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무심코 빌렸다가 내가 대체 이 책을 왜 빌렸지 화들짝 놀라 반납하러 가던 중 회사 동료를 만났다. 마치 김난도 교수의 책을 들고 있는 것처럼 부끄러움을 느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긴 읽었는데 세대론을 담는 책들이 다 그러하듯 아무 내용이 없다. 40대는 소비와 지출이 많은 세대이기에 그들을 마케팅 타겟으로 삼아야하는데 때마침 그들이 X세대라는 이야기.
키퍼 서덜랜드의 오랜만의 드라마. 1편은 유튜브로 전체 공개되어있다. 1편을 보고나면 2편을 바로 넘기게 될만큼 흡인력이 있지만 2편부터는 본격적으로 플래시백이 채워지면서 텐션이 떨어지는데 그마저도 2편 엔딩의 클리프행어를 위한 구성이었음이 밝혀지면서 탈력이 온다.
최근에 어퓨굿맨을 다시 봤는데 20대 시절의 키퍼 서덜랜드가 나온다. 대머리 라인이 20대부터 50대 중반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데 이게 인체 공학적으로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다. 케빈 코스트너처럼 가발을 쓰는 거겠지.
이 뜨거운 학문이 어떻게 출발했고, 어떤 관점으로 인간을 보는지 알고 싶다면 제일 좋은 입문서이자 교과서. 다만 모든 교과서가 그렇듯, 자신들에 대한 비판을 많이 담지는 않았다.
혁명만을 생각했고, 혁명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던 냉혹한 마키아벨리주의자. 신념과 행동을 일치시켰고, 번민과 후회가 없었던. 소련은 레닌을 성인으로 만들기 위해 관련 자료를 기밀로 분류했고, 같은 시기 세상 다른 쪽에서 그는 사탄이었 다.
빈야사 요가 50분. 요가 선생님은 "빈야사는 '흐르다'의 의미입니다. 흐름을 느끼면서 호흡을 이어가세요."라고 말씀하셨지만 선생님의 유난히 명료한, 수분이 날아가 메마른 밀가루 반죽처럼 끊어지는 딕션 때문에 내 호흡의 흐름도 끊기고 말았다.
(11p) 인간보다는 풀이나 여우, 원생동물, 바이러스가 더 흥미롭게 보일 것이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 생명체들은 적어도 인간만큼 눈에 띄는 특징━엄청나게 넓은 분포 범위, 경탄스러운 적응성, 놀라운 내구성━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한가지 특징은 분명 어떤 시각에서 보더라도 도드라질 것이다. 바로 다른 모든 종과 달리 변화무쌍한 문화를 정신없이 경험하거니와 다른 어떤 생물보다도 더 많은 문화, 더 다양한 문화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어지러울 만큼 서로 대비되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반면, 다른 종들은 개체 간 차이의 폭이 비교적 좁다. 인간의 생활 방식과 식생활, 사회구조와 정치 체제, 표현하고 소통하는 수단, 의례와 종교는 다른 어떤 문화적 동물보다도 풍성하다. 그 다양성이 바로 이 책의 주제다.
저자에 대한 기대가 좀 있었고, 설정이 그럴싸해 보여서 메이페어 마녀 시리즈에 도전했다. 번역본으로 2권까지 읽고 나서 인내심이 바닥나 인터넷 서평을 찾아보니 하나같이 왜 이렇게 전개가 느리냐며 불평하는 내용. 결국 포기했다. 최근에 미국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졌던데 평가는 좋지 않은 모양이다.
독자 멱살 잡고 끌고가는 이야기의 휘몰아침. 70년대에 쓴 소설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 타임슬립이란 소재를 인종차별과 노예제도에 붙이다니. 게다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혈연, 조상과도 연관성을 지어놨는데 억지스럽거나 어색하지 않다. 책 속에서의 ‘현재’는 1970년대이지만, 그 시대를 2020년대로 고쳐 읽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최근에 드라마로 제작됐지만 실망스럽다. 이건 책으로 봐야한다.
4월이 되어 요가 선생님이 바뀌었다. 이상하게도 견상 자세, 다운 독은 요가 선생님마다 동작 가이드가 다르다. 이번에도 새롭게 배움. 세상에 견종이 많은만큼 자세도 제각각인 법이다.
가끔 운다. 분에 겨워 울고, 서러움에 겨워 울고, 행복에 겨워 울고, 감격에 겨워 운다. 따지고 보면 감정 때문이 아니라 겨워서 우는 것이다. 예전에는 아니었다. 아프면 슬프면 고프면 기쁘면 울었다. 감정을 참다 참다 겨워서 울지 않았다. 감정에 솔직했고, 감정은 그 자체로 울림이었다. 겨워한다는 것은 거세게 일어난 감정이나 정서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삶은 자주 퍼즐 맞추기에 비유된다. 퍼즐은 완성본 그림을 미리 알려 주고, 퍼즐 조각은 각기 맞는 자리가 정해져 있다. 그럼에도 퍼즐을 맞추는 일은 쉽지 않다. 산다는 것을 결과를 모르는 과정을 걷는 일이다. 꿈과 희망이라는 밑그림에 기대어 삶의 조각을 하나둘 세워나간다. 삶의 조각은 형태가 정해진 무엇이 아니라 어찌어찌 되어가는 사정을 알아가는 일이다. 누구에게나 사정이 있다. 어떤 사정은 자신밖에 알지 못하고, 어떤 사정은 자신조차 알지 못한다.
매듭은 지어야겠고, 선택의 시간은 다가온다. 어찌어찌 조각을 찾아 끼워 넣었다. 그리고 되돌아보지 않았다. 묻지 않았다. 일단 맞춰졌고 다시 맞춘다고 제대로 맞출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다. 다시 맞추는 지난한 과정은 죄다 나의 몫이다. 돌아보는 순간 나는 빚진 사람이 된다. 그래봤자 세상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다. 세상에 공짜는 없고 빚은 돌아온다. 빚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결국 겨운 순간에 부딪힌다.
어떤 사람이나 사건에 대해 내가 느끼는 감정을 알려면 그 맥락과 상황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맥락과 상황 속에서 열고 달고 맺고 풀지 않고, 단순히 '나'라는 정해진 틀 안에 때려 맞췄던 퍼즐은 언제고 한번 아우성을 친다. 더 이상 못 견디겠다는 것인데. 자신조차 몰랐던 사정은 강물을 역류해서 다시 내 앞에 나타난다. 내가 모르는 사정이었다고 사정해 봤자 소용없다. 알든 모르든 결국 내 사정이다. 자기 변혁이 필요한 시간이다. 그러한 변혁은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이든 이마에 땀방울을 맺게 하는 햇살이든 개인을 당혹스럽게 한다. 정작 세상은 능청맞게 말을 건넨다. ‘그건 네 사정이지.’ 당혹해하는 나는 안중에도 없다. 누구에게나 사정이 있다. 그 사정을 알지 못하고, 아니 잘못 받아들여서 어찌어찌 끼워 맞춘 내 사정일 뿐이다.
신이 보내는 최고의 선물은 시련이다. 시련은 우리가 삶의 완성된 그림을 알 때까지 계속된다. 깨닫지 못하면 더 큰 선물이 닥쳐온다. 우리는 어쩌면 삶의 완성된 그림을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다만 묻지 않고 외면하면서 삶에 빚을 지는 동안 멀어졌을 뿐이다. 빚을 졌다는 것을 아는 순간, 내 사정일 뿐이라는 현타가 오는 순간, 평온했던 일상은 퍼즐 조각처럼 산산이 부서진다. 우리는 파편화된 조각들이 흩뿌려진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다. 옆에는 텅 빈 캔버스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내가 아는 퍼즐 맞추기의 시작은 헛된 망상에 빠져 있다가 자기가 처한 실제 상황을 깨닫게 되는 딱 그 지점이다.
사람은 다 이상하다. 주위에 남편과 아내를 이상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 ‘엄친아’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친구네 아들만 정상이고 내 자식은 죄다 이상하다. 믿고 의지하는 부모 형제 친구 중에 완벽하게 정상적인 사람은 없다. 하물며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에게는 ‘에라, 인간아!’라며 상종도 못할 사람으로 취급한다. 사람은 다 이상하다. 사람을 정상으로 만드는 것도 불가능하다. 정상이라는 것은 내 입장에서 정상일 뿐이다. 굳이 정상을 찾으라면 자리가 달라지면 풍경이 달라진다는 사실 정도다. 한 올의 티도 허락하지 않는 이상하지 않는 사람을 나는 상상하기 어렵다. 무작정 외치는 ‘비정상의 정상화’는 그래서 오만이자 폭력이다.
수백수천 개로 조각난 퍼즐 앞에 서면 난감하기 그지없다. 삶을 오롯이 세우는 변화는 철갑을 두르고 필승의 정신으로 무장한다고 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퍼즐 맞추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테두리부터 맞춰보는 것이다. 우리의 사고와 감정은 고치 속에 갇힌 양 홀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시선이 외부로 향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 나를 변화시키는 가장 최선의 시작은 내가 세운 퍼즐의 바깥을 궁금해하는 일이다. 나를 알기 위해서 시선은 안이 아니라 바깥을 향해야 한다. 더 큰 그림, 즉 관계망에 나를 비추는 것이다. 곁에서 나를 향해 자신의 무늬를 알려주는 것이 관계망이다. 그 맥락과 상황 안에서 나의 사고와 감정을 이해하는 것이 제대로 나를 세우는 시발점이다. 변화의 단위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다.
물어야 할 것은 묻는 것, 외면하지 않고 빚지지 않는 것, 이것이 테두리를 더듬으며 맥락과 상황을 제대로 경험하면서 나를 다시 세우는 방식이다. 제대로 된 경험은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서야 그 옛날 아버지를 헤아리게 되듯,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던 것을 상상하게 하는 마법 같은 일이다. 그렇게 퍼즐이 제 자리를 찾고 온전히 그림이 되었을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다. 관계망을 통해 온전한 그림을 찾았다는 감격에 겨워 우는 것일까? 그때 울음은 내가 우는 것 같지 않다. 그 울음은 깊은 곳에서 막힌 수맥이 뚫려 콸콸 통하는 소리다. 겨워 우는 울음이 아니라, 진짜배기 내 감정에서 자연스레 나오는 울음인 거다.
빨갱이 아버지. 사람과 사건을 붉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딸.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촘촘한 관계망을 경험하면서 생생히 살아나는 딸의 해방일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