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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쓰다: 010. 감사


아무도 없는 적막한 골목, 공연히 주변을 휘이- 한 번 돌아보고는 이내 깊은 숨을 내뱉었다. 낯선 감각. 분명 1년 넘게 오갔던 출퇴근길인데 요즘은 스치는 바람 냄새조차 낯설다. 서늘해진 어깨를 으쓱이고는 스르륵,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계절의 변화 같은 것이 아니었다. 몇 주 전부터 그녀 주변을 둘러싼 이 낯선 공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는 매 순간 낯선 무언가가 그녀가 옮기는 발자국마다 따라와 끈적하게 맺혀 있는 기분이었다.



몸무게는 2킬로그램이나 줄었다. 오늘은 회사에서 한 시간 빨리 퇴근했다. 병원에서는 신경성 위염이라고 했다. 당분간 커피와 녹차를 끊고, 스트레스 받지 말고 잘 먹고 잘 자고 푹 쉬라는 평범하고 흔한 조언이 쏟아졌다. 글쎄, 마음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선. 그녀를 괴롭히는 것은 다름 아닌 낯선 이의 시선이었다. 누군가의 눈길이 그녀를 끈질기게 따라오고 있음이 분명했다. 형용할 수 없는 찝찝하고 끈적한 눈동자. 끈적하고 서늘한 감각. 자신을 향해 번들거리고 있음이 분명한 정체 모를 눈동자는 좀처럼 그 실체를 찾을 수 없어 더 섬뜩했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비슷한 불쾌한 느낌을 처음 느꼈던 건 초등학생 때였다. 2학년쯤이었을까. 하얀 두상이 보일 정도로 짧게 깎은 머리, 조금은 흐리멍덩한 눈동자, 어딘가 어색하고 아둔한 움직임. 같은 학교 4학년 남학생이었다. 오랜 머무름 끝에 그가 직접 실체를 드러낸 것은 급식소 뒷 길, 창고 근처에서였다. 무작정 뒷걸음질 치는 그녀를, 그는 더 빠른 걸음으로 따랐다. 그의 손에는 뿌리째 뽑힌 보라색 들꽃이 힘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흡, 가쁜 숨을 들이켰다. 이내 스텝이 꼬인 그녀는 그만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지고 말았다. 손바닥에 닿은 아스팔트는 거칠었다. 남학생이 성큼, 한 걸음 더 가깝게 다가왔다. 일그러진 웃음을 흘리며 다가오던 그 남학생의 그림자는 몹시도 짙고 커다랬다.



"어. 그, 내, 내, 내가 도와줄까?"


말을 더듬었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반사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지금 그녀가 도움을 청해야 할 곳은 그 남학생 쪽이 아니라 다른 쪽임을 단 번에 알아차렸다. 꺄아아아악, 살려주세요! 작은 외마디 비명이 공기를 갈랐다. 급식소 주방 쪽에서 아주머니 몇 분이 다급하게 뛰어나왔다.



"무슨 일이야, 학생!"



빨간 양념이 잔뜩 묻은 고무장갑을 양손에 낀 채였다. 어른들의 등장에 당황한 남학생은 쥐고 있던 꽃을 떨어뜨리며 양손을 머리 위로 크게 휘두르듯 내저어 보였다. 보라색 꽃잎이 어울리지 않게 느릿느릿, 바람을 타고 흩날렸다.



"아, 아, 아니에요. 저는, 저, 저는 그냥...!"



담임 선생님의 보호를 받으며 부모님을 기다렸다. 특별반 남학생이라고 했다. 별 뜻은 없었다고. 정신 연령이 초등학교 1학년에도 채 못 미쳤던 그 남학생은 그저 보라색 들꽃을 선물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했다. 보라색을 유난히 좋아했던 그 남학생은, 매일 보라색 머리핀으로 반묶음 머리를 하고 다니던 그녀를 '순수하게' 좋아했다고. 그녀는 그날 이후, 집에 있던 보라색 물건을 몽땅 처분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학교에서도, 동네에서도 그 남학생을 두 번 다시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안정을 찾은 그녀는 급식소 뒤 편을 마주할 때면, 가끔 그 남학생을 떠올렸다. 남들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라는 이유로 무작정 겁을 먹었던 건 아닐까. 대화도 해 보지도 않고 다짜고짜 비명부터 지른 자신 때문에 남학생이 곤란해지거나 상처받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남학생과 눈길이 마주쳤던 그날, 등 뒤로 서늘하게 타고 올라오던 그 끈적하고 불쾌한 느낌만은 선명하게 남아 그녀를 지속적으로 괴롭혔다. 생애 첫 스토커였다.



그 후 학창 시절, 그녀의 뒤를 쫓는 남학생들은 몇 더 있었다. 그러나 그녀를 뜨악하게 만들 정도의 끈적한 서늘함은 없었다. 몇 번의 고백과 몇 번의 거절이 오갈 뿐이었다. 자연스러운 접근과 거절이었고, 누구 하나 더 이상 그녀를 괴롭히지 않고 깔끔하게 단념했다.







터벅터벅, 건물 5층까지 오르는 걸음이 무거웠다. 자취 1년 차, 다음 번 집은 저층이거나 엘리베이터가 있는 조건부터 먼저 따져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5층에 다다른 걸음이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고 계단 끝에서 멈췄다. 우뚝, 그 자리에 멈춰 선 그녀는 자신의 눈에 밟히는 저 하얀 것이 무엇인지 한참을 뚫어지게 바라보아야 했다.



「최수련」 자신의 이름이 적힌 약 봉투였다.



약 봉투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자켓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핸드폰부터 다급히 찾았다. 건물 주인아주머니 전화번호를 찾는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전화기 너머 울리는 아주머니의 음성에 다짜고짜 건물 cctv를 확인할 수 있느냐 물었다. 지금 당장 경찰서를 찾아가야 할까, 지나치게 과민 반응을 하는 걸까 고민하는 그 모든 찰나에도 끈적한 눈길은 그녀를 따라붙었다. 다시 또, 등 뒤가 서늘했다. 급식소 뒤 편, 흩날리던 보라색 꽃잎이 악몽처럼 떠올랐다. 보라색 꽃을 건네던 그 손길이 어딘가 모르게 순수한 끈적임이었다면, 저 하얀 약 봉투는 순수함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훨씬 더 역겹고 더러운 끈적임이 분명했다. 어디서부터지,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 헛구역질이 올라올 것만 같았다.

그간 우편함의 우편물이 중간에 사라지거나 흐트러져 있는 일들이 종종 있었다. 아침에 급히 출근하면서 스캔하듯 본 우편함의 형태와 퇴근길에 마주한 우편함의 형태가 다른 날이 더 많았다. 게 중 몇은 뜯었다가 다시 붙인 흔적도 있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하루는 날짜에 맞춰 내놓은 일반 쓰레기 봉투의 모서리가 찢겨진 날도 있었다. 동네에 돌아다니는 도둑 고양이가 한 짓일까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쓰레기 더미에서 그녀가 썼던 메모나 영수증 몇이 증발하고 없었다. 수련은 자신이 망상장애라도 걸린 걸까, 스스로를 의심하기도 했다. 그런데 저 하얀 약 봉투가 나타난 순간 모든 것이 자명해졌다. 몇 주간의 이 모든 정황들은 자신이 홀로 만들어낸 착각이 아니었다. 







잘근잘근, 손톱을 물어뜯고 있는데 건물 주인아주머니의 전화가 울렸다. 안타깝게도 cctv는 건물 입구에 세워진 1 대가 전부였다. 몹시 흐리고 옅은 화질도 화질이거니와 cctv 영상만으로는 특별한 것을 찾을 수 없었다. 각 층마다 3세대씩, 5층짜리 건물. 총 15 세대가 함께 사는 건물에는 반나절 동안 많은 사람들이 오갔다. 건물에 사는 사람뿐 아니라 그들을 방문한 지인들, 하루에 몇 번이고 오가는 배달 라이더까지. 영상만으로는 흰 약 봉투의 흔적도, 의심스러운 누군가도 시원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수련의 연락에 진아가 다급히 달려왔다. 급한 대로 옷가지만 챙겨 당분간 자신의 집으로 가 있자는 진아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수련은 고집을 피웠다. 도망쳐야 할 것은, 사라져야 할 것은 자신이 아니라 그 스토커라는 이유에서였다. 게다가 단지 머무는 장소를 옮긴다고 해서 이 끈적한 눈길이 사라질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누구보다 수련의 성격을 잘 아는 진아였다. 대신 진아가 수련의 집에 자주 드나들기로 했다. 진아는 태어난 지 13개월 된 딸아이의 엄마였다. 집을 오래 비울 수 없었다.



수련은 경찰에 신고부터 했다. 그간 자신이 느낀 불쾌한 시선과 우편함, 쓰레기 봉투 사건들을 차근차근 설명해야 했다. 끝으로 오늘 현관 앞에 놓인 약 봉투를 증거로 내밀었다. 상대는 점점 대범해지고 있었다. 보다 직접적인 물증을 찾을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수련은 현관문에 인터넷으로 구매한 cctv를 설치했다. 경찰은 주변 순찰을 강화하겠다고 했고, 원하면 출퇴근길에 동행해 주는 방법도 있다고 했다. 그녀는 어린 시절, 그날처럼 엉덩방아를 찧으며 바보처럼 넘어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대신, 자신이 직접 맞설 거라고, 그럴 수 있다고 되뇌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뒤였다.



"502호, 맞죠? 자연스럽게 계속 걸어요. 뒤쪽 10시 방향."



낯선 향기가 곁에 붙었다. 수련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어깨를 움츠렸으나 이내 허리를 곧게 펴고 태연한 척 앞을 보고 걸었다. 익숙한 얼굴, 501호였다. 자기 건물에 당최 스토커가 웬 말이냐고 주인아주머니가 하루종일 소란스럽게 한 터였다. 모든 세대를 하나하나 방문하며 502호에 이상한 사람 보이면 바로 신고하라고 신신당부하며 사람들을 들볶았다. 501호도 그 소란으로부터 자유로울 리 없었다. 501호의 발걸음에 속도를 맞춰 걸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걸으려 했으나, 자꾸만 다리에 힘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얕아 보이지만 실은 매우 위험한 늪에 발이 빠진 것만 같았다. 허우적거리는 정신을 다잡았다. 



"야!! 왜!!!! 내가 더러워? 내가 뭐 했는데! 뭘 잘못했는데!!" 



수련의 신고 문자를 받은 경찰이 곧장 출동했다. 이내 진아도 아기 띠를 한 채 수련의 집으로 뛰어왔다. 현장 검거. 그림자처럼 뒤를 따라다니는 생활이 지겨웠던 걸까. 지하철에서부터 집까지, 퇴근하는 수련을 끈질기게 쫓는 그의 등 뒤에는 파란 수국 꽃다발이 찰랑찰랑, 어지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얼마 전 새로 생긴 편의점의 야간 아르바이트생이었다. 수련의 기억이 맞다면 자신과 눈길 한 번 제대로 마주치지 않던 사람이었다. 물건을 계산할 때마다 묘하게 사람을 불편하게 했던 그 남자. 경찰서로 연행되는 순간에도 그는 수련을 향해 알아들을 수 없는 짐승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바닥에 내팽겨진 파란 수국 꽃다발이 그의 거친 발길에 짓밟혀 으스러지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편의점에 들렀던 수련이 습관처럼 건넨 인사와 눈웃음이 발단이었다고 했다. 그녀는 망연자실했다. 자신에게서 출발한 친절은 그 언젠가 지구를 돌고 돌아 친절로, 아니, 친절이 아니어도 좋으니 어떤 식으로든 따뜻한 무언가로 되돌아올 거라 믿고 살았다. 그런데 자신의 사소한 감사 인사가 커다란 공포가 되어 돌아왔다. 범인은 수련과 같은 건물, 2층에 살고 있었다. 청소년 시절의 범행이긴 했지만 2건의 성추행 미수와 1건의 성폭력 전과가 있었다. 최근 5년 간 정신과 약물 복용 이력이 있었고, 현재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치료를 받고 있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 몇 주 간, 그녀를 괴롭혔던 끈적하고 서늘한 시선에 비해 실상은 어리숙하고 치밀하지 못한 편에 속하는 인간이었다. 그는 수련의 현관 cctv에도 흔적을 남겨 두었다. 새벽 4시, 검은 모자를 눌러쓴 채 한참 동안 수련의 현관 앞 복도를 서성거리며 기웃거리는 모습도 고스란히 찍혀 있었다. 







범인이 검거된 날 밤, 진아는 남편에게 아이를 부탁한 채 수련의 집에서 함께 잤다. 다음 날, 진아를 등 떠밀어 집으로 돌려보낸 수련은 회사에 일주일 간 휴가를 냈다. 전 날 밤의 소동이 하룻밤 꿈만 같았다. 온몸 구석구석 묻어있는 그 끈적하고 더러운 눈길을 떨쳐내고 싶었다.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샤워를 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대청소까지 끝낸 수련은 쓰레기를 버리러 집을 나서는 길, 건물 복도에서 501호와 마주쳤다. 어제 내내 자신의 발걸음을 맞추어 걸어주었던 고마운 그 남자. 



"안녕하세요." 

"어, 502호 맞죠? 괜찮으세요?" 

"어제는 정말 감사했어요."

"아니에요. 주인 이모님이 좀 유별나야죠."



뒤통수를 긁으며 멋쩍게 웃는 그를 향해 수련도 덩달아 피식, 웃음을 흘렸다. 짧은 동행, 대단한 일을 함께 해 낸 전우애 같은 것이라도 생긴 걸까. 두 사람은 함께 집 근처 카페로 향했다. 이른 아침부터 문을 여는 그 카페는 브런치가 맛있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는 주변 대학에 재학 중인 대학원생이라고 했다. 이른 새벽이나 늦은 시간에 문이 여닫히는 소리를 가끔 들었던 터였다. 야근이 잦은 직장인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어렸다. 학생이었구나.



"어제 너무 감사해서요. 오늘은 제가 대접할게요."

"아, 별일 없어 다행이에요. 감사하다는 인사가 뭐 특별하다고 그랬을까요, 그 사람은."







순간 지이이잉, 진동벨이 울렸다. 울림은 생각보다 컸다. 순간, 테이블 전체가 흔들렸다. 아니, 수련은 자신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음을 느꼈다. 자리에서 일어나 메뉴를 픽업하러 걸어가는 내내 수련의 등 뒤에 내리꽂히고 있을 그 사람의 시선이 몹시도 뜨거웠다. 아니, 익숙한 눈길이었다. 사람 좋게 웃어 보이던 그 눈웃음 뒤로, 끈적하고 서늘한 시선이 꽁꽁 숨어 있었다.



[감사하다고 했잖아! 네가! 네가 먼저 나한테 웃어줬잖아!!]



경찰서 유치장 쇠창살 사이로 손을 뻗으며 스토커가 발악하듯 내질렀던 그 말. 그 미친놈의 외침을 들은 건 분명 수련 자신과 진아뿐이었다. 다시, 발걸음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휘청이는 다리를 들키지 않으려 애써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넘기며 걸었다. 손 끝이 저렸다. 어젯밤 빠져나온 줄 알았던 그 깊고 위험한 늪에서 정작 한 발자국도 빠져나오지 못했다. 어지러웠다. 숨이 가빴다. 이름 모를 보라색 들꽃의 꽃잎이, 푸른 수국 꽃다발이 눈앞에서 뒤엉켜 쏟아져 내렸다.



끈적한 서늘함. 샤워를 해도, 대청소를 해도 끈질기게 남아있던 그 더러운 흔적의 주인이 지금, 바로 자신의 뒤에 있다.



더쓰다: 009. 결혼식


정식으로 연애를 시작하기도 전부터 연애를 시작하기까지, 그리고 연애를 하는 내내. 우리는 1년 365일 중, 360일을 만났다. 첫 만남부터 매일같이 지속된 만남.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저녁쯤이면 카톡이 울렸다.


[우리 오늘도 만날까요?]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돌이켜보면 나 역시 딱히 거절 의사를 밝힌 적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매일 만났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절, 나는 연애니 남자니 전부 지겹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좋으니 그냥 혼자가 편할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했던 것 같다. 지칠만큼 치쳐 있었던, '그 남자가 그 남자지, 별 거 있나'라는 생각이 가장 짙었던 그 시절 일상처럼 내 앞에 나타난 사람이었다. 태어나 만난 그 어떤 사람보다 밝고, 따뜻하다 못해 뜨겁고, 에너지 넘치고, (원한다면 어떤 이유에서건) 매일이 이벤트인 사람.




대학원 생활로 정신없던 그 시절, 나는 참 많이도 바빴는데 하루의 마지막은 늘 이 남자가 함께였다. 동네가 같았다.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길, 나를 데려다주는 30분 만이라도 내 얼굴을 보러 달려오는 남자였다. 당시 내가 있던 학교는 부산이었지만, 그의 직장은 집 근처였다. 다시 말하면, 그는 나를 보기 위해 늘 피곤한 몸을 이끌고 부산까지 나왔다가 다시 집으로 되돌아오는 일정을 소화한 셈이다. (본격 연애를 시작하고 나서는 아예 나의 학교 근처에 위치한 회사로 이직까지 했다, 이 사람.)


처음부터 종이 울렸다던가, '이 남자다!'하는 느낌은 없었다. 일관된 모습에 안정감을 느꼈던 걸까. 밝고 뜨거운 그 생소한 에너지에 정신이 팔렸던 걸까. 천천히 스며들듯 나의 일상이 된 그 사람을 보며, 내가 결혼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면 지금 이 사람과 함께일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 같은 것이 생겼다.




엄마는 나의 사생활에 대해 무지했다. 늘 나에 대한 관심이 흘러 넘치는 엄마였지만, 그럴수록 나는 집과 밖의 생활을 철저히 분리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처음 연애를 하는 얼마간 엄마는 그 사람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 바람 냄새로도 내 아이의 변화를 알 수 있는 게 엄마이니, 결국 엄마는 어느 시점이 지나며 내가 연애를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큰 관심을 두지는 않으셨다. 그간 나의 연애는 서툴렀고, 짧았고, 깊지 않았다. 테스트하듯 사랑을 시험대 위에 올려두는 연애였으니, 길게 지속될 리 만무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나의 말은, 그런 엄마에게 폭탄선언이자 충격 그 자체였다. 내가 먼저 집에 연애 사실을 고백하는 일은 잘 없었거니와 고백하더라도 '그냥, 있어.' 정도의 미약하고 사소한 것이었다. 연애 중인 사람을 부모님께 소개하겠다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엄마는 막연히 내가 아주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던 차였다. 엄마는 나의 폭탄선언을 마뜩찮아 했다. 하다하다 상대의 나이까지 흠이 되었다. 처음에는 '7살 나이 차이'가 너무 많다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 다음은 상대는 나이가 많으니 결혼을 서두르는 게 당연하고, 그 상대가 내가 아니어도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을 거라고, 네가 속고 있는거라고 그 사람에게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씌웠다. 나여서가 아니라, 나이가 차서 결혼을 원하는 거라고 비난했다.


아니, 내가 결혼이 하고 싶다니까, 엄마?


궁지에 몰린 엄마는 이제 띠 궁합까지 끌고왔다. 나와 상대의 띠는 상극 중에 상극이라는 것이었다. 첫 번째 상극은 6살 차이이고, 두 번째 상극이 7살 차이라고 갖다붙였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엄마는 가끔 본인의 딸이 '과학'을 기반으로 한 심리학을 연구한다는 사실을 잊고 지내는 듯 했다.




그럼에도 우리의 연애는 지속됐다. 언젠가 아빠가 구원투수로 나섰다. 나와 엄마의 신경전을 아무말 없이 지켜보던 아빠는 내게 따로 대화를 신청했다. "이제는 엄마를 알 때도 되지 않았니. 좀 영리하게 가자, 엄마는 그런 방법으로는 안 통할거야." 아빠는 엄마의 성향도, 나의 성향도 누구보다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 엄마를 잘 구슬려보자는 식으로 물꼬를 텄지만, 사실 내 편을 들어주는 척하며 나의 만만치 않은 고집을 한 풀 꺾으려는 아빠의 너른 혜안이었다. 아빠는 내게 식사 자리를 잡으라고 했다. 엄마에게는 절대 비밀로 하고, 아빠가 먼저 그 사람을 만나보겠다고 했다. 아빠가 보고도 괜찮은 사람이다 싶으면, 그 다음은 아빠에게 맡겨 달라고 했다. 대신 조건을 걸었다. 아빠가 만나보았는데 별로라는 판단이 들면, 너도 그 때는 물러나 달라는 것이었다.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믿었으므로 나는 주저없이 아빠의 손을 잡았다.


첩보작전을 펼치듯, 아빠와 그 사람의 식사자리가 열렸다. 그 사람은 몹시도 긴장했다. 술을 잘 하지 못하는 아빠였지만 그 사람에게 술을 권했다. 역시나 술을 잘 못하는 남자였다. 그 자리에서 주량이 가장 센 것은 나였으나, 나는 그 날 한 잔도 마시지 않고 맨정신으로 두 사람의 처음을 지켜보았다. 두 사람은 그 날, 첫 식사 자리에서 소주 5병을 나누어 마셨다.


아빠와 그 사람은 서로 멀쩡한 척 연기했으나 거나하게 취한 상태로 헤어졌다. 친구와 식사를 한다고 집을 나섰던 아빠가 먼저 집으로 귀가했고, 연구실 회식이 있다고 했던 나는 그 사람을 집까지 데려다주고서 뒤늦게 따로 귀가했다. 아빠에게 90도로 인사를 한 뒤에 쓰러지듯 휘청이며 내게 기대던던 그 사람에게서 낯설고 고약한 소주 냄새가 났다. 쿨하게 손을 흔들고 돌아서는 아빠의 걸음걸이도 꽤 흔들리고 있었다.


아빠에게서 OK 사인이 떨어졌다. 단, 조금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일단은 아빠가 허락한 사람이니 편안한 마음으로 연애를 지속해보라고 지지해주었다. 엄마를 설득하는 건 아빠의 몫으로 넘겼다.




2015년 2월 말, 그 사람은 정식으로 우리 부모님을 만났다. 엄마는 집을 나서기 전부터 자신은 한 마디도 하지 않을테니, 질문은 전부 당신이 하라고 아빠에게 신신당부했다. 나는 아빠의 조언대로 식사를 함께 해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듯 바닥에 납작 엎드린 자세를 취했다. 정말로 엄마는 식사 내내 입을 앙, 다물고 있었다. 돈 봉투를 건네며 '우리 아들과 헤어지게'를 외치는, 흔한 아침 드라마의 어떤 시어머니와 꼭 빼닮은 태도였다. 아빠와의 첫 만남은 극비사항이었으므로, 아빠는 무게를 잡으며 그 식사 자리에서 처음 했던 것과 거의 유사한 질문들을 다시 해야 했고, 그 사람은 다시 그 때와 같은 태도로 진실된 대답들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엄마의 입이 열렸다.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한 번 말을 트기 시작한 엄마는 본인이 직접 그 사람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입을 다물고 있었나, 싶게 이야기가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어느새 그 자리에서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것은 아빠였고, 주 면접관 역할은 엄마가 도맡아 하고 있었다. 결국 식사의 마지막은 케이크에 초를 불며 몇일 뒤에 있을 내 생일을 다함께 축하하는 것으로 흥겹게 마무리되었다.


엄마는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아빠의 질문에 대한 그 사람의 답에 마음이 열렸다고 했다. "부모님입니다. 어떻게 들리실 지는 모르겠지만 ... 저는 저희 부모님들처럼 살고 싶습니다." 수줍은 듯 당당하게 내뱉는 그 사람의 대답을 듣는 순간,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좋아졌다고 했다. 자신의 부모님을 존경한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그들이 살아온 삶을 동경하고, 그런 인생을 살고 싶어하는 남자라면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고 했다. 사람이 밝고 구김살이 없어 좋다는 둥, 붙임성이 좋다는 둥, 넉살이 어쩜 그렇게 좋냐는 둥 ... 그 뒤로는 칭찬 일색이었다. 이제는 엄마가 적극적으로 나의 연애를 찬성한다는 데 오히려 그것이 어색하고 불편할 정도였다. 그렇게 그 사람은 우리 부모님의 마음을 열었다.




2015년 봄, 그 사람이 엄마에게 일본으로 온천 여행을 함께 가자고 했다. 싫다고 할 줄 알았던 엄마는 단 번에 좋다고 응했다.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평소 일본 온천 여행을 떠나고 싶어하셨던 어머님도 합세했다. 여행은 결국 이상한 조합이 되었다. 두 분 어머님을 모시고, 그것도 일본 온천 여행이라니. 나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아니, 이게 가능한 조합이야? 여행을 가기로 약속하고 나니 양가 어머님이 서로 얼굴도 모른 채로 덜컥 온천 여행을 가는 건 무리라는 데 의견이 모였다. 여행을 가기 전, 간단히 식사라도 함께 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2015년 5월 24일. 간단한 식사와 차를 함께하기로 했다. 연배가 비슷한 양가 어머님은 급속도로 친분을 쌓았다. 중간에서 우리가 할 일은 딱히 없었다. 그 덕에 우리는 점심 식사와 차를 끝으로 헤어진다는 처음 계획과는 달리, 저녁 식사와 간단한 반주, 그리고 노래방에 들러 끌어오른 흥을 발산시키는 데까지 이어졌다. 점심 식사를 하러 나간 엄마와 내가 밤 12시가 다 되어서야, 그것도 엄마가 술에 약간 취한 상태로 돌아온 것을 바라보던 아빠의 표정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화통한 성격의 어머님은 "이렇게 서로 좋아하는 두 사람인데, 내년 초에는 결혼시켜도 되지 않겠냐"고 넌지시 말씀을 건넸다. "그러지요, 좋네요!" 엄마의 화답은 더 당황스러웠다. 서로 막내 딸, 큰 아들 나누어 가진다고 생각하자며 두 분은 웃음을 터뜨렸다. 첫 만남, 첫 식사 자리에서 우리 두 사람의 시간은 '연애'를 넘어 '결혼'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메르스가 창궐했던 2015년 6월. 우리는 일본 온천 여행 대신 여수로 여행을 떠났다. 정말로 양가 어머님과 함께인 여행이었다. 그 이후는 속전속결이었다. 네 사람이 자주 만남을 가졌고, 어머님들은 어느새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평소처럼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던 어느 날, 엄마가 핸드폰의 달력을 열고는 대뜸 "7월 말, 일요일은 어떠세요?"라고 물었다. 요는 아버님들까지 모시고 식사를 하자는 것이었지만, 실은 상견례를 하자는 말이었다. 지이잉, 차가 준비되었다는 진동벨 소리에 1층으로 내려가면서, 우리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진짜로? 진짜 상견례를 하겠다고? 이렇게?


아빠는 끝까지 본인의 역할에 충실했다. 상견례 날짜를 잡았다는 엄마의 말에, "내 의견은 왜 묻지 않고 결정하느냐"며 괜히 마음에도 없는 군소리를 붙였다. 엄마의 이런저런 길어지는 부연 설명에 남몰래 아빠와 나의 입꼬리가 비식, 올라갔다. 엄마는 이미 그 사람에게 흠뻑 빠져 있었다.


아니, 이럴 거면서 뭘 그렇게 반대했대?




2016년 2월 14일. 세상 모두가 달콤함에 취했던 그 날, 우리는 그 누구보다 달콤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혼수는 최대한 간단하게, 천편일률적인 스튜디오 촬영 대신 스냅 작가 한 명을 섭외한 채 내 맘대로 준비한 셀프 웨딩 촬영, 식 당일 무거운 주례는 생략, 축가에 이어 사물놀이 후배들의 선물같았던 결혼 축하 공연 ... 내가 꿈꾸는 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들었던 결혼식이었다.


1년 365일 중 360일을 만났던 그 남자와 나는, 그렇게 1년 365일을 내내 함께 하는 사이가 되었다. 평생을, 곁에서 함께하는 '부부'가 되었다. 그럴싸한 꽃가루도, 종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우리는 인연이었다고, 처음부터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사랑을 좀처럼 믿지 못하던 내가 [오늘도 만날까요?]라는 그 사람의 카톡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좋아요]라고 대답한 그 날부터 우리는 이미 이렇게 결혼식을 올릴 운명이었다고.


평생, 나와 함께 할 동반자가 당신이어서 참 다행이다. 정말, 고맙다.



더쓰다: 008. 얼굴


눈을 감아야만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내게 기억이란, 때로 선명하지 않은 아지랑이 같아서 선명하게 각인된 몇몇 장면들을 제외하고는 심상(心象)으로 남아있는 기억들이 적다. 모조리 망각한 것은 아닌데, 굳이 설명하자면 내 기억들은 조각조각 흩어져 있는 것도 같고 흐린 안개 속에 감춰진 것도 같다. 그래서 학창시절 친구들과 오랜만에 시간을 보낼 때면 퍽 난감하다. 아무리 절친했던 친구와 함께여도 나는 암흑에 가까운 기억상자를 가지고 있어서, 그들과 추억을 나누는 시간동안 남몰래 괴롭고 외로울 때가 많다.

그보다 더 힘든 건, 갑자기 나를 아는 채 하는 사람을 마주했을 때다. 나는 인사를 나누는 짧은 찰나에 모든 단서들을 놓치지 않으려 애쓴다. 상대가 나를 부르는 호칭이나 나를 대하는 말투, 몸짓, 사소한 신호에서 적어도 상대와 내가 어느 시기에 인연이 닿았던 것인지 만이라도 빨리 기억에서 소환시키려 갖은 노력을 기울인다. 때로는 상대의 얼굴을 알아는 보겠는데(그러니까 여기서 알아 본다는 건 '아는 얼굴인가 모르는 얼굴인가'의 기준에서 '안다'의 범주에 들어가는 얼굴임을 알아챘다는 뜻이다.) 문제는 그 이상은 떠오르지 않는 거다. 상대의 이름도, 상대와 내가 어떤 관계인지도 내 머릿속에는 저장된 것이 없다. 애초에 저장이 되지 않은 것인지, 저장은 되었지만 소멸한 것인지, 아니면 잘 저장되어 있는데도 인출에 문제가 있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가만 보니 꼭 자기가 제일 못 하는 걸 전공으로 고르더라고. 상담이 필요한 녀석들이 상담 심리학을 하고, 어디 아픈 놈들이 임상 심리학을 해. 게 중에 제일 머리가 모자란 놈들이 여길 찾아오더만. 그래, 너는 뭐가 모자라서 인지 심리학을 고른 게냐?" 심리학을 내 길로 선택했을 때, 인지 심리학을 전공으로 골랐을 때, 담당 실험실 교수님께서 하셨던 농담이 떠오른다.

교수님, 이제 와 말씀 드리는 거지만, 저는 기억을 잘 못 하는 사람인 듯 싶어요. 특히, 사람 얼굴이 그래요.



그럼에도, 눈을 감으면, 부족한 내 기억 속 작은 상자에도 선명히 떠오르는 그 순간의 얼굴이 있다.

사랑하는 나의 할머니. 내게 팔배게를 해 주시던, 너른 품을 내어주시던 그 시절 내 할머니의 그 얼굴.

할머니 품에 쏙 들어갈 정도로 작았던 나. 무어라 나즈막히 노래를 불러주셨는데, 노래는 기억나지 않는다. 자꾸만 까무룩 눈이 감기는 할머니는 노래인지 잠꼬대인지 모를 소리를 흥얼대며 나를 품에 안고서 등을 가만가만 두드린다. 혼자 낮에 실컷 낮잠을 잔 내가 곱게 잘 리가 없다. 할머니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숨을 쉰다. 할머니 냄새가 콧 속으로 훅, 밀려 들어왔다 나간다. 편안하고 따뜻한, 포근한 겨울 냄새. 전혀 잘 생각 없이 말똥말똥, 멀건 눈만 깜빡깜빡, 할머니의 가슴팍에 얌전히 안겨 있다.

꼬물거리는 작은 손가락을 움직여 할머니의 가슴팍에 있는 단추를 단추구멍에 넣었다 뺏다, 장난을 친다. 붉은 색과 검은 색, 보라 색이 오묘하게 섞여 있던 할머니의 조끼. 아메바 같기도 하고, 덩쿨 같기도 한 어지러운 작은 무늬가 엉키듯 얽혀 있던 그 조끼. 시간이 많이 흘러 다시 찾은 시장에는 눈을 돌리는 곳마다 그런 스타일의 옷들이 좌판에 깔려 있었다. 그 무늬들을 보며 할머니 생각이 나서 웃음이 났던 것도 같다.



등에 올려진 할머니의 손길이 무겁다. 할머니 숨소리도 어느새 거칠다. 고개를 가만 들어 할머니 얼굴을 바라본다. 잠든 걸까. 꼼지락 몸을 움직여 할머니와 고개를 마주 보고 눕는다. 옴폭 패인 할머니 눈이 감겨있다. 굽이굽이 쌓인 주름결을 따라 작은 손가락을 움직인다. 세로로 줄 선 입술의 주름들을 따라 손을 움직이면, 할머니가 "으응, 그래~" 묻지도 않았는데 대답을 한다. 옆으로 누운 할머니 얼굴은 땅으로 쏟아질 것도 같다. 어린 마음에 그게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잘 때마다 왜 할머니 얼굴은 바닥으로 쏟아지지. 그래도 입 밖으로 꺼내 물어본 적은 없다. 물어보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건지, 물어볼 기회가 없었는 지는 모르겠다.



푹, 들어간 할머니의 얇은 눈꺼풀을 심술궂게 손가락으로 들어올린다. "할머니이, 일어나. 나랑 놀아." 그러면 인상 한 번 쓰지 않고 할머니는 힘 없이 눈꺼풀을 겨우, 천천히 들어올린다. "우야노, 이래 안 자서. 깜디도 잔다. 어여 코- 넨네 하자." 마당에 검은 강아지도 잔다고, 다 자는 시간이니 자야 된다고 그 한 마디 하고는 다시 등에서 손을 가만가만 두드린다. 어쩐지 놀아 달라는 요구를 거절 당했음에도, 나를 다시 재우는 그 모든 움직임은 몹시도 느리고 둔한 것이었음에도, 어린 나는 그 모든 순간에 평온을 느낀다. 내가 아직 잠들지 않았는데 먼저 잠 드는 할머니에게 심술 부리듯 앙칼지게 눈을 까뒤집어도 채근하지 않고 가만가만 나를 진정시켜주는 그 '넨네 하자'는 말소리와 흩어지는 숨소리, 등을 두드려주던 손길이 여전히 뜨겁다. 그러면 나는 몇 번을 더 할머니의 눈을 뒤집고, 할머니는 또 여전히 같은 온도로 나를 진정시키기를 반복하다가 어느새 정신을 차리면 아침이었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든 것이었다. 나는 쏟아지는 할머니의 얼굴에서, 낮과는 전혀 다른 할머니의 얼굴에서 내가 아는 할머니가 맞는 지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내 등에 닿는 할머니의 손길에서 '내 할머니'를 확인 받으며 안심하며 잠들고 싶었던 걸까. 그 무엇도 알 수 없다.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확실한 건, 여전히 눈을 감으면, 애를 쓰면, 그래도 그 순간에 나를 품어주던 할머니의 너른 품이, 주름이 쏟아지던 그 보드라운 얼굴이 선명히 떠오른다는 사실. 그것에 나는 이유 없이 안도하게 된다. 할머니가 설령 돌아가시는 순간이 오더라도 나는 이 기억을 붙잡고 끝내 추억할 수 있음에 새삼스레 감사하게 된다. 나의 이 미천한 기억 상자에도 할머니의 얼굴이 이렇게나마 작게 담겨 있어서, 그 잠깐의 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추억할 수 있는 얼굴이 있어 정말 다행이라고.



눈을 감아야만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그리운 얼굴을 떠올리고 싶은 날이면, 가만, 눈을 감아 본다.



더쓰다: 007. 비밀


소영은 몇 번이고 마음을 다잡았다. 기필코 오늘이어야만 했다.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마지막 기회였다. 운동화 끈을 조여매고 일어나 교복 치마를 탁탁 털어냈다. 스스로를 다독이며 불어넣는 기합이었다. 내달리듯 집을 나섰다. 오늘따라 유난히 바람은 시리고, 햇살은 따가웠다.

교실 문을 열자, 교탁에서 무리지어 떠드는 아이들 사이로 지원의 얼굴이 소영을 가장 먼저 맞이했다. 말간 얼굴. 소영을 따라 도로록 구르는 그 눈동자를 무시했다. 소영은 일부러 모른척 자리에 가 앉았다. 소영의 몸짓에 지원은 다시 아이들 틈새로 숨어들었다. 소영의 가방에는 밤새 길게 쓴 편지가 있었다.

이별 편지였다.

오늘따라 지원과 단 둘이 시간을 보낼 틈이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자꾸만 귓바퀴에 머물다 쏟아져내렸다. 허공에 떠다니는 먼지의 흐름까지 하나하나 다 보일 정도로 더디게 흐르는 시간이었다. 소영의 온 신경은 오직 편지에 가 있었다. 지원에게 적당한 타이밍에 이 편지를 전해야 했다. 적당한 순간에, 적당히, 이별을 해야만 하는데. 적당한 이별이라니. 소영은 이별을 준비하는 여자애 치고 퍽 평온해 보였다. 아니, 초조했으면 초조했지, 조금도 슬프거나 애달픈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소영이 이렇게까지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구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내일은 대현 중학교 졸업식이었다. 소영은 중학교 졸업 선물로 이별을 고하는 여자 친구가 되기 싫었다. 졸업식에 헤어지나, 그 전 날 헤어지나. 하루 차이로 이별하면서 그게 뭐가 다를까 싶지만, 그래도 예쁜 꽃다발 들고 찍는 그 졸업 사진에 소영은 지원과 연인 사이로 사진을 남기기 싫었다. 이별 편지에 마음 상한 지원이 아예 소영과 사진을 찍고 싶지 않아 하면 더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꽤 오래 전부터 생각했던 이별이었다. 시한부 연애. 처음부터 소영은 지원과 끝이 정해진 것처럼 연애를 했다. 그걸 몰랐을 지원이 아니었다.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상관 없었다. 그저 소영이 좋았다. 곁에 있을 수 있으면, 가까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무엇이든 좋았다. 웃을 때 가늘게 늘어지는 눈꼬리, 시원하게 터지는 웃음 소리, 필기하는 가느다란 손가락의 움직임, 무언가에 집중할 때면 가늘어지는 입술 ... 지원은 소영의 사소한 모든 것들을 좋아했다. 길을 걸을 때 쉽사리 소영의 손을 잡고 걷지 못 해도, 다른 스킨쉽이나 키스를 허락해 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어차피 그런 것 때문에 소영을 만나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 오늘 헤어지는 거지?"

소영이 오늘 지원에게 이별을 고할 거라는 것 쯤은, 예상한 바였다. 그렇다면 지원이 먼저 해야 했다. 종례를 앞둔 시간, 왁자지껄 부산스러운 아이들 사이, 홀로 책상에 엎드려 있는 소영에게 지원이 먼저 다가가 속삭이듯 말을 걸었다. 소영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지원이 어느새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소영과 지원, 둘이 함께 이야기 나누는 것에 관심을 갖는 아이들은 딱히 없었다. 소영은 지원의 질문을 이제야 이해한 사람처럼 어버버, 고개를 끄덕였다.

"음, 대신 소원 하나만 들어줄 수 있어?"

"소원?"

뚝딱거리던 소영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미간을 좁히며 못마땅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지원은 사람 좋은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마지막이잖아." 그 한마디에 소영은 다시 기가 죽었다. 어제 밤 늦게까지 쓴 편지를 굳이 전해주지 않아도 되고, 어떻게 이별의 물꼬를 터야 하나 고민하는 수고는 덜었는데 소원이라니 덜컥 부담이 몰려왔다. 사귀는 내내 자신에게 무엇 하나 요구하지 않던 지원이었다. 그런 지원이 이별의 순간에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요구한 소원이니 머릿속이 복잡할 만도 했다.

"한 번만 안아보자."

"뭐?"

소영의 눈이 토끼처럼 커졌다. 안그래도 큰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동그래졌다. 그 다음은 더 가관이었다. 소영이 손 쓸 새도 없이 지원의 품에 폭, 쓰러지듯 안겼다. 영락없이 어미새 품에 안긴 아기새였다. 달큰한 꽃 향이 풍겼다. 소영의 어깨를 감싼 지원의 손 끝이 조금, 떨렸다.





"자, 반장. 종례하자, 종례! 거기! 아이고오~~~ 저 기집애 둘은 떨어지고!"

담임 선생님의 등장과 함께 지원이 소영에게서 스르륵, 썰물처럼 흩어지듯 빠져나갔다. 소영의 짝이 자리에 와 앉은 뒤에도 한동안 소영은 기울어진 몸을 바르게 돌리기 힘들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몸도, 머리도 제대로 인지하기 힘들었다. 달큰한 꽃 향기만 빙빙 맴돌았다. 어지러웠다.

소영의 비밀스러운 첫 연애가 끝나고, 첫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더쓰다: 006. 식물


어릴 때부터 동물이라면 다 좋았다. 특별히 종류를 가리지 않고 전부 다. 귀여운 반려동물들에만 국한된 사랑은 아니었다. 고등학생 때였을 텐데, 그 시절 우리 가족이 살던 오래된 주택은 나무로 지어진 집이었다. 어느 날, 방 한 구석에서 구멍을 발견했다. 침대 머리맡 아래쪽이라, 떨어진 물건을 찾기 위해 침대를 당기지 않았더라면 보지 못했을 구멍이었다. 아빠는 급한대로 합판과 실리콘으로 구멍을 메웠다. 그 때부터였다. 깊은 잠에 빠진 새벽이면 머리맡에서 자꾸만 이상한 소리가 울렸다. 그륵그르륵, 가르륵가륵가륵.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지조차 몰랐다. 이틀 쯤 지나고야 알았다. 사실 그 구멍은 쥐가 만든 통로였고, 하필 그 안에 쥐가 들어가 있는 사이 아빠가 구멍을 메웠던 터라 꼼짝없이 갇힌 쥐가 밖으로 나오려고 다시 구멍을 파는 소리였다. 아빠는 채웠던 구멍을 다시 뚫었다. 구멍 앞에는 커다란 끈끈이 쥐덫이 놓여 있었다.


다음 날, 쥐덫에는 회색 쥐가 붙어 있었다. 나는 발록발록한 작은 귀, 동그랗고 새-카만 눈동자를 보고 한 눈에 반했다. 햄스터 같은 반려 설치류들과는 전혀 다른 귀여움이었다. 서동쥐전을 읽으며 상상했던 모습 그대로의 회색 쥐였다. 하수구를 전전했을 지, 쓰레기통을 뒤지는 것이 일상이었을지 모를 뻣뻣하고 지저분한 털은 별로 중요치 않았다. 둥그렇게 말린 긴 꼬리를 만져보고 싶었고, 작디 작은 뒷통수를 한 번 쓰다듬어주고 싶었지만 그걸 허락해 줄 부모님이 아니었다. 아쉬움에 울상이 된 나를 두고, 아빠는 쥐덫을 반으로 접어 내게서 멀어졌다. 쥐덫을 들지 않은 아빠의 다른 손에는 망치가 들려 있었다. 그 날 밤, 나는 남몰래 숨죽여 울었다. 새벽이면 다시 나무 긁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내 방에 잠시 같이 살았던 그 쥐를, 나는 꽤 오래토록 그리워했다. 이상한 애착이었다. 동물에 대한 내 애정은 이처럼 한계가 없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그렇게 세팅된 채로 태어난 것 같았다. 그저 동물이라면 이유불문 모두 반갑고 사랑스러웠다. 이정도 마음이면 동물과 함께 하는 직업을 택했어도 직업 만족도가 꽤 높았을 듯 싶다.






그런데 식물은, 달랐다.






식물을 싫어했던 것은 아니다. 그 역시 생명체로 바라보았기에 몹시도 애정했지만, 식물 입장에서 나는 몹시도 악질적인 연쇄살인마였다. 이상하게 내가 키우는 화분은 기다렸다는 듯 차례로 죽어나갔다. 식물을 키운 장소의 문제는 아니었다. 엄마가 키우는 화분들은 보란듯이 잘 자랐다. 생기까지 돌았다. 늘 자리를 떠나는 것은 그 곁에 있던 내 화분들이었다. 이유도 다양했다. 어떤 것은 물은 너무 많이 줘서, 어떤 것은 물을 너무 적게 줘서, 어떤 것은 진드기에 점령 당해서, 또 어떤 것은 이유도 모른 채로 ... 갖은 애를 써도 결과는 같았다. 엄마의 돌봄을 따라해 보기도 했고, 좋다는 영양제를 사다 꽂아줘 보기도 했고, 사랑한다는 말을 매일같이 들려주기도 했다. 소용 없었다. 내 품으로 들어온 식물들은 하나같이 시름시름 앓다가 이내 매말라 죽었다. 그런 일들이 거듭되자 나는 식물과 잘 맞지 않는 사람이구나, 잠정 결론을 내렸더랬다. 차츰, 내 삶에서 '식물'은 '죽음'과 긴밀히 연결되었다.


운 좋게 식물들을 잘 길러냈던 적도 있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햇살이 참 좋았던 H와 나, 우리의 첫 집. 그 곳에서는 내가 무언가 하지 않아도 다육이들이 잘 자라 주었다. 한 달에 한 번쯤 물을 주었을까, 다육이들은 지나치게 물을 적게 주어도 괜찮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코니 화단은 다육이들로 가득 찼다. 어쩌면, 식물과도 잘 지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엿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좀 더 큰 집으로 이사를 하면서 나는 화단을 포기해야 했다. 이사를 결정한 집은 거실을 확장해서 발코니가 없었다. 작은 크기의 발코니가 있긴 했지만 실외기가 안으로 들어와 있어 식물을 키울 수 없는 환경이었다. 식물 없는 삶이 이어졌다. 기분을 내 보려 가끔 생화를 한 묶음씩 사서 화병에 꽂아두곤 했지만, 며칠 가지 않아 시들기 일쑤였다. 결국, 식물에 대한 나의 희망은 그 집에서만 맛볼 수 있었던 한낱 꿈이었을까. 다시 또 식물과 죽음 사이의 연결선이 짙어졌다.






언제부터인가 내게 죽음은 그저 죽음인 채로 곁에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죽음이 편안하거나 익숙한 사람이 있을까. 나 역시 어릴 때는 막연히 죽음을 무서워하고, 걱정하고, 헤어짐을 두려워하는 인간이었다. 변화의 출발점을 찾다가 내가 만났던 죽음들을 떠올렸다. 끝없이 죽음만을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물론 그 시절 죽음을 끝내 포기한 덕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겠지만, 여하튼 죽음 속에 갇힌 듯 살았던 그 시간 덕에 나는 죽음과 제법 친밀해졌다. 일반적으로 '죽음'하면 떠올리는 두려움이나 불안, 슬픔, 외로움 같은 감정들과 뒤엉킨 어둠이 내게는 없다. 졸업이나 취직, 결혼처럼 그저 삶에서 겪는 경험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여러 번 경험해 볼 수 없고, 결코 되돌릴 수 없고, 경험하는 순간 삶이 끝나 버린다는 점에서는 다른 경험들과는 차원이 다를 수 있겠으나 그럼에도 내게 죽음은 무겁지 않은 것이었다. 우리는 매 순간 살아가고 있지만, 매 순간 죽어가고 있지 않은가.


죽음을 일상처럼 마주하다보니 자연스레 오늘같은 날을 상상해 본 적이 있다.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나의 존엄성과 남아있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고민이었다. 현실은 상상보다 더 지독하다. H의 도움 없이 나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다. 그 어떤 식물도, 동물도 애정으로 키워본 적 없는 H가, 그런 일은 자기랑 맞지 않는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H가 나를 돌본다. 남몰래 울고 또 울었을 젖은 얼굴. 슬픈 표정을 삼키고는 다정하게 말을 붙이며 조심스럽고 정성스러운 손길로 내 몸을 옆으로 기울인다. 욕창이 생기지 않으려면 몸을 계속 움직여줘야 한다.


너는 알까. 나는 너의 따스한 손길조차 느낄 수 없어. 내 몸에 닿는 네가 전혀 느껴지지 않아. 그게 못내 서러워.


식물을 키울 때는 내가 매번 식물을 시들어 죽게 했는데 내가 식물인간이 된 지금은 오히려 H, 네가 먼저 시들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선다. 결국 나 때문에 시들어 죽는다니, 전자도 후자도 별로 마음에 썩 들지 않는 모양새다. 나는 오늘로 한 달 째, 식물처럼 살아있다. 의식이 없고 전신이 경직된 채로 대사(代謝)라는 식물적 기능만을 하는 인간. 죽음과 긴밀히 맞닿아 있지만, 기적처럼 다시 되살아날 수도 있는 인간.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인간. 식물상태의 인간. 글쎄. 약속된 기한 없는 지루한 기다림을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로, 사랑이라는 이유로 너에게 모두 짊어지게 해도 되는 걸까. 1%의 가능성 때문에 끝이 보이지 않는 씨름을 하는 게 맞는걸까.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은데. 매일같이 젖어있는 네 얼굴이 더 아픈데. 나의 삶과 죽음을 내가 직접 결정할 수만 있다면, 나의 그 결정을 네게 전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전한다면 너는, 나의 결정을 받아들여 줄까.

오늘따라 유난히, 한 손에는 쥐 덫과 다른 한 손에는 망치를 들고 멀어지던 아빠의 뒷모습이 그립다.

내게도 한 번에 망치를 휘둘러줄 커다란 손이 필요하다.



더쓰다: 005. 여행


여행은 내게 낯선 것이었다. 애초에 내가 여행이라는 것을 좋아하는 지, 싫어하는 지 조차 아예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내게 여행은 저 멀리, 동떨어진 세상의 이야기였다. 부모님의 영향이 컸다. 부모님은 여행을 즐기지 않으셨다. 꼭 거창하게 멀리, 오랜 기간 떠나는 해외 여행만이 여행은 아님을 안다. 허나 부모님은 (국내 여행이든, 당일치기 여행이든) 어떤 형태로든 집을 떠나 시간을 보내는 소소한 나들이조차 썩 즐기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유년시절부터 나는 여행이라는 것을 접할 기회가 극히 드물었다.

여행이라는 것이 아예 삶 속에 없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여행이라는 개념이 내게는 없었다. 우리 세 식구가 함께 한 여행을 꼽자면 다섯 손가락으로도 충분하다. 방학 때 강원도에 살고 계신 이모 집에 놀러간 일(여름과 겨울 한 번씩 간 것이 전부), 서울에 출장 간 아빠를 만나러 엄마랑 단 둘이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 간 일, 부곡하와이에 놀러간 일. 유년시절에 부모님과 함께 한 여행은 그 네 번이 전부였다. 흔한 나들이도 하지 않았다. 하루하루 살아내기가 퍽퍽했을까. 늘 미래에 살고 있었던 엄마는 현재를 즐기는 법을 몰랐다. 여행에 들이는 시간과 노력, 돈이 아까운 사람이었다. 여행이 우리 삶에 가져다 주는 가치들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아빠는 해외에서 일을 한 경험도 있고 여행 자체를 제법 즐기는 남자였지만 좀처럼 떠나지 않는 엄마를 배려했고, 적응했고, 어느새 떠나지 않는 삶에 익숙해졌던 것 같다.






퍽 삭막한 삶을 살았던 부모님이(정확히는 엄마가) 나의 여행을 적극 지지할 리 만무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친구 집에서 하루 자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격 없이 지내는 (부모님끼리도 친한) 친구네라고 할지라도 외박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친구가 우리 집에 오는 것은 가능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우리 엄마는 안 되는 게 참 많았다. 좀 더 자라서는 친구와 [내일로 기차 여행]을 떠나는 것도 꿈꿨지만 말 그대로 꿈이었다. 친구 집에 하루 머무는 것도 안되는 판국에 다른 지역으로의 여행이라니, 가당찮은 일이었다. 학교에서 떠나는 수학여행처럼 오직 공식 일정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여행의 전부였다.

다행히도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고등학교는 당시 중국의 고등학교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었고, 덕분에 수학여행은 중국으로 떠났다. 국립 고등학교였던 덕도 보았다. 4박 5일 일정이었음에도 매우 저렴한 비용을 들여 중국을 다녀올 수 있었다. 대학을 가고서는 그 공식 일정들이 늘어났다. 학생회 활동을 열심히 했으니 MT는 빠지지 않고 다녔다. 대학은 '개성 공장' 견학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다. 학생회 임원들은 매년 북한을 다녀왔다. 나도 그 행운의 주인공이었다. 당시 공장 문제로 개성 공장을 가지는 못했지만, 임진강을 건너 북한의 공개된 일부 식당과 산을 탔다. 하루 머물렀을 뿐이지만 평생 잊지 못할 풍경들을 나는 눈에, 마음에 담았다. 학생회라는 이유로 자매결연 대학이 있었던 일본도 다녀왔다. 대학원에 가서는 학회 참석이라는 명목으로 국내의 많은 지역과 해외를 다닐 수 있었다. 나는 그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즐겼다. 부모님이 알려주지 않았던 여행의 묘미를 나는 그렇게 배웠다. 어찌나 달콤하던지. 외국에서 살라고 해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정도로 나는 물 갈이도 하지 않았고, 모든 음식도 잘 먹었고, 적응력이 높았다. 모든 것이 좋았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모든 여행들은 어디까지나 '공식' 일정이었다. 내 개인이 주체적으로 하는 여행은 없었다. 양심에 찔렸지만, 내 시간을 갖기 위해서는 눈속임만이 답이었다. 나는 공식 MT의 일정 중 하루를 더 불려 내 개인 여행 일정으로 썼고, 장학재단의 MT 일정 중 이틀을 빼내 친구들과 시간을 보냈다. 대담하게 아예 없는 공식 일정을 거짓말로 창조해 낼 베짱은 없었다. 그렇게 떠나는 여행은 1분 1초가 불안을 짊어져야 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불안으로 쌓아올린 여행은 쓰디 썼다. 공식 일정 말고, 개인 여행을 통해 많은 경험들을 쌓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어학 연수를 떠났다가 돌아오는 친구들, 워킹 홀리데이를 떠난 선배, 국내외 여행을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훌쩍 다녀올 수 있던 많은 이들. 나는 무엇이 그리도 두려웠을까. 엄마와 아빠의 '안 된다'는 틀을 벗어나는 것이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

결혼을 하고서야 비로소 나는 자유를 찾았다. 나는 결혼을 하면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행복하기도 했지만 실은 '자유롭게 나의 시간을 갖는 것'이 그 무엇보다 가장 행복했다.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즉흥적이고 무계획이 계획이자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 내 남편 덕에 나의 결혼 생활은 자유 그 자체였다. 결혼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나는 학교 일정이 끝나고, 남편은 회사 일정이 끝난 금요일 저녁.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갑자기 남해로 떠나고 싶다는 말이 나왔다. 진짜로 집에 들러 간단히 갈아입을 옷과 세면도구만 챙겨 남해로 떠나는 차 안. 숙소도 잡지 않고 떠나는 길, 급히 검색해서 펜션마다 전화를 돌려 겨우 하나를 잡았다. 별안간 이게 무슨 일인가 싶으면서도 구름 탄 듯 붕 뜬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오빠. 나, 결혼 한 거 같지 않고 마음 잘 맞는 룸메이트가 한 명 생긴 것 같아!"라는 나를 보며 실없이 웃던 남편의 얼굴이 아직도 선하다. 꽁꽁 묶여 있던 속박의 틀을 벗어난 나를 바라보는 남편의 마음은 어떤 모양새였을까. 그 쯔음이었을 게다. 남편은 내게 약속했다. 많이 다니자고. 어디든 이렇게 함께 여행하듯 즐기며 살자고. 그리고 여권에도 도장을 많이 찍어주겠다고. 적어도 1년에 1번은 꼭 도장을 찍자고. 국내는 가깝든 멀든 자주 다니면 그만이니, 해외도 자주 다니자고. 그리고 남편은 정말로 그 약속을 지켰다. 1번이 대수일까, 그보다 더 많은 도장을 찍어줬다.






여행은 내게 위안이자 쉼이었다. 집이 아닌, 익숙한 풍경들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삶을 이어가는 그 모든 순간들의 추억은 다시 일상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어주었다. 일상에 지칠 때면, 이제는 내 입에서 '떠나고 싶다'는 말이 자연스레 흘러나온다. 삶에 여행이란 개념조차 없던 내가, 이제는 여행이 곧 삶이 되었다. 아이를 낳고도 쉬지 않았던 여행. 그 덕에 아이는 나이에 비해 여권에 제법 많은 도장이 찍혀 있고, 국내에 많은 지역들을 돌아다녔으며, 자신만의 취향이 확고하다. 가끔 아이를 보고 있으면 놀랍다. 어디에서 먹었던 무엇이 좋았다던가, 거긴 A가 좋은 대신 B가 아쉬웠는데 여기는 A가 아쉬운 대신 B가 좋다고 고민을 한다던가, 어디에서 보았던 그걸 또 보고 싶다던가, 그걸 할 수 있는 곳에 또 가고 싶다던가, 그 때 누군가와 같이 갔던 그 곳이 너무 좋아서 또 가고 싶다던가 ... 여행을 통해 켜켜이 쌓인 자신만의 견고한 취향들을 주장할 때면 아이가 가진 그 색깔이 멋있어서 감탄스럽다. 앞으로 더 쌓여갈 여행들 속에 얼마나 많은 것들을 더 취할 수 있을까, 기대가 된다. 내가 놓친 것들을 이 아이는 충분히 누리고 있는 것 같아 내심 감사하게 된다. 나는 어른이 되어서야 찾게 된 여행의 의미를, 이 아이는 벌써부터 삶 속에 녹이고 있음에 괜히 안도하게 된다. 여행이 없는 삶을 살았던 나는 여행이 있는 삶을 사는 네가 못내 부럽다.

2019년 12월, 아이 생일을 기념해서 떠났던 세부 여행이 우리 세 식구의 마지막 해외여행이었다. 다음 해 1월 코로나가 한국에 극심하게 퍼진 뒤로 우리는 발이 묶였다. 물론 캠핑으로 여행의 형태를 전환했고, 나들이는 변함없이 자주 다녔지만 아주 낯선 땅을 밟고 싶은 그 욕구는 늘 발을 간질인다. 위드 코로나가 된 지금, 오랜만에 다시 여권을 펼쳐본다. 올해는 오랜만에 다시 도장을 찍을 수 있지 않을까, 슬며시 기대도 해 본다. 비행기의 그 소란스러운 진동을 느껴보고 싶다. 몹시도 낯선 타국의 공기 냄새와 어색한 언어들 속에 갇힌 나를 그려본다. 여행이 주는 그 자유를, 다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더쓰다: 004. 음식


김영하 북클럽이 발단이었다. "자, 오늘이 마지막 식사라면 무엇을 먹고 싶습니까" 그 전까지 열심히 반응하며 북클럽에 참여하고 있었거늘, 저 질문 하나에 나의 모든 것이 멈추었다. 뒷통수를 한 대 세게 맞은 기분이었다. 사람들의 답변은 이전과 같은 속도로 빠르게 올라왔지만 나 혼자 백지상태로 멈추어 있었다. 실시간으로 채팅창에 스치는 다양한 음식들을 보고 있어도 마지막 식사로 먹고 싶은 것이 단 하나도 떠오르질 않았다.


나만 그런 걸까. 그 뒤로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북클럽에서 내가 받았던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다들 고민하지 않고 하나씩 답을 내놓았다. 여러 가지 음식 중에 하나를 고르기 힘들어 고민하는 사람도 있었고, 한 가지 음식만을 콕 찝어 이야기 한 사람도 있었고, 거한 상차림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사람도 있었다. 힐링푸드라서, 단순히 맛있어서, 평소에 너무 좋아해서, 그리운 추억이 담겨 있어서, 보고싶은 사람이 해 주던 음식이어서, 흔히 잘 못 먹는 음식이라서 ... 제각기 음식마다 저마다의 사연이 그득 담겨 있었다. 게다가 한 번 음식에 대한 이야기 물꼬가 트이기 시작하면 끝이 없었다. 심지어는 사형수의 마지막 식사에 관한 이야기까지 이어질 정도로 저 질문은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하는 풍부한 단서가 되어주었다. 나는 몹시 절망했다. 나만 이상한거야?






그도 그럴 것이, 평소 나는 맛에 무딘 사람이다. 좋게 말하면 가성비가 참 좋은 혀를 가졌다. 웬만하면 다 맛있다. (사실 맛 없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남편의 표현에 따르면 저렴한 입맛을 가졌고, 아빠의 표현에 따르면 평균보다 대체로 만족도가 높은 편이고, 또 누군가의 표현에 따르면 삶의 큰 낙을 하나 잃은 사람이기도 했다. 무언가를 먹는 행위에 어떤 의미를 두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대단한 소식가라던가 사흘밤낮 쫄쫄 굶는다는 뜻은 아니다. 배가 고프면 무언가를 먹고, 적당히 먹어 배가 부르면 그만이다. 좋은 공간에서 맛있는 음식으로 힐링하고 싶은 순간들도 있지만, 맛있음의 기준이 현격히 낮고 명확한 기준이 없는 터라 음식을 먹는 행위로 얻는 힐링이라는 게 퍽 스펙타클하지도 않다. 그만큼 내게는 음식이 어렵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걸림돌은 바로 '마지막'이었다. 삶의 마지막에 무언가를 먹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어차피 죽을 몸인데! 죽는다잖아! 끝없는 외침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나즈막히 울려퍼졌다. 아마도 나는 그 질문에서 '음식'보다 '마지막'에 꽂힌 탓에 나머지는 제대로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끝, 소멸, 허무. 내게 죽음은 그런 것이었던가. 차라리 질문이 "오늘이 마지막 순간이라면, 함께 있고 싶은 사람이 있나요?"였더라면 상대적으로 답 하기 쉬웠을 것이다. 오히려 여러 명 중에 한 명을 뽑기 위해 고민을 하거나, 꼭 함께이고 싶지만 나의 죽음 뒤에 홀로 남겨질 이의 슬픔 때문에 답 하기 꺼려했으면 몰라도 아예 백지상태는 아니었을 거란 말이다.






얼마 전, 그런 내게도 마지막으로 먹고 싶은 음식이 생겼다. 남편이 해 주는 떡볶이. 남편은 강의 준비를 하느라 늦은 시간까지 깨어있는 나를 위해, 저녁을 허술하게 먹고 출출하다는 나를 위해 종종 떡볶이를 해 주었다.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떡볶이와는 좀 거리가 멀 지 모른다. 밀떡이나 쌀떡으로 된 떡볶이 떡으로 만드는 일은 거의 없다. 오히려 냉동실에 있는 떡국 떡이 주 재료일 때가 많다(시도해 보지 않았다면 추천! 의외로 가장 맛있다.). 떡국 떡마저도 없는 날엔 라면 사리가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 아니면 아예 어묵이나 햄, 순대가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이쯤 되면 떡볶이라고 부르는 게 의미가 있나 싶다. 어쨋든 남편이 내게 해 주는 떡볶이는 오로지 나의 요구를 100퍼센트 반영한 떡볶이 소스와 토핑(이 두 가지는 매번 바뀐다), 그리고 주재료만큼 듬뿍 넣은 양파가 핵심이다(양파는 다다익선). 심한 날은 일주일에 세 번이나 연속으로 떡볶이를 먹었고, 이 떡볶이가 먹고 싶어 저녁을 대충 먹고 아이가 잠들 시간만을 기다리기도 했다. 취사병 출신의 남편은 요리를 잘 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 떡볶이가 무엇이 그렇게 특별한가, 물어본다면 사실 특별한 것은 없다. 아니, 있다. '남편'이 아니면 절대로 먹을 수 없는 맛과 모양의, 내 인생 유일한 남편표 떡볶이라는 점이 특별하다.


오늘이 마지막 식사라면 무엇을 먹고 싶습니까. '생의 마지막'에만 몰두했던 내가 일상에서 찾아낸 또 다른 의미의 '마지막'이자 '유일함'이 답을 주었다. 평소처럼 남편이 만들어준 떡볶이를 먹다가 불현듯, 폭탄선언을 하는 사람마냥 비장한 얼굴로 남편에게 외쳤다. "나, 마지막으로 먹고 싶은 음식 정했어. 이거야!" 마지막으로 먹고 싶은 음식을 찾지 못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남편이었다. 남편은 나의 답이 싫지 않은 듯, 비식 웃음을 흘렸다. 본인이 먼저 죽으면 이 떡볶이는 더 이상 못 먹을텐데 나의 마지막 식사로 먹을 가능성이 있겠느냐는 실없는 농담도 던졌다(남편은 나보다 나이가 7살이 많다). 나는 남편을 따라 웃으며 가는 데 순서가 있느냐는 더 실없는 농담으로 받아쳤다. 진짜로 죽기 전에 그걸 꼭 먹겠다는 말이 아니라, 몹시 저렴한 입맛을 가진 내가 인생 최대치의 힐링을 주는 음식이 바로 당신이 만든 이 떡볶이라는 진심은 으쓱이는 어깨짓으로 대신했다.


내일 야식으로는 남편에게 떡볶이를 주문해야겠다. 지난 번 하지 못했던, 진심을 담은 '고맙다'는 인사도 함께.





더쓰다: 003. 탄생


心理(마음 심, 이치 리)

마음의 이치에 대해 공부하는 학문. 간단히 말하면 그렇다.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이 마음이 궁금했다. 고대 철학자나 사상가들은 관찰과 물음을 통해 몸과 마음의 관계를 이해하고자 했다. 의식이란 무엇이고,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신체는 마음과 어떻게 관련되는가? 우리가 아는 것의 얼마 만큼이 생득적으로 주어지고, 경험을 통해 획득되는가? 이러한 형태의 질문들은 플라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된 관심사이기도 했다. 우리는 이러한 사유들을 일컬어 '과학 이전의 심리학'이라 한다.


현대에 이르러 심리학은 '과학(science)로서의 심리학'이라 일컫는다. 행동과 심적 과정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실시하는 학문이다. 이 과학이라는 수식어는 어디에 기인할까. 사실 심리학은 그저 철학에 속하는 어떤 한 분야일 뿐이었고, 심리라는 단어 자체도 크게 화두가 되지 않았다. 1879년, 빌헬름 분트는 세계 최초로 독일의 라이프치히 대학에 실험 심리 연구실을 만들었다. 그의 첫 번째 심리학 실험은 몹시도 간단했다. 그는 참가자들에게 소리가 들리면 버튼을 눌러달라고 부탁했다. 이 때 조건은 두 가지였다. 한 집단의 참가자들에게는 '소리가 들리면 바로 버튼을 누를 것'을, 다른 집단의 참가자들에게는 '소리의 지각을 의식적으로 자각하면 버튼을 누를 것'을 요구한 것. 결과는 어땠을까. 참가자들의 반응 시간은 조건에 따라 약 100ms 정도의 차이가 생겼다(두 번째 집단이 약 100ms 정도 반응이 느렸다). 분트는 이 시간 차이를 두고 우리의 의식이 작동하는 시간이라고 간주했다. 그게 현대의 심리학 입장에서 진정한 실험이냐 아니냐, 혹은 진짜 그게 의식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를 뒤로 하고 이 실험은 심리학 역사에 큰 의미를 갖는다. 과학으로서의 심리학, 실험 심리학 탄생의 순간이었다.






내가 심리학에 처음으로 관심을 두게 된 계기는 우연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당시 나는 외줄타기를 하듯 마음이 위태로운 사춘기 소녀였다. 그 시절, 나와 가장 친했던 친구는 인간, 본능, 선과 악, 삶, 죽음 등에 대해 늘 궁금해했고 나는 그녀와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들을 참 좋아했다. 그녀와 나눈 대화가 켜켜이 쌓이는 동안 심리학을 향한 열망이 태어났다. 인간의 마음을 다룬다는 심리학에 관심이 생겼다. 우리는 같은 대학에 진학했다. 그녀는 철학과, 나는 심리학과였다. 우리가 흥미를 느끼고 다루고 싶었던 주제들은 같았지만 그 질문들에 접근하는 방법은 철저히 달랐다. 심리학과 1학년, 전공시간. 심리학의 역사에 대한 챕터에서 심리학이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들었을 때 그녀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철학적 사유를 즐겼던 그녀 덕분에 탄생한 심리학에 대한 열망이지 않았던가. 함께 대학을 다니는 동안 우리는 참 즐거웠다. 같은 문제를 두고 전혀 다르게 접근하는 우리의 방식이 재미있었고, 그 사이에서 폭발처럼 튀는 시너지효과는 실로 말할 것이 없었다. 그녀는 '과학적 사고'를 하는 나를 신기하게 여겼고, 나는 '철학적 사유'를 끝없이 이어가는 그녀가 신기했다.


지금도 그녀와 나는 나눌 이야기가 무궁무진하다. 서울과 경남, 매우 먼 거리에 살고 있어 자주 볼 수 없고, 서로 엄마가 된 뒤로는 아이를 키우느라 연락을 자주 주고 받지 못하는데도 한 번 불이 붙으면 대화의 깊이가 끝이 없다. 가끔 생각해본다. 그 때, 그녀와 가까워지지 않았더라면 과연 나는 심리학을 전공했을까(그 전까지 나의 관심은 오로지 통역, 외교 같은 것이었다). 심리학과에 진학하고, 학부 2학년 때 엘리자베스 로프터스 교수의 실험 하나로 심리학에 뼈를 묻겠다 다짐하고, 졸업 전에 논문을 연이어 쓰면서 자연스레 대학원을 갔다. 대학원에 진학해서는 지도 교수님의 믿음으로 이른 시기에 시간 강사로의 경력도 시작할 수 있었다. 물론 모두 나의 선택과 노력이 쌓은 공든 탑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애초에 심리학에 대한 관심이 내 마음 속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없었을 시간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가 내 마음에 심어둔 '인간에 대한 관심'이라는 씨앗이 싹을 틔운 순간, 어쩌면 약 20년 후 지금의 내가 완성될 준비가 이미 끝마쳐졌는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그녀에게 오랜만에 연락을 해 보아야겠다. 심리학자 밤비의 탄생에 네 공이 몹시 크다고, 그 모든 순간을 함께 해 주어 고맙다고, 앞으로도 이 시간들에 햇빛을 쬐어주고 물 주며 사랑으로 잘 키워보겠다고.



더쓰다: 002. 나의 온도


애초에 몸이 차가운 아이였다. 한의학이든 양학이든 모든 전문가들이 내놓은 합의된 진단은 심장이 약하다는 것이었다. 심장이 튼튼해야 온 몸에 혈액이 잘 돌텐데, 내 심장은 그럴 여력이 없는 채로 태어난 듯 했다. 가느다란 말초 신경계 끝까지 혈액을 다 보내줄 만큼 힘이 없는 심장 말이다. 여기까지 설명을 듣고나면 내가 가진 심장은 허약하게 태어났으니 몹시도 유약할 것 같겠지만, 가슴팍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내 심장은 그 누구보다 가열차게 펌프질을 한다. 매 분, 매 초 그 누구보다 힘차게 뛴다. 그걸 처음 인지했던 날 '한 번의 펌프질로 힘 닿는 데까지 최대한 많은 양의 혈액을 내보내려고 너도 애 쓰고 있구나' 기특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쨋든 심장의 그런 가련한 노력에도 내 몸은 늘 차가웠다.


차가운 몸이 유난히 빛을 발하는 건 추운 계절이었다. 어릴 때는 겨울에 동상에도 쉽게 걸렸다. 양 손 손가락 끝부터 두 마디씩, 차례로 모두 노랗게 변해서 어른들을 놀래켰다. 김이 폴폴 나는 뜨거운 두붓물에도 담그어 보고, 지린내 나는 오줌물에도 담그었다. 저릿저릿 손 끝을 타고 오르는 전기같은 통증을 안다. 겨울이면 그 때처럼 다시 손가락 색이 변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날들이 종종 있다. 통증보다는 변색에 대한 부끄러움이 더 크다.



좋은 점도 있다. 계절의 변화를 빠르게 안다. 코 끝이 얼음처럼 차가워지면 추운 계절이 시작된다. 몸이 먼저 계절의 변화를 눈치 챈다. 내 코 끝이 차가워졌다 싶으면 알레르기성 비염이 있는 남편과 아이가 차가운 바람에 킁킁, 콧물과의 사투를 시작한다. 그것이 내게는 계절의 변화를 알아채는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는데, 어느 날 아이가 내 얼굴에 자기 얼굴을 부비다가 화들짝 놀라며 조그마한 두 손으로 내 코 끝을 얼른 감쌌다. '엄마 코가 얼음이야!' 꼭 산타의 루돌프 코라도 만난 모양새로 동그래진 그 눈이 나를 향했다. '엄마는 추운 가을이나 겨울엔 항상 그래. 따뜻해지면 또 괜찮다, 신기하지?' 아이가 코를 감쌌던 손을 내리며 실없이 웃는 나를 못 믿겠다는 듯 쳐다보는데 머쓱해져서 코 끝을 손으로 비볐다. 아이 말처럼 코가 차가웠다. 26도, 따뜻한 방 안에서 말이다. 열심히 펌프질하는 심장의 노력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손발이 차가워서, 손이 따뜻한 사람이 늘 좋았다. 언제든 손을 맞잡아도 녹아내릴 것만 같은 그런 뜨거운 사람. 아무리 더운 여름이어도 내 손의 최대 온도는 정수기 정수 정도의 온도여서 철철 끓는 뜨거운 온수같은 손을 사랑했다. 더없이 따뜻했던 그 많은 손들을 떠올려본다. 그들에게 나는 얼마나 시린 사람이었나. 추운 겨울, 얼음장같은 내 손을 마주할 때마다 온 몸에 소름이 돋지는 않았을까. 따뜻해지지 않은 손으로 장난스레 닿았던 그 목덜미는 또 얼마나 힘들었을까. 정성껏 양 손을 마주잡아 따뜻하게 데워놓아도 이내 돌아서면 차갑게 식어버리고 마는 내 손을 다시 바라보면서 절망을 느낀 적은 없었을까. 아니, 차가운 손의 문제였을까, 시린 마음의 문제였을까. 비뚤어진 마음이었다. 20대 초반, 나의 사랑은, 나의 온도는 그런 것이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해도 끝까지 내 곁에 남아있을 수 있겠냐는 일종의 테스트. 사랑한다는 네 고백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해 보라는 차가운 시험대. 참 못된 사랑이었다. 당근 마켓에는 거래하는 행태에 따라 사용자의 온도를 매겨주는 시스템을 적용시켰다. 그 때의 나를 사랑의 온도로 매긴다면 아마 끝 없는 영하에 수렴하리라. 몸이 차가운 건 그에 비할 바가 아니다. 손이 차가운 건 마음이 따뜻해서, 라는 말은 그 때의 내게는 전혀 부합하지 않는 설명이었다. 손이 차가운 것보다 마음이 더 차가운 여자였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 나의 시린 폭주는 끝이 없었다.






키보드에서 손을 내려 코 끝을 매만져본다. 얼굴 끝에 매달린 내 코 끝은 여전히 얼음 같다. 책상 밑, 발을 서로 마주 비벼 본다. 발등에 닿는 내 발가락은 코 끝보다 더 차갑다. 오늘도 내 심장은 가열차게 펌프질을 하는데, 그 노력을 아는 지 모르는 지 내 몸의 끝자락은 언제나처럼 얼음 조각에 가깝다. 가슴팍을 내려다보며 쉬지 않고 크게 움켜쥐었다 펴길 반복하는 심장의 노력을 기억한다. 몸의 온도보다 더 차가웠을 그 때의 비뚤어진 내 마음의 온도를 후회한다. 30대 후반, 이제 나는 손이 차가운 건 마음이 따뜻해서, 라는 그 말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용암 같은 남편을 만나 비로소 멈출 수 있었던 시린 폭주였다. 차가운 손 끝 말고, 열심히 뛰는 심장을 내려다 볼 여유가 생겼다. 그래, 차가운 손을 가졌으니 그 끝까지 혈액 한 번 보내 보겠다고 태어나 지금껏 뜨겁게 노력하는 심장을 가졌지 않은가. 나는 그 누구보다 차가운 몸을 가졌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 뜨거운 심장을 가진 사람이기도 하다. 나의 온도는 차가움과 뜨거움이 공존하고, 따라서 더없이 차갑지만 뜨겁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더쓰다: 001. 정리


사람이 좋고 사람의 마음이 궁금해 심리학을 전공했지만 나는 여전히 사람 마음이 가장 어렵다. 그리고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그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내 마음인 듯하다.


내 마음 속에서 엄마는 늘 정리정돈되지 않은 짐 같았다. 굉장히 무겁거나 부피가 큰 것도 아닌데, 생각지도 못한 깊은 곳까지 번잡하게 흐트러져 있어 일상 곳곳에서 눈길을 마주하게 되는, 그런 사소하지만 꽤 신경쓰이는 짐 말이다. 엄마를 이해하고 싶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사춘기 시절에는 '엄마가 만약에 내 또래였으면 우리는 절대로 친해질 수 없었을거야. 상극이야.' 같은 말도 서슴없이 했고, 아이를 가졌을 때는 '절대로 내 아이는 엄마에게 맡기지 않겠다.'고 말도 안되는 선언을 했으며, 늘 나의 새로운 다짐 목록에는 '죽어도 엄마처럼은 살지 않을거야.'가 상위권을 차지했다. 그 뿐일까. 몹시도 미성숙하고 마음이 위태로웠던 시절, '내가 이대로 죽어버리면 엄마가 슬퍼할까. 그러면 조금은 후회할까.'같은 밉살스러운 생각도 여러 번 했던 것 같다. 그러면 그럴수록 마음 속에 쌓인 엄마라는 짐은 더 정신없이 흩어질 뿐, 조금도 정리되지 않았다.






그런 엄마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을 처음으로 발견한 것은 결혼하기 전, '엄마를 엄마로 바라보지 말고, 한 여자로써 한 번 바라보는 건 어떻겠느냐'던 아빠의 말씀 덕분이었다. 오랜 시간 같은 동네에서 살았던 아빠는 엄마가 되기 이전의 엄마의 삶에 대해 본인이 아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 내게 설명했다. 살아오는 내내 불편했던 엄마의 모습들 중 극히 일부가 조금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두 번째는, 심리학을 전공하면서였다. 딸의 마음 말고, 심리학자의 마음으로 엄마라는 한 사람을 바라보는 순간들만큼은 풀 수 없이 꼬여 있는 것만 같았던 문제들이 조금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작은 짐이 되었다. 때로는 한 걸음 물러서서 본 엄마가, 엄마의 삶이, 엄마의 마음이 몹시 애처롭기도 했다.


세 번째는, 내가 엄마가 되고 난 후였다. 2016년 12월, 아이를 낳았다. 엄마로서의 삶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새로운 역할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힘들고 지치던 순간, 나는 왜 그토록 밉던 엄마가 가장 먼저 떠올랐을까. 내 아이만큼은 나처럼 키우고 싶지 않으니 절대로 엄마에게는 맡기는 일이 없을 거라던, 엄마의 숨결이 아이에게 닿는 걸 상상하는 것조차 소스라치게 싫었던 내가, 그때, 그 순간 왜 그토록 엄마가 그리웠을까. 엄마가 된 그 순간부터 나는 매일매일 엄마를 생각했다. 정리정돈되지 않던 그 짐을, 보고 싶지 않아 구석에 쳐박아두어도 이상하게 불쑥불쑥 눈에 보이는 게 못내 힘들었던 그 짐을 내 스스로 끄집어내는 날이 많아졌다. 적극적으로 정리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그저 마음 속에 떠오르는 엄마를, 자연스레 그려지는 지난 날의 엄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할머니가 된 엄마를, 그 당시에는 미처 나에게 해 주지 못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영혼까지 끌어모아 내 아이에게 넘치듯 쏟아내는 엄마를 그저 지켜보았다. 그렇다고 해도 엄마가 온전히 이해되는 날은 없었다. 그러나 아이가 채 백일도 되지 않았던 때, 아이를 하루종일 맡겨도 아무런 근심 없고, 마음이 편한 유일한 대상이 내 엄마가 되어 있었다. 내가 엄마가 된 이후로, 아이가 커가는 순간마다 나는 과거의 엄마를, 그 때의 나를 만나는 날이 잦아졌다.






방학을 시작하고 아이는 태권도장에 혼자 가는 것이 하루 중 가장 설레는 시간이 되었다. 아이 표현에 따르면 '엄마와 같이 가면 우당탕탕 걸어가는데' 혼자 가면 그렇지 않아 좋다고 했다. 태권도장은 아파트 상가에 위치한 데다 집에서 보면 가는 길이 다 보일만큼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저 혼자 나서서 여유롭게 주변을 즐기고 홀가분한 자유의 시간을 만끽하는 것이 얼마나 신명날까 싶어 웃어주었다. 그런데 아이가 늘상 출발하기 전에 묻는 것이 있었다. '엄마, 오늘도 나 가는거 봐 줄거야?' 아이도 안다. 거실 베란다에서 내려보면 자신의 모습이 고스란히 다 보인다는 것을. '그래, 이제는 날씨가 많이 추워서 가는 내내 창문 열어 손은 못 흔들어 주지만, 계속 보고 있을거니까 걱정마' 처음에는 아무리 자유가 좋다 한들 혼자 움직이는 것이 불안해서 그런가보다 했다. 그래서 걱정을 덜어주려 늘 엄마가 보고 있으니 괜찮다는 말도 항상 덧붙였다. 그러다가 오늘, 내가 물었다. '그런데 있잖아. 항상 엄마가 가는 길을 봐 주면 좋겠어?' 아이가 눈을 도록, 굴리더니 나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응! 엄마가 보고 있으면 너무 좋아! 오늘도 보고 있어, 알았지?' 순간 말문이 막혀 가만 아이를 바라보는 동안, 아이는 저만치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나서며 손을 흔들었다.



바닥을 짚고 일어나 베란다 창가로 향했다. 얼마 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1층 현관을 빠져나간 아이가 총총총 인도를 따라 걷는 게 보였다. 내가 창을 열지 않으면 저 멀리서 내 모습이 보이지 않을텐데, 저만치 걷던 아이는 몸을 돌려 내 쪽으로 크게 손을 한 번 흔들고는 쿨하게 다시 태권도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순간 눈물이 흘렀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내가 살던 집에서도 베란다 창을 통해 엄마가 나의 동선을 고스란히 볼 수 있었다. 나는 엄마가 나의 동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난 뒤로 숨이 막혔었다. 내가 엄마가 되어보니 내 아이의 길을 눈길로 따라가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관심이자 사랑인 동시에 걱정이었는데, 그 때의 어린 나는 엄마의 그 눈길이 부자연스러운 관심이자 간섭인 동시에 불필요한 불안이라고 받아들였다. 오롯이 나의 눈길을 관심과 사랑으로 받아주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 때의 내가, 그 때의 엄마가 불현듯 떠올라 내내 눈물이 흘렀다. 엄마가 늘 문제라고 생각했다. 남들과 조금 다른 형태로 사랑을 쏟아내는 엄마가 불편했다.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 왜 내 엄마일까 궁금했다. 그런데 어쩌면 엄마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딘지 모르게 베베 꼬여있었던 것은 어린 날의 내가 아니었을까.






오늘,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또 한 번 엄마라는 마음의 짐이 1만큼 정리되었다. 아니, 실은 무작정 엄마를 미워하기만 했던 내 마음의 짐이 1만큼 정리되었다. 그 동안 엄마가 내 마음 속에서 자꾸만 번잡하게 흐트러지고 내 마음 속에서 정리정돈 되지 않는 짐으로 남아 있었던 것은 그 짐에 이름표를 잘못 붙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역시나 가장 어려운 것은 내 마음이었다. 엄마에게서 답을 찾으면 안 되는 문제였다. 흩어진 짐들에 이름표를 다시 붙인다. 앞으로 조금은 정리가 쉬워질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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