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을 통해 <빅 히스토리>의 기본 틀을 가늠해 보게 하네요.
과거 전체를 보다
과거를 이해하는 양상은 20세기 중반부터 바뀌기 시작했는데 이유 중 하나로 크로노미터* 혁명에 있다.
(*크로노미터 : 천문 관측·경위도선 관측·항해 따위에 쓰던, 정밀도가 높은 휴대용 태엽 시계. 온도, 기압, 습도 따위)
과거 사건들의 연대를 측정하는 신기술(방사성 연대 측정법)로 인해 문자 기록에 언급되지 않은 사건들, 지구 생명과 우주의 기원을 이어지는 사건들의 절대 연대를 알게 되었다.
지난 수천 년 동안의 인류 역사만 살펴보는 대신 생물권, 지구, 우주 전체의 역사를 포함하는 100억 년이 넘는 과거를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빅 히스토리
빅 히스토리의 핵심과제는 과거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우주가 시작된 순간까지 거슬러 올라가 시간의 역사 전체를 재구성하는 일이다.
이제 과학에 토대한 새롭고 보편적인 역사를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 모든 인류 사회를 포함하고 그들의 역사를 지구와 우주의 더 큰 역사와 결합한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기본 구조 - 복잡성
우주가 시작된 이후 138억 년 동안 점점 더 복잡한 것들이 출현해왔다. 복잡한 것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는 새로운 특성을 생성하도록 배열되어 있다. 이 새로운 특성을 창발성(emergent property)*이라고 한다.
(*창발성 : 하위 계층(구성 요소)에는 없는 특성이나 행동이 상위 계층(전체 구조)에서 자발적으로 돌연히 출현하는 현상)
복잡성의 5가지 특징
- 구성요소가 다양하다: 복잡한 것은 다양하고 수많은 구성요소로 이루어진다.
- 정확한 구조 안에 배치되어 있다 : 구성요소들이 정해진 방식으로 정확하게 결합되어 있다.
- 새롭거나 창발적이다 : 구조가 형성되는 방식에 따라 독특한 특성이 출현한다.
- 딱 맞는 조건에서만 출현한다 : 알맞고 완벽한 골디락스 조건에만 나타난다.
- 에너지의 흐름을 통해 결합되어 있다 : 특정 복잡성의 유형은 에너지 흐름에 달려 있다. 에너지 흐름을 없애면 그 복잡성은 차이점을 빚어내는 창발성을 잃는다.
기본 틀 - 빅 히스토리의 8대 문턱
전혀 새로운 것이 출현하는 주요 돌파구가 된 사건은 138억 년간의 역사에서 8번 일어났다. 이를 문턱(threshold)이라고 한다.
문턱은 새로운 무언가와 마주치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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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만 읽는데도 낯선 용어가 많아요.
핵심은 8대 문턱을 넘어가는 과정을 알아가는 것이 빅 히스토리인 것 같아요.
8대 문턱 요약 표를 보고 이제부터 한 장씩 역사의 변화의 문턱을 넘어가야 하겠죠.
역사인지 과학인지 어렵게만 느껴지지만 새로운 관점의 역사를 알게 될 거라 믿어요.
특히 서문에서 연대표기가 특별히 눈에 띄네요.
표준 기준은 기원전을 뜻하는 BCE[공통 시대(before the Common Era)]와 기원후를 뜻하는 CE[공통 시대 (Common Era0]다. 공통 시대는 약 2,000년 전에 시작되었으므로, 서양에서 사용해온 연대 표기법인 BC[그리스도 이전(before christ)]와 AD[그리스도의 시대(in the year of the Lord)]와 같은 날짜를 뜻한다. 이 표기법의 장점은 특정 문화를 적게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22쪽
BCE, CE라는 용어를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네요.
역사를 점점 평등하게 기술하려고 노력하는 시도이겠죠. 서문에서 역사 기술의 문제점을 조금이나마 줄여보려고 노력한 시도라 여겨져요.
이런 의도를 갖고 시작하는 빅 히스토리이니 이전의 역사와는 다른 관점을 보여주리라 짐작돼요.
새롭게 배워야 할 것도 많겠지만 새로운 관점에 눈 떠보고 싶어요.
앤솔로지에 실을 단편의 2차 저자 교정을 마쳤다. 생활지 칼럼 원고와 메일링 서비스용 에세이도 각각 써서 보냈다. 밀렸던 이메일 답장도 전부 보냈다. 중요한 용건이 있는 내용들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속이 시원했다.
설 연휴 첫날에는 HJ와 처가에 갔다. 낮에 집에서 사과를 한 알 깎아 먹고 점심께 조금 넘어 출발했다. 처가는 우리 집에서 지하철로 30분 정도 거리에 있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동안 HJ는 최근 어느 배구 선수가 화제에 오른 사건을 설명해주었다.
HJ는 배구나 농구 같은 종목 선수들의 신구 세대 갈등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었다. 과거의 영광을 기억하는 왕년의 스타들이 업계를 부흥시키겠다고 이런저런 시도를 하고, 신세대 선수들은 그런 모습을 시큰둥하게 바라보고, 왕년의 스타들은 거기에 서운해 한다는 내용이었다.
양쪽이 조금씩 이해가 되기도 했고, 처음에는 언론의 호들갑 아닌가 싶었던 한국판 사토리 세대가 실제로 등장해서 이미 널리 퍼져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 생각하다 보면 퍽 냉소적인 결론에 이른다.
이 사회의 미래에 대해 우울한 상상도 한다. 증시나 부동산 시장에서 내년쯤 사소한 사건이 방아쇠가 되어 거품이 터지고 본격적으로 일본 같은 장기불황이 오지 않을까? 지금 이런 사회 경제 상황이 과연 정상인가? 나는 내가 내심 그런 파국을 기대하고 있음을 깨닫고 두려워한다.
춥지는 않지만 흐린 날이었다. 지하철역에서 내려 처가로 걸어가는 길에 아파트단지 하늘에서는 까마귀 한 마리가 불길하게 울어대며 낮게 날아다녔다. 들어주는 다른 새도 없는 것 같은데 왜 저렇게 우는 걸까. 그 영역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건가. 짝을 부르는 걸까. 그저 감탄사일까.
빌딩 경비원으로 일하시는 장인어른은 출근해서 댁에 안 계셨고, 장모님만 계셨다. “아버님이 일하는 건물은 설에도 문을 여나요?” 하고 물으니 그렇단다. 장모님은 라디오로 올드 팝을 듣고 계셨다. 늘 라디오로 팝송을 들으신다. HJ도 그렇다.
장모님, HJ, 나, 이렇게 세 사람이 이른 저녁을 먹었다. 분식집을 운영하기도 했던 장모님은 요리 솜씨가 좋다. 떡국, 갈비, 전을 해주셨고 맛있게 잘 먹었다. 우리가 목포에 갔던 이야기, HJ가 이직하려는 이야기 등을 했다.
떡국을 배불리 먹고 졸려 하는 나를 보고 HJ가 안방에 들어가 자라고 했다. 장모님도 그러라고 계속 권해서, 조금 쑥스러웠지만 방에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눕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다. 한 시간쯤 지나 눈을 떴을 때 내가 어디에 있는 건지 몰라 잠시 혼란스러웠을 정도로 깊이 잤다.
그렇게 식사를 하고 낮잠까지 잔 다음 HJ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장모님 댁 근처에 있는 작은 천변을 걸었다. 좁은 개천에는 오리가 많았고,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는 왜가리도 보았다. 주변은 온통 고층아파트였는데, 사람에게도 새에게도 너무 작은 숨통이었다. 몇몇 아파트 단지에 리모델링주택조합이 승인됐다며 자축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이 동네는 재건축이 아니라 리모델링이 인기인가?
2킬로미터 남짓 걸어 다음 지하철역이 있는 곳까지 갔다. 거기서 지하철을 타고 HJ는 친정으로 돌아갔고, 나는 혼자 집에 왔다. HJ는 하루 묵고 다음날 아버지, 동생과 점심까지 먹고 올 예정이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파운더스 포터와 다른 맥주들을 마셨다. 책도 안 읽히고 달리 손에 잡히는 일도 없어서 볼 만한 영상 없나 하고 넷플릭스를 뒤적거렸다. 옛날 영화들을 조금씩 보다 말았다. 《다이 하드 3》와 《인디아나 존스》였다. 《다이 하드 3》는 대학생 때, 《인디아나 존스》는 중학생 때 봤다. 두 편 모두 다시 봐도 재미있었다.
파운더스는 흑맥주를 잘 만들기로 유명한 미국 브루어리고, 파운더스 포터도 맥주 리뷰 사이트들에서 평가가 아주 좋다. 커피와 다크초콜릿 향이 강하고, 쓴 맛과 단 맛이 동시에 난다. 병 라벨에는 검은 드레스를 입고 검은 모자를 쓴 여인이 그려져 있고, 그 아래 ‘다크, 리치, 앤드 섹시’라고 적혀 있다.
그 라벨을 보고 나는 왠지 안나 카레니나를 떠올리는데, 민음사판 『안나 카레니나』의 표지 그림과 닮아서임을 조금 뒤에 깨닫는다. 무슨 관련이라도 있나? 인터넷을 검색해봤지만 라벨의 그림에 대한 정보는 찾지 못하겠다. 민음사판 『안나 카레니나』의 표지 그림은 러시아 화가 이반 크람스코이의 작품인 《미지의 여인》이라고 한다.
까마귀는 깍깍
검은 옷 여인의 신비한 미소
달콤한 붕괴의 향기
다음날 낮에는 HJ가 돌아오기 전에 청소를 했다. 점심은 걸렀다. HJ는 장모님이 싸주신 반찬을 잔뜩 들고 오후에 돌아왔다. 지하철역까지 마중을 나갔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반찬통을 열어 전과 나물을 데워 먹고 또 잤다. 자고 일어나서 세탁을 했다.
“엄마는 자기가 든든히 먹고 푹 자는 모습이 그렇게 보기 좋았나봐. 밥집으로 여기고 자주 오라더라.” HJ가 전해주었다. 민망해하면서 방으로 들어가더니 바로 곯아떨어져 한 시간이나 자는 내 모습이 자기는 웃겼다고도 했다.
2006년에 발간되었으니 이제는 이 책 자체가 사료로서 가치를 지니게 됐다. 무려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가 나오기 전에 인터넷과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해 사람들이 어떤 상상과 우려를 했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인터넷과 민주주의의 관계는 여전히 오리무중인데 책을 발간한 삼성경제연구소는 기관 이름을 바꿨고 이런 연구에세이도 더 내지 않기로 했다. 그야말로 격세지감. 유용한 시리즈였는데.
평화롭게만 보이는 미국 교외가 자동차가 없는 십대나 빈곤 계층에게는 유배지나 다름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동차가 처음 보급될 당시 사망 사고를 낸 운전자는 살인죄로 기소됐다. 도로가 넓은 도시는 소방차가 길을 다니기 쉬운 만큼 소방서가 주거 구역에서 멀어서 화재 사망자 수가 다른 지역과 별 차이가 없다. 면적을 기준으로 삼으면 대형 마트보다 지역 상점 밀집가가 더 많은 일자리를 제공한다.
그믐북클럽 1기의 20인에 당첨되는 영광이 ~ 행복합니다. ㅎㅎ
묵직한 책을 받고 깔끔한 이미지의 스티커로 메모할 노트도 준비했다.
작년에 읽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이후 오래간만에 두꺼운 책을 읽어본다.
그믐이라는 기간 동안 부지런히 읽어갈 것을 다짐하며 아자아자 화이팅!!!!
* ‘인권연대 숨’ 소식지 2022년 12월호 ‘현경이랑 세상 읽기’ 꼭지에 실린 글입니다.
제목: 감았던 눈을 와짝 뜰 때 / 글쓴이: 박현경(화가)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밤이 어두웠는데
눈 감고 가거라.
가진 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거라.
발부리에 돌이 채이거든
감았던 눈을 와짝 떠라.
- 윤동주, <눈 감고 간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간단한 명상을 하고, 뜨끈한 두유를 마시며 책을 읽거나 일기를 쓴다. 고양이들 아침밥과 물을 챙겨 주고, 고양이들 화장실을 청소해 준다. 요가원에 가는 날은 요가를 하며 땀을 흠뻑 흘리고 집에 와, 천천히 점심밥을 지어 먹는다. 요가복을 빨아 널고 오후 작업을 시작한다. 요가원에 가지 않는 날은 아침 일찍부터 작업에 들어가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날의 작업을 마치고 시간이 남으면 걸어서 남편의 카페에 간다. 차 한 잔을 홀짝이며 전시 준비 일을 한다. 아침, 저녁, 밤마다 꼬박꼬박 약을 챙겨 먹고, 스스로가 많이 평온해졌음에 감사한다.
휴직 중인 나의 일상. 하루하루가 너무 소중해 가슴이 저리다. 깨뜨리고 싶지 않은 안온함이다. 그러나 이 안온한 이불 속에만 푹 파묻혀 밖에서 누가 무슨 일을 당하는지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과연 진정한 평화일까.
세속의 모든 일들에서 몸과 마음을 끊고 진정 자유롭고 진정 평화롭게 살겠노라 마음먹은 때가 있었다. 그때의 나에게 정치는 관심을 끊어야 할 지저분한 일로 여겨졌고, 거리에서 시위하는 사람들은 마음의 평화를 찾지 못한 채 분노에 휩싸인 이들로 여겨졌다. 오래 전 일이다. 그때의 내 자신이 진심으로 부끄럽다.
내가 수도원과 성당에서, 미사와 책들 속에서 그토록 목마르게 찾아 헤매던 하느님, 그분이 바로 거리에 계시고 사람들 사이에 계신 걸 늦게서야 알아보았다. 국가가 제 할 일을 하지 않아 춥고 억울하게 죽어 간 사람들, 국가가 공권력으로 짓밟은 이들, 자본의 논리 속에 위험으로 내몰린 노동자들, 그들의 일이 도무지 남의 일로 여겨지지 않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내 안온한 일상의 루틴을 깨고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으로 나가게 되었다.
10.29 참사로 희생된 분들에게도, 세월호 참사 희생자분들에게도, 故 백남기 농민에게도, 故 김용균 노동자를 비롯해 노동 현장에서 참사를 당하신 모든 분들에게도, 깨뜨리고 싶지 않은 소중한 일상이 있었을 것이다. ‘밤이 어두’운 가운데 삶이 더 춥고 더 팍팍해진 모든 이들에게, 지키고 싶은 따스한 삶이, 소박하고 안온하고 따스한 삶이 있을 것이다. 내가 나의 소중한 일상, 소박하고 안온하고 따스한 삶을 살아갈 때 이 이웃들을 떠올리고 이 이웃들과 함께 분노하게 되는 이유이다.
윤동주 시인이 시에서 말했듯, ‘밤이 어두웠’기에 ‘눈 감고 가’는 시대이다. 여기서 ‘눈 감고 가거라’의 의미를 나는, ‘의연하게 가라, 내면의 힘으로 가라’는 의미로 이해한다. 시대의 고통을 외면하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가진 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거라.’라고 했다. 오늘 내가 이웃과 연대하기 위해 하는 조그만 일 하나하나가 바로 ‘가진 바 씨앗을 뿌리’는 행위가 아닐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은 ‘감았던 눈을 와짝 떠’야 할 시기이다. 발부리에 차이는 돌이 너무나 사납다. 사나운 돌에 차인 발부리가 뼛속까지 아프다. 10.29 참사 희생자 유족분들의 뼈아픈 절규가 지금 우리 사회의 현실을 말해 준다. 슬프다고, 심란하다고 외면하며 내 일상의 안온함만을 챙길 때 나는 비극이 되풀이되는 데에 어떤 방식으로든 일조하고 있는 게 아닐까. 지금은 ‘감았던 눈을 와짝 떠’야 할 때, 눈을 뜨고 연대해야 할 때, 조그만 몸짓으로라도 행동해야 할 때. 오늘 나의 일상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그림_박현경, 「네가 보고 싶어서 2」
10.29 참사 희생자를 추모합니다.
* ‘인권연대 숨’ 소식지 2022년 11월호 ‘현경이랑 세상 읽기’ 꼭지에 게재된 글입니다.
제목: 몸 / 글쓴이: 박현경(화가)
1. 타인의 몸
매주 한 번씩 누드 크로키 모임에 참여해 그림을 그린다. 1분 또는 3분마다 바뀌는 포즈에 따라, 한눈팔 겨를 없이 모델을 관찰하고 선을 그으며 몰입의 시간을 보낸다. 그러면서 느끼고 또 느끼는 것. 아름답구나. 있는 그대로 참 아름답구나. 마른 몸은 마른 대로, 살찐 몸은 살찐 대로, 배 나왔으면 배 나온 대로, 안 나왔으면 안 나온 대로, 흉터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여자든 남자든 어떤 성별이든……. 아름답지 않은 몸은 어디에도 없구나. 흔한 레토릭으로 주워섬기는 말이 아니라, 경험을 토대로 진심을 다해 증언하건대, 아름답구나. 있는 그대로 참 아름답구나. 이렇게 느끼며 끄덕이다 보면 생각은 자연스레 ‘나의 몸’으로 향한다.
2. 나의 몸
고백하건대 ‘날씬한 몸’에 대한 집착과 동경은 언제나 내 두뇌를 채우고 있었다. 살찐 몸에 대한 열등감이 극심했던 고등학교 때부터, 살 빠진 몸을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 이십 대와 삼십 대 내내. 심지어, ‘날씬함을 미의 기준으로 내세우는 사회ㆍ문화적 현상이 여성들을 옥죄고 있으나 여러분은 이에 휘둘리지 말고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내가 가르치던 여고생들 앞에서 열변을 토하던 때에도, 정작 나 자신은 몸무게와 칼로리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내가 몸무게 걱정도 칼로리 계산도 집어치우게 만든 강적을 만났으니 이는 바로 우울증이다. 우울증이 가장 심했던 기간인 올해 5~6월에는 평소에 하던 산책이나 운동도 다 집어치우고 거의 집안에서만 지냈으며, 집안에서도 가만히 누워 있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길었다. 그 여파였을까? 몸매가 달라지고, 전에는 잘 맞던 옷들 중 더 이상 맞지 않아 못 입는 옷들이 부쩍 늘어났다.
몇 주 전 몸무게를 재어 보니 일 년 전 몸무게에서 10kg 정도가 늘어나 있었다. 바로 이십 년 전 내 고등학교 때 몸무게로 돌아간 것이다. ‘나는 뚱뚱하고 못생겼다’는 열등감에 시달리던 고등학교 때. ‘결국 돌고 돌아 이 몸무게야?’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스스로가 대견하기도 했다. 살이 쪘다는 사실을 제법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 점에 대해서 말이다.
물론 지금은 지난 5~6월과 달리 매일 산책도 하고 운동도 한다. 하지만 이건 몸무게에 대한 조바심 때문이 아니라 내 몸과 마음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다. 나는 이제, ‘지금 이 상태 그대로’ 괜찮다는 걸 알고 있다.
3. 벗은 몸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맨몸으로 전신 거울 앞에 선다. 누드 크로키를 할 때 모델을 관찰하듯 내 몸을 관찰한다. 그러면서 느끼고 또 느끼는 것. 아름답구나. 있는 그대로 참 아름답구나. 마른 몸은 마른 대로, 살찐 몸은 살찐 대로, 배 나왔으면 배 나온 대로, 안 나왔으면 안 나온 대로, 흉터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여자든 남자든 어떤 성별이든……. 아름답지 않은 몸은 어디에도 없구나. 있는 그대로 참 아름답구나. 내 몸도 그러하구나.
이십 년 전의 나 자신을 만날 수 있다면 말해 주고 싶다. 너는 참 아름답다고. 너의 몸은 참 아름답다고.
4. 우리의 몸
참 많은 사람들이,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몸이 아름답지 못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 같다. 간혹 현재의 자기 몸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하더라도 몸무게나 체질량 지수 등의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라 여기고, 따라서 이 조건을 지켜 내야 한다는 부담을 안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나 또한 나의 몸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며 오랜 시간을 보냈다. 마치 누가 우리의 눈과 판단력에 마법을 걸기라도 한 듯이 제가끔 자기 나름의 열등감에 시달리며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내 몸이 아름답다는 것을 안다. 나는 지금 이 순간 이대로의 내 몸을 사랑한다. 있는 그대로의 내 몸을 사랑하니 타인들도 더 귀하게 여겨진다. 세상이 아름답다는 걸 한층 더 진하게 느낀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만나면 말해 주고 싶다. 당신은 참 아름답다고. 당신의 몸은 참 아름답다고. 바로 이 말을 하고 싶어 이 글을 썼다.
그림_박현경, 「슬픔」
10.29 참사 희생자를 추모합니다.
근세 시대나 근대 초기의 유럽문학을 읽다보면 추리소설 혹은 그 비슷한 장르소설류의 저가 출판물을 읽는 묘사가 자주 나온다. 아마도 쉬우면서도 자극적인 소재를 사용하고 극적인 스토리를 만들어냄으로서 당시 여가생활을 즐길 거리가 부족했던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아니면 그냥 작가들도 책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이기에 그랬던가, 음음. 이들 중 대부분은 한번 읽고 쓰레기장으로 직행했을터지만 '셜록 홈즈의 모험'같이 수백년을 지나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도 그 인기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소재들도 간간히 발견할 수 있다.
오늘날의 동아시아에는 아마도 라이트노벨(혹은 웹소설)이 비슷한 위치가 될 수 있지 않을까싶다. 저렴한 가격, 자극적인 소재, 대중들의 인기를 끌만한 소재. 모두 당시의 펄프 픽션이 요구하던 소재를 완벽하게 대변하지 않는가. 그 덕분에 라이트노벨은 좋은 판매량을 유지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 증거로 어느 서점, 심지어 중고 서점을 가더라도 라이트노벨은 웬만하면 존재하며, 그 위치는 항상 입구의 근처에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잠깐 흥미가 동해서 읽고는 잊어버리기 때문에 그 상태도 매우 양호하다. 그러면서도 유행이 지나 사람들이 찾지 않아서 웬만한 새 책을 한 권 살 권으로 중고라이트 노벨은 4~5권도 너끈히 살 수 있다! 웹소설이면 10권도 가능할지 몰라! (물론 웹소설이 오프라인으로 출판되지 않는다는 전제하의 이야기다.)
물론 라이트노벨에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10대에 사든, 그 이후에 사던 책을 구매할때는 왠지 모르게 부끄러움이 생기곤 한다. 왜 그것은 작가의 몫이 아니라 나의 몫인걸까. 그리고 무슨 이야기를 사던 1권 이후에는 같은 소재의 이야기들을 리메이크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러니 라이트노벨이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담더라도 대부분은 1권만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한다.
이렇게 말하면 순문학을 좋아하시는 분들께서는 약간 불편해하실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미 한국 문학, 그 중에서도 포스트모더니즘을 추구하는 작가분들은 이미 어느 정도는 라이트노벨화되어가고있는 것같다. 뜬금없이 자가용이나 기차를 타고 떠나는 국내여행은 이세계와 같고 그곳에서 만나는 기인들은 히로인의 역할을 대변하고 우리의 상식과는 괴리된 언행을 하는 것도 라이트노벨답다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라이트노벨다운 것들은 보통 사람들에게 저평가받으면서도 왠지 모르게 팬덤은 두터운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그런 작가분들도 순문학으로 인정받는데, 라이트노벨도 당당히 독서의 일부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아, 이 삭막한 세상에서는 독서라는 취미 자체가 다른 차원에서 건너온 별난 취미로 간주되는구나.
스마트 도시에 관한 여러 가지 실험을 먼저 가상공간에서 운영해보고 실제 세계에 이식하자는 제안을 하며 그 개념을 ‘이데아 시티’라고 명명한다. 그런 시뮬레이션이 잘 될지, 효과가 있을지는 차치하고, 책이 1, 2년쯤 뒤에 나왔으면 메타버스라는 단어를 어떻게든 활용했을 것 같다. 필진에 아는 이름이 나와 반가웠다.
글을 읽기 전에 먼저 저자를 알았고, 그 다음 독립출판물로 접했고, 그 다음 이 책을 읽었다. 절에서 행자로 2년을 살았다는 작가를 결코 평범하다고는 할 수 없겠고, 솔직히 책장을 넘기다 보면 내 관점에서는 위태롭거나 아슬아슬하게 느껴지는 대목도 꽤 있다. 하지만 읽다 보면 재미있고, 호감이 들 수밖에 없고, 다음 행보가 무척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