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트니스클럽에 다니면서 생활의 리듬을 되찾고 체중도 감량했다. 12월 초에는 63킬로그램 남짓이 되었다. 1킬로그램만 더 빼면 우울증에 걸리기 전으로 회복하는 건데, 그 마지막 1킬로그램이 잘 빠지지 않았다.
그런데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로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올라가면서 피트니스클럽이 운영을 축소하다가 마침내 문을 닫았다. 집에서 홈 트레이닝을 하자고 마음먹었지만 아무래도 피트니스클럽을 다닐 때보다는 게을러졌다. 운동량도 줄었다.
아침에도 6시 반에 못 일어나고 늦잠을 자는 때가 생겼다. 안 좋은 생각들, 기억들이 머리에 떠올라 한참 사라지지 않았다. 분노에 차서 벽을 치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하고, 부끄러워서 혼자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쉬기도 한다.
이렇게 우울증이 오는 거구나. 알면서도 막지 못한다는 것, 내가 그 감정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점이 사랑과 닮았다. 참으로 운명 같구나.
아침부터 맥주를 마시면 안 된다. 침대에 기어 들어가서도 안 된다. 하지만 몸을 움직이는 건 귀찮고 매사에 의욕이 안 난다. 그래서 책을 읽었다. 특히 일본 추리소설들을 많이 읽었다. 단편집이 가장 좋았고, 가벼워 보이는 소설일수록 환영이었다.
하루는 가와사키 소시의 『서장 다나카 겐이치의 우울』을, 다음날에는 모리 아키마로의 『검정고양이의 산책 혹은 미학강의』를 읽었다. 『서장 다나카 겐이치…』는 수사에 관심 없는 젊은 경찰서장과 그런 서장을 오해하는 열혈 경찰관들이 벌이는 추리극인데 만화책처럼 유쾌하다. 『검정고양이…』는 ‘인문학 미스터리’를 표방하는데 라이트노벨 같은 서술과 거창한 소재의 결합이 독특하고 흥미롭다. 로맨스도 있다.
셋째 날에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 세 권을 하루에 읽었다. 장편소설인 『하쿠바산장 살인사건』과 『11문자 살인사건』, 그리고 연작 단편집인 『살인 현장은 구름 위』. 모두 작가가 1980년대에 쓴 초기작들이다. 참고로 내가 좋아하는 히가시노의 작품들은 대부분 2010년대에 나왔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공허한 십자가』, 『매스커레이드 호텔』….
『하쿠바산장 살인사건』에는 밀실 살인, 사고사로 위장한 살인, 암호 풀이가 나오는데 읽다 보면 ‘과연 이런 식으로 사람을 죽이거나 물건을 숨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만 재미있으므로 넘어간다. 『11문자 살인사건』은 그보다는 조금 더 톤이 무겁다. 『살인 현장은…』에서는 승무원 콤비가 비행기나 항공사와 관련된 수수께끼들을 해결하는데 작가도 진지한 마음으로 쓴 작품은 아닌 것 같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읽을 때면 늘 경이롭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이렇게 꾸준히 많이 쓸 수 있을까? 나는 왜 이렇게 쓰지 못할까? 집중력에 문제가 있는 걸까? 비꼬는 말이 절대 아니다. 나는 히가시노 게이고도 무라카미 하루키도 모두 진심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성실하게 쓰지 못하게 되면서부터 그 두 일본 작가의 대단함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히가시노의 책을 세 권 읽은 날에 글은 한 자도 쓰지 않았다. 대신 바닥을 청소하고 근력 운동을 했다. 점심은 굶고, 저녁에는 집 근처 사무용 건물 지하에 있는 구내식당에 가서 밥을 먹었다. 이 구내식당은 점심에는 두 가지 메뉴를 제공하지만 저녁식사 메뉴는 한 종류라서 뭘 먹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대체로 저녁 메뉴가 점심보다 부실하다.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가서 페트병에 든 마튼즈 바이젠을 두 병 사 왔다. 마튼즈는 1758년에 술장사를 시작한 유서 깊은 맥주 가문이고 생산량도 벨기에 2위라지만,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한국 소비자들에게는 가격 대비 성능비로 인식되는 브랜드다. 이날 내가 모처럼 이 맥주에 손을 뻗은 데에도 하루 종일 밥값을 하지 못했다는 자격지심이 한 몫 했다.
그런데 아뿔싸, 집에 와서 뚜껑을 따고는 크게 실망했다. 오래된 제품이었는지 탄산이 다 날아가 밍밍했고, 맛도 살짝 변한 것 같았다. HJ는 마실 만하다고 했지만 나는 한 잔을 겨우 비웠다. 다시는 페트병 맥주는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위스키, 보드카, 소주에는 유통기한이 없지만 맥주에는 있다. 알코올 함량이 낮고 여러 가지 첨가물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도수가 특이하게 높거나 람빅 스타일이 아닌 한 병맥주와 캔맥주 대부분은 유통기한이 1년, 페트병 맥주는 6개월이다.
홉은 단백질 성분이라서 직사광선을 받으면 맛이 변질된다. 맛의 측면에서는 병맥주보다 캔맥주가 더 안전한 선택이다. 특히 페트병은 유리병과 달리 표면에 미세한 구멍이 있어서 뚜껑을 따기 전에도 바깥의 산소가 안으로 들어가고, 안의 탄산가스도 밖으로 조금씩 새어나온다. 맥주 페트병은 일반 페트병과 달리 다중막 구조로 만들거나 차폐 성분이 있는 특수 재질을 사용한다지만(그래서 재활용도 어렵다).
김빠진 맥주
가성비에 너무 매달리지 말아요
인생 짧아요
우울증에도 유통기한이 있으면 좋을 텐데. 6개월만, 1년만 버텨내면 끝난다는 보장이 있으면 좋을 텐데. 김빠진 맥주 같은 날들을 보내고 있다. 하강 나선의 입구에 있는 것 아닌가 싶어 불안하다. 이 우울감에는 예전에 느끼곤 했던 감미로움 따위는 없다.
오늘은 미야지마 겐야의 『고마워, 우울증』을 펼쳤다. 저자는 일본의 정신과 의사인데 본인 스스로 오랫동안 우울증으로 고생했고, 자기 병을 고치기 위해 전공을 정신과로 택했다. 환자들에게 항우울증 약을 권하지 않는 의사라고 한다.
기록을 찾아보니 전에 이 책을 읽은 게 2016년으로 나온다. 그때는 우울증을 겪지도 않았으면서 왜 읽었나 모르겠다. 그래도 덕분에 책 제목과 ‘우울증은 삶을 바꿀 기회’라는 문구가 기억에 남아 다시 집어 들게 됐다.
현대의학에서 우울증을 바라보는 방식을 비판하는 앞부분이 위로가 됐다. 정신과 의사들이 다른 검사 없이 오직 환자 말에만 의존해 우울증 진단을 내리며, 재발 환자에게 약을 계속 권하도록 교육받지만 그런다고 우울증이 치료되는 건 아니라고. ‘많은 정신과 의사의 치료는 약을 처방하는 것뿐’이라고.
성실하고 사려 깊은 사람일수록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는 얘기는 듣기는 좋지만 썩 믿기지는 않는다. 뒷부분에 적힌 우울증을 극복하는 실천 방법들은 그냥 눈으로만 읽었다.
우울증이 삶을 바꿀 기회라면, 우울증을 기회로 내 삶은 어떻게 바뀔까? 나는 희망적인 생각도 한다. 이 병을 완전히 극복하기만 한다면, 나는 보다 현명하고 의연한 사람이 될 것 같다. 그리고 음영이 있는 인간이 될 것이다. 이미 얼마간은 그렇게 됐다고도 생각한다.
나는 전보다 미소를 더 자주 짓는 사람이 되어가고도 있다. ‘난 참 운이 좋다, 즐겁다’고 생각하면서 하루에 여러 번 의식적으로 미소를 짓는다. 혼자 박수를 치며 이상한 춤도 춘다. 50대, 60대에 늘 미소를 짓는 얼굴이면 좋겠다. 진심으로 “고마워, 우울증”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
동지가 가까워오니 우울증의 기운이 밀려오는 걸 느낀다. 역시 우울증은 일조량과 상관이 있는 거야. 거의 다 극복했다고 여기던 터라 당황스럽고 또 두렵다.
내가 우울증을 앓고 있구나, 하고 깨달은 것이 올해 3월이었다. 3주가량 그 증상이 지속되었는데, 그 기간 동안 무슨 동면하는 동물처럼 엄청나게 잤다. 삶에서 도피하고 싶었고, 방법이 술 아니면 잠이었다. 졸리기도 많이 졸렸고, 술을 마시지 않으려고 잠을 일부러 청하기도 했다.
4월에 ‘이래선 안 되겠다’ 마음먹고 동네에 있는 정신과 병원에 가서 약을 처방 받았다. 정신과에 간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우울증의 흔한 증상 중 하나가 불면증이라는 이야기를 그날 듣고 멋쩍게 웃었다.
약의 효과는 지금 생각해보면 애매하다. 다른 정신과 약을 먹어 본 적이 없으니 비교할 만한 경험도 없다. 자살 충동이 누그러들었고 그걸로 충분하다고, 다행이라고 여겼더랬다. 워낙 기대가 없기도 했고.
그러다 다른 소설가의 우울증 경험을 뒤늦게 전해 들었는데, 그이는 항우울제를 먹고서는 너무 행복해져서 오히려 이래서는 글을 못 쓰겠는데, 하고 걱정했다고 한다. 나는 그런 적은 한 번도 없다. 그 얘기를 들려준 작가가 부럽기까지 했다.
부작용은 약하게 겪었다. 입 안이 뻑뻑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침이 말랐고, 안구건조증이 심해져서 눈의 실핏줄이 터졌다. 신체에서 분비물이 잘 나오지 않는 게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의 대표적인 부작용이라고 한다. 안과에 가서 소독제와 일회용 눈물을 한아름 처방 받았는데, 안구건조증으로 안과에 간 것도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약국에서 젊은 약사가 우울증 약을 건네며 “맛있는 거 많이 드세요” 하고 위로했다. 그래, 맛난 거 먹는 게 행복이지. 그래서 그 뒤로 한동안 다이어트 걱정 않고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먹었다.
그리고 불과 넉 달 사이에 7킬로그램이 쪘다. 5월 중순만 해도 몸무게가 62킬로그램 남짓이었는데, 9월 중순에는 70킬로그램을 돌파했다. 체중이 70킬로그램을 넘은 것도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올해는 처음 해보는 경험들이 많다.
얼굴도 몸도 동글동글해졌다. 66, 67킬로그램일 때 절식해야겠다 싶었다. 그런데 잘 되지 않았다. 나 원래 굶는 거 잘하는데…. 의사에게도 이 문제를 이야기했는데, 내가 처방 받은 항우울제인 렉사프로의 부작용 중 하나가 탄수화물에 대한 욕구가 커지는 거라고 했다.
정작 병세는 어느 단계에서 더 호전되는 것 같지 않았다. 7월에 한 번, 9월에 또 한 번, 만사 귀찮아져서 1, 2주씩 침대 속에 틀어박혀 있었다. 의사에게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은 친절하고 좋은 분이었지만, 그 이가 아니라 현대정신의학에 대해 품고 있던 높은 기대가 꺾였다. ‘못 믿겠다’는 아니고, ‘아, 기껏 이거였어?’ 정도.
증세가 나쁘다고 하면 복용량을 늘려주고, 그래도 차도가 없다고 하면 약을 바꾸는 식으로, 땜질 처방을 받는다고 느꼈다. 그러다 요행히 나에게 딱 맞는 약과 투여량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모든 치료가 나의 자가 진단을 기반으로 이뤄지는 셈인데, 그 자기 파악에 내가 자신이 없었다. 나 상태가 좋아졌나? 나빠졌나? 잘 모르겠는데. 탄수화물에 대한 욕구가 커졌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9월 중순에 항우울제 복용을 내 멋대로 중단했다. 이 경험을 솔직하게 써야겠다고 느낀다. 하지만 이런 고백이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독자에게 잘못된 신호를 주지 않으면 좋겠다. 나는 절박한 마음과 환자 특유의 오기에 잘못된 판단을 내렸고, 운이 좋았다.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는 서서히 복용량을 줄여야지, 단번에 끊으면 위험하다고 한다. 실제로 나도 얼마 뒤 심각한 공황 발작을 두 번 겪었다.
약을 찬장 안으로 치운 다음날부터 피트니스클럽에 다니기 시작했다. 아침에 무조건 6시 반에 일어나 HJ가 출근할 때 나도 피트니스클럽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매일 하루에 30분씩 달리고, 이틀에 하루는 웨이트트레이닝을 하기로. 다른 건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그것만큼은 지키자고 굳게 다짐했다.
다행히 그렇게 억지로 몸을 밖으로 끌고 나가기 시작하고 나서 얼마 뒤부터 분명하게 차도가 있었다. 그래도 병원에 다니는 걸 멈추지는 않았는데, 운동의 효과 역시 얼마 못가고 사라지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그러면 다시 병원에 의지해야 할 터였다. 그런데 내가 다니던 동네 병원은 예약을 한번만 지키지 않아도 환자를 다시 받아주지 않는다고 엄포를 놓는 곳이었다.
그래서 이후로 석 달 동안 병원에 가서는 약 잘 먹고 있다고 거짓말하고, 처방전을 받아서 약국에는 가지 않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약 구매 기록을 의사가 검색할 수 있지 않나 우려했는데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이제 거의 다 나은 거 같으니 약은 그만 먹어도 될 거 같다”고 갈 때마다 이야기했지만 의사는 좀 더 지켜보자며 계속 처방전을 써주었다. 약의 용량은 줄었다.
9월 말에 하루, 10월에 또 하루 공황 발작이 왔다. 갑자기 얼굴 앞에 투명한 벽이 생기고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어 한밤에 집밖으로 나가 근처 개천 다리 위에 한참 서 있다가 돌아왔다. 10월에는 하룻밤에 두 번이나 그랬다.
의사도, 약사도 술을 삼가라고 했다. 그래서 대신 무알코올 맥주를 많이 마셨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하이트제로를 박스째로 주문해서 쌓아놓고 마셨다.
무알코올 맥주는 만드는 방법이 세 가지다. 아예 효모를 발효하지 않는 것, 발효를 한 다음 알코올을 제거하는 것, 발효를 하긴 하되 억제해서 알코올 함량이 1퍼센트 아래인 낮은 도수의 맥주를 만드는 것. 마지막 방법이 무알코올 맥주 중에는 제일 맛이 좋다고 한다. 알코올 함량이 1퍼센트보다 낮으면 무알코올 맥주라고 팔아도 된다.
하이트제로는 비발효 공법 맥주다. 나무위키에는 하이트제로에 대해 ‘맥주고 뭐고를 떠나 기본적으로 맛이 없다’, ‘탄산음료로서도 부적격’ 같은 악평이 적혀 있다. 나는 이게 어디냐, 하고 감사히 먹었다. 진짜 맥주만큼 좋았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고.
나는 내가 알코올 중독자가 될 기질이 다분히 있다고 생각하는데, 무알코올 맥주가 없었더라면 어땠을지 상상해보기도 한다. 탄산수 같은 걸로 대신했으려나?
고마운 친구여
지옥 가는 길을 막아줬다오
심심하긴 해요
내가 왜 우울증에 걸렸는지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주 원인은 아니겠지만 얼마간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하는 요인 중에 일기를 쓰지 않게 됐다는 점도 있다. 30년 가까이 써왔던 일기를 재작년 말부터 쓰지 않고 있다. 타인에게 보여줄 글이 아니니 쓸모가 없다고 여겼고(나조차 다시 읽지 않았다), 바쁘기도 해서였다. 그리고 15개월 뒤에 우울증에 걸렸다.
일상을 혼자 글자로 적으며 부정적인 감정을 풀어왔는데, 그걸 더 하지 못하게 되어 우울증이 온 것은 아닐까, 진지하게 생각한다. 이렇게 맥주를 소재로 일상 에세이를 쓰는 것은 글쓰기에 있는 치유의 힘을 얻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기도 하다.
2022년 4월 27일 그믐의 김혜정 대표는 제주문학관을 방문하여 제주도민들과 독서모임이 가진 힘에 관해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지적이고 분석적인 글을 좋아하고, 이 작가의 독서 칼럼을 좋아한다. 내가 은근히 로맨틱한 남자여서 사랑 이야기도 좋아한다. 그래서 매우 취향에 맞는 책이었다. 서태지와 신해 철의 음악이나 노랫말이 아닌 사랑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일이 없어서 고개 끄덕이며 감탄. ‘결국 우리는 사랑 앞에서 버둥거리게 된다’는 표지 문구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