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쓰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임, 지식 공동체 그믐
‘지식공동체 그믐’이라는 이름은 그믐이 가장 중요시하는 가치를 담고 있습니다. 지식과 공동체, 이 두 가지입니다.
먼저, 책 읽는 사람이 드문 요즈음, 그믐은 우리끼리 모여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따뜻한 공동체를 구성하고 싶습니다. 책 쓰는 사람을 돕고 책 읽는 사람끼리는 위로하고 연대합니다. 그믐의 목표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재미있고 의미 있는 책을 발굴해나가고 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문 화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믐이 중요시하는 또 다른 가치는 ‘지식’입니다. 지식이라고 하면 뭔가 어렵고 대단한 것이 연상되시나요?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의 다양한 측면과 사람들의 솔직한 의견을 모두 맥락 있게 글자로 남기면 이것이 후대에게는 지식이 될 것입니다. 문명은 읽고 쓰는 삶 위에 존재합니다.
“우리가 사라지면 암흑이 찾아온다”
지식 공동체 그믐
유인원과의 산책을 읽은 뒤 유인원에 대해 검색하다보니 알고리즘을 따라 넷플릭스 다큐 <침팬지의 제국>을 보게 되었다. <나의 문어 선생님>의 제임스 리드가 연출. 부족 전쟁과 정치 싸움에 살인까지 인간과 침팬지의 DNA가 98% 일치하는 이유를 이해하게 됨.
터무니 없는 익스트림 클로즈업에 고속 촬영까지 이걸 대체 어떻게 찍었나 싶었는데 그냥 카메라맨이 개고생 함.
https://www.youtube.com/watch?v=cZal12H2YNY&ab_channel=Netflix%3ABehindtheStreams
동네에 온천이 있다. 이십년 이동네 살면서 다섯번이나 와봤을까? 온센을 못가고 온천 ♨️ 에 왔네; 고래뱃속에서 요나는 삼일동안 무수한 고백을 했겠지~ 불순종의 아이콘이 순종의 자녀가 되기까지 ㅜㅜ 이제그만 토해내어 주실때도 된것같은데ㆍㆍㆍ
내가 이공계 연구자들이나 종사자들을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는 탐욕에 있다. 간간히 "인문학은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인문학 관련 지원금을 없애고 그 방면을 이공계로 재투자 해야 한다"는 발언을 세 번이나 목격했기 때문이다. 공과대학 대학원 하나만 폐쇄하면 전국 인문대학의 한숨이 없어진다는 생각은 안 하나보다. 선지자 나단의 이야기를 되새길 기회를 준 유익한 인간들이었다. (그들도 생물학적으로는 인간이다.)
이렇게 세상과 인간에 대한 관점이 확립되지 않은 채 자신의 안위와 명예 만을 기준으로 삼는 인간들은 공감 능력이 결여되어있다. 자신은 다른 사람을 존중하거나 사회에 기여할 생각 따위는 없지만 나는 학위가 있으니까 그에 따른 권위를 사회에 요구하는 것이다. 뻔뻔한 건지 아니면 인간에 대한 존중을 못 배운 건지. 둘 다는 아니기를 빌겠다.
그렇게 대접만 요구하면 다행인데 또 다시 인문학에 기웃거린다. "작가면 작가답게 굴어야지, 왜 TV와 유튜브에 등장하느냐!" 교수면 교수답게 연구나 강의를 하지, 왜 TV를 보는 것인지는 유튜브를 안 보는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심지어 본인도 신문사에 정치 칼럼을 투고한 이력이 있다고 한다. 허참. 인지부... 아니 이러면 사실적시로 인한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하겠군. 이중사고 정도로 대체하도록 하자.
아무튼 과학자는 소설가의 칼럼을 아주 잠깐 훑어보고 이 세상에는 문학다운 문학이 없어진다고 한탄한다.(글을 아주 잠깐 훑어보는 사람이 학위를 취득하고 교수가 되다니) 마치 웹소설 주인공이 빌런을 깔보는 듯한 말투다. 저런 칼럼을 읽는데 120원을 내라고 안 해서 다행이다. 하지만 과학자다운 과학은 하나도 언급하지 않으면서 상대방보고 본업에 충실하라고 말하는 것은 비극이다.
신자유주의의 도래로 인간이 추구할 가치가 없어지면서 인간은 목표를 설정하기보다 다른 무엇인가를 깔보는 행위를 즐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튼 나보다 낮은 존재가 있다는 증명함으로서 자신이 상대적으로 높아보인다는 만족감을 주는 행위에 불과하다. 즉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다른 존재들은 공존하거나 협력하는 대상이 아니라 투쟁하거나 굴복시켜야한다는 존재로 생각하는 셈이다. 그런 짓을 하면서 상대방이 자신을 대접해준다는 발상은 다시 한번 이중사고적 행위라고 언급해야 마땅하다.
과학자가 원하는 수준 있는 문학이란 무엇일까?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소설가가 과학자보다는 수준 있고 인간성 있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러니 김우재 교수가 읽을지는 모르겠지만 실명을 언급하면서 이 말은 해야겠다. 평소에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 관심 가지지 않으면서 자기 아쉬울 때만 팔아 먹지마라. 노동자는 월급이 싸구려일지언정 인격까지 당신처럼 저렴하지는 아니니까 말이다. 나같은 사람에게는 최소한 단기 아르바이트생의 고충으로 소설집을 쓴 소설가가 당신같은 작자들보다는 더 위안이 되고 호기심이 가는 사람이다.
복잡계 이론을 이용해 사회구성 원리를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짜보자는 아이디어가 눈길을 끈다. 복잡한 조세법을 단순한 규칙 몇 개로 재정리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
결론부의 ‘나오시마 선언’이 흥미롭다. 데이터 기술을 활용해 새로운 종신고용시스템이나 초국적 위험관리조 직을 만들 수 있다는 아이디어들이 눈길을 끈다.
노션이 좋다고 하길래 궁금해서 빌려보았다. 노션의 장점과 실제적인 이용법들이 나와있다.
제일 궁금했던 건 구글 클라우드 독스에서는 안 되는데 노션에서만 되는 게 뭘까? 라는 거였다.
책의 내용은 아니고 내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아래와 같다. 하지만 제대로 사용해 본 적은 많지 않아서 이게 다라는 확신은 못 하겠다.
- 편집이 쉽다. (워드에선 기껏 총알점 밖에 없는데 노션에는 귀여운 이모지 및 활용할 것들이 많음)
- 보기에 깔끔하고 식별성이 높다. (워드는 오른쪽 정렬, 왼쪽 정렬 중구난방에 글 작성자가 깔끔하게 문서를 제작하지 않으면 보는 이들이 어려움)
- 템플릿이 많다. 그냥 가져다 쓰면 된다.
- 하위 문서를 달기 좋다. (세부 사항 등 다른 페이지로 넘어가야 되는 정보들의 위계 질서를 한 페이지에 넣고 접어둔 걸 그냥 푸는 방식으로 쉽게 구현할 수 있음)
조카 하준이가 여섯 살을 앞둔 늦가을이었다. 고열 때문에 병원에 입원한 준이를 찾았다. 그리고 며칠간 오빠네에 머물다 함께 퇴원 수속을 밟았던 날이었다. 오랜만에 집으로 들어선 형 하준이를 보고 동생 민준인 “안녕”하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민준인 아직 “안녕”과 “맛있다” 등 몇 가지 말밖에 하지 못하는 두 살이었다. 그럼에도 제법 정확한 발음으로 형을 반겼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준이의 눈이 떨리고 있었다. 그때 다시 한번 확인했다. 하준이가 느끼는 첫째의 스트레스를.
하준이에게 마음이 가는 건 나와 닮은 구석이 많아서다. 예민하고, 소심하고, 겁이 많다. 생각해보면 20대까지 아니 어쩌면 지금도 부모님 특히 엄마의 장남에 대한 사랑이 늘 서운했다. 내 것은 없거나 적었고, 그 슬픔은 혼자 해소시켜야만 했다. 그런데 분명 그게 전부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누군가 그게 다가 아니라고 말해주었다면 어땠을까. 누군가 날 지지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면 덜 외롭고 더 행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노력’으로 실현 가능한 행복도 있음을 알게 된 지금 느끼는 아쉬움이다.
그래서일까. 하준이에게 가장 해주고 싶은 것은 무엇보다 ‘사랑한다’는 말이다. 앞으로 하게 될 모든 말 역시 사랑한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사랑해 준아. 이 세상 누구보다 넌 내게 소중한 존재란다. 나의 조카로 태어나줘서, 그게 너라서 고마워. 그리고 그래서 너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어. 고모보다, 네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널 더 사랑했던 사람이 있단다.
한참 뒤 어머니가 물었다.
“어땠어?”
한참 뒤 아버지가 말했다.
“좋아서 혼났어.”
얼마 뒤 어머니가 물었다.
“그리고?”
얼마 뒤 아버지가 말했다.
“슬프다……”
두 사람은 다시 나무 밑에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 이상하게 그때부터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평소에는 그렇게 쉬지 않고 재잘댔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어머니의 노랫소린 이미 흩어져 사라진 뒤였다. 하지만 아득하고 정갈한 여운이 계곡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세상은 고요했고 나무들은 풍요롭게 너울댔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 야릇하고 암시적인 침묵을 묵묵히 견뎌내고 있었다. 흔들려야 할 것은 흔들리라고, 벌어져야 할 것은 벌어지라고, 그냥 내버려 두고 있었다.
(중략) 그때 우리는 그걸 원했어. 그때 우리는 그게 필요했어. 그때 우리는 그걸 하지 않을 수 없었어. 그때 우리는 그걸 했어. 그때 우린 그걸 한 번 더 했어. 그때 우린 그걸 계속했어. 그리고 우리는 그게 몹시,
‘좋았어.’
바야흐로 진짜 여름이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사랑일지 모른다. 숨기기도 어렵고, 지키기도 어려운 것. 그래서 늘 노력해야만 하는 것. 그게 사랑이 아닐까. 김애란 작가의 『두근두근 내 인생』에서 막 사랑을 시작한, 어린 연인의 사랑을 묘사한 부분이다. 특별한 것이 있다면 글을 쓴 주인공이 어린 연인의 ‘아들’이라는 거다. 가장 아플 때에, 사랑하는 부모가 가장 행복했을 순간을 소설 속 주인공(아들)은 상상한다. 어린 부모가 되기 전 그들은 그저 사랑을 몹시 원했고, 아무도 그걸 막지 못했으며, 그 모든 게 결국, 그들을 행복하게 했을 거다.
준이가 꼭 믿었으면 하는 것이 있다. 그건 다름 아닌 ‘사랑’이다. 사랑은 믿는 것보다 의심하는 게 더 쉽다. 하지만 의심하지 않아야 사랑할 수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깨닫기 위해선 얼마나 긴 시간과 버팀이 필요한 것일까. 소설 속 주인공은 병을 앓고 있다. 그래서 부모는 아픈 아들 생각뿐이고, 어린 자식은 오히려 그런 부모를 걱정한다. 뭐, 이런 사랑이 다 있나 싶을 때 작가는 이들을 통해 사랑이 꼭 기쁨만이 아님을 말한다. 사랑하기에 아플 수밖에 없는 것도 삶이라고. 어쩌면 그게 우리 모두의 사랑이라고. 그러니 인정하자고. “네가 내 슬픔이어서 기뻐.”
부모가 되기에 적당한 나이란 없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부모가 된다. 보통의 연인은 그 누구보다 서롤 사랑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부모가 되면 자식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대개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겁을 먹게 되는게 아닐까. ‘혹시 아픈 덴 없을까’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 어린 부모의 대화를 빌려 설명하자면, 어느 날 준이의 엄마 아빠 역시 이런 대화를 나눴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얘가 꿈이 있는 아이였음 좋겠어.”, “나는 얘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아이였으면 좋겠어.”라고. 모든 부모가 그러하듯 자식의 안녕을 비는 것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우린 이 일을 반복해왔다.
작가는 ‘사람들은 왜 아이를 낳을까?’라고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에 문득 ‘아이는 왜 태어날까?’란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쩌면 ‘운명’ 같은 건 아닐까. 낳은 것이 아니라 낳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준이는 어떻게 태어나게 된 걸까. 준이 역시 자라서 어른이 되면 부모가 될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건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사랑하니까. 너의 존재가 사랑임을 꼭 말해주고 싶었다.
When Jesus became God?라는 표제는 원래 기독교 내부에서도 예수를 하느님이라 생각하지도 않았고 또 그렇게 믿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독교는 성부, 성자, 성령을 삼위일체라는 교리로 설명하고 있지만, 신약성서의 공관복음共觀福音 어디에도 예수를 하느님이라고 오해?할만한 언급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예수는 팔레스타인 갈릴레이 지방, 유대인 목수의 아들이었다. 이곳 중근동 지역은 유대교의 야훼, 또는 7세기에 출현한 이슬람교의 알라처럼 유일신 신앙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목수의 아들을 神格化(신격화)할 수 있었던 그리스 로마의 전통과는 확연히 구별이 되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유대교에게 기독교의 삼위일체Trinity 교리와 같은 주장은 대단히 낯설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도행전을 통해서 바오로 사도의 체험과 啓示(계시)를 부정할 수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카톨릭 환경에서 성장했지만 청년기를 거치면서 기독교에 대한 애증, 반감과 공감의 경계 선상 어디 쯤에 항상 서 있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 청년기 기독교는 서구 제국주의 뒷배처럼 인식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중년의 나이가 되어서도 그 종교 안으로 더 이상 깊게 천착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 책을 선택해서 읽게 된 동기도 다시 한 번, 아직까지도 충분히 이해되지 않은 이 종교와 나와의 연관성을 발견하고 싶은 숨어 있는 願望(원망)이 있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이 책의 내용은 예수가 신이냐 인간이야 하는 서로 다른 주장이 경쟁하다 전자가 승리하는 역사적 과정을 이야기 한다. 아리우스Arius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라는 두 인물로 대표되는 ‘예수의 神性(신성)과 人性(인성)’에 대한 기독교 교리 논쟁은 4세기에 시작되었다. 예수의 사후 300년 동안 지속되었던 박해가 끝나고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서 기독교가 로마의 공식 종교로 인정된 시점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 아리우스라는 문제적 인물에 대한 소개를 조금 간단히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대단히 흥미를 끄는 전형적 빌런villain이기 때문이다.
“이 빨간 머리의 부제는 4세기의 새로운 유형new men의 사람이었다: 대박해 시대가 끝나고 난 뒤에 출현했고; 그의 부모는 이교도였을 가능성이 크지만 고전교육이 아닌 기독교 교육을 받았고; 현실 세계의 권력관계에 대해 대단히 능수능란한 교활함을 구비한 인물이었다. 이론적 명민함, 원칙에 대한 무시무시한 집착과 정치적 무자비함의 조합은 마틴 루터, 존 칼빈에 이어 블라드미르 레닌이 출현할 때까지 그에 견줄만한 역사적 인물은 없었다.”고 루빈스타인은 소개한다.(Rubenstein, Richard E.. When Jesus Became God: The Struggle to Define Christianity during the Last Days of Rome (pp. 104-105). Houghton Mifflin Harcourt. Kindle Edition. )
한편, 그와 동시에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의 대립은 인간에 대한 이해와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 훨씬 크다.
당시 고대 사회는 동로마 사회가 훨씬 풍요롭고 세련된 선진 사회였다. 이탈리아 반도를 비롯한 서유럽은 촌뜨기 취급을 받았다. 그리스 고전 교육에 익숙한 동지중해 사람들은 팔레스타인 갈릴레이 벽촌 출신의 ‘예수’라는 인물이 보여준 매력과 모범에 크게 공감한다. 예수라는 전범典範을 통해 인간이 노력을 통해 인간 자신 뿐만 아니라 인간사회를 충분히 성화聖化시키고 거룩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다. 아리우스의 견해에 동조했던 이들 동지중해 사람들은 또 성性적 욕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인간이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낙관론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성욕은 이들 논쟁의 핵심적 주제 중의 하나였다. ) 도시화된 동로마 사회의 장인artisan, 노동자, 선원, 상인, 승려와 수도자들 그리고 젊은이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고 있었다.
반면, 아타나시우스는 예수의 모범은 사막의 성자와 같은 수도자들 한테만 가능한 일이라고 주장했고 오로지 하느님의 일방적인 자비를 통해서만 그 구원이 가능하며 그 하느님의 자비는 교회의 성사聖事sacraments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pp. 149-150). Houghton Mifflin Harcourt. Kindle Edition.] 또, 인간의 성욕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으며 오직 신만이 그것을 다스릴 수 있다고 믿었다. 이후 전개되는 서로마 교회의 모습과 와 서유럽의 기독교는 예수를 이렇게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이 같은 논쟁의 근저에는 당시 로마 제국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만 한다. 과거, 유대왕국이 로마제국에 의해서 멸망할 때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던 사람들은 세상의 종말apocalypse에 대한 존재론적 위기의식에 휩쌓여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제국 로마의 영광이 영원할 것처럼 알고 살았던 4세기의 로마인들은 제국의 귀퉁이가 붕괴하기 시작하는 상황을 점점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콘스탄틴 대제의 사후 그 아들들에 의해 제국은 다시 분열되고 훈족의 서진으로 다뉴브 강 유역의 게르만 족이 로마의 영내로 밀려들면서 378년 (현재, 튀르키에의 북서 유럽 영통) 하드리아누스에서 로마제국의 군단이 황제와 함께 거의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경험하게 된다. 이 사건은 더욱 로마 제국의 종말, 세상의 종말로 연상이 되면서 아리우스파가 주장하던 낙관론은 로마제국 안에서 사라지고 아타나시우스의 삼위일체론이 지배적인 교리, 기독교의 공식 도그마로 자리 잡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리우스의 견해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슬람교로 계승이 되는 것처럼 보이며 유대교 역시 예수를 한 명의 ‘예언자’로만 평가하는 관점으로 이어진다.
나는 性慾(성욕)이라는 주제가 이들 논쟁의 발화점의 하나였다는 주장에 상당 부분 공명한다. 서방 카톨릭 교회가 로마 그리스적인 전통에서 예수를 신격화 했다고 이해했었지만 정작 예수를 신으로 절대화 시킨 것은 인간이 너무나 나약해서 성욕과 같은 근원적 욕망을 통제하거나 지배할 수 없다는 한계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일종의 劇的(극적) 反轉(반전)처럼 이해되었다. 초기 기독교는 난삽한 성적 관행에 대해서 대단히 엄격한 태도를 취한다. The Wierdest라는 책을 읽다보면 초기 기독교가 사촌, 육촌, 팔촌 등으로 근친결혼을 확대 금지하는 칙령을 지속적으로 발표한다. 이를 통해 귀족들의 토지가 교회로 수용되고 이것이 유럽 사회가 친족적 혈연, 지연적 혈연 관계로 발전하지 않고 개인주의적 법치주의적 사회로 진화해 나갈 수 있었다고 이 책은 주장한다.
루벤스타인 책의 미덕은 이해하기 힘든 종교, 철학의 문제를 역사적 맥락 속에서 설명해 주는데 있다. 21세기는 데이타 사이언스를 바탕으로 한 AI(Artificial Intelligence)가 등장하고 계몽주의, 휴머니즘이 절정에 달한 시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느 주식 전문가는 유튜브 방송에서 인공지능의 시대를 역사적으로 철기시대의 도래에 비견될 만큼의 대사건이라며 호들갑을 떤다. 서유럽 사회가 중세에 아리스토텔레스를 재발견한 이래 ‘근대Modernity’라는 역사의 지평을 열고 그 연속선상에서 AI의 시대에 진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AI시대의 이데올로기는 동성애를 성적 倒錯(도착)이라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이 變態(변태) 성욕을 普遍(보편)이라 주장하며 異性(이성) 性慾(성욕)을 異常性慾(이상성욕)이라 윽박지른다. 참 기가 찰 노릇이고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 같은 인간의 어리석음 때문에 기독교, 이슬람교는 여전히 설득력, 遡求(소구)의 힘을 갖는 종교 같다. 이름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예전에 읽었던 기독교사의 영국인 저자는 기독교를 아직 신생종교로 표현하고 있었는데 그때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면서 인간의 우매와 오만이 이렇게 극단적으로 치닫고 있는 사실을 관찰하면서 기독교는 서구 사회에서 조만간 찬란하게 부활하리라 과감하게 예상해 본다.
청년시절 '성욕'은 나를 求道(구도)로 이끄는 원동력이었다.
아무튼, 신의 은총과 금욕이 아니라 콘돔과 백신, 그리고 이혼소송으로 성욕을 관리하는 21세기에, 신은 어떤 모습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게 될지 몹시도 궁금하다.
책과 영화가 있으면 무조건 책부터 먼저 보는 편이다. 그런데 최근에 우연찮게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녹터널 애니멀즈> 등 원작이 있는 영화들을 꽤나 재미있게 보았다. 어쩌면 책이 더 재미있다는 건 나의 오랜 편견이었는지도?
책은 짧아도 대여섯 시간이 걸리는데 영화는 어찌 되었든 두 시간 남짓에 마무리가 되니 같은 내용이라면 영화가 더 나은 선택인건가?
그래서 요 네스뵈의 원작 <헤드헌터>도 원작에 앞서 영화를 보게 되었다. 헌데 만듦새는 나쁘지 않으나 도저히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스토리였다. 악당이 주인공을 쫓는 이유가 납득이 되질 않는다. 사람을 죽이려면 어지간한 이유로서는 안 될 것 같은데..보는 내내 계속 이럴만한 일인가 라는 생각만 들고...영화 <골든 슬럼버>가 생각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