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도 난해한데, 읽는 이가 주인공 캐릭터에 대해 느낄 수밖에 없는 혐오감에 주인공의 자기혐오가 겹쳐 책장 넘기기 힘들었다. 작가가 지적장애가 있는 장남을 낳은 다음해 발표한 작품이라 그냥 픽션으로 읽게 되지 않는다.
헨리 제임스의 초기 대표작. 순진하고 맹한 젊은 여인이 남자들과 어울리기 좋아한다는 이유로 부당한 비난을 받고, 다소 뜬금없는 결말을 맞는다. 작가가 그런 시대를 고발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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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천문학회, 영국지리학회, 영국행성학회 회원인 저자의 과학 에세이. 주로 천문학에 대한 내용이고, 가끔 외계인 관련 음모론들을 신랄하지만 가볍게 조롱한다.
저자가 ‘무역이 아니라 노동 차익거래’라고 비난하는 그 경제행위가 지구적 관점에선 부의 재분배일 수도 있지 않을까. 테러방지법 등 논점이 빗나가는 대목도 많다.
서학 서언
페이지 5
모든 일에는 행간이 있다. 행간을 뺀 정보는 죽은 정보다. 행간이 정보에 그림자를 드리워야 그 정보가 입체적으로 살아난다.
이 책은1770년대 중반 이후 조선 천주교회 태동기부터 1801년 신유박해까지 길지 않은 시기를 다룬다. 조선을 관통한 서학이 일으킨 소용돌이와 그 와중에 벌어졌던 일들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들을 찾아서 살폈다.
서학의 수용과 배척이 노론 벽파와의 정쟁에서 오랫동안 열세에 몰렸던 남인 내부의 전쟁으로 확산된 것은 큰 비극이었다.
체제공을 정점에 둔 남인이 신서파와 공서파로 갈려 싸웠다. 그들 스스로 가난한 두 과부의 싸움이라고 비유했을 만큼 얻은 것 없이 서로에게 참담한 결과를 낳았다.
서학과의 접촉과 접속은 내부의 긍정적 변화를 이끄는 동력이 되지 못하고 위정척사의 명분 아래 세도정치에 날개만 달아주었다. 그 결과 수많은 서학죄인의 순교의 피가 강물과 산하를 붉게 적셨다.
시복시성을 위한 신앙 행위의 증거 자료?
다산은 자신의 모든 글에서 천주교에 관한 한 철저하게 자기 검열을 가했고, 진실을 숨겼다... ... 다산이 숨긴 진실은 행간에 가려져 있다. 복잡한 퍼즐을 다 맞춰야 그림자가 드러난다.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만 해도 그렇다. 관변기록이나 척사파의 글속에서 그는 한결같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야비하고 권모술수에 능한 인물로 묘사되었다.
성교요지는 최근 개신교 쪽 연구자들에 의해 1863년 윌리엄 마틴 목사가 선교사에 대한 한자 교육 목적에서 한문으로 짓고 영문으로 번역까지 한 상자쌍천을 한글자도 바꾸지 않고 주석까지 그대로 베낀 것임이 명백하게 밝혀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김대건 신부가 중국에 전한 것을 마틴이 그대로 베낀 것이라는 황당한 주장까지 나왔다 이벽을 위하려다 이벽을 욕보이고, 김대건 신부를 무함하고, 아무 잘못 없는 마틴 목사를 도둑으로 몰기까지 하는 파렴치한 논리이다.
지석사발에 적힌 글씨가 한눈에 다산의 글씨라는 확신이 들었을 때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 이 과정에서 윤지헌과 새로 만나 예정에 없던 글 몇 꼭지를 더 쓰게 되었다.
다산이 가성직제도 아래 10인의 신부 중 한사람이었다거나 ... ...
심문장에서 정약망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다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우리 집안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고 했다. '약망'은 다산의 세례명인 '요한'이었으니, 정약망을 모른다 함은 자기 부정의 극치였다.
이 책은 통사가 아니어서 전체 글이 하나의 줄거리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편마다 쟁점을 두어 논점을 검토해가는 방식으로 집필했다.
중간자적 시각을 가져도 좋지 않을까 싶다. 그래야만 안 보이던 지점이나 보지 않았으려 외면했던 사각지대들이 명징하게 드러나 실상에 다가설 수 있게 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정보는 해석을 통해서만 생기를 얻는다. 해설을 해석으로 착각하면 학문은 없다. 자료에서 의미를 끌어내는 것은 질문과 해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일부 비판과 비난을 분간하지 못하는 편협한 태도는 곤란하다.
사람은 가고 흐릿한 기록만 남았다. 그렇다고 그 긴박했던 절체절명의 시간이 순금으로 빛난던 헌신이 낡아 퇴색하는 것은 아니다. 한번씩 그들의 시간 속으로 들어갈 때마다 나는 울컥하곤 했다. 전 생애를 걸고 신앙의 길 위에 섰던 순백한 그들의 결심 앞에서, 결단 없이 우물쭈물 머뭇거리는 나를 바라보았다.
1.칠극 이야기
처음엔 서양의 놀라운 문물에 압도되다가 차츰 그 너머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무엇이 저들을 저토록 놀랍게 만들었을까? 그 같은 과학적 진보를 가능케 한 배경 사유가 몹시 궁금해졌다.
내 생각 "영국의 왕실문화처럼 왕족과 귀족들의 학문에 대한 열정이 그들의 과학적 발전을 이룬 것이 아닐까 생각되어진다. 출판물 조차 그들의 체계와 학풍이 반영되어 있어서 그 시대의 학문적 열정은 어떤 물적 지원과 지도자(왕-세종대왕 ,집현전,성균관)의 정신적인 지지도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지적인 향연이 지식인들 곳곳에 뿌리 내린 결과가 오늘의 과학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마테오 리치의 교우론과 판토하의 칠극
교우론은 서양 선비들의 우정에 대해 쓴 책이었다. 첫 장을 열자 "벗이란 남이 아닌 나의 반쪽이니, 바로 제2의 나다. 그러므로 벗을 자기처럼 보아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
천주교의 교리를 문답체로 설명한 천주실의도 흥미로웠지만 칠극 같은 책은 어록체 산문으로 구성되어 논어를 읽는 느낌에 더 가까웠다.
"내가 왕이 된 것을 즐거워하는 것은 바로 남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즐거워서다."
칠극은 예수회 판토하 신부가 1614년 북경에서 출판한 책이다.서문에서 사람의 마음에 생기는 병은 일곱가지가 있다. 마음을 치료하는 약 또한 일곱가지가 있다. 요컨대 그 큰 뜻은 모두 묵은 것을 없애고 새것을 쌓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오만은 겸손으로 이기고 질투는 어짊과 사랑으로 극복하며 탐욕은 베풂으로풀고 분노는 인내로 가라앉히며 식탐은 절제로 막고 음란함은 정결로 차단하며 게으름은 부지런함으로 넘어서야 한다
입으로 재를 부는 사람은 스스로 제 얼굴을 더럽히고 눈은 어지럽게 만든다. 남을 헐뜯는 자는 스스로 그 마음을 더럽히고 그 영혼을 어둡게 만든다.
색욕 같은 것은 젊어서는 실컷 즐겨도 늙고 나면 시들해진다. 분노 따위는 참으면 떠나가고 고요해지면 물러난다. 오직 교만은 한번 마음에 들어오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딱 붙어 다닌다. ...
신체가 노쇠해도 교만은 줄어들지 않는다.
남을 헐뜯는 사람은 돼지와 같다. 발을 둘 곳에 입을 두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사람이 귀를 기울여 칭찬하는 말을 들으면 어리석어지고, 듣고 나서 혼자 기뻐하면 미치광이가 된다.
술이란 음란을 부추기는 땔감이다. 술을 마음대로 마시면서 함부로 음란하지 않은 경우란 드물다. 성경에 말했다. "삼가 술에 취하지 말라. 그 음란함이 그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2.다산 정약용과 칠극
다산 정약용의 자형 이승훈이
동지사 서장관인 아버지 이동욱을 따라 북겨에 갔다가
1784년 봄 최초로 영세를 받고 돌아왔다.
방적아의 칠극, 필방제의 영언여작, 탕약망의 주제군징 등 10여권의 책과 함께, 다산은 이를 큰형 정약현의 처남인 이벽을 통해 구해 읽고 급격한 마음의 쏠림을 느꼈다. 다산의 마음을 이끈 것은 단연 칠극이었다.
다산의 제자 윤종문에게 준 증언첩의 한 단락
맹자는 대체를 기르는 사람은 대인이 되고 소체를 기르는 사람은 소인이 되어 금수와의 거리가 멀지 않다고 했다.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는 데만 뜻을 두어 편안히 즐기다가 세상을 마쳐, 몸뚱이가 식기도 전에 이름이 먼저 사라지는 것은 짐승일 뿐이다. 짐승으로 사는 것을 원한단 말인가
꿈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반드시 이미 꿈에서 깬 것이다. 악에 대해 인식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선으로 옮겨가기 시작한 상태다. 병을 처음 치료할 때는 모름지기 병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만약 병으로 인지하지 못해 치료하지 못하면 낫기가 어려워진다.
세상의 부는 꿈과 한가지다. 부라는 것이 진짜가 아니라 그저 꿈일 뿐이라는 말이다.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은 잠잘 때 귀한 음식을 먹고 마산 술을 마시는 꿈을 꾼다. 그러다가 잠을 깨면 배고픔과 목마름은 처음과 똑같다. 부자가 재물을 얻으면 마구 베풀며 혼자 즐거워한다. 그러다가 잠깐 만에 그 재화는 처음처럼 배고프고 목마르게 되고 만다. 배불리 먹는 꿈을 꾸는 사람은 그 꿈을 꾸고 있을 때는 능히 그것이 진짜 배부른 것이 아닌 줄을 깨닫게 할 수가 없다. 재물을 좋아하는 자 또한 지금 얻은 재물이 결국 헛된 물건인 줄을 알도록 깨우칠 수가 없다. 죽을 때가 이르거나 꿈을 깨고서야 깨닫는다.
재화를 비밀스럽게 감춰두는 것은 남에게 베풀어 주는 것만 함이 없다. 단단히 잡으려 하면 할수록 더욱 미끄럽게 빠져나가니, 재화라는 것은 메기와 같은 것이다.
즐거움은 또한 괴로움의 씨앗이고, 괴로움 또한 즐거움의 씨앗이다. 지금 괴로움을 기르지 않는다면, 나중에 어찌 즐거움을 거둘 수가 있겠는가?
또 정신으로 죽은 사람의 묘로 가서, 네가 예전에 알고 지내던, 세상의 즐거움을 꽤나 누렸던 사람이 지금은 모두 더러운 먼지와 탁한 진흙이 된 것을 생각해보고, 다시 너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거라, 이 사람은 예전에 세상에 살아 있을 적에는 나와 같았는데, 내가 내일에는 저 사람처럼 무덤에 있겠구나, 육체와 그 아름다움과 편안한 즐거움의 온갖 형상도 모두 다 이와 같을 뿐이니. 어찌 중하다 하겠는가?
3. 홍유한 제문의 행간
홍유한 - 한국카톨릭 최초의 수덕자
성호 이익의 제자로 30대 초반이던 1757년 천주교 교리 접함
진리를 담은 층층의 가르침이 내면에 깊은 감동을 일으킴 (칠극)
직방외기, 천주실의를 구해 읽음
1784년 이승훈 - 북경에서 최초로 영세를 받고 돌아옴
1785년 3월 명례방서 푸른 두건을 쓰고 얼굴에 분을 바른 이벽이 미사를 집전하다가 노름판이 벌어진 것으로 착각한 순라꾼의 급습으로 천주교 집회가 적발되는 사건 발생
홍유한은 1785년 1월 세상을 떴다. 사건 두달 전
권철신이 쓴 홍유한 제문 속 <칠극> 논의
홍유한 누님의 사위, 성호 이익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
공께서 대월 공부에 잠심하여 이미 그 사사로움을 능히 다 없앴으니, 지나치다고 했던 것은 나의 아집을 지닌 견해로 공의 사사로움 없는 마음을 가늠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잠심대월은 주자가 경재잠에서 마음을 가라앉혀 지내면서 상제를 찬양하라.고 한데서 따온 말이다. 상제 즉 하느님을 찬양한다는 대월 이라는 표현을 섰다.
첫째 음식에 대한 절제는 칠극 '색도' 곧 탐욕스레 먹는 것을 막는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둘째 절색은 '방음'은 즉 음란함을 막는 것과 호응한다. 셋째, 자기 규율은 '책태' 곧 게으름에 대한 채찍질과 맞통한다. 넷째 함인은 식분에 연결되니 인내로 분노ㅗ를 가라앉히라는 것이다 다섯째, 집겸은 '복오' 즉 교만을 눌러 겸손하라는 가르침과 같다. 여섯째, 시인은 남에게 베푸는 것으로 '해탐' 곧 탐욕을 풀라는 것과 관련이 있다. 남은 것은 '평투' 뿐이다. 질투를 가라앉히라는 말이다. - 홍유한의 일생이 칠극의 가르침으 오롯이 실천에 옮긴 역정이었음을 설명했다. 페이지48
홍유한의 제문 (이기양)
아! 식욕과 색욕은 사람이 크게 욕망하는 바다, 하지만 선생은 자신에게 있어 담박하기가 고목과 같았고, 막아 억제함은 원수와 적을 대하듯 하였다. 해침과 요구함은 사람이 누구나 병통으로 여기는 바다. 하지만 선생은 남에 대해 혹 다ㅏ치기라도 할까 봐 아껴 보호하였고, 능히 하지 못하는 듯이 베풀어 주었다. 치우치기 쉬운 것이 오만인데, 선생은 스스로를 볼 때 언제나 남과 어울리기에 부족한 듯이 한 사람이다. 가라앉히기 어려운 거이 분노지만, 선생은 남을 대할 때 항상 어디를 가든지 덕을 베풀지 않은 적이 없던 분이다. 잠시 동안은 능해도 오래가는 이가 드문 것은 게으르미 틈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선생은 사는 60년 동안 여기에 한결같아서 줄을 그은 것처럼 반듯하였다.
2022년 07월 15일 장미와동백이 개정판을 출간했다. 나는 1999년 11월 초판 지영사가 발행한 책을 읽었다. 교보문고는 1996년에 처음 출간된 책이라고 하는데 99년 이전 출간된 흔적은 찾지 못했다.
책의 제목에 드러나듯 마술, 과학, 인문학 이야기이다. 세 갈래의 담론이 서로 반목하며 '수사적 공존'에 안주하는 것을 비판한다. 세 담론이 맞닿은 곳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밝히고, 또 진정한 '지식의 다원화'를 위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저자는 ‘가상현실’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제안하고 상용화한 컴퓨터과학자이자 작가다. 소셜 미디어 알고리즘이 이용자들을 ‘꼴통’이 되도록 이끌고, 그게 전체 공동체에도 악영향을 끼친다고 주장. 설득력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