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드 강의를 책으로 펴낸 시리즈 중 한 권이고, 그래서 아주 얇다. ‘우리는 노력을 기울이는 만큼 결과물을 사랑하게 된다. 결과물을 자신과 동일시하게 되면서 정체성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소설가들이 그래서 다들 쪼잔할 정도로 비판에 민감하고 자기객관화를 못한다. 나도 예외일 리 없고.
읽는 동안 내가 저질렀던 자잘한 부정행위들이 생각나 몹시 부끄러웠다. 다른 사람들도 많이들 그런다는 말이 별로 위안이 되지는 않았다. 그 모든 것이 어떤 인지적 자원에 대한 인간의 통상적인 반응이라는 설명을 들으면, 그냥 인간에 대한 기대를 많이 접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66p ★
한 번도 이런식의 대응을 해보 적이 없었다. 교수 사회가 부정부패로 물들었다 해도 그곳은 최소한 학문을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기에 기본적으로 식물성을 품고 있었다. 교수 사회에서만 오랜 시간을 보내느라 다른 사회를 경험해본 적이 없는 서희에게 유동구와의 대립은 그야말로 가슴을 졸이게 했다. 하지만 서희는 끝내 당차게 유동구와 맞섰다. 그러고는 밖으로 나왔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서 이토록 긴장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이는 건 괜찮다고 자위했다.
67p ★
단지 그뿐이었다. 말없이 곁에 있어주었다는 것. 서희는 그것만으로도 상훈에게 감사했다.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는 상훈의 태도에 신뢰를 느꼈다.
112p
그는 진짜 사제야. 우리들을 도덕과 윤리로 덧씌워진 거추장스러운 것들로부터 해방시키는 진정한 사제야.
162p X
"손과 발 그리고 귀. 모두 상훈의 것입니다." "....미쳤어." "손으로는 무언가를 썼고 발로는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귀로 들었죠." "..." "열어보세요. 이제 무슨 차례인지." ... "입은 무언가를 말한다는 의미입니다. 누구한테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알아내는 것은 서희씨의 몫입니다."
212p ★
Q. 사제가 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입니까?
A. 단 하나야. 심장이 아닌 머릴로 행동하는 존재가 되는 거지. 감정적으로 대의를 망각하고 보편 윤리의 잣대로 새로운 질서 구축을 위한 조정과 조율의 방법론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일을 해선 안돼. 그런 맥락에서 종교인의 희생은 일반의 통념을 뛰어넘는 악역을 감당해야 할 때가 있게 되지.
206p ★
길승호가 민서에게 말을 건넸다. '멈추지 말라고. 여기서 멈추면 나를 붙잡은 것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짓뭉개는 거라고.' 그렇게 소리쳤다. 민서는 죽은 후에도 볼펜을 쥔 주먹을 풀지 않는 길승호의 손을 붙잡으며 그의 외침을 듣고 있었다.
228p
하지만 아가씨는 모든 걸 알고 있어요. 아버님이 상훈 씨와 다른 파양 아이들에게 기업으로부터 후원을 받아 교육시키고 국위선양에 필요한 역군을 만드는 것 외에 또 다른 역할을 기대했다는 거 말이에요. 상훈 씨, 길승호. 이 두 사람이 그걸 거부한 거에요. 아버지의 뜻을 거부한거죠. 상훈 씨는 버려진 신의 아들이고 길승호는 그 신의 아들을 세상이란 시장 앞에 내다 판 유다에요.
251p ★
경찰력의 만류도, 정치권의 우려도 그녀를 막지 못했다. 그녀는 막무가내로 사다리를 붙잡고 한 걸음, 한 걸음 크레인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내 청춘!을 다 바친 우리 동네와ㆍㆍ
그래도 포인트 삼천점은 쓰고 가야지~ ㅎㅎ
이 소설도 아내와 내 평가가 갈렸던 작품이다. 요시다 슈이치의 다른 작품은 무척 좋아하는데도 이 소설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려웠다. 마음이 싸늘해서 그런가? 범인에 대해서는 ‘이런 인물이 있을 순 있겠다’는 정도로만 납득했다. 범인을 따르게 되는 캐릭터에 대해서는, 이런 사람은 절대로 없다고 생각했다.
아쿠타가와 수상작 「파크 라이프」와 「플라워스」가 함께 실려 있다. 어떻게 이렇게 풍경을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지? 정말 감탄했고, 나중에 필사까지 했다. 천천히 문장을 옮겨 적으며 깨달은 사실은, 풍경 묘사는 심리 묘사와 함께 할 때 비로소 실감이 난다는 것.