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모토 테루의 에세이는 처음 읽는데 야구는 원래 잘하던 사람이 잘하듯 역시나 에세이도 소설 잘 쓰던 사람이 잘 쓴다. 혼신을 다한 듯한 역자의 번역까지 곁들어져 더할나위 없음.
Lucien Lévy-Dhurmer의 '조르주 로덴바흐의 초상'(1890). 삽화: 피터 윌리
제니퍼 로페즈 주연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액션 영화. 스토리는 우리 모두가 60번쯤 어딘가에서 봤을 법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니퍼 로페즈는 스나이퍼 출신인데 근거리 전투도 잘한다는 설정. 제니퍼 로페즈는 비록 50대이지만 벌크업된 체형이기 때문에 근접전을 못할 것도 없겠지만 원거리 전투와 근접 전투는 프로야구의 투수와 타자처럼 쓰는 근육 자체가 다르다. 둘 다 잘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데 세상에는 오타니 쇼헤이 같은 인간도 있으니까.
* ‘인권연대 숨’ 소식지 2023년 5월호 ‘현경이랑 세상 읽기’ 꼭지에 게재된 글입니다.
제목: 너도 때때로 넘어지고 깨지겠지 / 글쓴이: 박현경(화가)
복직을 했다. 우울증과 공황장애로 1년 2개월을 쉬는 동안, 복직을 할 것인가, 학교를 영영 떠날 것인가에 대한 길고도 진지한 고민을 거쳐, 시간이 가르쳐 준 답에 따라 복직을 했다.
휴직 기간은 소중한 시간이었다. 많이 아팠고, 많이 방황했고, 많이 슬펐지만, 온전히 내 것으로 내 앞에 펼쳐진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실존(實存)해 살았다. 그 기간 책을 실컷 읽었는데, 어떤 문장들은 마음 깊이 자리 잡아 지워지지 않는다. 이를테면,
‘어쨌든 무릎이 깨졌다는 건 사랑했다는 뜻이다.’
- 안희연, 『당신이 좋아지면, 밤이 깊어지면』, 157쪽
그렇구나. 사랑했다는 뜻이구나. 내가 넘어져 상처가 난 건 사랑했다는 증거구나. 나는 늘 떠나고 싶어 하면서도 사실은 이 일을 사랑했구나. 학교를, 학생들을 사랑했구나.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일터를 존엄한 곳으로,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곳으로 가꾸어 가는 일을 사랑했던 거구나. 그래서 그토록 깨졌던 거구나.
‘깨진 무릎’으로 복직을 해서 새로운 학생들을 만났다. 중학교 2학년 남자 반의 담임이 되어 일주일 정도를 보낸 뒤 이 글을 쓰고 있다. 고단하지만 행복한 일주일이었다. 다치고 아파 본 후 학생들과의 만남은 예전과 분명 다른 데가 있다.
‘깊은 어둠에 잠겼던 손이 이전과 같을 리 없으므로 / 그 손이 끈질기게 진흙덩어리를 빚을 것이므로’
- 안희연, 「아침은 이곳을 정차하지 않고 지나갔다」 중에서
5년 전, 다른 중학교에서 2학년과 3학년 남자 반 수업을 들어갈 때, 나는 남학생들의 장난과 산만함, 삐딱함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이제는 중2 남학생들의 끊임없는 장난과 산만함, 삐딱함이 어쩐지 조금도 짜증스럽지가 않다. 오히려 귀엽고 사랑스럽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짠하고 안쓰럽게 느껴진다. 내가 마주한 이 꽃다운 청춘들 앞에서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지금 이 자리에 있기까지 너는 어떤 하루하루를 건너, 어떤 사연을 품고 살아왔을까. 어떤 기쁨과 슬픔을 간직하고서 너는 여기에 있니. 네 안의 생각과 감정을 누가 감히 함부로 판단할 수 있을까.
네 앞에 긴 생(生)이 펼쳐져 있구나. 너도 때때로 무릎이 깨지겠지. 너의 손은 어느 땐가 깊은 어둠에 잠길 거야. 너도 많이 아파하고 방황하고 슬퍼하겠지. 그래도 네 손은 끈질기게 진흙덩어리를 빚을 거야.
이들 한 명 한 명의 삶의 무게를 생각하노라면 눈물이 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너무 귀해서 가슴이 저릿하다. 전에도 안 느껴 본 느낌은 아니지만 이토록 진하게 느끼지는 못했었다. ‘깊은 어둠에 잠겨 본 손이 이전과 같을 리 없으므로’. 깊은 어둠에 잠겨 본 마음이 이전과 같을 리 없으므로.
‘깨진 유리들이 모여 손이 된다 // 단단한 두 손으로 / 버티면서 짓고 있었다’
- 안미옥, 「덧창」 중에서
내 앞에도 긴 생(生)이 펼쳐져 있다. 앞으로도 난 때때로 무릎이 깨질 것이다. 나의 손은 또 깊디깊은 어둠에 잠길 것이다. 어쩌면 오래오래 잠길 것이다. 그러고 나면 이전과 같지 않아진 손이, 조금 더 넓고 따뜻해진 손이 끈질기게 진흙덩어리를 빚을 것이다. 깨어진 마음 조각들이 모여서 된 ‘단단한 두 손으로 / 버티면서’ 살고 사랑할 것이다.
그러다가 헷갈릴 땐, 길을 물어봐야겠다. 날마다 교실에서 마주하는, 나의 학생 동지들에게. 그 명랑한 웃음들로 내 삶을 밝게 비춰 봐야겠다.
그림_박현경, 「네가 보고 싶어서 16」
평행세계 SF 코믹 일상 첩보물. 하루키가 이런 분위기로 강치나 양사나이가 나오는 귀여운 단편을 가끔 썼는데, 그 확장판 같은 느낌. 대단한 야심은 없지만 ‘귀여우니까 괜찮아.’ 귀엽고 싱겁게 막나간다.
제임스 엘로이는 에세이에서, “반항 소녀는 혐오스러우면서 매력적”이라고 썼다. 이 책에 딱 어울리는 말 같다. 인물들에 대해서도 그렇고, ‘벗을 때까지 맞았어’ 같은 짧은 문장들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내가 태어나던 1964년 7월 12일에 아버지는 울산 왕피천에서 은어 낚시를 하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아이들(Aristotle’s Children- How Christians, Muslims, and Jews Rediscovered Ancient Wisdom and Illuminated the Dark Ages)는 2003년 미국 뉴욕에서 출판되었고 한국에서는 그 이듬해 2004년 민음사에서 번역 출판되었다. 저자 Richard E. Rubenstein은 미국계 유태인으로 특히 종교적 극단에 의한 폭력과 충돌에 대한 역사연구를 하는 역사학자라고 한다.
기본적으로 동아시아 근대역사를 바라보는 가장 유력한 관점 중의 하나는 동서문명의 충돌이라는 ‘틀’에서 그 성격을 규정짓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성과 과학으로 무장된 서양의 근대문명의 무력 또는 위력 앞에서 수천년 중국을 중심으로 형성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허망하게 무너지고 중국은 반식민지로 전락할 수 밖에 없었다. 반면, 일본은 유일하게 비서구 국가 중 근대화에 성공하면서 근대적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했지만 결국 미국과의 전쟁에 패망함으써 서양 사회가 동아시아 사회를 압도하고 규정하는 역사가 현재의 미중 충돌 이전까지 지배적인 흐름이었다고 봐도 좋을 것 같다.
나는 80년대 학번이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적 이념의 세례를 직간접적으로 받았던 세대라고 회고하게 된다. 그 민족주의가 사회주의적 형태로 배태胚胎된 배경에는 서양의 근대에 대한 열패감劣敗感과 선망羨望이 동시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80년대를 지배하고 통치하던 군부는 상당히 무식하고 우직하며 축재蓄財를 하는데도 참으로 뻔뻔스러웠지만 88올림픽을 치르면서 한국사회는 식민지와 분단, 전쟁으로 인한 깊은 상처들이 분명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치유되는 역사적 전환점에 들어서게 되었던 것 같다.
21세기에 들어서서는 우리 사회의 전근대성前近代性과 서양 사회의 근대성近代性을 더욱 객관화, 상대화 시킬 수 있는 여유가 생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우리에게 서양사회와 근대를 극복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시사示唆를 던져주는 책임에 분명해 보인다.
이 책은 스페인의 Reconquista에서 시작된다. 스페인이 위치한 10세기의 리베리아 반도는 이슬람 세계에 지배되는 땅이었다. 기독교도에 의해서 톨레도, 리스본 등이 재정복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서물들이 카톨릭 교회의 성직자들에 의해서 발견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서양사회 근대의 서막序幕, 아리스토텔레스 혁명이 시작되는 역사적 시점이라고 본다. 이후 톨레도의 수도원장은 무슬림, 유대인 학자, 그리고 기독교 학자들을 총동원해 아랍어로 번역이 되고 나름의 주석이 붙어 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을 모두 라틴어 등으로 번역하는 대역사大役事를 벌이게 된다. 가톨릭 교회는 이슬람 사회를 통해 소개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서물들을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스스로를 혁신하고 쇄신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았다는 사실을 밝힌다. 그리고 그 정점은 토마스 아퀴나스로 대표되는 토미즘Thomism으로 집대성, 수렴收斂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부루조아들에 의해 건설된 근대의 국민국가들(National States)들은 중세를 암흑기라고 규정하며 중세의 성취, 중세의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10세기 이후 중세 사회의 저류에서 흐르던 이 뜨거운 혁신의 모멘텀을 고의적으로 무시하고 방기하는 전략을 취해 왔는데 그것은 교회의 권위와 윤리관이 자본주의 사회 부르조아들의 이해관계에 방해, 또는 장애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중세라는 ‘과거’에 대한 부정과 함께 ‘이슬람’이라는 문명을 폄하 또는 무시하는 전략을 취하게 된다.
다시 말해, 서양의 근대는 오로지 이들 부르조아들에 의해서 이성에 바탕한 계몽과 과학적 혁신을 통한 유일무이한 성취였다는 역사적 서사敍事를 날조捏造하게 되는데 이교도인 이슬람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전문명이 우회적으로 서유럽 사회에 전승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토대를 만든 것은 카톨릭 교회의 엄청난 수고가 있었다는 사실을 고의적으로 방기放棄(Conscious Neglect)하는 것이었다고 본다. 그만큼 이성과 신앙의 이원화, 분단은 서양의 근대 국민국가(Natioanl State)를 건설했던 세력들의 작위作爲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고 배우게 된다.
'혼불','화첩기행'은 춘향전에서부터 이어지는 남원의 정신문화유산이며 글로벌이다.
오월 중순, 남편과 찾은 지리산 바래봉,광한루,혼불 문학관,시립 미술관 여정은 자연과 예술이 녹아들고 승화되어 웅숭깊은 맛과 멋으로 꽃심을 그려내고 있다.
삶의 깊이와 부피를 찾아가는 우리의 걷기는 내일도 계속된다.
“너 고모 된다.”
처음 저 말을 들었던 날이 떠오른다. 영 쑥스럽고, 어색하던 그 날의 그 느낌.
보통 무엇이 되는 데에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데 비해 ‘고모’가 되는 건 그렇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그냥 그렇게 고모가 됐다. 그런데 그럼에도 ‘고모’란 말이 어색했다. 아마 조카 하준이도 그랬을 거다.
어느 날이었다. 혼자 처음 오빠네에 놀러 갔던 날. 준이와 단둘이 거실에 남게 됐다. 당시 준이는 목도 가누지 못하는 갓난아이였다. 태어난 지 100일이 채 되지 않았을 때고, 나와 두 번째 만난 날이었다. 그맘때의 아기가 고모를 알아볼 리 없다. 어색한 대치 상황이 이어졌다. 그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어색하게 조카의 두 다리를 잡고 위아래로 접었다 폈다 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 준이의 표정을 기억한다. 이게 뭐지, 이 사람은 누구지. 울 듯 말 듯 한 표정을 짓던 준이는 바로 울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그 후로 시간이 지나 준이가 네 살이 됐을 때였다. 타지 생활을 하고 있던 난 오랜만에 본가에서 잠을 잤다. 명절이었는지 그날은 준이도 집에 와 있었다. 비몽사몽 준이 목소리에 이끌려 방문을 열고 나온 내게 조카는 이렇게 말했다.
“고모 잘 잤어?”
전율이 느껴졌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그리고 그때 확인했다. 관계란 단순한 말이 아닌 ‘의미’가 담긴 말을 건넬 때 비로소 시작된다는 것을. 우리 사이에 의미있는 말을 먼저 건넨 건 내가 아닌 준이였다. 그러니까 사실 고백하건대 준이가 내게 주는 기쁨이 훨씬 큼을 다시 한번 확인한 날이기도 하다.
작은 입술로 오물오물 ‘고모’하고 불러주는 유일한 존재. 그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우린 멀리 떨어져 있고, 사실상 자주 보지 못한다. 그럼에도 마음 같아선 매일매일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래서 나는 이 마음을 이야기로 풀어내고자 한다. 그리고 이것을 같이 읽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한다. 원하면 언제든 다시 펼쳐볼 수 있도록. 그렇다면, 언제든 고모가 ‘곁’에 있음을 언젠가는 알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