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22일(음력 11월 29일) 19시 29분에 '수북강녕'에서 1시간 29분보다 좀 더 긴 시간동안 <매핑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해주신 작가님들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참석해 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그믐밤 5회 이야기는 아래에 있습니다.
남쪽으로 튀고 싶다.
최근 몇 주동안 나쁜일이 계속 겹쳐서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대책없이 낙관적인 오쿠다 히데오 책을 집어들었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15년전쯤이고, 그 때도 앞날이 막막해서 대책없는 낙관이 필요했었다.
남쪽으로 도망가면 좀 나아질까?
한 명의 청년이 또 죽었다. 꿈도 미래도 많았던 청년이 죽었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죽음이지만 누군가에겐 그냥 한 사람이 죽었을 뿐이다. 소모품에 보낼 위로의 감정 따위는 사치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애도는 시간 낭비일지도 모르겠다.
<쇳밥일지>를 읽으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왜 올해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모든 후보가 지역이란 말을, 균형발전이란 말을 하지 않았을까. 왜 대한민국의 청년은 수도권에 거주하며 인서울의 대학에 다니는 엘리트로 한정되어야 하는가. 쇳밥일지는 “이곳에도 청년들이 살고 있어요”라고 얘기하고 있었다.
어김없이 선거는 끝났다. 선거기간에 약속한 많은 청년 관련 공약은 올해 정부 예산안을 보면 그들의 의지를 알 수 있다. 삭감 삭감 삭감…과거 우석훈 교수는 “20대여, 토플책을 덮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라고 얘기했다. 우석훈 교수가 그 얘기를 한 2000년대 초반의 시대적 맥락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럼 지금 2020년의 시대에 20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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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잘모르겠다.
높임말의 가치
우리말에는 특이하게 높임말이라는 윗사람을 존중하는 표현이 있다. 단순히 존중을 표현하는 어구가 있는게 아니라, 정확한 표현과 어순이 존재한다. 이러한 존비어 문화가 존재하는 언어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며 존비어의 존재 또한 차츰, 존중의 의미로 변화해 가는 추세이다. 하지만 유독 대한민국 국민은 높임말에 민감하다. 하지만 이런 높임말이 정말로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그리도 그에 대한 다른 방안이 있는지에 대해서 고민해 보았다.
모임원 분이 높임말이라는 것 자체가 굉장히 큰 코스트를 소모한다는 의견을 내었다. 이는 단순히 문장이 길어지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존중을 위해서 우리가 높임말을 사용하다 보면 이 존중의 의미에 더 초점을 두게 된다는 것이다. 흔히 문장을 온전히 완성해야 하는데 사회초년생들의 경우, 그리고 계급이 명확히 구분되는 경우 이런 실수가 더 자주 일어난다. 대한민국 국적의 남자들은 대부분 군대라는 계급사회를 겪는다. 그리고 이 계급사회에서 종종 나오는 괴상한 문장들이 생겨난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오병장님, 김상병님, 아니 김상병이 그 뭐랬더라.. 예.. 그.. 오늘 저녁 밥 먹냐고 물어보라고 했습니… 하셨습니다.”
난 처음 이 말을 듣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일단 압존법(더 높은 사람 앞에서는 낮은 사람의 호칭에 ‘님’ 등의 높임말을 빼는것)을 어겨서 인상을 잔뜩 쓴 상황이기는 했지만, 그 뒤에 저녁 식사를 쿨하게 밥으로 바꿔서 말하면서 또 문장제체를 높일지 말지 고민하는 후임의 얼굴에서 엄청난 피로와 고통을 보아서이기도 하고, 매번 혼나면서도 이놈은 어떻게 한번을 안고쳐 질까 싶어서 이기도 했다. 그 이후에 그당시 오병장이 칼춤 춘 이야기는 생략하고 본론으로 넘어가자면, 어쨋든 높임말은 앞뒤 내용보다 그 높임말 자체에 집중하게 되는 것 뿐만 아니라 사용에 있어서 다양한 환경에 적합하지도 않고, 그저 식사 할거냐라는 짧은 핵심어를 길게 늘이는 효과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명백한 문장과 의사소통의 낭비임이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높임말의 이러한 부정적인 부분 외에도 중요한 가치가 있다. 높임말에는 존중의 의미가 담겨 있는데, 국내에서는 이러한 존중의 의미를 표현하는데에 높임말은 중요한 커뮤니케이션의 방법이다. 그리고 이러한 존중의 의미는 성인 뿐만 아닌 이 한국어를 사용하는 모두에게 전달되거나, 내포되어서 전해지고 있다. 즉, 한국인은 무의식중에 존중이라는 문화를 언어를 통해서 많은 부분을 할당하고 있으며 습득하고 있다는 것이다. 종종 높임말이 아닌 말을 들었을 때 우리가 기분이 나쁜 이유를 모임원들은 하나같이 존중이 없어보여서로 이야기해 주었다. 이러한 대한민국의 사람들이 느끼는 존중의 가치는 꽤나 중요하다. 아마도 바디랭귀지나 행동에서 나타나는 타국의 존중의 의미를 우리는 대부분 언어로서 할당했기 때문이 아닐까. 라고 추측해 본다.
감정의 목표
모든 동물은 성교 후 우울해 진다고 한다. 어쩌면 이 말이 현자타임을 말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이 라틴어 수업에서는 우리가 거대한 목표(사랑하는 이성과 관계를 맺는 것이 거대한 목표라는 것임에는 틀림없는걸까.)를 이루고 나면 우울함이 찾아오는 것을 표현한다고 한다. 그래서 모임원들에게 비슷한 경험이 있는지 물었다.
모임원들은 두 파로 나뉘었다. 한쪽은 목표를 이루면 행복하지 왜 우울하느냐 라는 이 감정을 이해 못하겟다는 파와 목표를 이루고 나면 한동안 우울하지 않기 위해 도리어 일을 계속 해나간다는 파로 나뉘었다. 그리고 일을 계속 해 나감으로서 우울함이 찾아올 여유가 없게 만든 다는 것이다.
다만, 모두가 우울함이 찾아 올 수 있다는 것에는 일부 동의 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우울함이 찾아오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해 보았다. 다양한 이유로 고민해 볼 수 있는데, 필자는 이 우울함의 이유는 감정의 역치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평상시 높은 카타르시스를 느낄일이 잘 없으니 무언가 오랫동안 해온 것을 성취해 내고 나서 느끼는 카타르 시스 뒤에 찾아오는 평온함으로 돌아올 때의 역치에 의해서 우울함으로 이를 착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다른 모임원은 인간은 성장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목표를 잃게 되면 우울함이 찾아오도록 설계되어 잇는 것은 아닌지, 라는 조심스러운 답변을 내 놓았는데 매우 매력적이고 재미있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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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모임 Reading 에 참여하고 싶다면 _ www.litt.ly/oddity.
1990년대 초반 미국을 휩쓸었던 거짓기억증후군에 대한 책. 수많은 여성들이 ‘패스트푸드식 가짜 심리치료’를 받다가 어린 시절의 가짜 성폭행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마녀사냥이 시작되었다. 기억에 관한 책이자 과학자의 용기에 대한 책이고, 돌팔이 의료행위에 대한 고발서이자 맹신과 회의주의에 대한 우화이기도 하다.
가끔 위화가 소설가가 아니라 마법사 아닐까 생각한다. 어떻게 그렇게 쉬우면서도 심오하고, 웃기면서도 슬픈 작품들을 쓸 수 있을까. 나 혼자 ‘위화적인 순간’이라고 부르는 시간들이 있다. 너무 재미있고 뒤가 궁금한데, 갑작스럽게 가슴이 미어져서 책장을 잠시 덮고 마음을 추슬러야 하는 시간. 그의 책을 읽고 나면 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저절로 다짐하게 된다. 주변 사람들에게 잘하자. 불행을 담담히 받아들이자. 잔인해지지 말자. 전쟁을 막자. 『원청』에는 위화적인 순간이 무척 많았다. 책장을 덮고 눈을 감았다가, 인물들의 운명을 알고 싶어 다시 펼치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한국문학번역원 발행 영문 계간지 Korean Literature Now 58호에 과거 독서모임 했던 경험과 그믐을 시작하게 된 계기, 그 밖의 그믐의 여러 이야기를 '문학적 경험'이라는 큰 주제 아래 부족하나마 적어 보았다.
마침 번역을 맡아 주신 분이 정슬인 번역가님이라 반가웠다.
‘흑뢰성’은 책걸상 팟캐스트를 통해서도 추천을 듣고 최근 읽은 격월간 미스테리아에서도 나오고 해서 읽기 전부터 제목이 익숙한 책이었다. 불야성 (하세 세이슈 작)처럼 일 본 뒷골목 야쿠자들의 생존기를 그린 책인가 싶었지만 배경은 옛날 옛날 전국시대. 오다 노부나가가 한창 땅따먹기에서 승전보를 울리고 있던 시기, 그에 맞서 한 성을 지키는 성주의 이야기를 그렸다.
워낙 기대를 가지고 읽어서인지 크게 울림 있는 부분은 생각보다 적었다. 두께가 꽤 두껍지만 내용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동안 성 안에서 일어난 네 개의 수수께끼를 푸는 방식이라 장편소설보다는 연작소설 느낌이다. 개별 개별 재미있지만 이 정도 두께감 있는 추리소설을 읽고 난 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밀물처럼 다가오는 뭐라 정의할 수 없는 커다란 감정들은 없었다.
472쪽
저희는 다만 죽음으로도 그 고통이 끝나지 않을까 봐 두려웠습니다.
정보집약적인 산업, 확장불가 능한 게이트키퍼가 있는 산업, 고도로 분화된 산업이 플랫폼 혁명으로 타격을 입을 거라고 한다. 출판이 여기에 해당하고 교육과 의료는 더 그렇다. 규제가 많고 실패 비용이 높으며 자원집약적인 산업은 플랫폼 혁명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한다. 플랫폼에 적합한 새로운 규제 방식―예컨대 ‘규제 2.0’―을 도입해야 한다고 제안하는데, 분명 논의해야 할 일이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읽기 재미있다. 다음 세상을 만들려면 먼저 그걸 상상해야 한다. 16세기 인문주의자의 소망 중에는 21세기에도 절실한 제도가 있는가 하면 황당무계하게 들리는 내용도 있다. 결혼하기 전에 남녀가 서로 옷을 벗고 신체에 하자(?)가 없는지 확인한다든가. 전쟁에 대한 유토피아의 태도는 매우 마키아벨리스러우면서 설 득력 있다. 유토피아에는 노예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