의 이야기.’ 한 단편의 화자인 소설가가 정신적 불륜 관계인 여성에게서 이런 작품 평가를 듣는다. 그 말을 그대로 이 소설집 전체에 대해 적용해도 될 것 같다. 「꿈은 사라지고의 역사」가 좋았다.
대체로 비참하게 살다 떠난 옛 문인들에 대해 읽다보니 글이고 삶이고 뭐고 다 허망해지는 기분. 송(宋)부터 청(淸)까지인 둘째 권은 나중에 읽기로.
HJ와 목포를 다녀왔다. 즉흥적으로 결정해 갑작스럽게 떠난 여행이었다. “기차를 타고 가면 목포가 의외로 금방이네, 1박 2일로 갈까?” 내가 제안했더니 HJ는 “그럼 자기가 계획을 짜”라고 말했다. 인터넷 지도와 여행 블로그들을 보면서 내가 짠 일정표는 아주 간단했다.
낮에 SRT를 타고 목포역 도착. 늦은 점심으로 꽃게 요리 먹음. 호텔에 감. 저녁에 수제 맥줏집에서 지역 맥주 마심. 둘째 날 낮에 목포해상케이블카 탐. 이번에도 늦은 점심을 먹는데 메뉴는 낙지 요리. SRT 타고 서울로 올라옴.
HJ는 그 계획표를 보더니 “잘 짰네” 하고 칭찬을 해주고 전국 5대 빵집(이런 말은 누가 지어내는 걸까?) 중 한 곳이라는 코롬방제과점에 들르는 일정을 추가했다. 새우바게트와 크림치즈바게트가 유명한 지역 빵집이라고 했다.
우리는 거의 계획대로 움직였다. 기차가 출발하기 20분쯤 전에 수서역에 도착했다. HJ는 공차에서 블랙 밀크티를 사고, 나는 편의점에서 스텔라 아르투아를 한 캔 사 마셨다. 기차에서 HJ는 내가 추천한 일본 추리소설들을 읽었다. 나는 전자책을 읽다가 멍하니 창밖을 보다가 졸다가 했다.
나는 먹을 걸 가리거나 음식에 조예가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남도음식은 좋아한다. 누군가 “목포에는 맛집이 따로 없다. 모든 집이 맛집이기 때문이다. 역전 식당에서 콩나물국을 먹어도 맛있다”고 자랑했는데 동의한다. 실제로 목포고속버스터미널에 있는 식당에서 콩나물국을 먹은 적이 있는데, 아주 맛있었다.
그냥 큰 욕심 없이 기차 타는 재미를 즐기고 남도음식이나 간단히 즐기고 오자 싶었다. 민어나 병어, 갈치는 제철이 아니라기에 먹을 음식으로 꽃게와 낙지를 골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꽃게와 낙지도 제철은 아니었다. 홍어를 먹을까 싶기도 했는데 옷에 냄새가 배어 돌아오는 길에 민폐가 될 것 같았다.
목포역에서 내려서는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식당에 갔다. 다른 것 없이 꽃게살비빔밥 2인분과 카스를 한 병 주문했다. 껍질을 다 발라내고 양념에 무친 게살만 담은 접시가 밥과 함께 나왔다. 매생이, 파래, 마른갈치조림 등 반찬도 푸짐했다.
나는 게살과 밥을 한 번에 비벼 먹고 HJ는 조금씩 섞어 먹었다. ‘이걸 먹기 위해 목포에 가야 한다’는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목포에 와서 먹어 보니 재미있고 좋네’ 정도의 맛? 우리 부부가 이 정도 여행은 돈 걱정 없이 즐기게 됐다 싶어 뿌듯했다.
식당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갔다. 택시 기사가 우리에게 목포에 뭐 볼 게 있어 왔느냐며 말을 붙였다.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요즘 먹을 만한 게 뭐가 있느냐고 물으니 그는 “제철 따위는 중요하지 않고 다 양념 맛”이라고 대꾸했다. 케이블카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았다.
호텔에서 몸을 씻고 잠시 쉬었다. 바다가 보이는 방이어서 HJ가 좋아했다. 나는 섬이 많은 서해 바다의 매력이 뭔지 잘 모르겠지만…. 수평선이 보이는 탁 트인 전망이 좋다, 나는. 침대가 두 개인 객실은 크기가 제법 컸다. 그런데 뜨거운 물은 나오다 말다 했다.
저녁께 신도심으로 걸어갔다. ‘파머스브루어리’라는 수제맥줏집에 가보고 싶었다. 전북 고창에 양조장이 있는 한국 수제맥주 회사 파머스맥주의 매장이다. 유달산 스타우트, 갓바위 엠버에일처럼 목포의 명물 이름을 따온 크래프트맥주도 판다고 했다.
별 기대 없이 찾아갔는데 가게 분위기가 너무 좋아 깜짝 놀랐다. 천장이 높은 복층 구조였는데 거리를 향하는 면은 커다란 통유리 창으로 되어 있어 개방감이 뛰어났다. 실내는 우리가 딱 선호하는 정도로 어두웠고 벽에 걸린 커다란 스크린에서는 고흐의 일생을 그린 애니메이션 영화가, 반대편의 조금 작은 스크린에서는 한국 액션 영화가 나왔다.
우리는 아래가 내려다보이는 2층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테이블 위에는 초가 놓여 있었는데 종업원이 불을 붙여주었지만 히터에서 나오는 바람 때문에 곧 꺼졌다. 우리는 샘플러를 주문했다. 맥주는 파머스 드라이, 필스너, 유달산 스타우트, 갓바위 엠버에일을 골랐다. HJ는 필스너와 갓바위 엠버에일이 맛있다고 했고 나도 같은 의견이었다.
종업원은 친절하고 동작이 빨랐다. 우리가 주문한 모듬 소시지 외에도 서비스라며 감자튀김을 가져다주었다. 소시지도 감자튀김도 아주 푸짐하고 맛있었다. 이것도 목포라서 그런 건가? 다이어트는 잠시 잊기로 하고 포크를 든 손을 부지런히 놀렸다. 샘플러 잔을 다 비운 다음에는 필스너와 헤페바이젠, 골든에일을 마셨다. 맥주들도 다 전용 컵에 따라져 나왔다.
기분 좋게 마시고 다시 숙소로 걸어왔다. HJ는 반신욕을 시작했고 나는 양치질만 한 뒤 침대에 누워 일찍 잤다. 오후 9시 반에 잠을 청했는데 다음날 오전 9시가 넘어 일어났다. 밖에 나가 커피를 마실까, 하고 HJ에게 물었으나 귀찮다고 했다. 그냥 객실에 있는 주전자로 물을 끓여 인스턴트커피를 마시고 느긋하게 샤워를 했다.
체크아웃을 하고 택시를 불러 목포해상케이블카 북항 승강장으로 갔다. 이 케이블카는 목포시가 오랫동안 준비한 야심찬 관광객 유치 프로젝트로, 재작년에 개통했다. 서비스를 개시하자마자 큰 인기를 모았고, 이제는 지역경제에 미치는 경제적 효과가 1000억 원에 이른다나? 그런 말도 ‘전국 5대 빵집’이라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실체 없게 들리지만.
케이블카에 대한 내 감상도 꽃게살비빔밥에 대한 감상과 같았다. 그걸 타기 위해 목포에 갈 필요는 없지만 간 김에 타 보면 재미있고 좋다는 것. 우리는 일반 캐빈보다 5000원이 더 비싼 크리스털 캐빈에 올랐다. 아래 바닥이 투명 창으로 되어 있는 객실이었는데, 타고 보니 전망을 즐기기에는 일반 캐빈도 충분해 보였다.
해상케이블카 정류장은 북항, 유달산 정상 아래, 고하도, 이렇게 세 군데에 있었다. 우리는 북항에서 타서 유달산 정류장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고 고하도로 갔다. 유달산은 작은 규모 치고는 둘러보기에 풍광이 괜찮은 바위산이었고, HJ는 유달산과 고하도 사이의 좁은 해협 경치도 아름답다며 감탄했다.
고하도에서는 케이블카 승강장에서 500미터쯤 떨어진 전망대에 올랐다. 판옥선을 쌓아놓은 형태로 만들었다는 디자인이 독특한 전망대였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는데 우리는 그냥 운동화 차림이었기 때문에 천천히 걸어 올랐다.
전망대는 5층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없고 대신 계단 옆에 ‘끝까지 올라간 보람을 느끼게 해드립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해가 질 때 왔더라면 더 아름다웠겠다 싶었다. 섬 남쪽의 해안데크 길을 걸어볼까 했으나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 포기했다.
내려올 때에는 ‘보행약자용 등산로’라고 적힌 우회로로 왔는데, 그 길이 더 미끄럽고 걷기 힘들었다. 그런데 전망대보다 보행약자용 등산로의 경치가 더 아름다웠다. 길이 좁고 나무에 눈이 쌓여서 눈앞이 온통 하얬다. 사람도 거의 없었다. HJ가 감탄을 거듭하는 바람에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당초에는 점심을 목포역 근처의 낙지전문점에 가서 먹을 생각이었으나, 계획을 바꿔 고하도 케이블카 승강장에 있는 푸드코트에서 먹었다. 그곳 전망이 굉장히 멋졌고, 지역 요리 메뉴도 있었고, 손님이 없어 한적했기 때문이다. ‘목포에서는 어느 식당이나 다 맛있다고 하니 푸드코트도 맛있겠지’ 하는 마음도 있었다.
연포탕과 꼬막비빔밥을 먹었는데 맛이 괜찮았다. 느긋하게 먹고 내려오다 유달산 승강장에서 다시 내려 커피를 마셨다. 북항 승강장에서 택시를 불러 코롬방제과점에 갔고, 거기서 새우바게트와 크림치즈바게트를 샀다. 유당불내증 때문에 생크림이나 치즈를 먹지 못하는 나는 새우바게트만 맛을 봤는데 무척 맛있었다. 하지만 HJ는 나와 의견이 달랐다.
그렇게 짧은 목포 여행을 마무리했다. SRT에서 HJ는 요네자와 호노부의 단편집 『진실의 10미터 앞』을 읽다가 표제작에 감동받아 눈물을 글썽였다. 나는 롤프 도벨리의 『불행 피하기 기술』을 읽었는데 동의하는 부분도 있고 아닌 부분도 있었다. 집에 돌아와 바게트로 저녁을 대신했다. 기타 연습을 하겠답시고 조율을 하다가 줄을 끊어 먹었다.
목포에 왔습니다
산은 케이블카로 오르는 게 좋아요
맛있게 먹고 잘 놀다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