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볼 날이 얼마 안남았네.
어서 모든 절차가 마무리되기를!
나 살 빠진다; 이미 코로나 이전을 너머 무슨 삼십대 때 정도로 빠진듯. Literally.
- 일생 다이어트가 목표였던 적은 거의 없던
인간
오디오북을 무단 발행한 출판사의 편집장은 내 말이 다 옳다며, 자신들이 매번 그때만 넘기려 임기응변으로 대처했다고 시인했다. 내가 납득할 수 있게 정리해서 사과하고 관련 절차도 바로잡겠다고 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러겠다는 내용은 답신에 없었다. 한 달 기다려볼 생각이다.
설 연휴가 지나자 연락이 우르르 몰려 왔다. 안부를 물으며 자기 소식을 전하는 지인들, 뒤늦게 새해 인사를 하며 시간 날 때 전화해 달라든가 한번 얼굴 보자는 이들. 편집자나 기획자도 있고, 언론계 선후배도 있고, 기자 일을 하며 알게 된 사람도 있고, 그 전부터 알았던 사람도 있다. 나는 낮에 전화를 꺼두므로 그런 연락을 메일이나 문자메시지로 받게 된다.
친한 동아일보 출신 선배와는 만날 약속을 잡았다. 몇몇 사람들에게는 의례적으로 적당한 답장을 보냈다. 연락을 받고 며칠 뒤에야 간단한 답장을 보내기도 했다. 몇몇 사람들에게는 아직 답하지 않았고 어쩌면 영영 답을 안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렇게 답장을 하지 않는다고 내 마음이 편한 것도 아니고 속으로 소심하게 계속 신경을 쓴다.
왜 이렇게 다른 사람 만나는 걸 싫어하고 부담을 느끼는 걸까. 만나면 뭔가 부탁을 받을 것 같고 결국엔 내 시간을 뺏기게 되리라 걱정해서인가? 그런 면도 조금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내가 애매하게 친한 관계인 사람을 만나는 데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 때문이다.
긴장을 풀고 만나는 타인도 몇 있다. 주로 대학 동기와 동아일보 선후배들이다.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을 업무 목적으로 만날 때에도 심하게 긴장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별로 친하지 않거나 잘 모르는 사람을 친목을 목적으로 만나면 나는 매우 서툴고 어쩔 줄 몰라 한다. 에너지도 많이 뺏기고 실수도 많이 하고 자책도 많이 한다.
그러면서 그런 만남 자체를 피하게 되었다. 그 결과 나이가 들어서 사귄 이른바 ‘사회 친구’는 한 명도 없다시피 하다. 아마 앞으로도 특별한 사건이 없는 한 못 사귀지 않을까 예상한다. 사실 동아일보 선후배들과도 같은 부서에서 일하며 폭탄주 마시면서 부대끼다가 겨우 친해졌다. 한 팀에서 일하지 않은 사람과는 데면데면하다.
에드워드 불모어의 『염증에 걸린 마음』을 읽었다. 우울증이 몸의 염증 때문에 일어날 수 있다는 최근 이론에 대한 책이다. 신경면역학이라는 학문 이름도 처음 알게 됐다. 모든 우울증의 원인이 다 염증이라는 얘기는 아니었다. 암이 한 종류가 아니듯 우울증도 여러 종류인 듯하며, 그 중에 염증성 우울증도 있는 것 같다는 주장이었다.
내게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내용은 많지 않았다. 다른 질병과 달리 우울증에 대해서는 프로작 개발 이후 뚜렷한 연구 성과가 없다거나, 프로작을 포함한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들의 근거가 매우 불완전하다는 대목이 조금 눈길을 끌었다. ‘의사들도 잘 모르면서 약을 처방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울증에 대한 책은 이제 더 찾아 읽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앤드루 솔로몬의 『한낮의 우울』만 더 읽어볼 계획이다.
『염증에 걸린 마음』을 읽은 날 저녁에는 상트벤델러 필스를 마셨다. 마트에서 파는 독일산 저가 맥주다. 포도향이 희미하게 나는 것 외에 큰 풍미는 없다. 대신 식도가 살짝 따끔한 느낌이 들 정도로 탄산이 강하다. 나는 ‘목넘김’이라는 표현을 단순히 한국 맥주회사들의 마케팅 용어라고 여기지는 않고, 사실 그 감각을 꽤 즐기는 편이기 때문에 이 맥주도 싫진 않다. 소폭, 맥막을 만드는 데 사용하거나 도수가 높은 술을 마신 뒤 체이서로 삼으면 좋을 듯하다. 비아냥거리는 게 아니다.
근처 공원에 정자가 있는데, 동네 할머니들의 사랑방이다. HJ는 그 자리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하는데 할머니들 때문에 그 지붕 아래 들어가 본 적은 아직 없다. 그녀는 여름이 되면 비 오는 날 꼭 거기에 막걸리 병을 들고 가서 마시겠다고 한다. 그때 나는 상트벤델러 필스를 가져가서 막걸리와 섞어 마시려 한다.
작은 계획을 꾸며요
그 일을 벌일 장소를 상상하죠
그때 마실 맥주도 같이
『염증에 걸린 마음』을 읽은 다음날에는 파주출판단지 소식지에 실을 칼럼을 썼고, 근력 운동을 했고, 부모님 댁에 가서 강아지와 놀았다. 토머스 캐스카트의 『누구를 구할 것인가?』와 미하엘 마리의 『양의 탈을 쓴 가치』를 읽었다. 가치의 문제를 다룬 책들을 읽고 싶었다.
『누구를 구할 것인가?』는 트롤리 딜레마에 관한 얇은 교양서다. 그런 사건이 현실에서 진짜로 벌어졌다고 가정하고 검사와 변호사, 배심원 등의 입을 통해 여러 방향에서 사안을 검토하고, 그러면서 관련 철학자들의 사상을 짧게 소개한다. 나쁘지 않지만, ‘트롤리학(學)’에 관심이 있다면 데이비드 에드먼즈의 『저 뚱뚱한 남자를 죽이겠습니까?』를 읽는 편이 더 낫다.
『양의 탈을 쓴 가치』는 가치가 어떻게 조작되고 조종되는지에 대한 내용이라고 해서 관심을 갖고 펼쳤는데, 실망스러웠다. 물론 많은 가치가 다른 가치와 충돌하고, 때로 악행의 명분이 되고, 그걸 입에 올리는 사람들 중 제대로 실천하는 이는 드물다. 하지만 그게 가치의 무가치함을 말하지는 않는다.
인간미 있고 유머러스한 물리학자가 생활 속 사례를 들어 말하는 통계물리학 이야기. 특히 내게는 출판 시장 분석이 눈길을 끌었다. 본문보다 조금 목소리 톤을 높여 쓴 듯한 부록의 ‘직언’들도 무척 좋았다.
도발적인 상상력으로 풀어낸 신라의 풍경. 작가의 패기가 느껴진다. 불교가 전파되면서 토착 문화가 점점 사라져가는 가운데 열정적으로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교합했던 사람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린다.
* ‘인권연대 숨’ 소식지 2023년 1월호 ‘현경이랑 세상 읽기’ 꼭지에 게재된 글입니다.
제목: 나는 왜 여기에 / 글쓴이: 박현경(화가)
내 그림들에 둘러싸여 이 글을 쓴다. 프랑스 파리 15구의 한 갤러리. 흰 벽에는 알록달록한 괴물들이 붙어 있고 벌거벗은 내 자신이 나를 내려다본다. 사람 얼굴이 달린 물고기가 아가미에서 꽃을 뿜고, 소년과 호랑이가 물고기를 타고 날아다닌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눈길로 통유리문 안을 들여다보고, 가끔씩 들어와 그림들을 자세히 본다. 내게 질문하고, 질문하고, 또 질문한다. 일 년 전부터 계획해 준비한, 내가 원하던 공간과 시간. 감사하다.
겁이 많은 나는 전시회를 앞두고 불안했다. 작품들을 포장해 위탁 수하물로 비행기에 싣고서 열네 시간 반을 날아와, 네 박스나 되는 그 짐을 파리 공항에서 되찾은 후 갤러리까지 운반하고, 전시 오프닝 전날 내 의도대로 작품들을 설치하고, 전시 시작 날엔 오프닝을 치러 내고, 이어 전시를 진행하고 또 그 다음 전시로 넘어가는 그 모든 과정, 그 속에서 생길 수 있을지도 모르고 절대로 안 생길지도 모를 온갖 불상사들의 리스트가 내 머릿속에 자동으로 생성됐다. 그리고 나는 그 리스트를 하나씩 체크하며 떨리는 마음으로 여행을 준비했다. 당시 내 일기장엔 이런 문장들이 적혀 있다.
‘나는 두려워. 나는 두려워.’와 ‘두려워하지 마. 두려워하지 마.’는 사실 같은 말일 것이다. 나는 이 두 말, 실은 같은 뜻인 두 말을 수시로 중얼거린다. 그러면서도 알고 또 믿는다. 다 잘될 거라는 것을.’
“두렵다. 두렵다. 두렵다.”
요즘 자꾸만 중얼대게 되는 말. 저절로 중얼대게 된다. 마치 주문처럼 이 말을 중얼대고 나면 불안이 조금 가라앉는다. 그저께까지로 프랑스에 가져갈 작품은 모두 완성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이 모든 두려움과 불안을 감수해 가며 정신적, 육체적 수고를 무릅쓰고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전시 오프닝 때에는 예상보다 훨씬 많은 분들이 오셨다. 다들 그림을 하나하나 찬찬히 관찰하고 내게 많은 질문을 던졌다. 질문에 답하다 보니 깊은 대화까지 나누게 됐다. 내 안에서 튀어나온 기괴하고 아름다운 괴물들의 존재를 그들이 직관적으로 느끼고 받아들인다는 인상을 받았다. 프랑스 관람객분들의 감상과 질문의 결이 한국의 관람객분들과 닮은 듯하면서도 미묘한 차이가 있어 흥미로웠다. 이국인들의 시선에 비친 내 작품들을 바라보며 나 자신도 새롭게 발견하는 것들이 있었다. 이 새로운 발견들은 앞으로의 창작에 새로운 활력이 될 것이다.
아침에 숙소를 나서면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바쁘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도 많고,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들도 많다. 우리나라에도 아침이 있고 출근길이 있고 자전거 타는 사람들,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곳과 한국의 사람들 모습이 비슷한 듯하면서도 미묘하게 달라 그 차이점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이 나라 사람 중 누군가가 한국에 간다면 역시 한국만의 그리고 한국인들만의 크고 작은 특징들을 발견하며 재미있어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내가 살던 곳 청주를 떠올리면 그곳의 거리거리가 신선하게 기억된다.
어제는 연금 개혁안에 반대하는 총파업으로 대부분의 지하철 운행이 중지됐다. 그래서 나는 숙소에서 갤러리까지 두 시간을 걸어 출근하고, 저녁에도 두 시간을 걸어 퇴근했다. 아침에는 차를 끌고 나오거나 자전거를 타고 나온 사람이 평소보다 확 많아져 도로가 몹시 혼잡했다. 저녁에는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걷다가 길가 카페에 앉아 칵테일로 목을 축였다. 걷는 건 언제나 하는 일이지만 새로운 이유로 새로운 광경을 보며 오래오래 걷는다는 것은 참 신선한 일이었다. 앞으로 청주에 돌아가서도 길을 걸을 때면 어제의 긴 행군을 떠올리게 될 듯하다. 그렇게 해서 익숙한 길들에 새 의미 하나가 더해지는 것이다.
어쩌면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에 나는 여기에 왔을 것이다. 익숙한 삶, 익숙한 장소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각으로 나의 작품들을 보고, 나의 일상을 보려고. 그리하여 창작에도 일상에도 새 활력을 얻으려고. 일상성에서 벗어나 멀리멀리 날고 싶다고 먼 나라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다고 내 안에서 아우성치는 목소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 목소리를 따라 나는 여기까지 왔다. 내 그림들 그리고 내 일상이 새로운 빛깔로 반짝인다. 이 새로운 반짝임에 목말라 나는 이토록 멀리 떠나와야 했던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소련군이 베를린을 점령했을 때 그곳 여성들에게 벌어졌던 일들. 참혹하고 기괴하다. 자신의 이름을 숨긴 채 일기를 쓴 저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지금 우리는 성폭력을 집단 경험으로 여긴다. 성폭력은 이제 사방천지에서 일어나며 심지어 협상의 대상이 되어버렸다.’(181쪽) 인간, 혐오스럽고 가엾고 슬프고 강한 존재.
거침없이 쭉쭉 뻗어나가는 서사와 탄탄한 취재에 바탕을 둔 사실적인 묘사. 저마다 이기적인 욕망을 품고 제각각 끝 모를 지옥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다양한 인물들. 붕괴를 예감하지만 그것이 언제, 누군가에 의해, 어떤 식으로 일어날지 예상할 수 없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긴장감을 잃지 않는다. 그러면서 한 회사, 한 도시, 결국에는 한국 사회를 뒤덮은 부조리를 정밀하게 고발한다.
문제의식에는 물론 동감한다. 그런데 몰라서 실천을 못하는 내용은 아닌 것 같다. 원서가 나온 건 2013년이고, 그 사이 우리의 집중력은 더 떨어졌고.
내용이 어렵고 문장은 더 어렵다. 그래도 인간 존엄성을 둘러싼 네 가지 상반되는 해석을 소개하는 5장을 접한 것만으로도 참고 읽을 가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