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적으로 다 재미있었지만 살짝 더 진중한 뒷부분이 취향에 보다 맞았다. 먹는 얘기를 아주 맛있게 잘 쓰신다. 좋아하지도 않는 생선구이가 먹고 싶어졌다. 글 안 쓰는 작가는 변비 환자와 같다는 말에 동감.
마르크스보다 싱어가 궁금해서 펼치게 된 책. 마르크스가 옳았는지, 여전히 유효한지를 말하는 10장, 11장이 핵심이다. 피케티의 분석과 마르크스의 주장을 비교하는 대목이 흥미롭다.
기본적으로 동물권 신장에 찬성하는 독자를 대상으로 하며, ‘이유들’보다는 기본 개념과 실천 전략의 방향을 설명하는 부분의 비중이 높다. 세미 채식주의를 실천하면서, 종차별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거기에 ‘차별’이라는 말을 써도 되는 건지 계속 고민 중.
즉흥적인 일회성 기부와 감성에 휘둘리는 이타주의를 벗어나 이성적으로 이타적인 행동을 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야 한다는 데에는 더없이 찬성. ‘무리하지 말고 실천하자, 의도보다 결과를 따지자’는 주장도 강력하다. 그런데 이게 어느 선을 넘어서면 궤변 같은 영역에 이른다. 그런 면에서 도덕적 직관도 중요하다고 본다. 나는 싱어의 견해들에 무척 감화되었지만, 동시에 그의 주장이 아직 미완성이라고 여긴다.
p.17p ★
비유하자면, 아주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 한 번 읽은 책을 다시 읽는 것과 비슷해. 이미 내용은 다 알고, 그걸 바꿀 수도 없어. 하지만 그렇다 해도 매번 읽을 때마다, 중요한 대목에서 새로운 감흥을 느낄 수 있잖아. 주인공이 나중에 행복해진다는 걸 알아도 슬퍼질 수 있고, 사건 진행 속도를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도 있지. 원하는 속도로 읽으면 되는 거니까. 중간에 멈출 수도 이고, 어떤 페이지를 읽다가 다른 페이지로 건너뛸 수도 있고, 앞으로 돌아갈 수도 있어. 시간이란 게 책처럼 통째로 펼쳐져 있으니까.
그럼 보통 사람들의 인생은 어떤 영화를 극장에서 처음으로 보는 거랑 비슷한 건가? 여자가 다시 물었다. 앞으로 어떤 장면이 나올지도 모르고, 속도를 조절할 수도 없고. 중간에 멈출 수도 없는?
아, 비유 좋네.
p.19 ★
있잖아, 그러면. 그렇게 모든 순간을 동시에 사는 거라면. 여자가 말했다. 넌 네가 어떻게 죽는지도 알겠네?
응. 알아.
어떻게 죽어?
편안하게. 남자가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좋겠네. 편안하게 죽어서.
죽는 순간에는 딱 그렇게 죽기를 바랐던 것 같아.
p.21
아무튼. 그 이름 바꾼 일이 보람이라는 이름 달고 한, 제일 보람 있었던 일이야. 그래서 그뒤로는 보람을 못 느끼는 걸까?
p.26 ★
작은 보람과는 거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이름이 같은 아이와는 가급적 친해지고 싶지 않았다. 멋부리고 나가는 날마다 같은 옷을 입은 여자를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기분이었다.
p.29
여자는 큰 보람과 작은 보람을 만들고 난 재료로 자신을 만든 것 같다고 생각했다.
p.82 X
도대체 나는 왜 태어났을까. 내가 호치키스 같은 거라도 하나 발명하면 세상에 태어난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 난 그런 것도 발명하지 못하잖아. 그냥 학습만화 말풍선의 위치를 잡고 오자를 교정하는 사람이잖아. 인류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내가 있어서 조금이라도 삶이 나아진 사람이 있을까. 난 그냥 일벌 한 마리인 거야. 여왕벌을 위해 나무를 돌아다니며 열심히 꿀을 따지. 나 같은 게 천 마리, 만 마리, 십만 마리가 더 있어. 다른 일벌한테, 아니면 여왕벌한테, 내가 무슨 의미일까.
p.87
어떤 관계의 의미가 그 끝에 달려있는 거라면, 안 좋게 끝날 관계는 아예 시작도 하지 말아야 하는걸까? 그 끝에 이르기까지 아무리 과정이 아름답고 행복하다 하더라도?
우리가 안 좋게 끝나? 여자가 물었다.
너는 어떤게 좋아? A, 약간 짧지만 완벽하게 기승전결이 되고 아련한 마음으로 헤어지는 인연. B, A하고 똑같은 기간을 보낸 다음에 조금 더 시간이 추가되는데 끝날 때 굉장히 안 좋게 끝나는 관계.
시간이 얼마나 추가되는데?
글쎄. 하루 정도라면?
p.99 ★
너는 너랑 이름이 같았던, 그 중동 항공사에 다니는 동창 이야기를 들을 때 기분이 어땠어? 남자가 물었다.
부럽지. 부럽고, 나는 왜 그렇게 살지 못할까, 그런 생각이 들지.
난, 꼭 내가 두 사람이 된 것 같아. 또 한 사람의 내가 지금도 벌통을 실은 트럭을 몰고 있을 것만 같아. 아카시아니 유태치 싸리니 그런 꽃밭을 찾아서. 올해는 예년보다 날씨가 쌀쌀한데 그때 그 꽃밭에 꽃이 피었을까, 그런 걸 고민하면서. 아무도 이름을 묻지 않는 길 위에서.
p.140 X
그건 초승달이야. 초승달도 아침에 떠서 저녁에 지지만 그믐들이랑 미묘하게 뜨는 시각이 달라. 초승달은 해가 뜬 다음에 떠서, 해가 지고 나서 조금 있다가 져. 그때 볼 수 있는거지. 그믐달은 해가 지기 전에 사라져.
해가 지기 전에 사라져. 여자가 남자의 말을 반복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더 길어졌다.
p.144 ★
나한테 남은 문제는 이거였어. 네가 이 마지막 때문에 우리 관계를 온통 불행했던 것으로, 비극적인 것으로 기억하지 않을까? 보통의 시간 순서로 삶은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서사와 결말을 중시하잖아. 어린 시절 행복하고 노년에 불행한 것보다 그 반대를 선호하고, 수십 년을 기다린 아버지와 딸이 마지막에 잠시라도 꼭 만나야 하고.
p.148
지금까지 내가 해온 모든 거짓말들은 다 잊더라도, 이 말만은 기억해줬으면 해. 널 만나서 정말 기뻤어. 너와의 시간은 내 인생 최고의 순간들이었어. 난 그걸 절대로 후회하지 않아. 고마워. 진심으로.
그러고 나서 남자는 화면을 보며 잠시 머뭇거렸다. 여자에게 하는 말이 너무 짧아 무언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더 보탤 단어들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 말들은 거짓이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너무 잔인한 진실도 안 되었다. 너를 만나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다시 겪으라면, 나는 그렇게 할 거야, 같은 말들. 사실 남자는 여자를 만나기 위해 시공간 연속체 속에서 그 모든 일을 몇 번이고 다시 겪고 있는 중이었다.
p.161
여자는 땅에 붙어서 개미보다 작은 크기로 꾸물거리는 사람들과 도로를 따라 천천히 움직이는 자동차, 그리고 멈춰버린 듯한 강물을 보다가 문득 자신의 소원을 깨달았다.
훨훨 날아가고 싶어. 나의 시간을 살고 싶어.
자유로워 지고 싶어.
p.165 - 수상소감 중
제가 소설을 쓰는 첫 번째 이유가 돈인 것은 아닙니다. 세번째 이유쯤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인생을 걸고 어떤 일을 할 때, 세번째 이유는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 이 밥벌이의 싸움을 피하면서 다른 방식으로 현실에 참여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 그것이 첫번째, 두번째 전장을 가벼이 여긴다는 의미가 아님을 잘 알아주시리라 믿습니다. ... 계속 싸워서 글과 돈을 열심히 벌어보겠습니다. 쓰고 싶은 설을 다 써서 더이상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때까지, 굶어죽지 않고 살아남겠습니다.
책으로 하는 세계 여행,
번역가의 가이드로 함께 떠나요.
<번역가의 인생책> 마지막 시간입니다. 송은주 번역가와 함께 데이비드 미첼의 <클라우드 아틀라스>를 읽어봅니다. 혹시 SF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 (2013) 보셨나요? 그 영화의 원작 소설이 바로 이 책입니다!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데이비드 미첼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서로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기묘하게 얽힌 여섯 개의 퍼즐 조각 같은 흥미로운 이야기가 담겨 있어요. 흥미진진하지 않나요? 이 책을 번역한 송은주 번역가도 <클라우드 아틀라스>를 무척 좋아하신다고 해요.
송은주 번역가와 함께 데이비드 미첼의 독창적이고 방대한 스토리의 세계로 떠나실 분! 지금 신청 해주세요 :) 참고로 이 책은 총 2권입니다. 읽고 싶었지만, 읽을 양이 방대해서 엄두가 안 나셨던 분들도 이번에 <번역가의 인생책>에서 함께 읽어보시는 건 어떨까요?
송은주 번역가와 <클라우드 아틀라스> 함께 읽기
신청 기간 6/13(화)까지 (위의 링크를 클릭하면 ‘참여 신청’ 하실 수 있습니다.
모임 기간 : 6/14(수)~7/12(수) (모임은 29일간 열립니다. 참여 신청을 하시면 그믐의 알림과 개인 이메일로 모임 진행 상황을 안내해 드립니다.)
7월 6일에는 송은주 번역가와 함께하는 북토크가 열립니다. 북토크 신청은 초콜릿책방의 인스타그램을 통해서 하실 수 있습니다. 신청 관련해서 모임과 그믐 SNS를 통해서도 전달드릴게요.
*오프라인 북토크 : 7월 6일(목) 저녁 7시, 초콜릿책방(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동)
송은주 번역가
이화여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하며 건국대, 이화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광대 샬리마르』『공포의 헬멧』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모든 것이 밝혀졌다』 『미들섹스』 『순수의 시대』 『집으로 가는 길』 『종이로 만든 사람들』 등이 있다.
번역가와 ‘함께 읽기’란!
-각자 읽을 책을 준비합니다.
-모임지기인 송은주 번역가가 이끄는 방식에 따라 29일 동안 책을 함께 읽습니다.
-번역가가 던지는 책에 관한 질문에 답해봅니다.
-그날 읽은 분량에 대한 소감을 남기거나, 좋았던 문장을 공유합니다. 다른 참여자들의 단상을 읽고 내 생각을 보탭니다.
-책에 관해 깊고, 맥락 있는 대화를 서로 나눕니다.
*모임에서 나눈 이야기는 그믐의 홍보 활동을 위한 콘텐츠 제작에 활용될 수 있습니다.
*참여 관련 궁금한 사항은 gmeum@gmeum.com으로 문의 주세요
읽을 당시 일본에 두 세달 체류하고 있었다. 낡고 좁은 일본 지하철에서 오며가며 잘 읽었다. 일어를 전혀 할 줄 몰랐기 때문에 사회로부터 열외된 자의 감정을 간접적으로 느끼며 읽었다.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노숙자, 인턴사원, 자퇴청소년, 애국보수 어르신으로 우리 주변에서 종종 뵙는 분들이다. 소설에서 이들은 사회로부터 열외된 존재로 표상된다. 소설은 이들이 종말론에 근거한 일종의 종교적 축제에 휘말리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장르적인 성격이 강하지만 장르소설로 분류할 정도는 아니다. 작가의 의도인지 알 길이 없으나 이러한 중간 정도의 장르적 성격이 나는 조금 아쉬웠다. 장르적 성격을 한층 강화하기 위해 등장인물들이 서로 더 얽혀서 복잡한 플롯을 구성하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음 근데 그랬다면 작품의 의도와는 많이 멀어질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반대방향으로 인물의 수를 줄이고 개별 인물들의 이야기를 좀 더 비중있게 다뤄서 사회비판적 성격을 강화하면 어땠을까 싶다. (개인적으로 인턴사원 윤마리아의 이야기가 더 듣고 싶었다.) 아무튼 나로서는 양쪽 다 조금씩 덜채워졌다고 느꼈다. 물론 그런 성격이 이 소설을 독특하고 매력적이게 만든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아마 그런 점이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한 여러 이유 중 하나일 거라 본다.
실제로 순문학 / 장르문학의 구분이 흐려지는 경향이기도 하고, 두 구분이 항상 충돌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대체로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이상하게도 이 소설을 읽을 때는 두 구분을 다시금 떠올리고 한 쪽을 더 강하게 밀고가지 않은 것을 아쉬워했다.
아쉽다고 많이 썼지만 사실 술술 넘어가는 재밌는 책이다. 다 읽고 나서는 호기심이 생겨 작가의 이력이나 인터뷰 몇개를 찾아보기도 했다. 소설의 적나라한 묘사나 블랙코미디스러운 분위기를 생각하면 작가가 온화한 인상의 목사라는 점은 놀랍다.
여담으로 소설 속 데이비드교의 축제는 종말론에 심취한 다윗교도들이 1993년에 벌인 웨이코 공방전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류의 실용도서는 보통 아래 두 가지 중에 하나의 경우에 들어가기 쉽다.
예제와 설명이 자세한데 실제적으로 내가 처한 단계와는 거리가 멀어 '나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 (이제 수영 발차기를 배우려는 사람에게 프리 다이빙 법을 자세히 알려준다)
두 번째, 실무적인 내용과 팁을 기대했는데 원론적인 이야기들로만 꽉 찬 경우 (수영 발차기를 배우려는 사람에게 수영이라는 운동이 몸에 얼마나 유익한지를 거듭 설명)
<이것이 UX/UI 디자인이다>는 위 두 가지 경우를 다 피해 적절한 예시와 설명으로 UX/UI 관련 아주 초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실질적으로 이론 베이스가 깊지는 않은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큰 도움을 주는 책이다. 저자가 라이트브레인 UX컨설팅 그룹의 이사라고 나와서 '라이트브레인' 이라는 회사도 찾아보았는데 최근 에 LG CNS 에게 인수되었다고 나온다.
공연에 다녀왔는데 😭
오는 길, 사람들이 저리 휘영청 뜬 만월 아래
술을 기울이며 좋은 시간들 보내고 계시더라구.
부러워서 이미 졌다.
*이 게시물은 2023년 5월 29일 경향일보의 오피니언에 게시된 '독서의 효과는, 독서입니다'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이미 한번 언급한 적이 있는 내용이지만, 독서를 읽는 사람들의 목적이 모두 똑같을 리 없다. 누구는 자기계발서,누구는 투자서, 누구는 인문 및 시사 교양서, 누구는 학술서적, 누구는 만화책 및 라이트노벨, 누구는 한국 현대 문학, 누구는 일본 장르문학, 누구는 서양 고전 문학을 읽는다. 이런 세상에서 독서의 목적 및 효과가 하나라고 단정하는 것은, OTT를 보는 사람들이 단 하나의 프로그램을 보기 위해서 넷플릭스에 가입한다는 소리만큼이나 가벼운 주장이다.
무엇인가의 목적은 그 자체에 있다는 명제는 옳다. 그러나 이 명제가 담고 있는 뜻은 그 대상을 다른 대상에 종속시키지말라는 뜻이지, 그 자체를 신성불가침해서는 안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현학적이거나 먹고사는 걱정을 안해보신 분이라면 모를까, 저명하신 사회학자분이 가볍게 언급하실 사항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입니다'를 쓴 김민섭은 이 문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실까?)
다시 말하지만 작가의 주장 자체는 옳다. 오늘날 이 사회가 독서를 단순히 자신의 몸값을 늘리는 용도에만 치중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그 근거로 아무 말이나 해서는 안될 것이다. '운동 안 하면 나이 먹고 티가 나듯이 책 안 읽은 중년들은 깊이가 빈약하다는 독서예찬은 많이 당혹스럽다.'라는 말은 진보정론지 경향신문과 정반대인 보수기득권 신문 중앙일보가 5월 10일에 수록한 칼럼을 저격한듯하다. 그런데 내가 이해한 내용과는 정반대로 내용을 전개한다.
중앙일보 칼럼에서는 그냥 청년시절에는 총명했다가 그 총명함을 갈고닦지 않아서 그 총명함을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한탄을 쓰고 있다. 그런데 경향신문 칼럼에서는 그것을 마치 자기 몸값을 올리기 위해서 독서를 해야 한다는 늬앙스로 수정하고 있다. 이건 좀 지나친 표현이다. 순하게 말하면 잘못된 인용이고 사회학자분에게 어울리는 표현을 쓰자면 '변조' 행위다.
다수의 독서량이 늘어나면 이 세상이 좋아질 것이라고? 이 또한 원칙적으로는 옳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는 반드시 뒤따라야하는 것이 있는데 그 방법론을 제기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의 주장은 놀랍게도 독서학원 창출이다. 도서관 활성화나 독서모임 개최가 아니라 독서학원이라니, 역시 책은 돈이 되는 세상임이 틀림없다. 본인도 이건 좀 아니라고 여겼는지 커피라도 팔아야하냐는 표현을 첨언한다. 프랜차이즈 커피 가게가 문을 왜 닫는지는 생각 못하시나 보다. 아니면 독서의 목적은 사실 독서가 아니라 커피였을지도.
독서의 효과는 무엇일까? 그 답은 제각각 다르다. 한 사람에게도 새로운 책을 읽을 때마다 그 이유는 달라진다. 그만큼 독서의 세계는 무한하기에 매번 새로운 가르침을 우리에게 준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칼럼을 작성해놓고 ' 타인의 생애를 납작하게 찌그러트리지 않는다.'라는 자기부정으로 독서의 효과를 주장한다면, 어쩌면 독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비싼 굿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나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