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한 하버드 박사가 모든 걸 내려놓고 몽골로 가서 학교를 세웠다던 일이 세간의 화제였다. 내려놓음의 저자, 이용규 선교사님 이야기다. 책은 백만부였나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되고, 2탄으로 더 내려놓음이 나왔고 이후로 떠남, 같이 걷기 등 계속 저서들을 내고 계신다. 모두 읽었다^^ 현대인은 너무 아득바득 사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읽고 있는 북클럽 2기의 책 처럼, 잡히지 않을 눈 앞의 반짝이는 것을 향해 손을 뻗어 움켜쥐고도 싶을 것이고 남들 눈이 있으니까 이렇게 정도는 해두어야 하고 신경쓸게 많고 아주 피곤하지~ 그런 시선들을 덜 신경쓰는 편이고 나는 내가^^ 중요한 사람이지만 문득 피아노 치는데에도 릴렉스가 안되었던 건 그눔의 욕심이 많아서ㆍㆍ 이 곡을 오래 더 파야하는데 홀랑 그 다음 곡으로 넘어가;; 또 새 우물을 파고 또 파고 어느새 이렇게 나이를 먹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네. 그러지 않아도 괜찮아~ 긴장하지 않아도 괜찮아. 쉬어도 괜찮아:) 코로나 동안 심하게 쉬긴 했지만 😂 스트레스가 많았던 아이돌 시조새 토니도 머리를 짓찢어 피가 날 정도여도 자제할 수 없던 어느날, 문득 이 책을 읽게 되었는데 괜찮아 지더라는 마법이! 혹시 이 책을 집어든 당신에게 임할지도~ 혹여 한 권으로 안되겠음 더 내려놓음도 있고^^ 한 번 해보시라~ 밑져야 본전 아닌가! ㅎㅎ
예전에 데이브 아스프리의 <최강의 식사>와 <최강의 단식>을 읽었는데 이후에도 여러 권의 책을 내고 있었다. 그는 유사 과학과 과학 사이에 걸쳐있는 그레이존의 사례들을 주장한다. 자신을 직접 모르모트 삼아서 바이오해킹을 해봤다니 그렇겠구나 하고 넘어갈 때가 많음. 뭐 내가 하나하나 직접 따라서 할 것도 아니고. 건강염려증이 있는 분들이라면 흥미진진하게 읽을만하다.
저자가 추천한 단식은 호기심에 따라서 일 년째 해보고 있는데 이건 적성에 맞아서인지 개인적으로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고 있다. 팟캐스트도 운영해서 한번 들어봤지만 말이 너무 빨라서 리스닝이 안 됨.
올해 1월에 헬스장이 영업을 재개한 뒤로 두 달간 꾸준히 다녔다. 격일로 웨이트트레이닝을 했고, 근력 운동을 하지 않는 날에는 트레드밀에서 시속 11킬로미터의 속도로 5.5킬로미터씩 달렸다. 2월 말까지 헬스장이 문을 열었는데도 웨이트트레이닝이나 달리기를 하지 않은 날은 이틀뿐이다.
운동하기 참 싫다. 단 하루도 상쾌한 마음으로 피트니스클럽에 간 적이 없다. 그리고 남들도 그런지 나만 이런지 모르겠는데, 웨이트트레이닝보다 달리기가 더 싫다. 근력 운동을 설렁설렁 하는 건 아니다. 이마와 겨드랑이에 땀이 날 정도로, 한 시간 가까이 한다. 달리기를 하는 시간은 30분이다. 그런데 달리는 게 훨씬 더 싫다. 전에 마라톤 풀코스는 어떻게 뛰었는지 모르겠다. 미쳤었나?
미루고 미루다 밤에 달리기를 하고 돌아왔다. 지친 몸으로 컵라면을 끓여 먹고 양이 안 차서 냉동 만두를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렸다. 접시에 물을 뿌린 냉동 만두 다섯 알인지 여섯 알인지 올리고 그 위에 전자레인지용 투명 덮개를 얹었다.
주방 장갑을 낀 손으로 뜨거워진 접시를 전자레인지에서 꺼내 식탁으로 가져왔다. 그런데 뚜껑이 들어지지가 않았다. 만두가 익으면서 내부의 기압이 떨어져서 뚜껑과 접시가 찰싹 붙어버린 것이었다. 이미 만두 한 알은 뚜껑의 홈 사이에 찰싹 끼어 뭉개져 있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뚜껑과 접시를 떼어낼 수가 없었다. 그 사이에 사람을 놀리듯이 만두는 투명 뚜껑 아래서 천천히 하나씩 뭉그러졌고 거기서 육즙이 흘러나왔다. 한동안은 뚜껑만 들어낼 수 있으면 좀 괴상한 만두 수프라고 여기고 그 육즙과 찢어진 만두피들을 먹을 생각이었다. 그 정도로 배가 고팠다.
그러나 몇 분이 지나도록 뚜껑과 접시는 떼어지지 않았고, 그 안에 있는 물건은 점점 더 사람이 먹는 음식 형태에서 멀어진 몰골이 되어갔다. 허기도 사라졌다. 나는 울화가 치밀어 욕을 내뱉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화를 식히려 침대에 가서 잠시 누워 있었다.
자기 전에 설거지라도 하려고 접시와 해체된 만두와 뚜껑을 개수대에 넣었다. 그 빌어먹을 결합체는 식어 있었지만 그때까지도 분리될 기미가 없었다. 찬 물을 아무리 끼얹고 뚜껑과 접시 사이로 숟가락을 넣어 보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나는 그냥 접시를 깨버릴 작정으로 그걸 높이 들어서 힘껏 내팽개쳤다.
그런데 접시는 깨지지 않았고 뚜껑과 분리되지도 않았다. 대신 어이없게도 플라스틱 뚜껑이 찢어졌다. 그래 씨발, 나는 그 뚜껑을 손으로 다 찢어버리고 한때 만두였던 것을 음식물 쓰레기에 버리고 접시를 닦았다.
양치를 하고 누웠는데 잠시 잠이 들었다가 새벽 한 시쯤에 눈이 떠졌다. 더러운 기분이었다. 요즘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을까? 왜 이런 일들만 벌어질까? 그런 생각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내가 겪은 억울한 일들, 나에게 무례하게 대한 인간들, 나를 속인 자들, 내가 저지른 실수들, 부끄러운 짓거리들…….
잠이 오지 않아 전자도서관에서 요코제키 다이의 『루팡의 딸』을 빌려 읽었다. HJ가 얼마 전에 읽고 ‘장난스럽고 유치한데 책장을 덮을까 하다 어쩌다 보니 그냥 끝까지 읽게 됐다’고 평가한 게 기억났다. 어쩌다 보니 끝까지 읽게 됐다는 말은 흡인력이 있다는 얘기로 들렸고, 장난스럽고 유치한 글로 기분을 전환하고 싶었다. 프라모델 오타쿠인 신출내기 경찰서장이 거듭되는 우연으로 사건을 해결한다는 가와사키 소시의 『서장 다나카 겐이치의 우울』을 유쾌하게 읽은 참이기도 했다.
그런데 『루팡의 딸』은 『서장 다나카 겐이치의 우울』과 달리, 읽을수록 화가 나는 소설이었다. 경찰 집안의 아들과 도둑 집안의 딸이 연인 관계라는 만화 같은 설정이야 그렇다 쳐도, 전개가 너무 허술해서 도무지 몰입이 되지 않았다. 결국 다 읽었지만 읽는 내내 ‘이걸 끝까지 읽어야 하나?’ 하는 심정이었다.
아침을 뜬 눈으로 맞고 오전에 잠이 들었다. 충분히 잠을 자고 난 다음에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고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방에서 나오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나 자신이 한심하고 싫었고 세상도 짜증났다. 그대로 베란다 창문을 열고 뛰어내려 모든 것을 끝내버리는 일을 골똘히 상상했다. 그렇게 급속도로 어두운 감정에 빠졌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였다.
토요일이었다. 오후에도 내내 그런 상태로 방에 틀어박혀 있자 HJ가 나를 억지로 잡아끌어 밖으로 나왔다. HJ는 나더러 걷는 데까지 걸어보자고, 한강까지 걷자고 터무니없는 소리를 했다. 아마 얼마 전 만화가 기안84가 그렇게 서초동에서 대부도까지 56킬로미터를 달리며 자신감을 되찾는 모습을 TV에서 봤기 때문인 듯했다. 하지만 공원을 걷는데 의욕이 없고 기운도 없어서 얼마 걷지 못하고 벤치에 앉아 쉬었다.
그렇게 걷다가 인근 재래시장에 들어가 저녁을 먹었다. 문을 연 곳을 찾다가 곱창볶음을 파는 작은 식당에 들어갔다. 야채곱창과 막창볶음을 주문하고 카스 생맥주를 한 잔, 테라 병맥주를 한 병 마셨다. 야채곱창과 막창볶음은 첫 입에는 자극적이고 맛있었으나 조미료를 너무 많이 쓴 탓에 나중에는 속이 메슥거렸다.
국산 맥주를 25년 간 마시면서 카스를 좋아한 적은 없었다. OB 골든 라거와 OB 프리미어, 하이트 엑스트라 콜드를 상당히 괜찮다고 여겼고, 하이트 드라이피니쉬 d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카스도 마시기는 많이 마셨을 것이다. 아마 처음처럼 소주와 섞어서 마신 양이 그냥 순수하게 카스 맥주로 마신 양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갑작스러운 우울
뚜껑이 접시에 붙어버려서
만두가 약을 올려서
곱창볶음 가게에는 열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 하나가 테이블에 혼자 앉아서 휴대폰 게임에 푹 빠져 있었다. 봐주는 어른 없이 어두컴컴한 가게 구석에 앉아 있는 모습이 애잔했다. 가게에 직원이 세 사람이었는데 젊은 남자 직원이 아이의 아버지인 것 같았다.
식당 일이 조금 한가해졌을 때 젊은 남자 직원이 아이 맞은편에 앉아 말을 걸었고 아이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조금 나이 들어 보이는 다른 남자 직원과 여자 직원이 그 젊은 아버지의 형과 형수인지, 혹은 형과 부인인지, 아니면 가족관계는 아닌 회사 동료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음날에는 비가 내렸다. 종일 무기력하게 있다가 ‘이렇게 무너져서는 안 된다, 운동을 해야지’ 하고 마음먹고 헬스장에 갔다. 간신히 웨이트 트레이닝을 마치고 터벅터벅 길을 걸어가는데 버스가 빠른 속도로 옆을 지나가면서 물벼락을 뿌렸다.
우산을 쓰고 있어서 머리와 얼굴은 괜찮았지만 가슴부터 발끝까지, 점퍼부터 속옷까지 온 몸이 다 젖었다. 살면서 그렇게 지독하게 물벼락을 맞은 적이 없었다. 화를 낼 기운조차 없었다. 그날 밤에도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유명한 독자들을 만나 인사를 나눴다. 햄릿, 엠마 보바리, 돈키호테, 안나 카레니나 등. 심지어 그들도 책이라는 함정에 빠져 인생을 망쳤다며 이를 갈고 있었다.
‘무슨 얘기일지 알 것 같네’라던 삐딱한 영혼도 치유하는 소설. 몰입해서 읽었고 감동받았다. 잔인하도록 상세한 심리묘사, 격식에 매이지 않는 구어체 문장도 인상적. 작가의 본업이 영화감독이고 이 소설로 영화도 만들었는데, 무슨 사정인지 영화보다 책이 훨씬 좋았다.
1-1.
만 18세가 지나면 이제 성인으로 취급하지요. 기본적으로 주민등록증이 나오고, 선거도 할 수 있고, 운전면허증 등 법적으로 제한 받았던 것들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는 거죠. 제한이 풀리는 듯하지만 이 과정을 너머가는 순간이 그렇게 자유롭게 편하지 않았던 것을 저의 옛기억에서도 떠올릴 수 있었네요. 책에서는 후기 청소년기라고 할 수 있는 시기라 부르기도 하네요. 이 사이에서 조금씩 한계를 설정하고 통제하면서 책임있는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것 같아요. 어른은 한 순간에 되는 것이 아닌 과정 중에 있는 개인적혁명라는 말이 딱 맞는 것 같네요.
1-2.
그렇다, 어른이 된다는 건 하나의 과정이다. 하지만 그 자체로 급진적이고 우리를 해방시키는 과정이다. 우리 각자에게 개인적인 혁명이기도 하다. 84쪽
1-3. 자신의 정체성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만들어졌다는 말에 놀라움을 느꼈습니다. 인터넷세상이 정보와 오락을 즐기는 공간이 아닌 정체성까지 좌우하는 공간이 되었다는 것은 안타깝기도 합니다. 거기에 인터넷 소셜미디어로 상대적 박탈감까지 느끼는 현실은 온라인 상으로 만들어진 정체성이 얼마나 나약한가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진짜기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좋아요를 누루는 행동은 스스로 판단이 아닌 무조건, 무비판적인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개인적 혁명의 과정이라는 말처럼 지금의 사람들의 소셜미디어 행태도 하나의 과정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스스로 경계를 만들고 통제를 할 수 있는 어른이 되어가듯 SNS의 사용도 어른답게 성숙되어가리라 봅니다. SNS사용자제앱이 만들어지고 사용하는 것이 스스로 문제점을 인식한 것이라고 봅니다.
2000년생인 사람들 즉 지금 초기 성인기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스마트폰과 함께 자라난 첫 번째 집단입니다. 열여덟 살인 빅토리아는 자신의 ‘정체성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만들어져왔다고’ (p.63) 고백합니다. 그러나 과도한 소셜 미디어 노출은 자신과의 접촉을 끊게 하고,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타인의 완벽한 삶을 스크롤하고 ‘좋아요’를 누르게 만들죠. 사회심리학자인 셰리 터클은 이뿐만 아니라 온라인에서 타인들이 보여주고 싶은 삶을 보면서 자신의 ‘실제 삶이 뒤처지고 있다는 공포를 느’낀다고 덧붙입니다. 우리는 남들에게 말하는 삶에 못 미치는 존재들이 되며 ‘자기 자아를 마치 타인처럼 바라보면서 시기심을’ (p.68) 느끼게 된다고 하는데요. 여러분은 이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러니까 현승원 의장으로 알려져 있는 자본주의 시대 진정한 승자와 신사임당이었던 구사임당님이 유료 유투브 강좌를 마구 무료로 풀어쥬신 덕분에 들어가 본 본격 유투브로 돈벌기 강좌!에서 중요한 게 저 탐색과 노출기능이었던 것 같은데. 원랜 피아노 연습용 유투브였지만^^;
유류비의 상승과 환율로 인해 출장비가 올랐다고는 하지만 과연 이런 공허한 책에 25,000원의 가격을 책정 한다는 것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일인가?
장강명의 '나무가 됩시다'는 서울리뷰오브북스(1호)에 실린 단편이다.
별다른 기대 없이 읽기 시작했다. 장강명이란 이름은 서점 매대에서 본 기억이 있으나 그뿐이었다. 공상과학이라는 장르에 그다지 흥미가 없어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금새 몰입해서 읽었고, 2년이 지난 지금도 여운이 남았다.
달리기와 요가를 소재로 하는 에세이를 애써 찾아 읽는다. 내가 몸으로 느꼈던 불편함과 통증을 다른 이의 언어로 표현되는 것이 늘 궁금하다.
잡지사에서 야근과 과로와 번아웃으로 몸과 마음이 망가졌던 저자는 가로수길의 요가원에서 수행하고 발리와 태국의 요가원에서 또 수행하다가 같이 갔던 동료와 결혼하고 잠시 비건을 해볼까 고민하다가 그래도 돼지고기는 구워먹고 퇴사하고 요가 지도자 코스를 시작한다.
생애의 치명적인 트라우마를 요가 수행으로 극복하는데 그 트라우마의 본질을 거슬러올라가다보면 잡지사 시절의 관행적인 과로 그리고 어린 시절 사립 학교 시절 교사였던 아버지가 주말 근무하고 퇴근해 낮잠 잔 아들에게 잠자는 건 죽어있는 거와 같으니까 늘 깨어있으라는 일침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누군가의 크리티컬한 트라우마가 ‘과로’였다니! 대체 과로라는 개념이 한 인간의 인생에서 트라우마가 될 수 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